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의집 1277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이야기하나님과 대화하는 101가지 방법...
발걸음을 느릿하게
당신이 살고 있는 동네의
골목이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가 보세요.
그 곳에 세세한 것들...
화단의 갖가지 색상들이
만들어 내는 어울림과
색조의 미묘한 차이,
집안에서 새로 나온 불빛들이
잔디 위에 비쳐진 모습,
굴뚝에서 솟아나는 연기,
새싹과 활짝 핀 꽃들에
시선을 집중시켜 보세요.
잠시 걸음을 먼추고
피어 있는 꽃들에가 다가가
그 향기를 음미해 보세요.
발걸음을 느긋하게 해 달라고,
매일의 축복을 깨닫고
감사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 보세요.
예림의집 칼럼™예림의집이 드리는 삶의 지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태복음 16:16; 요한복음 6:69).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명백히 박혀 주는 많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린도전서 15:47).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라"(요한일서 20).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 17:3).
"제사장이 가운데서 일어서서 예수이게 물어 이르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시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마가복음 14:60-64).
오늘의 QT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이미 죽은 자로 여기라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로마서 6:11).
우리는 지금가지 주기 않은 자아가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우리 자아가 어떻게 죽을 수 있을가요? 많은 성도가 "내가 죽어야지, 죽어야지."라고 말하며 죽으려고 애를 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자아는 이미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자아가 죽엇다는 것은 믿음이 장성한 사람의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초신자 수준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로마서 6:3).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을 때 이미 죽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곧 나는 죽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태어났다는 마로가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장례식을 치르고 사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진리이고 복음입니다. 그러나 아직 중요한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이 진리를 결론으로 삼고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시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로마서 6장 2-6절에는 "우리"라고 했는데,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는 '내가'라고 썼습니다. 말하자면 로마서 6장 3-6절은 복음의 진리를 말하는 것이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개인적인 신앙고백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우리의 옛 사람도 예수님고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인 동시에 내가 죽은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진리를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죽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었다고 여기고 믿음으로 죽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바울처럼 십자가의 복음이 자신에게 그래도 임하였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사망선고를 해야 합니다. 죄의 종노릇 하던 자아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제 나는 예수님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생명이고 나의 전부이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고백하며 나아갈 때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죽음이 실제가 됩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 되시고 주인 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십자가 복음 앞에 정직하게 서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죽음으로 통과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오직 자아의 죽음으로만 통과할 수 있습니다. 자아의 죽음으로 십자가를 통과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이 내 생명이 되시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나의 복음'으로 고백해 보세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참고하여 서술 형태로 써보세요. 첫째, 자아가 죽지 않았을 때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부끄러운 죄가 있더라도 구체적으로 정직하게 고백해 보세요. 둘째, 여러분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게 죽었음을 고백해 보세요.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 결단을 써보세요.
언젠가 교회에 저에 대한 소문이 퍼진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에 떠도는 소문은 정말 근거도 없이 추측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더 황당한 것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듣고서 사실 여부도 확인하지 않은 채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교인들이었습니다.
저는 집사님 중의 한 명이 그 터무늬없는 소문을 퍼뜨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얼마나 억울하고 분하고 속이 타는지 가만히 앉아 있어도 제대로 숨을 쉬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 집사님을 당장 찾아가 헛소문을 퍼뜨린 연유를 따지고, 개인적인 사과는 물론 교인들 앞에서 공개적인 사과를 받아내고 싪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그를 교히에서 쫓아내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마음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 바로 지금 내가 죽어야 하는 때로구나.' 저는 그 생각을 예수님께서 저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저는 어찌해야 할지 모른 채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주님께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죽었습니다." 그래도 제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시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미 죽었습니다." 같은 고백을 두 번, 세 번, 네 번 ... 반복했습니다. 그 고백을 열 번째 반복하는 순간, 저에게 정말로 죽음이 실제가 되는 것처럼 느겨졌습니다. 그 죽음은 참으로 고요하고 평안했습니다.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던 제 마음은 이제 차분히 가라앉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 소문을 퍼뜨린 집사가 밉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을 쉬쉬하며 유통시켰던 교인들에 대한 섭섭함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마음의 격동이 사라지고 평온해지자 저는 주님의 마음을 구했습니다.
"주님, 이제 저에게 주님의 마음을 주십시오." 그 기도를 드린 후 주님의 음성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통곡이 터져 나왔습니다. 말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아팠습니다. 울다가 지쳐서 완전히 탈진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로 누워 있는데, "그런데 내가 지금 왜 이렇게 울고 있지?"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저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조금 전에 네가 내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느냐."
저는 그때 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는 '분노'가 아니라 '슬픔'이었습니다. 주님은 교회 안에서조차 서로 헐뜯고, 상처 주고, 자기를 주장하며 살아가는 우리를 보면서 깊이 슬퍼하고 계셨습니다. 헛소문을 퍼뜨려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집사님을 바라보며 통곡하시고, 그 집사님을 향해 숨을 쉬지 못할 만큼 분노하는 목사를 바라보며 통곡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제 자아의 죽음을 인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알지 못했으면 죽어도 몰랐을 주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죽음이 실제가 되면 모든 문제가 바뀝니다. 두려움, 염려, 걱정, 미움, 원망, 욕심, 조바심도 다 사라집니다. 그런 것들을 느끼는 주체인 내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자아의 죽음으로 이런 것들이 처리되면 우리 마음에는 평아노가 감사, 기쁨과 사랑의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환경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언제 어디서나 기뻐하고, 감사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아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어려워합니다. 내가 죽었다면 감정도 없어지고, 성질도 없어지고, 혈기, 음란한 마음 같은 것도 없어져야 하는데 여전히 그대로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이 살아나서 내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죽었다고 믿을 수 있을까요?
우리의 죄가 사함 받은 것과 옛 사람이 죽은 증거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게서 우리 죄를 사하심과 우리 옛 사람을 죽었다고 인정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때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옛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신의 욕구나 계획, 의지가 다 죽어집니다. 오직 상대방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하게 됩니다. 사람만 같이 있어도 육신을 따라 행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경험입니다. 하물며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더 말할 것도 없스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31).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한 것은 여전히 육신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육신의 욕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럴 때마다 자신이 죽었다는 진리를 계속 확인했습니다. 계속해서 "나는 죽었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신다."는 진리를 결론 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믿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역사하실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자아의 죽음을 받아들임으로 도무지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시험에서 이겼던 경험이 있습니까?
"아빠 아버지, 나는 이미 죽었습니다. 내 안에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는 나의 자아는 이미 죽었음을 믿습니다. 나의 옛 사람의 습관들을 제거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날마다 죽게 하옵소서. 나에게서 두려움, 염려, 걱정, 미움, 원망, 욕심, 조바심을 제거하여 주시고, 기쁨과 감사와 사랑이 가득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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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M은 예배에 쓰일 수 없습니다.
“CCM과 찬양은 구분해야 합니다. CCM은 또, 예배에 쓰일 수 없습니다.”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의 편견이었습니다. CCM은 기독교적인 대중음악이기 때문에 '찬양'과는 다르며, 구분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배에 쓰일 수 없다는 지적은 25년 전 제가 주장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찬송가만이 예배에 쓰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에게 있어서 찬송가의 존재는 특별합니다. 예배에 꼭 필요한 성경과 같은 위상으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찬송가를 감히 성경과 같은 반열에 놓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찬송가가 비록 성경과 함께 책으로 묶여 있다고 해서 그런 착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유일한 계시의 책입니다. 그러나 찬송가는 찬송가 공회 회원들이 모여서 회의를 통해 선곡해서 넣은 곡입니다. 하나님의 저작자이신 절대 진리인 성경과 인간의 회의를 거쳐 모은 노래를 같은 반열에서 취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찬송가에 담긴 곡이 영감이 있다는 논리도 편견입니다. 찬송가 중에는 1800년대 미국 기독교 부흥 역사 때 부를 찬송 곡이 없어서 당대 유행가에 가사만 기독교적으로 바꿔 만든 노래가 상당합니다. 특히 고난주간에 부르는 <오 거룩하신 주님> 멜로디의 경우는 독일의 선술집에서나 부르던 사랑노래였습니다.
제 말의 요지는 찬송가를 우습게 보자는 것이 아니라, 음악에 대한 가치기준은 시대에 따라, 문화에 따라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노래에 담겨진 가사의 농도이지, 스타일이나 음악적인 감각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감히 말하지만, CCM은 그런 의미에서 정신만 복음에 튼튼히 기초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예배에 쓰일 수 있습니다.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하고, 노래하는 곡이면 됩니다. 물론 교회 전통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매주 아니 날마다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에 CCM을 비롯한 찬송들을 어떻게 사용할까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CCM은 대중음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에 못 쓴다는 것은 편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찬송가도 전형적인 대중음악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대중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것이 대중음악이라면 찬송가가 더 실질적인 대중음악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건 찬송가에 있으니까 예배에 사용할 수 있는 곡이고, 이것은 경망스러운 CCM이니까 예배에 쓰이면 안 된다고 하는 식으로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2천 년 전 바리새인들의 그것과 무슨 다름이 있는지 곰곰이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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