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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림의집 1278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2018. 5. 4. 12:39

예림의집 1278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이야기|하나님과 대화하는 101가지 방법...


하나님께 받치는 감사 앨범


당신이 감사하게 여기는 것들

나무, 하늘, 친구, 가족, 침대,

현관이나 창문에서 바라본 풍경,

토마토 나무 등을

사진으로 찍어 보세요.

그 사진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감사 앨범에 정리하면서

침묵의 감사를 드려 보세요.

이 사람이, 이것이 왜 감사한지

그 이유를 사진 아래에 

써 놓고 싶어질 것입니다.




예림의집 칼럼™|예림의집이 드리는 삶의 지혜...


목숨과 바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유대 법으로는 신성모독의 죄를 범한 자는 사형에 처해졌으며, 예수님이 단지 인간이라고 가정해본다면 그분의 주장은 분명 신성모곡이 될 수 있습니다.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요한복음 5:23).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성을 지니신 것이 아니라면, 이 말 자체가 신성모독입니다. 

예를 들어 모세나 엘리야나 엘리사를 비롯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공경하듯 나를 공경하라"고 말했다면, 다시 말해 자신을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올려 놓았다면 그들은 노골적으로 신성모독의 죄를 범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스스로 주장한대로 신적 존재가 아니라며 그분을 죽였지만, 사실 그성는 단지 그분의 증언에만 의한 것이었습니다. 

대제사자잉 말했습니다.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게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태복음 26:63). 그러자 유대인들도 그분을 에워싸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언제까지 우를 이심하게 하려느냐?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밝히 말하시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브니다.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그러자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했습니다(요한복음 10:24-33).

그들은 그 말이 분명한 신성모독이므로 더 이상 듣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주님이 사형 언도를 받고 죽으신 것은 그분 스스로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26:63-66). 예수 그리스도가 단지 한 인간으로 이같이 신성을 모독했다면 유대인들이 그들의 법을 좇아 그분을 처형시킨 것은 올은 일이었습니다. 레위기 24장 16절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법을 좇아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모든 자들을 사형시켜야 했습니다. 주께서 자신을 하나님이라 말씀하셨던 그 진술은 그분의 생명을 대가로 요구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분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사형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6장 15절에서 예수님은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단지 훌륭한 사람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이 같은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회심한 이래로 그 점에 대해 조금도 의심해본 적이 없습니다.



오늘의 QT|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나는 죽고 주가 살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와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릐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로마서 6:13)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주님의 일을 스스로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고, 두 번째 유형은 주님이 자긴을 통해 일하시도록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그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1. 주님의 일을 스스로 열심히 하는 유형의 제자입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빌립보서 4:2).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빌립보교회의 충성스러웠던 여성 지도자였으나 한편으로는 교회 내 분열과 시험을 일으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두 사람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명햇습니다. 이로 보건대 열심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 같은 유형의 사람들은 열심은 있으나 주도권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잘한 것은 자랑과 교만으로 나타나고 안 된 것은 불평과 낙심으로 나타납니다. 주변에는 계속된 갈등과 다툼이 있고 시험거리가 많습니다.


2. 주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일하시도록 하는 유형의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로마서 15:17, 18).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한 일을 나타내고 드러내는데 결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오직 예수님께서 자신을 통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삶의 주도권이 예수님께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삶의 주도권이 예수님께 있을 때 하나님의 역사가 드러납니다. 내가 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게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잘되어도 교만하지 않고 겸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일이 실패한다 하더라도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아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갈등과 분쟁도 사라지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해 역사하실 수 있으면 자아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사실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입술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믿고 고백한다는 것은 예수님게 맡기고 완전히 순종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나의 의지를 버리고 주님의 의지로 행하고, 나의 감정이 아니라 주님의 감정으로 느끼고, 나의 지식과 경험을 의존하지 않고 매 순간 주님께 묻는 자세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나를 통하여 격시하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통하여 하고 싶어 하시는 일이 무엇일까요? 깊이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흔히 "나를 향한 주님의 계획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주님의 뜻을 묻고 있지만 여전히 주체는 "나"인 것입니다. 그 대신 우리는 그저 "주님의 계획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답을 얻을 수 있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고등부의 한 여학생이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고모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 고모는 조카들을 키우느라 시집도 못가고 온갖 고생을 하며 살았습니다. 학생은 고모가 자기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알았지만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고모의 잔소리에 반항심이 생겼습니다. 특히 고모가 교회 다니는 것을 반대하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에만 오면 숨이 막혔고 계속해서 고모와 싸웠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기도할 때면 언제나 고모와 싸운 것 때문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것이 가장 큰 회개의 제목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학생은 교회에서 "우리가 죽어야 우리 대신에 예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설교를 듣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순간 "나 대신 예수님이 우리 고모를 만나시면 얼마나 좋을까 ..."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집으로 들어간 학생은 현관 문고리를 잡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고모를 만나 싸우지 않을 자신이 없습니다. 저 대신 주님이 누리 고모를 만나 주세요."

기도를 마치고 문을 여는 순간 잔뜩 미간을 찌푸린 고모가 영락없이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잔소리를 듣는 학생의 마음이 이상하게도 전과 달랐습니다. 전 같았으면 같이 대들면서 반항을 했을 텐데 그날은 잔소리를 퍼붓는 고모의 얼굴에 주름진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학생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솟구쳤습니다. 학생은 자기에게 소리를 질러대는 고모를 와락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라는 고모에게 말했습니다. "고모, 고모 많이 늙었어! 우리 때문에 너무 많이 늙었어, 고모!"

고모는 전혀 예상치 않았던 조카의 행동과 말 때문에 당황했지만 그 순간 가슴에서 오랫동안 응어리져 있던 것이 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날 고모와 조카는 서로를 붙들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조카를 통해서 한 많은 한 여인의 삶을 치유하고 해방시키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고모는 조카를 따라서 교회에 나왔고 지금은 우리 교회의 충성스러운 집사가 되어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 예수님깨서 함께 계시다고 느껴지지 않는 것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남편 안에 계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아내가 죽으면 남편이 아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부모가 죽으면 자식이 예수님을 만나고 자시깅 죽으면 부모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따지고 보면 이것보다 더 큰 행복은 없습니다.

순종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순종은 자신의 힘으로 노력하는 순종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노력해도 잘되지 않는다는 좌절감을 느낄 수 박에 없습니다. 두 번째 순종은 죽음으로 하는 순종입니다. 자아가 죽어야 비로소 진짜 순종이 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 사실은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2002년 '학국 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의 여름 수련회에 말씀을 전하러 갔을 때 일입니다. 해마다 많은 신학생이 배출되지만 이들이 일할 사역지가 부족해진 상황에서 불확실한 미래를 불안해하는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기에 앞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까? 저 수많은 전도사가 나가서 일할 사역지가 너무 부족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책망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사역지가 왜 부족하냐?" 하나님의 책망하심에 저 역시 깊이 깨달은 것이 잇어서 그 마음 그대로 신학생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여러분은 왜 졸업 후에 사역할 임지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임지는 많습니다. 여러분이 집도 주고 월급도 주는 교회만 찾으려고 하니까 교회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가서 '사례비 안 주셔도 됩니다. 집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제가 복음을 전할 곳만 알려 주십시오'라고 해 보세요. 그리고 교회에서 지시하는 곳으로 나가 하루 종일 전도하고 결신자를 얻으면 교회에 와서 등록시켜 조세요. 어느 교회가 안 써주겠습니까? 여러분, 그렇게 했는데도 영 임지를 구할 수 없으면 저희 교회로 오십시오. 교회 재정상 사례비를 드리지는 못해도 열심히 전도하시겠다면 저는 얼마든지 환영하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교회로 찾아온 전도사님과 목사님들이 있었습니다. 설교에 은혜를 받았다면서 사례비를 안 줘도 되니까 그냥 교회에서 일만 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장로들과 의논해 보니 ""요즘 그런 전도사들이 어디 있습니까? 일하시도록 해보지요."라는 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정식으로 파송받기 위해 노회에 연락을 했습니다. 그러자 "교회법상 전도사를 파송하려면 파송받는 교회에서 그들에게 최소한의 생활비를 지급하도록 되어 있습니다."라고 하며 사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함께 일해보자고 해 놓은 터라 장로들과 재차 의논했습니다. 그러자 그들도 이왕 그렇게 된 것을 어쩌겠냐고 하시며 그분들 모두에게 사례비를 지급하도록 결의해주셨습니다. 한 해 동안 우리는 갑자기 맞이하게 된 일곱 분의 교역자들의 사례비를 충당하는라 재정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죽기를 각오한 일곱 명의 사역자로 인해 그해 놀라운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저는 그들을 보면서 정말 예수님 안에서 죽기로 각오하면 예수님이 반드시 살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내 자아의 죽음은 결코 신앙생활의 목표가 아닙니다. 도를 닦아서 이르러야 할 경지가 아닙니다. 내가 죽었다는 것은 믿음의 시작이고 주님이 역사하는 삶의 출발점입니다. 여러분이 죽음을 받아드리고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간증이 있으십니까?


"아빠 아버지. 나는 죽고 예수그리스도가 사십니다. 나의 자아를 완전히 죽여주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놀라운 역사를 목도하게 하옵소서. 이제 죽음 으로 하는 순종을 하기로 결단합니다. 내 자아가 죽음으로 진짜 순종을 하게 하소서. 오늘도 놀라운 주님의 역사하심을 목도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의 향기|악보를 클릭하면 찬양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찬양 세미나 강의입니다...

찬송은 성도의 의무


세미나 및 집회를 하려고 처음 교회를 방문하면 제일 많이 듣는 말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찬송에는 취미가 없는 가 봅니다.”“저는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찬송에는 재능이 없나 봐요.”

저는 처음에 이런 질문을 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찬송도 모르고 성경도 정독을 안 하는구나!’성경 곳곳에 찬송은 취미나 재능이 아니라고, 하나님은 멋진 공연을 보시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울어나는 찬송을 원하신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고운 목소리, 멋진 환상곡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찬송을 원하십니다. 취미라는 것은 강제성이 없습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일 뿐입니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찬송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 할지어다(시 9:1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바로다(시 33:1)”,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 할지어다(시 150:6)”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찬송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누구의 명령이 아닌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 주님의 말씀에 "아멘"하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거짓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찬송을 받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그분을 찬송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고 감히 말할 수가 있을까요? 이 명령에는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습니다, 찬송은 달란트나 은사나 은혜가 아닙니다. 찬송은 어떤 특정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호흡이 있는 자는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주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 명령은 우리에게 의무이지만 또한 권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시기 위하여 우리를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택하셔서 왕 같은 제사장이 되게 하시고, 거룩한 나라가 되게 하시며 주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벧전 2:9).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찬송을 부를 수 있는 ‘자격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자격증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 치심을 받은 자”라는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합니까? 하지만 이 찬송의 자격증은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 누구도 빼앗거나 박탈 할 수 없는, 곰팡이가 생기거나 불에 타지 않는 자격증입니다. 자격증을 딴 후에 장롱 속에 고이 숨겨 두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운전 면허증을 따고 10년 동안 장롱 속에 고이 간직한 사람이 과연 자동차를 제대로 운전할 수 있겠습니까? 

찬송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우리는 찬송할 자격이 있고, 찬송할 수 있고, 찬송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마음 깊은 곳에 묻어 버리고, 묻어 버린 것조차 잊어버린 그러한 불량 그리스도인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찬송은 성도의 의무입니다. 찬송은 성도들이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이요, 가장 기본적인 의무임을 명심합시다. 찬송하지 않는 삶은 불순종의 죄를 날마다 짖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기도할 때에 제일 먼저 찬송하지 못했던 순간을 떠올리면서 회개합니다. 우리가 숨을 쉬는 것처럼. 음식을 먹는 것처럼, 잠을 자는 것처럼 찬송이 삶에 자연적으로 녹아들게 합시다.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인 찬송! 찬송이 우리의 삶이 되는 때에 믿음의 꽃 피어날 것이고, 마침내 열매가 되어 주님의 한없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