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의집 메일 모음

예림의집 1272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2018. 4. 26. 14:59

예림의집 1272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이야기|하나님과 대화하는 101가지 방법...


하나님과 해돋이를..


아직은 쌀쌀한 바닷가에 앉아서

돋는 해를 보세요.

하나님이 당신 옆에 앉아서

그 순간을 같이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하늘의 변화에 눈을 집중시키고,

아름다은 파편들..

부서진 유리조각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태양 빛과

차가운 포장도로 위를

쓰다듬는 그 온기를 찾아 보세요.

당신이 좋아하는 장소 위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해 보세요.




예림의집 칼럼™|예림의집이 드리는 삶의 지혜...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


나는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연히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자기가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붙잡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기뻐하게 됩니다. 사실 이들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붙잡기를 원할 수도 있지만, 결국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들을 붙잡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위한 말씀이 시편 121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놔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편 121:1-9). 여행자들의 시편이라고도 불리는 이 말씀은 이 세상을 순례하는 우리같은 사람들을 위한 아름다운 말슴으로 잘 기억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에 하셨던 일을 지금도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집트에 있던 요셉을, 바로 왕 앞에 모세를, 그리고 바벨론에서는 다니엘을 지키셨으며, 또한 엘리야를 그 어두운 시절에 아합 왕 앞에 서게하셨습니다. 나는 지금 언급한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인 것에 대해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들을 그토록 훌륭하게 만드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또한 참되고 진실한 믿음은 하나님의 힘에 의존하게 만드는 인간의 연약함에서 비롯됩니다. 힘이 없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면 그는 강해질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너무 많은 힘을 갖고 잇고 우리 자신에 대해 지나친 확신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히브리서 6장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히브리서 6:17-20).


오늘의 QT|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회개와 죄의 고백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상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누가복음 18:13)


많은 사람이 은밀한 죄를 지으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은밀한 죄와 싸우고 있는 사람이 죄를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은밀한 죄를 이기는 하나님의 방법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죄를 다른 사람에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죄가 다시는 은밀한 죄가 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밀한 죄를 이기는 첫 걸음입니다.

자신의 죄를 다른 사람에게 고백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면 되지 꼭 사람 앞에서 죄를 고백해냐 하나?" 부끄럽기도하고 힘들것입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주님 앞에서 죄를 고백했다면 다른 사람 앞에서도 죄를 고백하는 것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정으로 죄를 이기기 원하는 사람만이 자기 죄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남자들의 은밀한 전쟁>이란 책을 쓴 페트릭 민즈 목사는 자신이 싸우고 있는 죄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고백하여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면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문제를 기꺼이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밤새도록 가슴을 치며 울고 금식해도, 아직도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완치가 어려운 병이 많지만 그중 하나가 알코올중독입니다. 일단 알코올에 중독되면 치유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알코올중독에서 빠져나오는 치유의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알코올중동자입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자기의 모습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자기의 상태를 바라보고, 대면하고, 인정하는 것이 치유의 시작입니다. 자신의 상태를 부정하면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치유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캐나다 코스타(KOSTA)에서 지를 이기는 법에 대해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수련회에 참석한 유학생들에게 정말로 죄를 이기기 원한다면 죄를 고백하라고 설교했습니다. 그다음 해에 갔더니 똑같은 강의를 도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케나다 토론토의 어떤 유학생이 간증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학생은 지난해에도 수련회에 참석하여 제가 전한 말씀을 듣고 청년부에 가서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제가 음란 사이트에 빠져 있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랬더니 자기만 그런 것이 아니고 대부분의 사람이 거기에 빠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란 사이트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서로를 위해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부모님이 게시지 않아 청년 혼자 집을 지키고 있을 때였습니다. 청년은 전도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전도사님, 무서워요." "무슨 일이니?" "저... 지금 집에 혼자 있어요. 컴퓨터도 있고... 유혹을 이길 자신이 없어요." 그래서 전도사는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한 다음, 다른 청년들과 함께 그 청년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렇게 청년의 집에 모여 예배드리고 QT를 나누고 청년의 부모님이 오실 때까지 같이 있었다고 합니다.

청년은 그렇게 고백함으로써 음란 사이트의 유혹에서 이길 수 있었다고 간증했습니다. 도무지 이길 수 없었던 음란의 유혹을 고백함으로써 이긴 것입니다. 그날 죄에서 이기고 난 그는 다음에 또 혼자 집에 있게 되었을 때에 굳이 다른 사람들을 오라고 할 필요 없이 혼자서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지켜나가려면 주님은 때때로 우리의 죄를 다른 살마들에게 고백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자기 죄를 토해 내는 것을 통해서 자기의 죄를 보게 됩니다. 자신만 아는 죄를 다른 사람에게 고백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매장당할 각오를 하고 자기의 추하고 부끄러운 죄를 고백합니다. '누가 저런 부끄러운 죄를 고백할 수 있는가?' 그 순간 사람들은 생각하게 됩니다. '아, 주님이시구나! 주님은 알고 계시구나!' 그리고 자기 안에도 그와 같은 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회개의 전이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선교 초창기에 영적 대각성을 경험하게 됩니다. 1903년에 원산에서 시작해서 1907년 평양에서 절정에 이른 부흥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영적 대각성은 1903년 선교사였던 하디 목사의 회개를 시작으로 일어났습니다. 하디 목사는 당시의 다른 선교사들처럼 우리 민족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선교에 임했습니다. 그러다가 사경회를 인도하는 중에 이러한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백을 들은 성도들 역시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됨으로서 영적 부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단순히 남을 미워하거나 질투하거나, 남을 훼방하는 일에 대한 회개 이외에도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친 도적질이나, 살인, 강간과 같은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는 사람들의 수가 무수히 많았습니다. 이런 죄의 고백으로 인하여 일본 경찰은 범인을 잡으려고 교회로 찾아오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을 읽고 초대교회 때는 왜 하나님의 능력이 많이 나타났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사도 야고보는 쵀교회에 하나님의 능력이 떠나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야고보서를 섰습니다. 그가 병이 낫도록 기도하기 전에 먼저 "죄를 서로 고백하라"고 말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이 크게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하나님의 능력이 사라지는 것은 서로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모습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축복이 많이 있지만 그중 하나가 서로의 지를 고백하고 회개할 수 있도록 도울 수있다는 것입니다. 서로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함으로 주님과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를 붙들어 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저희 교회는 매주 목요일 새벽에 '믿음으로 사는 남자들' 모임이 있습니다. 새벽에 모여 한 주간 살면서 깨달은 것들을 나누고 잘못한 것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남자들이 모여 "술을 온전히 끊겠습니다. 직장에서 불의한 방법으로 계약하지 않겠습니다. 술자리를 피하겠습니다. 집에서 화내고 짜증 내지 않갰습니다. 손해 보더라도 거짓말하지 않겠습니다. 작은 법도 꼭 지키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들으며 제 마음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모릅니다.

물론 이 모임을 부담스러워 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회개박에 할 것이 없어서 모임에 나가지 말까 하는 갈등을 겪었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회개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성도들에게 더욱 귀한 시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주일에 한 번이라도 공개적으로 회개할 기회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다른지 모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흘리 목사님도 소그룹 모임에서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회개하게 했습니다. "지난 모임 이후 어떤 죄를 범하셨습니까?", "어떤 유혹을 받았습니까?", "어떻게 그 유혹에서 벗어났습니까?",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은 어떤 생각과 행동이 있었습니가?", "당신에게는 숨기기를 원하는 어떤 비밀도 없습니까?"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질문으로 모일 때마다 회개하게 했습니다.

훼슬리 목사님의 부흥운동이 왜 그렇게 강력했을까요? 바로 이 고백 공동체 때문입니다. 한 주일이 지나면 고백의 시간을 가지니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나고, 또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 공동체 때문에 죄가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운동이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고 결국 감리교회가 탕생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죄를 고백하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자신의 죄를 고백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에도 분별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감동을 주실 때, 그리고 자신에게 영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회개는 고통스러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회개는 우리가 죄와 세상을 이기는 가장 큰 무기입니다. 회개는 계속적으로 주님을 만나게 하고 죄를 이기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을 알면 회개할 수 있고, 죄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당신도 다음 질문에 답을 써 보십시오. 첫째, 지난 모임 이후 어떤 죄를 범하셨습니까? 둘째, 어떤 유혹을 받았습니까? 셋째, 어떻게 그 유혹에서 벗어났습니까? 넷째,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은 어떤 생각과 행동이 있었습니까? 다섯째, 당신에게는 숨기기를 원하는 어떠한 비밀도 없습니까?


"아빠 아버지, 죄를 깨닥게 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공동체에게 죄를 고백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옵소서. 그리하여 다시는 그 죄에 종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죄를 고백함에 있어서 지혜를 주시고, 성령의 감도을 주시옵소서. 회개는 내가 사는 길이오니, 지속적인 회개를 통하여 계속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죄를 이기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의 향기|악보를 클릭하면 찬양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찬양 세미나 강의입니다...

CCM은 찬양을 이용해 돈 벌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이 질문은 오해에서 나온 말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CCM은 장사가 안 되는 업종입니다. 시장 층이 얇은 것도 그렇고, feed back층도 여타 대중문화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열악합니다. 한 CCM 가수가 앨범을 내려면 적어도 기획사나 아티스트 자신 모두 몇 천 만원의 빚을 지게 되는 것은 보편적인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장사가 안 되는 CCM계에서 계속 이 일을 하려고 할까요? 제가 경험하고 만나본 바, 이들 CCM 가수들은 이러한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전하는 것입니다. 마치 촛불이 자신을 태워 어둠을 밝히듯,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모여서 노래하고 힘들여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간혹 돈과 명예를 바라보고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은 반드시 하나님이 만지시어 바른 사역자가 되고 맙니다. 이것이 CCM은 하나님이 하시는 사역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경제가 1997년 IMF체제로 들어서면서부터 지금껏 이들 CCM 사역자들의 사역 환경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사역을 관두거나 다른 일로 전향한 가수는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어차피 이 일을 돈 바라보며 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상업성에 대한 우려의 잣대를 가난하고 배고픈 CCM 사역자들에게 들이댈 것이 아니라 문화적 마녀사냥에 힘쓰는 일부 세력들을 향해 던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90년대 초반부터 기독교계에 몰아닥친 대중문화를 향한 맹목적인 혐오감과 반감을 주입시키며 이익을 챙긴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대중문화에서 소재가 바닥나자 ‘복음성가 계에도 New Age가 있더라.’라는 식으로 문화 혐오주의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강연이나 책들을 펴내서 엄청난 수익을 얻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저도 이러한 몇몇 분들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CCM과 상업성은 현재로서는 연관 짓기 힘듭니다. 찬양사역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 말고는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