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의집 메일 모음

예림의집 1287번째

예림의집 2018. 5. 14. 12:39

예림의집 1287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이야기|하나님과 대화하는 101가지 방법...


동물원에서 하나님을


동물원에 가서

원숭이, 코끼리, 물개, 새, 기린,

사자, 박쥐를 찬찬히 살펴보세요.

다양한 동물들의 생태와

그 피조물을 생각해 내신

창조주에게 놀라움을 금치 마세요.

당신과 함께

동물원 곳곳을 다니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상상해 보세요.

하나님의 솜씨를 찬양하세요.




예림의집 칼럼™|예림의집이 드리는 삶의 지혜...


회개할 기회


한 순간에 회개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렇습니다. 망므과 태도를 바꾸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세월호"라는 깊은 상처가 있습니다. 안타깝게 죽어간 그들에겐 분명히 살 기회가 있었습니다. 방송으로 "어서 빨리 배 밖으로 탈출하라!"는 퇴선 명령만 있었다면,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지 않고 살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골든타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골든타임이 지난 후,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에 빠져들었고, 결국 많은 사람들을 잃었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에게는 가던 길을 멈추고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더이상 죽음과 파멸로 가지 않을 수 있다. 나는 내 죄를 회개하고 그것들로부터 돌아설 것이다." 당신은 별다른 느낌을 받지 않을지 모르지만 당신이 잘못된 길에 서 있음을 확신한다면, 지금 돌아서서 이렇게 말하기 바랍니다. "나는 더 이상 지금까지 행했던 반항과 죄의 길로 가지 않겠다." 당신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작정한 바로 그때, 구원은 당신의 것이 됩니다. 사람이 자기 마음을 결정하는 순간, 하나님은 그에게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회개하지 않고 복음을 믿지 않는다면 비난받을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오늘의 QT|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우리 시대에 임한 두 가지 부흥


미국의 급성장하는 교회들은 1995년 탐방했을 때, 일정 가운데 시카고제일교회를 방문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안타깝게도 한때 크게 부흥했었지만 지금은 쇠퇴한 교회였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부흥이 사라진 교회는 공기조차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 교회 예배당 의자에 앉아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부흥하는 교회'에서 사역하기 원합니다. 제가 목회하는 교회의 성도는 부흥하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두 가지 형태의 부흥, 곧 죄악의 부흥(세상 충만)과 성령의 부흥(성령 충만)이 동시에 빠르고, 뚜렷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세에 대하여 두 가지 서로 다른 예언을 합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디모데후서 3:1-5). 

죄악의 부흥은 지금 시대에 자기애, 돈 사랑, 자랑, 교만, 비방, 부모 거역, 감사하지 않음, 거룩하지 않음, 무정, 원한을 품음, 모함, 절제하지 않음, 사나움, 선한것을 거부함, 배신, 조급, 자만, 쾌락, 경건의 모양만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삶에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요엘서 2:28,29). 성령의 부흥은 애언과 꿈과 이상 성령의 부으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날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삶에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성령의 예언대로 마지막 때 세상은 점점 더 두 부흥의 열기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말세가 될수록 죄악이 부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성령의 부흥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이사야 40:5)고 예언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정말 그 예언대로 성령님의 능력과 부흥이 점점 더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오순절이 되자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120명의 제자에게 성령이 불같이 임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요엘서 2장 28, 29절에 나오는 예언의 성취라고 말할 수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예언 성취의 시작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결코 모든 육체에 성령이 임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초대교회를 통하여 강하게 퍼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선포되고 교회가 권력과 조직에 의존하기 시작하자 한동안 성령의 역사는 종교개혁을 통해서 다시 불꽃이 일어났고, 18세기에는 존 웨슬리, 조지 휘트필드, 조나단 에드워즈 등의 사역을 통해 미국과 영국에서 강력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1900년부터 10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미국, 인도, 유럽, 남미, 한국 등) 불길 같은 뜨거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고, 20세기의 성령운동은 전 세계 모든 부흥하는 교회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청년 학생들은 우리가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엄청난 죄악의 풍조에 휩싸여 있습니다. 반면에 놀라운 것은 청년들과 학생들이 우리가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강력한 성령 충만의 역사를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 청년들 사이에 예배하는 열기와 선교의 열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모릅니다.


한 번은 우리 교회 청년드링 거지순례전도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들을 교회 현관에서 맞이한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그들의 얼굴과 행색은 반 거지의 모습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은 달랐습니다. 마치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를 연상시키는 것 같앗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에는 힘이 있엇습니다.

그중 한 청년이 금요철야기도회 때 간증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거지순례전도를 시작하여 하루가 지나니 집에서보다 더 잘 먹었다는 것은 더 이상 간증거리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간증하면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소서." 찬양을 부르며 울엇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새 힘이었습니다. 거지순례전도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보는 것입니다. 돈 한 푼 가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밥 얻어먹고 잠잘 곳을 얻어 자면서 전도하는 것입니다. 

어느 권사가 교회 홈페이지에 그을 올렸습니다. "거지순례전도?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안 간다. 밥도 얻어 먹고, 차도 얻어 타고, 잠자리도 구걸해야 한다. 그것도 도와주는 이들에게 주님을 전하기까지 해야 한다. 선물을 들고 전도를 나가도 쉽지가 않은데..." 그 주간 거지순례전도를 떠난 청년들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주니므이 말씀이 제게 임하였습니다.

"너도 더나라, 그 정신으로 살아라. 철저히 무소유, 무능력의 정신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라! 이것이 진정 능력의 길이라." 기도하면서 돌아보니 제가 가진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의지한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앙망하는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거지순례전도팀이 모여서 겪은 일을 나누는데,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돈 떨어지는 그 순간부터 기도가 절로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일부러 다 버리지 않아도 좋습니다. 꼭 그렇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가져도 가지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처럼 의지하던 것을 마음으로는 다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부흥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확신을 가지게 되면 그 확신이 있기에 순종이 가능하게 되고, 그렇게 순종할 때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신다는 분명한 증거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사도행전 1:4).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에베소서 5:18). 예수님께서는 이미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제자들에게 성령을 충만하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이미 구원받은 에베소서의 성도들에게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초대교회는 집사를 택할 대 반드시 성령 충만한 성도를 택했습니다(사도행전 6:1-6).

1906년 미국 LA의 아주사 거리에 일어난 성령의 부흥이 미국의 영적 판도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미국 교회도 유럽처럼 말라비틀어진 껍데기뿐인 교회가 될 뻔했습니다. 유럽의 교회들은 성령의 역사를 보고도 거부햇습니다. 20세기 초에 웨일스와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여러 나라 가운데 성령이 강하게 임하셨고 뜨거운 부흥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당시 독일 교회 지도자들은 성령의 역사를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우리는 성령과 관계된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 결과 교회는 쇠퇴하고 자유주위 신학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30년대 독일에서 나치당이 권력을 잡았을 때 그들의 배후에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역사한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맞서 싸우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마귀의 세력과 싸울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미국 교회는 유럽 교회의 전철을 밟을 뻔했지만 오히려 영적 부흥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면에는 성령 충만과 부흥의 약속을 믿고 기도의 우물을 판 사람들이엇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두 가지 부흥의 흐름 중에서 성령 충만의 흐름 속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깊이 생각해 봅시다.


"아빠 아버지, 나는 두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세상으로 충만할 것인가, 성령으로 충만할 것인가를. 성령님, 나를 사로잡아주시고, 충만히 역사하여 주옵소서. 나는 거부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부어 주옵소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그 성령을 저에게 부어 주옵소서. 나를 위해 잘지 않고 주를 위해 살게 하시고, 주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게 하소서. 주님 주신 모든 기회를 나의 나태함으로 인해서 놓치지 않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의 향기|악보를 클릭하면 찬양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찬양 세미나 강의입니다...

찬송은 서원과 결단의 고백


자, 이제 “찬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 마지막 정의를 내려야 할 순서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찬송의 문자적인 해석에서부터 수평적 의미까지 상당히 포괄적으로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는 내가 매일 부르고 내 평생 불러야 할 이 노래가 ‘내 자신에게 과연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매일 부르는 찬송의 내용은 정말 대단합니다. 대게 진실한 신앙의 고백이요, 뜨거운 선교의 열정에서 작시, 작곡되었음을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때문에 찬송을 하다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흐르는 것을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찬송을 하다 보면 그 어떤 영화나 드라마보다도 더 감동적인 내용의 곡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저 또한 찬양할 때 가장 많이 눈물을 흘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찬송하는 소리만 들어보면 이 땅 위에 사도 바울이 수백만이요, 베드로, 야고보가 그렇게도 많은데 생활 속에서는 좀처럼 신앙의 거인을 만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 많은 공략들이 난무합니다. 저도 나라의 장래를 걱정합니다. 국민이 모두 잘살게 하는 것이 지도자의 목표일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국민이 행복하게 잘 살도록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렇게 안 되니까 항상 애를 태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후보들은 자신이 집권하기만 하면 2~3년 내에 1인당 국민 소들을 몇 만 달러 이상으로 끌어 올리겠다고 호언장담을 합니다. 또 다른 후보는 자신이 집권하면 아파트 분양가를 지금의 절반 시세로 낮추도록 하겠다고 큰 소리 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공약들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대다수의 국민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런 정치가들을 쉽게 판단하고 비난의 화살을 마구 쏘아댑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성도인 우리가 정치가들을 판단하고 비난할 만한 자격이 있을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앞에서 우리는 분명 찬송이 예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예물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과연 어떻습니까? 우리들 입술에 있는 찬송과 우리의 삶에는 얼마만큼의 괴리가 있는가 말입니다. 초대교회에 보낸 주님의 메시지를 보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초대교회 성도들의 행위를 아시는 주님이 오늘 우리들의 행위를 보실 때 과연 찬송으로 여길 만한 삶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은 같은 수준의 인간들을 잠시 기만했을 뿐이지만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을 너무 많이 기만하지 않았을까요? 혹시 지금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몇 곡의 찬송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만입이 내게 있으면(찬송가 23장)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 하겠네”

이 찬송은 청년들 보다 장년들이 더 많이 부르는 곡입니다. 설령 입이 만 개가 있다 할지라도 그 입으로 죄를 짓거나 망령을 부리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찬송하는데 쓰겠다는 하나님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루 우리들의 입술에서는 과연 찬송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만 개는 그렇다 치고라도 한 입을 가지고서도 주님을 찬송하고 높이기 세우기보다는 저속한 언어로 얼마나 몸과 마음을 더럽혔습니까? 오늘 제 자신을 반성해 봅니다.


달고 오묘한 그 말씀(찬송가 200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생명의 말씀은 귀한 그 말씀 진실로 생명의 말씀이 나의 길과 믿음 밝히 보여 주니 아름답고 귀한 말씀 생명 샘이로다. 아름답고 귀한 말씀 생명 샘이로다”

참으로 아름다운 찬송입니다. 이 시대에 활자화된 말씀이 없었다면 인류가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할 때 성경에 대한 소중함을 더 느끼게 되고 아울러 말씀을 자유롭게 대할 수 있는 환경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더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찬송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달고 오묘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노래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성경읽기를 싫어하는지 도대체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마치 방송 모니터라도 되는 듯 TV는 매일 일삼아 보면서 성경 한 장 읽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주부들이 그 얼마며, 신문은 그토록 즐겨 읽으면서도 말씀 한 구절을 묵상하지 않은 채 한 주간을 보내는 가장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입니다. 우리가 매일 신문을 읽듯이, TV를 시청하듯이 성경을 보면 한 달에 성경 1독을 할 수 잇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한국교회 성도들을 보면, 예배는 비교적 열심인데 정작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지 않기 때문에 영적인 힘이 없고 깊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권면 합니다. "제발, 기본적으로 성경 3독만이라도 하십시오." "제발, 하루에 한 구절씩은 암송해 보세요." 훈련받는 청년들에겐 이렇게 말합니다. “적어도 자신의 나이만큼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내 기도하는 그 시간(찬송가 364장)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

사실 기도드리는 것만큼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예배당 건물의 대형화에 비해 새벽기도회나 금요 기도회에 참석한 성도들의 숫자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이제는 많은 교회들이 새벽예배 자체를 포기하고 금요 철야는 고사하고 금요기도회도 한 시간이 넘으면 길다 합니다. 

어는 주일 낮 예배에 오천 명 모인다고 자랑하는 교회가 새벽기도회나 금요기도회 때는 그 오십분의 일도 채 안 되는 것을 보면서 기도하는 시간이 즐겁다고 노래하면서도 세상 일락에 노예처럼 사로잡혀 영적으로 신음하고 있는 성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기만 합니다.


내 평생 소원 이것뿐(찬송가 450장)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 이 세상 이별하는 날 주 앞에 가리라'

오래 전 제가 대구의 어는 교회 청년회 사역자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마침 연말이 되어 그 다음 해의 임원 선출을 위해 청년들이 모였는데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서로 임원을 하지 않겠노라고 발뺌들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다 못해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 찬송을 서너 번 반복해서 부르게 했습니다.

이윽고 찬송이 끝난 후 임원으로 권유받았던 몇몇 청년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찬송을 부른 소감이 어떻습니까?" "네 은혜롭습니다. 언제 불러도 은혜가 됩니다." 그때 저는 그들에게 고함을 질렀습니다. "이런 양심에 화인 맞은 인간들! 지금 당신들이 뭐라고 고백한지 아십니까? 내 평생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의 일 하는 것이 그렇게 소원이라면서 청년회 임원을 하지 않겠다니 주님을 우롱해도 유분수지 도대체 이것이 무슨 짓들이란 말입니까?" 혹시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진 않습니까? 주님의 일 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노래하고서도 항상 뒷전에서 맴돌고 있지 않는가 말입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찬송가 323장)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 만 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저는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주님의 두 가지 표정을 생각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감격하시는 표정이고 또 다른 하나는 슬픔과 안타까움의 표정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어느 찬송인들 주님이 귀하게 여기지 않겠냐마는 특별히 이 찬송의 내용은 그 헌신의 깊이가 더 하고 사랑의 농도가 진해 이 곡을 부르는 제 자신의 가슴도 뜨겁거늘 하물며 그것을 듣는 주님의 마음이야 오죽 하시겠습니까? 이 가사야 말로 사도 바울이나 할 수 있었던 고백이요, 주를 위해 거꾸로 십자가에 달린 베드로나 할 수 있었던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특히 한국 성도들은 이 찬송을 즐겨 부르고 있습니다. 아마 한국 교회에서 즐겨 부르는 찬송 베스트 10곡을 뽑으라면 이 찬송은 언제나 그 순위에 들어가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 찬송은 찬송하는 그 순간만큼은 한국 성도들의 신앙심을 사도 바울의 수준으로 끌어 올린 셈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기뻐하시다가 이내 슬퍼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냉용과는 반대로 살고 있는 우리들을 보면서 말입니다.


“예림의집”이란?

 

“예수님께서 임하셔서 거하시는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시면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 29)”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실제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정착하시고 그 곳에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주님이 주신 권능으로 담대히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봅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영접하는 우리의 마음을 거처로 삼으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그들을 떠나는 동시에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자신이 제자들을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하늘로 가시는 것처럼(요 14:2-3), 제자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위한 처소를 준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이제 그들에게 오셔서 그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얼마 후 오순절이 되었습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전에 하신 말씀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마음에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비롯한 전인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제 마음에 그리스도를 위한 거처를 만들어 기꺼이 모셔 들이며, 그분을 섬기고 거기서 그분과 즐거워하고 그분을 알아가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분을 제 마음에 모셨던 그 날 저녁을 저는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86년 여름, 제가 고 2때 청소년연합 여름 수련회 저녁집회 설교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사건은 얼마나 감격적인 일이었는지요! 그것은 제 중심에서 발생한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그 후로 그리스도를 모신 것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그리스도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후 새로이 시작된 그분과의 교제 가운데 주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주님, 저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뜻대로 사용하옵소서!”물론 주님은 기꺼이 저를 받으셨고, 저를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저는 이 후로 날마다 주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삶에서의 주님과의 동거가 시작되었고, “예림의집”의 사역도 시작되었습니다.


첫째, 온라인 선교사역

①다음 카페 “예림의집”

다음 검색 창에 예림의집을 치시면 바로 만날 수 있습니다. 클릭해 들어가셔서 회원가입을 하시면 그 순간부터 저의 예림의집 사역이 동참하게 됩니다. 현재 회원 수 900여명으로 이들이 잠정 후원자가 되어 기도후원, 물질후원, 재능기부 등을 하게 됩니다. 카페를 매개로 하여, 서로의 비전과 기도 제목을 나누고, 힘을 합쳐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저의 사역에 동참하시길 원하시는 분은 다음 검색 창에 “예림의집”을 치세요!

②다음 블로그 “예림의집”

다음 블로그 예림의집은 따로 회원 가입을 할 필요 없이 언제, 어디서나 방문하여 필요한 정보와 신앙 글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저는 다음 커뮤니티 공식 파워 블로거로 활동 중이며, 현재 58만 여 건이 넘는 방문자 수를 기록 중입니다. 다음 카페 “예림의집”과 연동되어 하루 평균 20개 이상의 정보가 업로드 되어 현재 2만여 편의 글들을 접하실 수 있습니다.

③페이스북 활동

요즘 활발한 페이스푹 활동을 통하여 온라인 선교의 지경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저를 친구초대 해주시고 팔로우해 주시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16개 그룹을 만들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소개하자면, 신학공부/찬양인도자학교/선교훈련/평신도성경공부/교회의교리교육/개인전도/정통과이단공부 등이 있습니다.


둘째, 선교사/개척교회 후원 사역

예림의집 3대 사역 중 그 두 번째 사역은 “선교사/개척교회 후원 사역”입니다. 이 사역은 찬양사역을 하던 저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셔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게 하신 사역입니다. 선교사님들과 개척교회를 바르게 후원하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선교와 교회개척 사역에 헌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림의집 카페 회원들을 포함한 그동안 주께서 연결시켜주신 후원자 1300 여 명이 함께 감당해 가는 사역입니다.

첫 번째, 기도 후원 사역은 주께서 연결해 주신 선교사님이나 개척교회를 위해 40 명의 기도용사를 세우는 사역입니다. 제 1호 필리핀 “김성재 선교사님”과 서울 상도동 “주님의 교회”를 필두로, 현재 11명의 선교사님과 6개의 개척교회를 후원하고 있고, 그 지경을 넓혀 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물질 후원 사역으로 앞에서 말씀드린 기도 후원자들 중에 하나님께서 자원하는 마음을 주신 분들이 물질 후원을 하게 됩니다. 재정 후원은 선교사님과 개척교회 목회자 가정의 기초 생활비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도록 원칙을 세웠습니다. 물품 후원은 선교나 교회 개척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들을 자원하여 후원하게 됩니다. 특히 도서 후원은 성경책, 신앙 도서, 아이들 학습 도서 등. 작은 도서관을 만들 수 있도록 후원합니다.

세 번째, 재능 기부 사역은 주님께서 주신 모든 달란트를 활용하여 선교와 교회 개척을 지원하는 사역입니다. 예를 들어, 선교 지원팀, 여름성교학교 진행팀, 찬양팀, 자원봉사단 등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모든 재능 기부 사역은 “자비량”을 원칙으로 합니다. 특히 전도 지원팀을 양성하여 개척교회를 지원할 계획입니다. 이 사역을 통하여 새로운 선교사들과 교회 개척자들이 새워질 것입니다.


셋째, 찬양 세미나/찬양 집회 사역

마지막 예림의집선교단의 사역은 “찬양 세미나”와 “찬양 집회”사역입니다. 제가 약 25년간 해오던 찬양 사역의 일환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을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특별히 부여하신 사역입니다. 아직도 찬양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 주님을 맘껏 찬양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잇습니다. 그들에게 제가 경험한 찬양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나누는 사역입니다.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사역을 나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않고, 귀중한 이 책 「찬송은 믿음의 꽃」을 선물 합니다. 저는 비록 짧은 시간동안 여러분을 만나지만, 찬송은 너무나 소중하기에 글로서 여러분들의 곁에서 치침이 되어드리려고 합니다. 비매품으로 무료로 드립니다. CCM에 대한 편견을 깨는 글에서부터, 찬양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등 찬송에 대한 저의 지난 25년간의 찬양사역의 총 결산의 책입니다. 본 책의 내용은 앞서 설명한 다음 카페와 블로그 “예림의집”과 페이스북을 통해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