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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림의집 1270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2018. 4. 24. 13:51

예림의집 1270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이야기|하나님과 대화하는 101가지 방법...


어둠 속에 빛을...


중요한 결정을 내려햐 할 때는

완전한 어둠 속에 

혼자 있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아보세요.

당신의 선택에 대해

하나님게 아뢰고

그분이 응답에

조용히 귀를 열어 보세요.

어둠 속에 빛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세요.




예림의집 칼럼™|예림의집이 드리는 삶의 지혜...


변명들...


"나는 아무런 힘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로마서 5장 말슴을 의지하도록 권하십시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로마서 5:6). 우리를 구원할 힘이 우리에게는 전혀 없다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한 명확한 이유가 됩니다. 그분은 연약한 자에게 힘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마우것도 볼 수 없어요."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세상의 빛이라."(요한복음 8: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빛을 비추기 위해 오셨을 뿐 아니라, "눈 먼 자들의 눈을 밝히기 위해"(이사야 42:7)서 오셨습니다.

또한 "나는 사람이 갑자기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 같은 생각을 가진 한 사람이 어느 날 밤에 상담실을 찾아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로마서 6장을 읽어보라고 권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로마서 6:23). 선물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는 선물을 받는 순간 그것은 당신의 것이 됩니다. 영생의 선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선물을 받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받는 순간 내 것이 디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아침의 빛처럼 언제 날이 샜는지 분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서히 회심하기도 합니다. 이와 반대로 번득이는 유성같이 진리가 임해서 회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는 요즘 <회심과 구원>이라는 제목으로 그을 쓰고 있습니다. 그 글이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아이는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는 동안 언제 거듭났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의외로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변화가 일어났던 시점, 즉 그가 하늘에 속한 성품에 참여하게 된 순간은 분명히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의 나와 지금의 나,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 어제이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해 보십시오!



오늘의 QT|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회개의 기쁨-②죄를 이기는 능력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린도전서 15:57)


많은 성도가 죄에 눌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일예배 때 대표 기도하는 사람들이 매주 비슷한 기도를 드리는 것을 봅니다. "지난 주간도 죄 중에 살다 왔습니다. 연약하고 죄 많은 모습 드대로 나왔습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평생 이런 기도만 하다가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이 정상적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난미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해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을가요? 바로 회개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9).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히ㅗ개하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죄를 이기는 방법입니다. 노력해서는 죄를 이길 수 없지만 회개를 통해서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회개를 통하여 죄를 이기고 은혜가 충만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은혜와 감격을 잃어버립니다. 왜 그들에게 십자가의 감격이 없을가요? 많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홰개의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가 죄를 그냥 지나치고 넘겨 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를 마무리 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다 씩고 잠자리에 듭니다. 

그런데 말과 행동을 잘못하고, 마음으로 잘못한 죄대 대해서는 회개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니 기도는 해야 하는데 기도도 안 되고, 신간이 갈수록 무감각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도 마음이 편안하고, 죄를 짓고도 아무렇지 않게 예배를 드립니다.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주님과의 사이를 죄가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 암으로 돌아가신 한 장로님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솔직히 경건한 신앙이리라기보다 교회 정치에 열심이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그의 자녀들은 참으로 신실하고 그중 한 명이 목사 사모였습니다. 평소 아버지를 잘 모시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웠던 딸은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병실에서 아버지를 간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예배 시간에 아버지가 회개해야 한다는 하나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버지에게 가서 회개하도록 하라니, 딸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곤란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너무나 분명한 마음을 주셨기에 그녀는 아무도 없이 단둘이 있는 시간에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슴드렸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회개하기를 원하세요."

그 말을 들은 장로님은 얼마나 노발대발 역정을 내시는지 당장 그 자라에서 쫒겨났다고 합니다. 평생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다고 생각하는 자신에게 회개하라는 딸의 말이 못시 언짢았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녀들은 "아버지를 이대로 하나님 앞에 가게 할 수는 없다."라며 눈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사흘쯤 지났을 때 그 장로가 자녀들을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자녀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그는 자신이 무릎을 꿇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했습니다. 온 몸에 암이 퍼져 통증으로 다리를 만지지도 못하게 하시던 분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 제가 이렇게 잘못을 회개합니다 ..."라며 통곡하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부인과 자녀들에게도 "이것은 내가 잘못했다."라고 하며 일일이 용서를 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누었다가 또 회개할 일이 생각나면 침상에서 일어나 다시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그렇게 내리 몇 날을 회개하시다가 어느 저녁 아무 고통도 없이 평안히 소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기다리시던 회개를 다 쏟으시고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입고 하나님께 가신 것입니다.


회개는 죄를 이기는 능력이고 흔혜와 축복을 회복하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왜 회개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안에 회개에 대한 좌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목사가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잘못하는 것을 보고 "너 회개해야 한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그러더랍니다. "회개하면 뭐해? 또 지을 텐데 ..." 그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한타깝지만 이것이 우리의 경험입니다. 많은 사람 죄를 짓고 회개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죄를 짓고 또 회개를 합니다. 그렇게 죄 짓는 것과 회개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회개해도 소용없구나!'라는 좌절감을 느끼게 되고, 회개 없는 삶에 빠지게 됩니다 

회개가 죄를 이기는 능력이 되지 못하는 것은 에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없이 그냥 회개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회개하는 것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사람이 회개하는 것은 다릅니다. 성겨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은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될 때 비로소 생명이 부어집니다.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때 비로소 회개에 생명이 부어지고, 죄를 이기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걸가요? 왜 회개하면서 또 죄를 짓는 것일가요?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없이 죄만 바라보고 히개하기 때문입니다. 죄만 바라보고 회개하니까 마음이 무거워지고 회개의 자절을 겪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와 함께 있을 때, 그에게 잘못한 것이 있다면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용서를 구해야 할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다 주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짓는 모든 죄는 다 주님께 지은 죄입니다. 배우자에게, 부모에게, 자녀에게, 교인들에게, 직장 동료에게, 혼자 은밀히 지은 부끄러운 일, 모두 다 예수님께 지은 죄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지를 짓는 순간 잘못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회개 없이 산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회개할 대상이 분명하지 않으니 죄를 짓고도 그냥 넘너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예수님과이 관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무엇을 회개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다 회개할 거리입니다. 예수님을 의식하지 않고 말하고 행동했던 모든 것, 예수님께 묻고 사으이하고 결정하지 않은 모든 거싱 회개할 거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분명히 아는 사람은 계속해서 회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의식하니까 작은 죄라도 회개하게 되고, 그 회개를 통해서 더욱 예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회개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죄를 이기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더 분명한 실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죄보다 무서운 것은 회개하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귀가 결정적인 순간을 노리고 있습니다. 지금 얼마나 많은 성도와 목회자, 교회가 이 함정에 빠져 무너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1999년 5월. 미국의 모 신문에 13년간 하버드대학 신학대 학장을 지낸 로널드 티먼 교수가 파면되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이유인즉, 대한의 컴퓨터 기사가 학장 관사에 있던 티먼 교수의 컴퓨터에 수백 장의 음란 사진이 저장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발견한 기사는 즉시 총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고 이 신학대 학장은 파면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신학대학 교수라는 사람이 포르노광일 수 있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목사도 똑같이 죄의 유혹을 받습니다. 신학대학 교수라고 해서 목사라고 해서 육신의 정욕, 물질의 탐심, 명예욕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죄의 유혹을 받는 것은 똑같습니다. 티먼 교수의 문제는 그가 죄의 유혹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고 살았다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고 넘어갔던 일은 없었습니까? 만약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닏까?


"아빠 아버지, 우리를 사랑으로 징게하실 뿐만 아니라, 죄를 이길 능력을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것은 회개하는 능력입니다 주님 우리가 예수님과의 친말한 관계 속에서 내 안에 있는 죄를 바라보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옵소서. 죄를 남겨둠으로 그 죄가 나를 좀먹게 하지 마시고, 회개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도말할 수 있도록 강력하게 역사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심을 순간 순간 인식하게 하시고, 죄로부터 나를 보호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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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찬양 세미나 강의입니다...

찬송은 무엇인가요?


이 질문은 꼭 필요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제 글을 읽으면서 이 질문이 떠올랐다면, 할렐루야!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여시는 순간입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십시오! 이 순간 여러분과 제가 이렇게 만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찬송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오늘날 이 “찬송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은 많은 성도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듯 보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반 이상이 찬송이고, 우리는 늘 창송을 부른다 하면서도 정작 찬송이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은 없는 듯합니다. 찬송을 부르면서도 찬송이 무엇인지, 왜 찬송을 하는 것인지, 어떤 것이 찬송인지 모른다면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시간, 찬송이, 찬양이 무엇인지 바로 알게 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제가 찬양 보급 사역을 처음으로 시작할 당시만 해도, 지방 교회에서는 찬송은 오직 창송가책에 있는 것만 허용되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에서 시끄럽게 한다고, 딴따라라고, 박수친다고 쫓겨난 적도 많았습니다. 그 당시 서울, 부산 등 대도시에서는 한창 새로운 찬양문화가 ‘예수전도단, 두란노경배와찬양’을 중심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지역 교회와의 격차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습니다. 제가 제일 먼저 한 작업은 찬송에 대한 바른 의미를 정립을 하여, 그것을 교회에, 특히 젊은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 첫 번째 단계가 바로 “찬송이란 무엇인가?”입니다. 

저는 다음 장에서 찬송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기에 앞서 요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온 CCM에 대해서 이야기 할 것입니다. “CCM에 대한 편견”이라는 주제로 이야기하다 보면, 과연 CCM이 무엇인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적당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고, 나아가서 찬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약간의 해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식사 때 입맛을 돋우는 에피타이저와 같은 역할이라고 할까요? 만약 여러분이 CCM에 대한 편견이 없다면, 이 주제는 넘어가셔도 됩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CCM이 무엇인지 알아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