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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림의집 1271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2018. 4. 25. 10:20

예림의집 1271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이야기|하나님과 대화하는 101가지 방법...


기적의 나무


자주 가는 산책로 입구나

뜰이나 정원에 흙을 파고

튤립이나 나무를

한 그루 심어 보세요.

그 구근이나 모묙이

일 년 뒤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 보세요!

만물을 키우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곰곰히 생각해 보세요.

당신을 성장시키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세요.




예림의집 칼럼™|예림의집이 드리는 삶의 지혜...


즉각적인 회심


어떤 사람들은 급작스런 회심에 대해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신약성경에서 순간적으로 일어나지 않은 회심이 있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자나시다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마 9:9).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 어느 것도 이보다 급작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또한 세리장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곳에 이르셔서 올려다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눅 19:5). 그의 회심은 틀림없이 나뭇가지와 지면사이의 어디에선가 일어났스니다. 우리는 삭개오가 그 순간 예수님을 기꺼이 영접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고넬료의 가족도 급작스럽게 회심했습니다. 베드로가 그의 일행에게 예수님을 전했을 때 성령이 오셨고, 그들은 세례를 받았습니다(행 10장). 오순절 당시에는 3철명의 사람들이 기쁘게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회심했을 뿐만 아니라, 같은 날 세례도 받았습니다(행 2장).

그리고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가 길을 가며 빌립이 내시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내시는 빌립에게 말했습니다.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행 8:36). 방해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빌립이 말했습니다. "만일 그대가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받을 수 있다"(행 8:37). 그리고 두 사람은 물로 내려갔고,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 밑에서 큰 권세를 쥐고 있던 내시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길을 기뻐하며 갔습니다(행 8:26-38). 여기서도 당신은 회심이란 급작스럽고도 순간적인 것임을 성경의 기록을 통해 받ㄹ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QT|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상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 같이 하라"(에베소서 4:32).


많은 그리스도인이 회개 없이 살고 있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회개를 해도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없다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 반복하여 회개하는 것 때문에 더 이상 회개할 수 없었노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는 말처럼 이제는 회개하기도 부끄럽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는 우리가 회개할 때마다 몇 번이고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지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사죄의 은총을 구하라는 것인데,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겠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무엇인가 잘못했을 때 부모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이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아이들 입에서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녀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면 모든 책망과 징계를 거두고 용서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바로 회개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태복음 18:22). 어느 날 베드로가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일곱 번이면 많이 용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형제가 회개하기만 한다면 490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그토록 계속적으로 용서할 것을 요구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그렇게 용서해 주시겠다는 약속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회개는 완전한 용서에 기초를 둡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완전한 용서가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다가 혹시 실수하고 넘어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용서해 주십니다. "그렇다년 지 짓고 회개만 하면 되겠네?"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은혜는 언제나 악용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면 모든 죄를 사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이 우리에게는 죄를 이길 힘이 됩니다.

누구나 반복적으로 넘어지는 죄가 있습니다. 이상하게 사람마다 극복하기 어려운 죄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를 정(正)'자를 그어 가며 회개해 보세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믿고 자신이 지은 죄를 고백하면 다 용서받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그래 용서한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그래 용서한다." "하나님, 또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그래 또 용서한다." ...

이렇게 하다 보면 아마 100번도 가지 않아서 이런 고백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 더 이상 죄를 짓고 싶지 않습니다. 더 이상 죄 짓고 용서해 달라는 말하기 싫습니다." 죄 짓는 것이 고통스러워지고 죄가 싫어지면 죄를 이길 수 있게 됩니다. 회개가 죄를 이기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죄를 바라보며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끊임없이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회개할 때, 그것이 죄를 이기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저 자신이 있게 된 것이 하나님의 용서하심 때문임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내기 너를 용서한다.", "용서한다.", "용서한다.", '용서한다." 하시는 말슴을 수 없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자동적으로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음란, 욕심, 교만, 자랑, 혈기 다 똑같았습니다. 만약 한 번이라도 하나님께서 "이제 더는 용서할 수 없다!" 하셨다면 저는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런 것들로 가슴을 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용서한다." 하셨고, 결국 그 은헤로 죄를 이겼습니다.

육신적으로는 달라진 것이 없지만,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믿음 하나는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달라지니까 육신의 정욕대로 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한일서 5:18).

하나님의 사람은 정말 죄를 짓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가 죄를 안 짓게 되는 것은 아무런 유혹도 받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악한 자는 여전히 우리의 육신을 통하여 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게시다는 것을 분명히 알지 못하면 이 유혹을 이길 장사가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경건하게 살 수 없습니다. "죄를 안 지어야 할텐데...", "경건하게 살아야 할 텐데..."라고 생각하고 결단도 하지만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율법적인 의무감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경건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 때 죄의 유혹을 이기고 경건하게 살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수도사였습니다. 수도사는 죄를 지으려고 해도 지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여자가 없으니 간음죄를 지을 수 없고, 사유재산이 없으니 도적질 할 것도 없고, 명예나 권세를 위해 출세해야 할 필요도 없으니 인간적 욕망의 노예가 될 리도 없스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틴 루터는 수도원에서 죄로 고민했스니다. 그는 '내 죄, 내죄, 내 죄입니다."하며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괴로워했습니다. 아무리 회개하고 고행을 해도 죄 문제가 해결되지가 않았습니다.

당시 로마에는 <스칼라 산타>라는 성당이 있었습니다. 이 성당에는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서 재판받으실 때 올라가셨다는 계단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내리면 죄 사함 받고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루터도 무릎으로 기어오르면서 한 계단 오를 때마다 입을 마추고, 주기도문을 외웠습니다.

그러나 다 올라갔는데도 해결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때 마치 큰 불빛을 보는 것처럼 말씀이 귀에 들려 왔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지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른다고 죄 사함을 받는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 루터는 하늘 문이 열리는 경험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받고, 믿음으로 용서하시는 은혜를 누립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이 어떻게 생길가요?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림을 바라봅니다"(히브리서 12:2, 새번역).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의 믿음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계속해서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의 믿음은 더 온전해 집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믿으밍 점점 더 실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진리가 진짜 믿어지면 매일 회개의 삶을 살게 됩니다. 나의 말, 생각, 행동, 모든 것이 회개거리가 되기 시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나에게 더욱 실제가 되시고, 결국 예수님은 나를 더 이상 죄에 무너지지 못하도록 지켜 주십니다. 악한 자가 나를 만지지도 못합니다. 이것이 회개의 놀라운 능력입니다.

많은 사람이 은밀한 죄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자기 혼자만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죄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고, 그 죄에서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면 은밀한 죄란 존재하지 않스니다. 예수님께서 함게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면 혼자 있는 시간은 은밀한 죄를 짓는 시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서 죄 지을 사람이 누가 있나요? 예수님 앞에서 교만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 앞에서 혈기 부릴 사람이 누가 있나요? 예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것이 분명해지면 혼자 있는 시간은 예수님과 은밀한 교제의 시간, 거룩한 시간으로 변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저는 처음에은 회개를 고통스러운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기쁨이었습니다. 회개할 때만다 예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저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안아 주시며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가 진정 회개할 때, 예수님의 구원 손길을 느끼며 용서받은 감격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 회개는 죄를 이기는 능력입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빠 아버지, 나에게 회개할 요기를 주시고, 회개할 때에 완전히 용서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나의 마음에 성령으로 임하신 예수님을 날마다 기억하며, 동행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주님이 항상 함께하심을 깨달았습니다. 더 이상 죄에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 주십시오. 은밀한 죄에 빠지지 않게 하시옵고 예수님과의 은밀한 교제의 시간, 거룩한 시간으로 가득 채우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의 향기|악보를 클릭하면 찬양을 들을 수 있습니다...




밴드로의 초대


그리스도인의 영성훈련을 위해 밴드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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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찬양 세미나 강의입니다...

Appetizer: CCM에 대한 편견


CCM에 대한 편견은 아직도 한국교회 중년 성도들의 정서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편견을 깨는 것이 보다 넓고, 깊은 찬양을 원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입니다. 저는 몇 가지 편견과 그에 대한 저의 견해를 통해 여러분에게 CCM에 대한 새로운 성찰의 기회를 드리고자 합니다.

CCM은 다양성의 세대를 사는 이들에게 진리인 복음을 뿌리 내리는 아주 정교한 사역입니다. 이는 교회의 적극적인 후원과 협력, 기도가 필요합니다. 물론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역이기 때문에 허점도 보이고, 또 허물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장 근본적인 심중에 자리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 열정은 세대와 감각, 그리고 신앙배경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 모든 거리를 뛰어넘는 이해의 고리가 되리라 믿습니다. 그동안 찬양사역을 하면서 제일 많이 들었던 편견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고 그 답을 나름대로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게 무슨 찬양입니까? CCM은 가요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가요는 다 나쁜 것일까요? 우선 이것부터 짚어봅시다. 가요 중에도 좋은 것이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름답게 하고, 또 이 사회에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주는 그런 노래들도 많습니다. 이 가운데에는 그리스도인이 쓴 노래들도 상당합니다. 그것이 결국 나중에 CCM으로 분류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결국 문제는 말초적이고, 상업적인 그런 노래들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부정하는 그런 노래들도 있습니다. 그런 노래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야지 무턱대고 모든 가요는 다 나쁘다는 식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모든 노래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음악의 뿌리도 그랬고요. 사실 이러한 편견의 이면에는 세상을 선과 악으로 단편적으로 이해하는 ‘이원론’이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이원론’은 아시는 분이 많겠지만, 이미 기독교 교리가 생기던 때에 ‘영지주의 사상’으로 이단으로 정죄 받은 것입니다. 복잡한 이야기는 각설하고, 가요에 대해 필요이상의 거부감을 느끼거나, 또는 들었다고, 불렀다고, 죄책감이 들 필요가 없습니다. 

좋은 가요, 좋은 대중음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요? 그런 이유로 CCM은 가요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가요 같은 CCM때문에 예수를 모르던 사람이 주님을 만나고, 예수를 믿는 사례를 여러 번 보았습니다. 또한 잘못된 대중문화에 빠져있던 친구들이 다시 교회 공동체 안으로 회복하게 되는 역사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멀어진 하나님과 인간과의 벽, 즉 율법과 범죄 함을 허무셨습니다. 결국 CCM의 역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처럼, 가로막힌 교회와 세상의 벽을 허무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