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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림의집 1279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2018. 5. 5. 11:45

예림의집 1279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이야기|하나님과 대화하는 101가지 방법...


하나님과 점심 데이트를


하나님과 점심 데이트를 해 보세요.

당신과 하나님만 알고

다른 사람은 모르게 살짝.

직장 상사와의 업무상 식사 때와

똑같은 주의를

하나님게 드리세요.

업무 관계, 거래, 계획, 기대 등을

점심을 먹으며

하나님과 의논해 보세요.




예림의집 칼럼™|예림의집이 드리는 삶의 지혜...


확실한 증거


한 악명 높은 죄인은 예수님께 예수님의 신성을 증명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분은 저를 구원하셨어요. 그것이 확실한 증거가 아니겠어요?" 어떤 불신자가 내게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세례요한의 삶을 연구중입니다. 왜 그를 전하지 않습니까? 그는 그리스도보다 더 훌륭한 인물인데 말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큰 업적을 이룰 수 있을 텐데요."

그래서 나는 "형제님, 당신은 세례 요한을 전하세요. 저는 당신을 따라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가 더 효과가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당신이 더 효과가 있겠지요. 사람들이란 몹시도 미신적이니까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과연 그 이유만일가요?

세례 요한은 참수당해서 제자들이 그의 몸을 찾아다 묻어주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들을 취하시고 선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 반역자들로부터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로다"(시 68:18).



오늘의 QT|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죽음을 통한 승리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타나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4:10, 11).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의 핵심은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있습니다. '나는 죽고'에 초점이 아니라 '예수로 살고'에 초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죽음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사는 삶으로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항상 죽음을 고백하며 사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타나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4:10, 11).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살았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가 항상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았던 이유는 그럴 때만 예수님의 생명이 자신을 통하여 나타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죽은 사람은 어떤 시험도 이길 힘을 얻게 됩니다. 죽음조차도 더 이상 그를 두렵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을 통하여 예수님의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2001년 11월, 서울 동광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입니다. 그 교회의 교우들과 식사를 마친 후 저녁 집회를 위해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전화를 받아 보니 아내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여보, 저 암아레요...." 아내는 청천벅력 같은 검진 결과를 받아들고 혼자선는 집으로 돌아갈 기력이 없어서 병원 로비에 앉아 저에게 전화를 했던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저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없었습니다. 당장 저녁집회때 설교할 자신도 없었습니다. 바로 달려가 아내 옆에 있어 주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보, 너무 미안해. 지금 내가 당신에게 갈 상황이 아니야. 당신 혼자 집에 가야겠어...."

그러나 저녁 집회 준비를 위해 머리를 숙인 제 머릿속에는 온통 아내에 대한 걱정뿐이었습니다. 저는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설교할 힘이 없습니다. 이 상황에서 제가 무슨 설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즉각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 응답은 저에 대한 책망이었습니다. "너는 네가 이미 죽었다고 고백해 놓고, 뭘 또 그렇게 죽겠다고 아우성이냐? 오늘 저녁 집회에 참석한 교인들 중 네 아내처럼 큰 병에 걸려 절박한 심정으로 해답을 구하는 자가 있다면, 너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하려느냐? 네가 네 아내에게 해 줄 말을 그에게 해라." 저는 그제야 제가 이미 죽었슴을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기도가 바뀌었습니다.

"주님, 아내를 주님께 맡깁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오늘 저녁 집회에 암 선고를 받고 온 이가 있다면 말씀을 통하여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옵소서." 그날 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말씀을 전했습니다. 큰 은혜가 있었습니다. 집회를 마친 후 운전하며 집으로 돌아오는데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 아내는 어떤 상태일까, 나는 아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모르기는 해도 지금쯤 아내는 초죽음 상태가 되어 자리에 누워 있을 것이 뻔했습니다. 저는 두려운 마음으로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그런데 현관문을 여는 아내의 표정이 무척 밝았습니다. "여보, 괜찮아?" "예, 저 괸찮아요." 아내는 웃음을 지으며 제 말을 받았습니다. 저는 아내의 밝은 표정에 어리둥절해서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저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전철을 타고 안산까지 왔어요. 자꾸만 눈물이 흘렀어요. 그런데 안산역에서 내려 집에 가려고 택시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역 주변에서 좌판을 벌이고 장사하를 하는 교우들 생각이 나더라고요. 혹시 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분들을 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마지막 심방이라고 생각하며 그분들을 찾아뵈었지요.

그런데 저의 느닷없는 방문을 받은 그분들이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사모님이 자기들을 찾아왔다고 기뻐하는 모습이 얼마나 좋던지 제 문제를 잊을 정도였어요. 추운 날씨에 떨면서 장사하는 그분들에게 따뜻한 차와 저녁을 사 드리고 함게 기도하고 일어났어요. 집에까지 택시를 타고 오는데, 차 안에서 갑자기 기사분에게 전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사분은 제가 자꾸 교회 이야기를 하니까 무척 떨떠름해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라랬죠. '기사님, 제가 지금 병원에서 암 선고를 받고 오는 길이에요. 우리가 사는 세상 이후에 분명히 천구깅 있어요. 꼭 예수님을 믿으셔야 해요.' 그랬더니 그분 태도가 확 바귀는 거에요. 제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며 듣더라구요. 그리고 아파트 앞에서 내리면서 다시 한 번 교회에 꼭 나가시라고 권면했지요.

사실 병원에서 암이란 판정을 들었을 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그러나 곰곰이 생각했어요. 주님이 지금 나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영혼을 사랑하고 구원하는 것이었어요. 제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심방하고 전도하니까 마음이 그렇게 편해질 수가 없었어요. 하나님께서 저에게 얼마의 시간을 주시든 저는 그 시간을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고 싶어요."

저는 아내의 말을 듣는 순간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삶의 초점을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께 맞추면, 죽음조차 우리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 후 제 아내는 암 제거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 시간은 저희 부부에게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희에게 은혜를 베푸셨고 지금 제 아내는 암에서 완전하게 고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지금 가장 고민되고 힘든 문제에 죽음을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의 죽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한 가지 더 놀라운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감추거나 억누르지 않고 드러낼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집에 귀중한 손님이 찾아왔다고 생각해 보세요. 급한 마음에 여기 저기 널려 있던 것들을 장롱 속에 집어넣고 구석구석 몰아넣습니다. 겉으로는 정리가 잘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정말 집안이 깨긋한 것입니까? 지저분한 것이 보이지 않을 뿐이지 깨끄해진 것은 아닙니다.

많은 성도가 이런 식으로 죄와 교만과 성질을 힘겹게 감추고 누루고 살아갑니다. 감추고 누르면서 이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드러나지 않는 것일 뿐이지 이긴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겸손한 척 머리를 숙이지만 속으로는 교만이 머리를 듭니다. 성질을 애써 누릅니다. 속으로는 찡그리고 겉으로는 웃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신앙생활은 자유와 기쁨이 아니라 도 하나이 짐이요, 스트레스입니다.

유교이 곤자는 수신(修身)을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계속 마음을 닦고 억제하는 것으로써, 그것이 성공해야 성인이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유교식으로 사는 성도가 많습니다. 그들은 매사에 조심하고 또 조심합니다. 이것이 율법적인 신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는 억누르지 않고 드러내고 또 드러냅니다.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면서도 두려울 것이 없고 문제가 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예수님 안에서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진정한 자유요, 복이요, 승리입니다.


"아빠 아버지, 나는 율법적인 신자이기보다는 예수님 안에서 이미 죽은 진정한 자유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십습니다. 저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로 완전히 죽고, 오직 예수님만이 사시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 삶은 주의 것입니다. 주님 주시는 그 참된 기쁨 속에서 자유인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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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찬양 세미나 강의입니다...

찬송은 소중한 예물①


“찬송은 예물”이란 말을 들어 보았습니까? 혹시 찬송을 예배를 준비하는 노래, 마음을 여는 노래 정도로 생각하고 있진 않습니까? 찬송을 예물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예물이란 헌금이나 교회에 필요한 물건. 즉, 유형적인 것으로만 알았기 때문에 예물하면 곧 헌금이라고만 많이 생각해 왔을 것입니다. 찬송을 예물로 생각했다면 ‘준비찬송’이라는 말도, 4절까지 있는 찬송을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1절과 4절만’부르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헌금할 지폐를 가운데를 잘라버리고 양 끝만 드리는 분은 없을 테니까요! 만약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찬송하는 태도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게 달라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까지 찬송을 무엇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신앙인들의 노래, 예배를 돕는 노래, 마음에 평안을 주는 노래, 정서적으로 도움을 주는 노래, 마음을 여는 노래 정도로만 생각하진 않으셨는지요? 찬송이 성도들의 정서에 유익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울러 예배 분위기를 돕고 심령을 평안케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런 이유 때문에 찬송을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대에 있습니다. 하지만 앞에 열거한 현상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부수적인 결과들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요, 선물이지 찬송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한국 교회는 그동안 찬송의 가치를 너무 많이 왜곡시켜 왔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첫째로, 몇몇 신학교나 미션스쿨에서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대부분의 학교는 5월에 축제를 엽니다. 이 축제의 하이라이트가 바로 ‘찬양경연대회’입니다. 찬송을 가지고 누가 잘 부르고, 누가 더 멋지게 연주하는지 판단하고 점수를 매기는 것입니다. 참가 신청을 받고 참가비도 받습니다. 예선과 본선이 있고 심사위원들이 있습니다. 찬양을 하는데 돈을 지불해야 하고 평가를 받아야 하고 몇 날을 연습을 해야 합니다. 찬양경연대회가 ‘축제의 꽃’이라고 합니다. 찬양경영대회를 통해 축제의 분위기가 고조 된다고도 합니다. 여러분 냉정히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감히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인 찬양에 등수를 매길 수 있단 말입니까? 찬송이 축제를 돕는 도구로 전락시키는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