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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림의집 1263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2018. 4. 17. 06:41

예림의집 1263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이야기|하나님과 대화하는 101가지 방법...


낯선 사람에게 미소를


하루 종일

낯선 사람에게 미소를 지어 보세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미소에 답하는지 보세요.

미소를 돌려받지 못해도

화내지 마세요. 

미쳤냐는 소리를 들어도

더욱 씨~익 웃어보이세요.

하나님이 당신의 미소를

돌려 주실 것입니다.




예림의집 칼럼™|예림의집이 드리는 삶의 지혜...


중언의 가치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와 관련된 많은 일들의 진행이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무시한다면 어떻게 삶의 일상적인 만남과 거래가 지속될 수 있겠습니까? 사회적인, 상업적인 모든 일들이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게 될 것입니다. 사도가 여기서 주장하고자 하는 취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어하신 것이라"(요일 5:9).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종종 진실하지 않는 것은 말하고 신실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는 자기 동료들은 믿으면서도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지 않고 그분의 증언을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증언을 믿는 것입니다. 이는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무모한 행동이 아닙니다. 또한 그것은 맹목적인 믿음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믿음만한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서 무조건 믿으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믿을만한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서 믿으라고 한다면 차라리 눈 없이 보고 귀 없이 들으며, 발 없이 걸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예컨데 캘리포니아를 향해 여행을 했을 때, 나는 안내책자 하나를 받았는데 그 책자를 통해 일리노이주를 떠나 미시시피강을 건너고 미주리주를 지나 네브라스카주에 이르며, 그 다음에 록키산맥을 넘어서 몰몬교들의 거주지인 솔트레이크시티를 지나 시에라 네바다를 거쳐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 그곳들을 지나가면서 아내책자 내용이 올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사분의 삼 정도의 여정을 잘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여행에 대해서 안내 책자를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불행한 회의론자일 것입니다.

나에게 우체국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열개의 표지물을 알려주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래서 그 열개 중에 아홉개를 찾았다면, 우체국에 가까이 와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됩니다. 이와 같은 믿음으로 인해 내가 전에 전혀 가지지 못했던 새 생명과 소망, 평화와 기쁨과 영혼의 안식 등을 얻게 된다면, 또는 절제를 얻게 되거나 악에 저항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면, 나는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만드신 도시'를 향한 바른 길에 들어섰다는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대로라면, 나머지 일들도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아직도 의심스러운 것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이와 같은 의심과 두려움 때문에 참된 믿음을 갖기는 어렵습니다. 믿음은 상황이 어찌되었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있는 곳에는 참된 펴오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 4:18). 아내가 남편을 의심한다면 그 아내는 얼마나 비참한 자십니까? 아들이 집을 떠난 후 자신에 대해 무관심해졌다고 생각하여 아들의 사랑까지 의심한다면 그 어머니는 얼마나 비참함을 느끼겠습니까? 참된 사랑에는 결코 의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QT|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우리는 고아가 아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부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에베소서 3:16, 17)


복음 중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 가지 놀라운 사건으로 나타났습니다. 첫째,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둘재,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온 세상 사람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셋째, 거룩하신 성령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습은 어ㄸ너 모습일까요?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 17:9).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바로 그 마음에 성령님께서 임하셔서 영원히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다음 질문을 읽고 답을 해보세요. 첫째, 로마서 8:9-19절을 읽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에 대한 호칭르 다 찾아보세요.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둘째, 에베소서 3장 16, 17절을 읽고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누가 계시다고 했는지 써보세요.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혹은 예수의 영(행 16:7)이라고 불립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 안에 계신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마음 안에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자신이 떠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근심햇습니다. 근심이 쌓인 나머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제자들에게 더 유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라"(요 16:7).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더 유익한 것은 그래야만 성령님이 오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성령님께서 모든 믿는 자 안에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성령님의 임재를 통하여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안에 계시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분명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고 하신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다음 질문을 읽고 답을 써보세요. 첫째, 고린도후서 13장 15절에서 우리 자신이 확증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둘째, 예수님께서 자신 안에 계신 것을 분명히 알지 못하면 어떻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버림 받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확증하고 살아야 할 것은 예수께서 내 안에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임재하심을 깨닫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중국 코스타 집회에 갔을 때 어는 청년이 마지막 집회를 앞두고 상담을 해왓습니다. "목사님, 저는 유학생활이 너무 힘들어 이번에는 하나님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으로 왔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다 은혜를 받는데 저는 지금까지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데 오늘까지 은혜를 받지 못하면 큰일입니다."라고 말하며 울었습니다. 저는 그 청년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청년이 은혜를 못 받았다고 울면서 상담까지 할 정도라면 벌서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신 것 아닌가요? 성령님이 역사하지 않으셨다면 아마 청년은 벌써 도망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울며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이렇게 마음을 간절하게 하시는 분이 도대체 누구인가요? 지금 성령께서 청년의 마음에서 역사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저녁에 이렇게 고백해 보세요. '주님, 제 마음에 강하게 역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마음을 이처럼 간절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더 강하게 역사해 주세요!'라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 청년을 위해 기도해 주엇습니다. 그날 밤 그 청년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바닥에 엎드려 주님이 만져 주시는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주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 역사를 깨닫지 못하고 삽니다. 그러니 죄의 유혹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방황사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확증하고 살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체험으로만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체험은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우리를 속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체험에 의지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데도 안 계신 것처럼 느낄 수도 있게 됩니다.

저는 첫 목회지인 여주에서 어느 날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강단에서 기도하면서 방언을 체험했습니다. 그때의 놀라움과 영적이 충격은 대단했습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과 살아 계신 하나님. 나를 기억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저는 체험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말슴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첫 번째 방언의 체험 이후 한동안 전느 성령의 체험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저를 떠나신 것으로 여겼던 때도 있었습니다. 

체험은 강한 확신을 주지만 순간적이어서 진정으로 성령님께서 함께 하심을 깨닫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 반면에 말씀은 지속적이며 완전한 답을 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바르게 확증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헤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실의에 빠져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눅 24:32). 그러나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 자신에 대한 말씀을 풀어 설명하셨습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풀어주신 말씀을 통해서 자신과 함께 있던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주심을 알게 되면 내 감정이나 체험에 상관없이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시간, 예배드리는 시간, 말씀 묵상하는 시간은 물론이고 하루 24시간 나와 함께 계신 것을 알게 됩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어떤 방법으로 주님이 함께 계시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하려고 했습니까? 그것이 주님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아빠 아버지, 저는 내안에 계셔서 역사하신 성령님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이고 저에게 말씀하시기만을 간구했습니다. 때때로 주님이 침묵하실 때에는 우울했고, 실망했으며, 낙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주님은 성경을 통하여 저에게 말씀해 주시고 계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주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부지런히 주님의 말씀을 읽고, 주님의 뜻을 깨닫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으로 나와 항상 함께하심을 확신하오니 감사들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의 향기|악보를 클릭하면 찬양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찬양 세미나 강의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 전도의 열매


그 첫째로, 우리는 찬송에 담긴 복음의 능력과 그로 인해 얻어지는 전도의 열매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누구나 살다 보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수많은 소리를 듣게 됩니다. 물론 그 소리 가운데는 유익을 주는 어떤 음악이나 새로운 정보가 있을 수도 있고 단순히 괴롭힘을 주는 소음도 있을 것입니다. 찬송도 그 가운데 하나의 소리입니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모든 찬송은 소리로 표현됩니다. 아울러 소리로 표현된 찬송은 그 울림 반경 내에 있는 사람에게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들려오는 거부할 수는 복음이 됩니다. 바로 여기에 찬송의 전도적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가 오늘 직장에서 일을 하다 잠시 휴식을 하는 가운데 작은 소리로 찬송을 불렀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그 옆에는 몇 사람의 동료들이 커피를 마시며 담소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자기들끼리 무슨 말을 주고받다가 찬송이 계속되자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해서 차츰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런데 찬송의 내용이 무엇인가요? 복음적인 고백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찬송은 복음이거나 복음의 해설처럼 들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오늘 그들이 들은 소리는 결코 예사로운 소리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복음을 들을 것입니다. 여기에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들의 심령에서 역사 하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생활 속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소리가 그저 스쳐 지나가거나 잠시 기억되다 이내 사라지는 것에 비해 찬송에 담긴 복음은 그 자체가 살아있는 능력이기 때문에 결코 그대로 소멸되지 않고 그 소리를 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심령을 갈아엎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우리 자신들이 말씀을 통해 새롭게 된 것 같이 우리 주변의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 역시 그들의 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우리가 부르는 찬송을 통해 복음을 듣고 이미 변화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찬양 사역을 하면서 찬송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간증을 많이 들었습니다. 군복무 시절 하루 일과가 끝나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찬송 소리에 어느 날 자기도 모르게 교회에 발을 들여 놓았다는 어는 형제의 고백, 예수를 전혀 모르는데 누군가가 선물로 보내준 찬송을 무심코 듣다가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다는 어느 자매의 고백 등 우리가 드리는 찬송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2008년부터 2011년까지 매주 수요일, 금요일 1시간씩 전철역 입구에서 찬양을 했습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을 찬양하고자 그렇게 했습니다. 어느 날 한 신사분이 찬양하는 동안 자리를 뜨지 않고 계속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찬양을 다 드린 후 짐을 정리하는데 다가오시더니 저에게 말을 걸어오셨습니다. 그분은 과거 열심히 주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던 집사님이었는데 믿던 교인에게 사기를 당하고 상처를 입어 주님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제가 찬양하는 동안 하나님은 그분의 귀에 찬양을 들리게 하셨고, 주님과의 첫 사랑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겠다고 제 손을 잡으며 고백했습니다.

또 한 번은 노원역 7호선과 4호선 교차 통로에서 찬양을 하고 있었던 때입니다. 그곳에는 다리가 없이 앉아서 구걸하고 있던 분이 계셨는데. 그 날은 그분이 엉엉 울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찬양을 하다 그분을 본 저는 깜짝 놀라서 찬양을 멈추고 어디 많이 아프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고백이 놀라웠습니다. 제 찬양의 가사를 반복해서 듣다가 그 가사의 내용이 자신을 찌르고, 위로 하였고, 사랑이 그리워서 울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분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평안을 빌어주고, 명함을 전해주며 예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후로 저는 지하철을 많이 이용합니다. 지하철 곳곳에는 찬양하기 좋은 공간이 많이 있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하나님을 묵상하다가 찬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어디서든 내려서 좋은 장소를 찾아 찬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기타를 가지고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렇게 찬양하다 보면 관심을 갖는 사람, 구경하는 사람, 경청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분들에게 제 명함을 드리며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전화하시라고 합니다. 또 다음 카페 “예림의집”을 소개하며 언제든 꼭 한번 놀러 오시라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드리는 찬양은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