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의집 1259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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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림의집 이야기하나님과 대화하는 101가지 방법...
잠들기 전에
침대로 올라가서
이불을 뒤집어쓸 때
당신의 마지막 의식적인 사고를
하나님께 드려 보세요.
불을 끄고
그날 있은 일 중 한가지를
하나님께 감사드려 보세요.
배개에 올가미를 씌워서
내일 당신이
만나게 될 한 가지 상황을
밧줄로 묶어
하나님께로 가지고 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굿-나잇 인사를 잊지 마세요.
예림의집 칼럼™예림의집이 드리는 삶의 지혜...
죄인인 인간
그렇다면 누가 죄를 지었습니까? 다음 22, 23절을 읽어봅시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2, 23). 인류의 일부분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사람의 죄를 드러내 주는 또 다른 말씀은 요한일서 1장의 말슴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
예전에 4만녕의 주민이 살고 있는 한 작은 도시에서 집회를 열었을 때의 일입니다. 한 부인이 우리에게 오더니 남편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부인은 그날 오후집회에 남편을 데리고 왔는데, 나는 그동안 여러 곳을 다니면서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을 수없이 만나봤지만 그 사람처럼 자기 의로 똘똘 뭉친 사람은 처음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인의 믿음을 보니 참 기쁩니다. 하지만 우리도 그에게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부인의 남편은 내가 보아온 사람들 중에서 가장 자기 의에 강하게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그러자 부인은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제 남편이 변화되지 않은 채 이번 집회가 끝나버리면 저의 가슴을 찢어질듯 아플 거에요."라고 말하고는 내가 지쳐버릴 정도로 쉬지 않고 남편을 데리고 왔습니다.
오늘의 QT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축복의 확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장 8절).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자신의 삶 가운데 벌어지는 일을 보고 그때그때 판단합니다. 일이 잘되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나 보다." 하고, 환경이 어려워지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이런 사람은 아직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환경을 통해 그때그때 확인해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확증된 진리입니다.
로마서 8장 35-39절에 보면 초대 교회 성도들이 엄청난 고난에 직면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박해를 받고, 굶주리고, 헐벗고, 죽음의 위협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도살 당할 양 같은 불안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환경만 바라본다면 하나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모든 일이 현실이었지만 그들은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사랑의 실제이신 예수님을 늘 바라보고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가장 강력한 표현입니다. 그 놀라운 사랑이 모든 것을 바꾸고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든지, 어떤 죄를 지었든지, 현재 어떤 문제가 있든지 그 사랑으로 인하여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1-24에 나오는 어버지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우리는 이 이야기를 흔히 '탕자 이야기'라고 부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유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죄였습니다. 지금이야 그럴 수도 있겠다고 하지만 당시 유대인들의 시각으로 보면 그것은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유산을 나누어 주기는커녕 내쫓을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요구대로 순순히 유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유산을 나누어 주지 않을 경우 아들을 영원히 잃어버릴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흔히 말하는 탕자 이야기는 방탕한 둘째 아들에게 초점을 맞춘 제목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이야기의 초점을 아버지에게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방탕한 우리를 징계하지 않으시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아버지의 모습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깨달을 때 진정으로 히개할 수 있습니다. 매 맞는 것이 두려워서 하는 회개는 온전한 회개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사랑 앞에서 자기 죄를 깨닫고 돌아오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완전한 거지, 완전한 실패자의 모습으로 돌아올 때 그를 달려가서 끌어안았습니다. 돼지 오물로 엉망인 그대로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 순간 탕자의 죄와 고통의 짐은 벗겨졌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진정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시작됩니다. 십나가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나면 불평했던 것, 원망했던 것, 낙심했던 것, 열심 없이 신앙생활 했던 것, 헌신하지 못했던 것이 죄였슴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회개할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방탕한 아들을 둔 목사가 있었습니다. 아들 때문에 목회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미국에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하루는 그 아들이 술에 취해 밤늦게 집에 들어와 침대에 쓰러져 자는데, 뜨거운 것이 손등과 팔뚝에 뚝뚝 떨어졌습니다. 술 취한 상태에서 눈을 떠 보니 어던 시커먼 그림자가 자기 옆에 서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보니 아버지가 옆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이제는 이 아들이 돌아오게 해 주옵소서. 제 생명을 거두어서라도 제 아들은 구하여 주옵소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 기도를 들으면서 아들도 울었습니다. '잘못은 내가 했는데, 왜 아버지가 죽으려고 하시는가?' 그날 그 아들은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섰습니다. 후에 시카고 대학을 졸업하고 게렛 신학교를 마치고 목사가 되어 자기와 같은 처지의 한인 2세들을 위하여 사역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능력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에게는 회개와 함께 축복의 확신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살면서도 열등감, 좌절감, 낙심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죄 용서와 구원의 맏음은 있는데 축복의 믿음은 가지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축복의 믿음을 가질 때부터 그 믿음은 능력이고 기적이 됩니다. 두려운 것도 염려도 사라집니다. 이 믿음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옵니다. 어느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생전에 뵙지는 못했지만 저의 장인은 종교교회 담임목사이셨습니다. 장인 어른은 40대의 젊은 나이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모님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장례를 치르고 난 뒤 홀로 집으로 돌아왔고, 그제야 '아 정말 정말 혼자구나!'하는 슬픔과 외로움이 밀려왔다고 합니다. 맡딸인 집사람이 두세 달 후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는 고3이었고 막내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라고 하니 그 막막한 심정이야 오죽했겠습니까? 사남매를 고스란히 남겨 둔 채 남편은 세상을 떠났고, 사택도 곧 비워 줘야 하니 집도 없고, 마땅히 먹고 살 방법도 없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앞으로 어덯게 해야 할지 모르는 두려움과 염려가 걷잡을 수 없이 몰려왔을 때, 하필 교회 재정을 담당하는 장로님이 찾아와서 "사례비와 퇴직금, 장례 때 들어온 조의금을 모두 담았습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마지막 생활비입니다."라고 하며 봉투 하나 놓고 가시더랍니다. 그 밤에 장모님은 펑펑 울며 밤을 지새우셨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요? 우리 어디 가서 살아요?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공부시키고 어떻게 먹고 삽니까?" 그렇게 울며 밤새 기도하는데 동이 틀 무렵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남편을 불러 가실 때에는 다 뜻이 있을 텐데 하나님께서 나와 아이들을 능히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실 텐데, 내가 왜 이렇게 쓸데없이 걱정만 하고 있나?" 이런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자 슬픔과 두려움의 기도가 감사의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다 책임져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먹을 것도 공부시킬 것도 다 마련해 주실 테니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저는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다가 어느덧 새벽기도회 시간이 되었습니다. 새벽기도회에 가려고 일어나 방 안에 불을 켜 보니 방바닥에 봉투 하나가 보였습니다. 바로 어제 저녁 장로님이 두고 가신 봉투였습니다. 그때 장모님은 하나님께서 다 책임져 주실 것을 믿고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에 봉투를 열어 보지 않고 그대로 감사헌금을 바쳤다고 합니다.
저는 장모님께 이 이야기를 듣고 '믿음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기적이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믿음이 어디서 온 것일까요? 바로 십자가에서 온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을 진실로 믿는 사람이 어려움과 역경을 만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찾아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하심을 흔들림 없이 믿게 하는 능력, 이거싱 바로 십자가에서 나온 놀라운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열등감, 좌절감, 낙심에 빠지는 것은 여건과 형편이 힘들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진정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나는 가장 큰 복을 받았다. 환경에 상관없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이 점이 분명한 사람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이요. 십자가의 능력을 아는 사람입니다.
어떤 전도사가 도자기를 만드는 성도의 집에 심방을 갔다가 두 개의 꽃병을 보고 감탄하여 "이것은 얼마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성도는 "저 두개으 꽃병은 파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성도는 이유를 말해 주었습니다.
"저는 몇 년 전만 해도 술주정뱅이에다 노름꾼이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친구의 권유로 교회 집회에 참석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쓰레기 더미에서 흙무더기를 발견하였습니다. 누군가가 쓸 데가 없어서 버린 것이지요. 저는 그걸 가져와 반죽하고 모형을 만들어 구웠습니다. 저 꽃병은 그날 만든 것들입니다.
그날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가지고 똑같은 일을 하실 수 있을거야!' 그때부터 저는 저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내맡기고 하나님께서 저를 새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동안 늘 받고 살았지만 오늘 새롭게 깨달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습니까?
"나를 사랑하시는 아빠 아버지, 내가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함을 믿습니다. 주님 주신 그 사랑 늘 경험하고 체험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나의 영혼의 민감함을 주시고, 주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목도하게 하소서. 언제나 용기를 잃지 않도록 북돗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저에게 주신 일들, 작은 일에 충성함으로 큰 일도 부여받는 주의 종이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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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은 소중한 예물②
첫째로, 몇몇 신학교나 미션스쿨에서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대부분의 학교는 5월에 축제를 엽니다. 이 축제의 하이라이트가 바로 ‘찬양경연대회’입니다. 찬송을 가지고 누가 잘 부르고, 누가 더 멋지게 연주하는지 판단하고 점수를 매기는 것입니다. 참가 신청을 받고 참가비도 받습니다. 예선과 본선이 있고 심사위원들이 있습니다. 찬양을 하는데 돈을 지불해야 하고 평가를 받아야 하고 몇 날을 연습을 해야 합니다. 찬양경연대회가 ‘축제의 꽃’이라고 합니다. 찬양경영대회를 통해 축제의 분위기가 고조 된다고도 합니다. 여러분 냉정히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감히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인 찬양에 등수를 매길 수 있단 말입니까? 찬송이 축제를 돕는 도구로 전락시키는 모습입니다.
둘째로, 흔히 기도원이나 부흥회에서 볼 수 있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찬송도취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개 한, 두 곡의 찬송을 수 없이 반복하는 것이 특징인데 북을 치고 손뼉을 치면서 성도들을 거의 무아지경으로 이끌어갑니다. 물론 그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성도들은 그런 식의 찬송을 매우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속이 시원하고 은혜를 받은 것 같다는 이유입니다. 하루는 그런 식의 집회를 인도하는 강사님에게 굳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물어 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의 대답은 “네, 찬송을 뜨겁게 해야 마음이 열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은혜도 받을 수 있습니다!”였습니다.
네, 찬송을 뜨겁게 해야 한다는 말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을 구별 못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음을 열고 뜨겁게 찬송 하는 것은 영적인 측면이지 물리적으로 몸에 열을 발산해서 뜨겁게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몸이 뜨겁다고 마음 또한 뜨거울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 최면일 뿐입니다. 골방에서 조용하지만 간절히 하나님을 묵상하는 사람의 마음은 뜨거운 심령인가요, 아닌가요? 손바닥에 불이 나도록 박수를 치고, 땀을 흘리고, 침을 튀겨야만 뜨겁게 찬양하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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