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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림의집 1289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2018. 5. 16. 11:40

예림의집 1289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이야기|하나님과 대화하는 101가지 방법...


다른 쪽 뺨도


누군가가

생각없는 말이나 부주의한 언행으로

기분을 상하게 한다면

크게 심호흡을 해 보세요.

같은 말을 되돌려주거나

화를 내지 말고

그냥 미소를 지어 보세요.

마음의 상처를 하나님께 고백하세요.

그런 다음 하나님이

칭찬해 줄 3가지 예를 들어

당신의 자제력,

참을성, 친절을 생각해 보세요.

덤으로 당신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의 장점 3가지도

하나님게 말해 보세요.




예림의집 칼럼™|예림의집이 드리는 삶의 지혜...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당신도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기다라고 있다면 당신 역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성셩은 우리에게 기다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선느 당신에게 지금 회개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용서받기를 원하지도 않는 사람을 하나님이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러한 미지근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를 하나님이 용서해 주신다면 그는 과연 행복할까요?

사람이 회개하지 않고 천국에 들어간다면 그에게 천국은 지옥이 되고말 것입니다. 천국은 준비된 사람들을 위해 예비된 곳입니다. 만약 당신의 아들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를 용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를 용서한다면 당신은 그에게 공정치 못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나중에 더 위험해 처하게 될 테니까요.

당신 아들이 당신의 책상에서 10만원을 훔친 다음 그것을 다써버렸다고 가정해 봅시다. 당신이 집에 돌아오자, 누군가가 그러한 아들의 행동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사실이냐고 묻자 아들은 일단 부인하기 시작합니다. 당신이 증거를 내밀면서 추궁하겠지만 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자백하기는커녕 도리어 다음에는 또 다른 일을 저지르겟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 경우 당신은 "그래, 너를 용서해 줄께."라고 말하면서 이 일을 그대로 묻어 둘 수 있겟습니까? 그것이 사랑입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이 술 취하고 도적질하고 간음하는 죄를 저지르면서도, 심지어 타인의 가슴에 대못을 박으면서도, 그들은 회개하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해 주시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아주 긍휼이,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야"는 말까지 덧붙입니다. 참으로 뻔뻔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지금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성경의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이 진실로 회개하고 그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회개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회개 후 놀라운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또한 제가 가장 못하는 것이 바로 이렇게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날마다 발을 씻어야"합니다.



오늘의 QT|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누가복음 11:13).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령 충만함을 받지 못한 채 답답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에 관해 우리가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나는 성령 충만함을 원하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령 충만을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을가요? 성령의 충만함이란 성령의 주권 아래서 되는 일이지만 성경에 보면 성령 충만을 받기 이해 두 가지 중요한 조건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1. 성령충만이 약속을 믿고 구해야 합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누가복음 11:13). 


부산에서 목회할 때 저는 교우들과 함께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온 교인이 마음을 모아 성령 춤난을 구하고 있으니 곧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성령의 역사를 넘치도록 일으켜 주시리라 기대했습니다. 교회에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 마음은 여전히 답답했습니다. 저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모든 성도가 한마음으로 그토록 간구하는데 왜 성령 충만의 은혜를 주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은 "너희가 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모든 교인이 성령 충만함을 간구하는 것 같은데 주님은 아니라고 하시니 말입니다.

얼마 후 전심으로 성령 충만을 간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교회에서 저녁마다 모여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간절히 부르짖으며 기도회를 이녿하고 있을 때 평상시에 잘 나오지 않던 한 남자 집사님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 집사님까지 기도회에 나와 저토록 열심히 기도할 정도면 정말 부흥은 눈앞에 다가왔다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그 집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목사님, 융자가 나왔어요!" 기뻐서 흥분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곧 그의 설명을 듣고 사오항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전 재산을 투자해서 벌인 사업의 마지막 잔금을 치러야 하는 날인데, 융자가 나오기로 했던 은행에서 융자를 내줄 수 없다고 햇다는 것입니다.

여러 은행을 찾아다니며 대출을 신청해 보았지만 번번이 거절당하고 마지막으로 들른 은행에서 내일 다시와 보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합니다. 결국 기운 없이 교회 앞을 지나가다가 마침 기도회가 열리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예배당 안에 들어와 앉았는데, 자신의 문제가 너무 시급했기 때문에 뒷자리에 앉자마자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도, 나라를 위해 기도할 때도, 환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도 그는 계속 융자를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바라던 융자가 나왔으니 기쁜 마음에 전화를 걸어온 것입니다. 저는 그분의 말을 들으면서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께 감사하기도 했지만, 그분이 온통 대출만을 위해 기도했다는 사실에 씁쓸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일어서려는 순간 성령님께서 제 마음에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구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겟느냐?"

만약에 어떤 사람이 병원에서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생각해 보세요. 기도할 때마다 "암을 고쳐 주세요!" 식사 기도할 때도 "암을 고쳐 주세요!"하지 않겠습니까? 너무 절박하니까 그렇게 구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함의 핵심은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오셔서 주님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이끌어 주시는 것이 성령 충만의 핵심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성령 충만을 구할 때 예수님이 정말 나의 주님이 되시기를 갈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의 집에 와서 같이 산다고 생각해 보세요. 보통 신경 쓰이는 이링 아닐 것입니다. 함부로 행동하거나 화를 낼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마음에 오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정말 마음에 주님으로 모시기를 원한다면 자기 마음대로 살 생각은 포기해야 합니다. 내 감정, 내 의지대로 사는 삶은 끝내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런 대가를 치른다고 해도 여러분은 성령 충만함을 구하시겠습니까?


제가 신학교 1학년 때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처음 보았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보지 못했지만 대학생이 되었다고 생각하니까 제일 해보고 싶은 것이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 마음에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 같은 놈은 버스 탈 자격도 없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 자신에게 벌을 주는 의미로 버스도 타지 않고 학교 기숙사까지 걸어갔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학교 채플실에 들어가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제가 보지 말아야 될 영화를 본 것 같습니다." 회개는 했지만 마음이 시원치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너 다시는 그런 영화 보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느냐?" 이렇게 물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예!"라고 고백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아무리 신학생이고 목회자가 될 것이지만 그런 영화를 전혀 볼 수 없다고 하면 나깅 없을 것 같았기 대문입니다. 한 시간 동안 끙끙대다가 결국 "하나님, 죄송해요!" 이렇게밖에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부끄럽고 한심한 일이지만 그때는 "예!"라고 고백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내 마음에 정말 예수님을 모시고 싶은 생각이 없엇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령 충만함을 갈망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직한게 말하면 성령께서 행사시는 은사나 능력, 체험을 구하는 것이지 성령님 그분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이용하여 무엇을 얻고 이루고자 하는 것이지 예수님 자신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패, 낙심, 좌절을 경험하는 이유가 사실은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여전히 내 감정, 내 생각, 내 의지대로 삽니다. 예수님을 외면하고 사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하거나 거절당한 적이 있다면 그대 느낌이 어떠셨습니까? 그것이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이 안에서 겪고 계신 일입니다. 회개할 것이 많지만 예수님을 무시하고 거절한 것보다 더 중요한 회개 제목은 없습니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사도행전 1:12-14).

제자들은 주임이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위해 기다리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이 되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3일, 4일이 되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더 기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5일, 6일, 7일이 지났을 때, 누가 남아 있겠습니까? 그러나 120명은 끝까지 기다렸습니다.

제자들은 능력을 구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 그분을 원했습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 주실 때까지 기다리고 구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열흘째 되는 날, 오순절에 강력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성령 충만이 임하자 그들은 권능을 받고 세상을 뒤집어 놓는 강력한 사역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정말 성령 충만을 구하십니까? 지금까지 성령 충만을 구했다면 무엇을 위하여 구했습니까?


"아빠 아버지, 성령 충만함을 주옵소서. 무너지 나의 심령에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옵소서. 다시 소생케 하옵소서. 나는 아무 힘도 없고, 아무런 의지도 없는 먼지와도 같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성령의 충만을 갈급합니다. 성령님! 내에게 충만히 임하셔서 나를 일으켜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의 향기|악보를 클릭하면 찬양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찬양 세미나 강의입니다...

찬양사역의 함정


첫째로, 자기도취의 함정입니다. 찬양 집해를 인도하면서 본인의 생각에 따라 오늘 집회가 잘 되었느니 안 되었느니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는 찬양을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확고한 인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찬양의 성공을 판단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둘째로, 관중들의 반응에 매몰되는 함정입니다. 관중들의 반응에 따라 그 날 집회의 성패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전국적으로 순회 집회를 해보면 지역에 따라 반응의 강도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확실히 충청도 지역은 반응이 다른 곳보다 덜 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덜 한 것은 아닙니다. 찬양 집회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시작했다면서, 집회가 끝난 뒤에 관중들의 반응에 따라 일희일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바른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셋째로, 인기의 함정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찬양 사역에 대해 칭찬을 듣게 되면, 내가 모든 것이 괜찮은 사람인 양 착각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칭찬은 찬양사역자에겐 독배와도 같습니다. 그들은 짧은 1시간 정도의 찬양하는 모습으로 판단할 뿐입니다. 우리는 항상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사용하셔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잘 알고, 겸손으로 허리를 동일 수 있어야합니다. 세례 요한은 “하늘에서 주신 바가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 3:27절).”고 했습니다. 우리도 세례 요한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엑스트라만으로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넷째로, 상업화의 함정도 찬양 사역자들에게 위험한 함정이 되고 있습니다. 사역의 범위가 커지면서 음반을 내고, 콘서트를 많이 하다보면 찬양 사역이 하나님을 기준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부분으로만 흐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찬양 사역의 기준과 중심을 자신에게 두어서도, 반응자들에게 두어서도 안 되며, 오직 하나님께만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무엇보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야 되겠는데, 이것은 다른 방법이 없고 평소에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양 사역자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말씀 앞에 서야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들뜬 감정의 함정입니다. 찬양을 올린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의 감정이 들뜨기 쉽습니다. 그렇기에 찬양은 하나님께 올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분께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고 가슴 깊이 새겨야 합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찬양 사역자들은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마 10:16)”는 주님의 말씀을 늘 유념해야 합니다. 

여섯째로, 말씀 배제의 함정입니다. 찬양은 말씀과 함께하지 않으면 방향성을 잃게 되고 맙니다. 말씀이 없으면 신비주의 노래 행위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 경우 찬양이 방향성을 잃어 무질서하고, 알맹이 없는 집회로 흐를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찬양과 말씀이 긴밀히 연결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나를 잃어버리는 함정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찬양 사역자인 우리가 하는 사역보다 우리 자신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사역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이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찬양 사역자에게 있어서 이 문제가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찬양 사역에 있어서 각자의 믿음이 성숙된 만큼만 표현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이상을 원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자신에게 항상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나는 얼마나 내 그릇에 합당한 찬양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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