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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림의집 1264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2018. 4. 18. 11:38

예림의집 1264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이야기|하나님과 대화하는 101가지 방법...


엘리베이터를 타면


엘리베이터를 탈 때는

하나님의 손바닥 위에

있다고 생각하세요.

엘리베이터가 올라갈 때

당신의 영혼을 고양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세요.

하나님의 임재를 느껴 보세요.

오늘 다른 사람의 영혼을

고양시킬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나님께 부탁드려 보세요.




예림의집 칼럼™|예림의집이 드리는 삶의 지혜...


지식과 동의 그리고 자기 것으로 삼기


믿음에는 세 가지 필수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물론 믿음을 내가 마음먹어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전적으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주건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세가지의 요소, 바로 '지식'과 '동의' 그리고 '자기 것으로 삼기'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먼저 우리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성려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 주십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알고 난 후에는 그 지식에 동의하고,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단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동의하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그를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믿음이 한 사람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만약 현재 머무르는 건물에 불이 났다고 누군가가 외쳤을 때 얼마나 빨리 밖으로 빠져나가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항상 무엇을 믿고 있는가에 따라 영향을 받습니다. 그것은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주신 기록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그의 모든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을 보면 그 말씀 속에 모든 영혼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 말씀은 한 치의 의심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를 보내신 분을 믿고, 이 위대한 구원을 붙잡아 자기 것으로 삼는다면 심판에 대한 두려움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일서 4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리라"(요일 4:17). 믿기만 하면 심판은 없습니다. 심판은 이미 지나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QT|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신 증거①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니"(로마서 8장 16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으로 우리 안에 와 계십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령님의 임재를 통해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신 증거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교제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내주하고 계신 사람은 어떤 증거를 가지고 있을까요? 


1.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린도전서 1:3),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한일서 4:15). 예수님을 주라 고백하는 것은 성령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 익숙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이러한 고백이 특별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상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평범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나 결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불신자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리지 못합니다. 불신자에게 "예수님이 누구입니까?"라고 묻는다면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이라고 대답할 수 있지만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흉내는 낼 수 있지만 진심으로 고백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 안에는 예수님께서 주님이라고 믿게 하실 성령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례받은 성도가 세례 간증을 하면서 자기도 놀라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10주 양육 중 9주까지도 예수님이 저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도, 제가 완전히 용서받았다는 것도,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도 확실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양육해 주신 이 집사님이 양육 첫날에 '영접기도 하시겠어요?' 하시는데, 하나님을 떠나 방황을 햇다느니, 죄인이라느니, 이제 당신은 주님의 자녀가 됐다느니, 하는 말투가 가슴에 와 닿기는커녕 반감만 생길 뿐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그런 말을 진정으로 믿는 걸까?'하고 의심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양육을 받던 날, '하나님, 저는 당신을 떠나 방황했습니다.'라는 말을 채 어아기지 못하고 저는 목이 메어 너무도 많이 울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모든 복음이 정말 다 믿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행하신 기적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죽음의 위기가 온다고 해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 황제를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엄청난 박해를 받았습니다. 죽임당할 위기를 겪었고 실제로 많은 사람이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박해에도 불구하고 로마 황제를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오직 한 분 예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은 스스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 안에 역사하시면서 믿음을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믿고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은 성령님이 계신 확실한 증거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하십니까? 여러분의 신앙고백을 써보세요.


2.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로마서 8장 15, 16).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것은 성령님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여러분 안에 성령님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비록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더라도 절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는 못합니다. 구원받은 자에게는 "양자의 영"이 역사하고 있지만 불신자에게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에 보면 귀신들도 하나님을 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만 무서워 떤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죄 사함의 은총을 받지 못한 자는 누구나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무서워하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종의 영"을 가진 사람의 실체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자연스럽게 부르십니가? 언제부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분명히 부르게 되었습니까?


3.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깨닫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전서 2:12).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알게 하는 것은 성령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의 영으로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세상의 영이 역사하는 곳에서 기쁨과 행복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게로부터 온 것들에서 기쁨과 행복을 느낍니다.

여러분이 만약 예배를 드릴 때나 말씀을 들을 때, 은혜롭다고 느낀 적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 안에 은혜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도 그럴까요?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성령님의 역사가 없기 때문에 은혜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이 좋아하는 노래와 성도가 은혜받는 찬양이 다른 것입니다.

한 기독교 연구소에서 예수 믿지 않는 대학생들에게 몇몇 큰 교회에 가서 예배를 참관한 뒤에 리포트를 작성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대학생들의 보고서에는 설교가 은혜롭다고 정평이 나 있는 교회일수록 감동을 못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연구소는 그 결과를 가지고 말씀에 은혜가 없는 것이 한국 교회의 큰 문제라고 분석하였습니다. 비기독교인 대학생들을 통해 한국 교회의 강단을 평가해 보는 것에도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은혜름 곳받았다고 한국 교회 강단에 은혜가 없다고 평가하는 것은 난센스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은혜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이 계시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평소에 하나님의 은혜라고 깨닫지 못하던 많은 것이 은혜임을 깨닥게 하십니다. 가족과 교인의 존재 자체, 평소의 건강과 직장 등 평범한 것 중에 감사를 느끼게 되고 심지어 고난까지도 감사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순간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느낍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 써보시기 바랍니다.



찬양의 향기|악보를 클릭하면 찬양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찬양 세미나 강의입니다...

상황을 초월한 찬송①


다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찬송의 수평적 의미는 육신의 한계 즉, 상황을 초월하여 부르는 찬송은 듣는 이로 하여금 영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좋은 예를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의 선교 여정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메리카에 있는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오클레소프 장군이 이끄는 조지아 주 이민단의 소속 목사로 1735년 10월 중순 시몬드호를 타고 대서양을 항해하던 중 갑자기 불어 닥친 폭풍으로 인해 요한 웨슬리 자신 뿐 아니라 선원들을 비롯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찬송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바로 함께 승선하고 있는 26명의 모라비아 교도들의 평안에 넘치는 찬송의 소리는 선교사라고 뽐냈던 요한 웨슬리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보잘것없으며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를 스스로 깨닫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날의 체험을 '오늘은 내가 지금까지 겪어온 날 중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을 본 날' 이라고 기록해 두었습니다.

배가 거의 침몰해 가는 상황에서 모라비아 교도들이 뱃전에 둘러앉아 찬송했던 것은 결코 웨슬리에게 감동을 주고자 함이 아이었습니다. 반석이 되신 주님께 영혼의 닻을 내리고 그의 영광을 찬송함이 목적 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그날 보았던 그 놀라운 현상은 한줄기 빛이 되어 웨슬리의 가슴에 남았고 결국 그 빛은 2년간의 조지아 주 사역을 쓰라린 패배로 장식하고 본국에 돌아갔던 그를 올더스케이트에서의 성령 체험으로 이끈 한 줄기 서광으로 작용했던 것입니다.

http://cafe.daum.net/HomeOfYER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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