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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림의집 1275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2018. 4. 29. 08:12

예림의집 1275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이야기|하나님과 대화하는 101가지 방법...


능력의 하나님을 껴안으세요


오늘은 주일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께 예배한다고 해서

주일입니다.

어느 폭풍우와 번개가 치던

주일 오전이었습니다.

저는 아침 일찍 일어나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어

쏟아지는 그 비를 

손으로 느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렇 생각을 했지요.

밖으로 뛰어나가서

그 소용돌이에

내 몸을 맡겨 보는 것은 어떨까?

풍풍우의 힘과 강함을

온 몸으로 느껴보는 겁니다.

그러면서 믿을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전 우주를 초월하는

능력의 하나님을 껴안으세요.




예림의집 칼럼™|예림의집이 드리는 삶의 지혜...


두 부류의 회의론자


두 부류의 회의론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과 '단지 논쟁을 즐기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종종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내 육체의 가시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나를 찌르지 않습니다. 나는 그들도 인생의 여정 가운데서 언젠가는 바른길을 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책잡아 그분께 덫을 놓으려고 주위를 어슬렁거리곤 합니다. 그들은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복음을 막기 위해 논장을 벌입니다. 그들은 논쟁을 하기 위해 우리들의 모임에 참석하는데, 나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권고를 전해주고 싶습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디모데후서 2:23). 정말 무식한 논쟁입니다!

회심한지 얼마 안 된 많은 사람들은 성경 전체를 다 방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실수를 범하곤 합니다. 나도 처음 회심했을 때, 성경에 대해 거의 몰랐으면서도 말씀을 가지고 나를 비판하는 모든 이들로부터 성경을 처음부터 끝가지 다 방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무신론자가 나를 붙잡고는 나의 모든 주장을 한 번에 깔아뭉개며 나를 낙담케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다 극복했습니다. 

사실 지금도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것들을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나는 그것들을 설명할 수가 없어요." "그것들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글세요. 나는 그것을 그저 믿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떻게 믿습니까?"라고 질문 할 때만다 나는 그저 믿는다고 간단하게 답변합니다.

예전에는 어둡과 알 수 없었던 것들이 많았으나 그 이후로 지금까지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해 새로운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나는 성경에서 논쟁이 되는 부분은 지금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습니다. 혹자는 물고기를 먹기 위해 생선의 가시부터 발라내는 일을 시작하지만, 저는 밝은 빛이 들어오지 않는 한 모든 것을 그대로 남겨두는 것입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설명해야 할 의무는 없기 때문입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심녕기 29:29). 그래서 나는 영적인 힘을 주니의 말씀을 늘 먹고 성령님께 이 말씀이 내 안에서 잘 소화될 수 있게 해다라고, 내 삶에 자양분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오늘의 QT|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우정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잠 18:24)."

 

성경은 우정에 대한 많은 실례를 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의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약 2:23). 아론과 홀은 모세 옆에 서서 전쟁에서 승리를 확보하기 위해 그의 손을 떠받쳤습니다(출 17:12). 다윗과 요나단은 잘 알려진 우정의 사례입니다(삼상 18장). 이런 우정들은 우연한 관계보다 낫습니다. 고난과 역경을 당할때, 그들은 서로 도움을 주게 됩니다.

우리가 깊고 상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을 때에는,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간에 우리가 의존하고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게 됩니다. 우리는 친구를 선택하는데 있어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기쁨, 즐거움을 가져옵니다. 친구들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 주고 받는 법, 더욱 친밀하게 관계를 맺는 법을 배우도록 도움을 줍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동기부여를 시키고, 실망시키고, 괴롭히고, 심저어 파멸에 이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환영받고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원합니다. 만약 당신이 필요에 의해 우정을 맺는다면, 그것은 지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 필요가 만족되면 당신은 그 우정에 대해 싫증내거나, 필요가 충족되지 않으면 불만족스러워하게 될 것입니다. 진실하고, 성실하고, 헌신적이고, 충성스러운 우정을 갖도록 신중을 기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인생은 그 노력으로 인해 무한한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빠 아버지, 내가 선택한 친구들이 나의 믿음을 세우는데 도움을 주거나 당신과 나 사이에 장애물이 되도록 합니다. 나로 함께 할 친구를 지혜롭게 선택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주님을 향한 그 사랑으로 우리의 이웃에게 우정을 키울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의 향기|악보를 클릭하면 찬양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찬양 세미나 강의입니다...

CCM 가수들은 가요하려다 안되니까 CCM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대중음악을 하다가 복음성가계로 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요즘에는 대중음악 가수들이 CCM 앨범을 내거나, 또 참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복음성가나 CCM을 하는 이유는 이쪽에서도 돈을 벌어보려는 심산이나, 또는 가요가 안 되니 이거라도 해야겠다는 계산이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다른 길을 걷지 않고 찬양보급과 찬양팀 사역을 하고 있는 저의 눈으로 보기에도 그렇게 보일까요?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앞서도 지적했지만, 결코 CCM 장르는 이익을 볼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그들은 인기와 상관없이 찬송을 부르고 싶어 했지, 대중 음악계처럼 치밀한 상업성과 인기의 이해타산 논리를 따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것을 저는 용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CCM을 하는 사람들의 절대 다수는 교회에서 정상적인 교육을 통해 배출된 사람입니다. 이들은 자기의 달란트와 시간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역에 헌신하고 나선 사람들입니다. 음악이나, 인기나, 금전이 그들의 목적이었다면 CCM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목적과 수단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음악이 목적이 되고 CCM을 수단으로 삼는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나라를 널리 전파하는 것이 목적이 되고, 음악이 수단이 된다면 그것처럼 아름다운 헌신의 귀감이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 CCM 가수 중에는 반대로 음악적 기량을 살려 대중음악계로 진출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CCM에서 인정받았으니 이제는 가요계로 진출해서 인기나 얻어 보자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을 저는 경계합니다.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나가겠다는 원대한 꿈이라고 그들을 믿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