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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림의집 1262번재 이야기

예림의집 2018. 4. 16. 10:56

예림의집 1262번재 이야기


예림의집 이야기|하나님과 대화하는 101가지 방법...


하나님의 편지


하나님이 당신에게 편지로

어떤 말을 하실지

상상해 보세요.

그리고 당신이 하나님이 되어

그 편지를 써 보는 겁니다.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인정하고 있는지를

써 보는 거에요.

지시하고 명령해 보세요.

당신의 삶에서

바뀌어야 하는 것들을

지적해 보세요.

당신의 어떤 면이

사랑스러운지 적어 보세요.

웃음소리? 

유머감각?

당신의 관심?

하나님이 당신에게 질문하게 하세요.

다 썼으면 받는 사람 자리에

당신 이름르 스고

"사랑하는 하나님"이라고

서명을 해보세요.

그 다음 날

하나님의 편지에

답장을 해보세요.




예림의집 칼럼™|예림의집이 드리는 삶의 지혜...


믿음으로 얻게 되는 생명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생명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생명을 되찾았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아담이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는 불신의 돌을 헛디뎌 비틀대다가 넘어져 버렸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일으켜 세워지고 똑바로 서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믿을 수 없다고 말할 때, 그들에게 성경의 말씀을 보여주고, 그들로 하여금 이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하게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제가지 단 한 번이라도 그분의 약속을 어기신 적이 있습니까?"

사탄과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단 한 가지 약속만이라도 어기시게 하려고 노력해 왔지만 모두 실패하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대한 믿음을 확실히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다음의 사실을 고민해보도록 권유하고 싶습니다. '나는 오늘 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더 잘 믿을 수 있을까?'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 17:9).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우리는 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더 잘 믿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생명의 길을 알기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개인의 구세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든 교리와 신조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아들에게로  지금 바로 나아가십시오!(저는 교리와 신조를 부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동안 매마른 교리로 연명해 왔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종류의 음식으로는 믿음이 자랄 수가 없습니다. 나의 영적 배고픔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채 그 길을 가게 됩니다. 교리로 연명한다는 것은 마른 옥수수 껍질로 살아가려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빵을 먹지 않는 영혼은 결국 깡마른 채로 남게 됩니다.

이떤 사람은 이렇게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이 뜨거워질 수 있을까요?" 대답은 '믿음의 의해서'라는 것입니다. 믿기 전에는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힘을 얻을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미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이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영생이 없느니라"(요일 5:9-12).


오늘의 QT|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한복음 15:4).


그리스오인이란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예수님은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오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이라고 불리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복음 중의 복음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다음 질문을 읽고 답을 써보세요. 첫째, 여러분은 "예수님은 제 안에 계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잠시 묵상하고 답을 써보세요. 혹시 예수님께서 당신 안에 계시자 않다고 생각되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셋째, 반대로 만약 에수님이 당신 안에 계시다면 그렇게 믿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이 제 안에 계십니다."라고 고백하셨다면 바로 고백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증거는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이 자신 안에 느껴지는 놀라운 평안과 사랑, 은혜를 그 증거로 말합니다. 그것도 그 증거의 일부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리 충만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항상 그런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낙심과 슬픔에 빠져 있을 때 예수님은 우리를 떠나 버리신 것일까요?

많은 그리스도인이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겨도 "주님, 왜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십니까?"라고 탄식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알고 있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나와 함께 계시는 에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제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목사이셨습니다. 저는 태어나자마자 집안 어른들에 의하여 하나님께 목사로 바쳐졌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자랐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 고등부 담당 전도사가 고린도후서 13장 5절 말씀을 본문으로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예수님께서 계신다.'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저는 그 말씀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제 안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 안에 계시다면 제가 모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배 후 설교자와 상담을 했습니다.

"정말 제 안에도 예수님께서 계십니까?" 그의 대답은 정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저는 갈등을 느꼈습니다. 제 안에는 예수님이 안 계신 것 같은데 솔직하게 말했다가는 목사 아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말로 들을 것 같아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 그렇군요!"라고 말하며 믿는 척하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그 당시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그 예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아는 척, 믿는 척할 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교제하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2004년 북경 코스타(KOSTA)에서 어느 목사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성도들이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만나면 어떻게 인사할 것 같습니까? 대부분 이렇게 인사할 것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라구요." 그말을 듣고 모두 웃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심각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예배 때마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인격적인 교제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처음 만나면 어떻게 인사를 하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믿습니다. 이 말씀을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성경도 알고 천국도 믿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감동이 없습니다. 성질 하나를 바꾸지 못합니다. 불평, 원망, 두려움, 염려 하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면 삶은 결코 변회되지 않습니다.

제가 교인들에게 가장 많이 속는 것 중의 하나가 부부 싸움입니다. 부부 싸움을 하고도 제 앞에서는 전혀 싸우지 않는 척하는 것입니다. 목사 앞에서 부부 싸움하는 것은 창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십니다."라고 고백하면서도 그렇게 부부 싸움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앞에서는 창피하지 않다는 말입니까? 이것이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많은 사람이 혼자 있을 때 음란물 같은 은밀한 죄의 유혹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유혹에 넘어집니다. 음란물의 유혹이 강해서 그런 걸까요? 아닙니다. 옆에 사람만 있어도 음란물을 버젖이 들여다보고 있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아마 음란물을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을 진짜로 믿지 않으니 그것이 유혹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교역자 수련회를 갔을 때 일입니다. 저녁 기도회때 부목사 한 명이 베드로전서 1장 15, 16절 말슴을 읽고 우리가 거룩하기를 위하여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닌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저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무엇이 거룩한 것입니가?" 그때 주님께서 제 마음에 주신 말씀이 잇었습니다. "혼자 있을 때 주를 바라보는 것이다." 거룩함에 대한 너무나 정확한 정의였습니다. 

얼마 후 교회 비전을 위해 기도할 때도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배당도 신축해야 하고, 교회 성장을 위해 구체적인 성장 목표를 제시해야 하는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주여, 우리 교회는 몇 명의 성도를 목표로 삼아야 할까요?" 그때 주님께서 주신 말씀도 같았습니다. "나는 네가 혼자 있을 때 나를 바라보는 목사가 되기를 원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사람들의 눈만 피하면 아무도 보지 않는 줄 압니다. 그래서 보는 사람만 없으면 별의별 말과 행동을 다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언제나 함께 계십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영화에 구약성경에 나오는 요셉이 얼마나 잘 생겼는가를 이렇게 그렸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어느 날 친구 부인들을 초청하여 식사하고는 과일을 깎게 했습니다. 그때 요셉을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요셉이 방에 들어오자, 부인들이 요셉을 처다보다가 그만 과일 깎던 손을 베이고 말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보디발의 아내가 "그러니 요셉을 날마다 보는 내가 어떻게 견딜 수 있겠어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내가 어찌하여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고 말하며 뿌리쳤습니다. 요셉은 그 대가로 감옥에 가야했습니다. 그가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던 것은 그 유혹이 약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요셉은 혈기왕성한 젊은이였고 보디발으 아내의 유혹은 강력했습니다. 요셉이 유혹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한 실제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지만으로 죄를 이기고 거룩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거룩하게 살 수 있느냐 없느냐는 우리의 의지나, 유혹의 강약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인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 있습니다. 항상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을 아는 사람이 거룩하게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살고 있습니까?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제가 너무 무딘 감각으로 예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나와 늘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식하며 살게 하소서. 주님이 저를 사랑하시고, 제가 주님을 사랑하기에 정직하며, 거룩하며, 성실하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이 함께 하시니 너무나도 기쁘고 행복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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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찬양 세미나 강의입니다...

찬송은 복음의 나팔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에서 찬송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찬송의 수평적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찬송하는 목적은 오직 한 가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 어떤 사람은 찬송의 수평적 의미를 살펴보자는 말에 찬송을 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찬송하는 이유와 목적은 오로지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되 그 과정에서 발생 되는 몇 가지 현상들을 살펴보자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