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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림의집 1260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2018. 4. 14. 10:08

예림의집 1260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이야기|하나님과 대화하는 101가지 방법...


악덕 리스트


당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악덕

음주, 험담, 질투, 시샘, 거짓말을

하나님께 이뢰어 보세요.

그것이 당신의 가장 큰 죄가

된 이유를 써 보세요.

모든 것을 빠짐없이 자세히,

그리고 그 리스트를

상자에 넣고 

그 상자를 포장해서

하나님께 드리세요.

상자를 벽장 속에 모아 두세요.

당신의 생일날 

그것을 끄집어내서

당신이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지

하나님께 아뢰세요.




예림의집 칼럼™|예림의집이 드리는 삶의 지혜...


죄에 대한 각성


그런데 30일간의 집회가 끝날 무렵, 그가 내게로 오더니 떨리는 손을 내 어깨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집회가 열렸던 장소는 너무나 추웠는데, 근처에 가스등이 켜져 있는 방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나에게 말했습니다. "잠시 동안만 이곳에 들어와 주시겠습니까?" "저는 전주에서 가장 나쁜 사람입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나는 그가 살인이나 아니면 다른 어떤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보고 물었습니다. "무슨 특별한 죄를 지은 적이 있습니까?" 그는 대답했습니다. "저의 삶 전체가 죄였습니다. 저는 기만적이고 자기 의에 가득 찬 바리새인입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는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이런 결과를 가져올 수는 없습니다. 성령께서 이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 후로 그는 그 도시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하나님게서 자신에게 행하신 바를 간증하는 가장 적극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질문해 오는 사람들에게 다음 네 구절의 말씀을 제시해 주십니다. 먼저 누가복음 13자으이 말씀입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3). 마태복음 18장에는 제자들이 하늘나라에서 누가 제일 큰지를 예수님께 물었을 때, 그분은 한 어린아이를 불러 가운데 세우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마태복음 5장에서는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원한다면 먼저 그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큰 아들과 함께 나라박에 있기보다는 작은 아들과 함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다(눅 15장 탕자의 비유 참조). 

큰 아들에게는 천국이 지옥과 같을 것입니다. 자기 동생이 돌아오는 것에 대해 기뻐하지 않는 큰 아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은 자입니다. 이는 진지하게 묵상해 볼 일입니다. 막이 내려지면 큰 아들은 바깥에, 반대로 작은 아들은 안에 남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구원의 섭리인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31).



오늘의 QT|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우리 신실하신 아버지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음이니라(딤후 2:13)."

 

"내가 믿음을 지켜나갈 수 없다."고 생각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당신이 당신의 구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지라도, 때론 그것이 정말 당신이 부르심을 받은 소망을 굳게 잡기 어렵게 되기도 합니다. 때때로 당신의 환경이 당신에게 너무 무거운 짐이 되므로 하나님이 당신을 도와주실 것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이해해야 할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가 당신의 믿음의 능력과 연결되어 흔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13절은,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을 주님과 구주로 영접하자마자, 당신은 그분과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당신은 그분의 일부인, 그의 가족의 일원이 됩니다.

존 칼빈은, "우리는 주님에 의해 양자가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그의 사랑받는 자녀로 환영하십니다. 그리고 신실하신 아버지로서, 그분은 당신을 돌보시고 도우시고 보호하십니다. 당신의 믿음의 결과로 하나님께서 당신이 고통과 시련을 당할때 당신을 위로하시고 도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세주의 믿을만한 성품과 그의 약속들의 기초를 발견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부족하다고 여거지는 그 믿음이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당신을 쫒아 내지는 못 할 것입니다. 당신의 신실하신 아버지를 믿으세요! 그분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결코 외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주님, 당신의 신실하심을 감사합니다. 나는 당신의 사랑이 나를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고 찬양하나이다. 날미디 새로운 환경과 맞서는 저에게 신실하신 아버지의 은혜를 주시옵소서. 끊을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을 날마다 경험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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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찬양 세미나 강의입니다...

찬송은 소중한 예물③


셋째로, “앰프만능주의”인데, 일부 찬양사역자나 부흥사들의 경우 장소에 전혀 맞지 않게 필요 이상으로 큰 고성능 앰프 시스템을 가지고 다니면서 소리의 크기를 최고로 높여 지붕이 들썩들썩할 지경에 이르게 합니다. 그들은 찬송의 소리는 크면 클수록 좋은 것이 아니냐는 단순한 생각에서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간의 귀는 일정 수준 이상의 소리를 들으면 고통과 불쾌감을 느끼고 마침내 내용과는 상관없이 해당 찬송을 거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히려 찬양과 예배에 방해가 될 뿐입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많은 찬양사역자와 부흥사들이 소리의 크기와 영성을 비례하다고 여기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아멘 소리가 작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다.”라든지, “더욱 더 크게 불러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라고 합니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이 말은 거짓입니다. 결코 성경에는 소리의 크기로 믿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조용히, 혼자서, 따로 떨어져서 하나님을 만나는 모습을 많이 보여 주셨습니다. 


넷째로, “성가곡 청문회”입니다. 어떤 교회 장로님은 주일날 성가대원들의 공포의 대상이 됩니다. 자신이 무슨 심사위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늘 평가해서 말하기를 좋아 합니다. 만약 한 곳이라도 틀리는 날에는 성가대원들에게 왜 죽을 쑤었느냐고 책망을 합니다. 아마 그 장로님은 틀리지 않고 제대로 하는 찬송은 밥이요, 그렇지 않은 경우는 죽이나 누룽지가 되는가봅니다. 그러나 더욱 문제인 것은 많은 성가대원들 조차 그 장로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찬송이 끝난 후 성도들이 아멘으로 힘차게 화답하면 흐뭇해하고, 별 반응이 없으면 속으로 ‘오늘도 죽 쑤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현상은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 생각하지 않고, 다만 예배의 분위기를 위해서, 또는 성도들의 반응을 의식하며 선곡했고, 연습하고, 불렀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마지막으로, 요즘 젊은이들에게서 발견되는 “자기취향대로”입니다. 대개 찬송을 자신의 음악적 취향에 따라 선택하고 즐기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찬송을 주님께 예물로 드린다는 차원이 아니라 자신의 정서를 위해 선곡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찬송을 받고 싶어 하는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 취향만을 우선하는 경우입니다. 이 역시 찬송이 예물임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제가 어느 날 한 모임에서 찬양 인도를 할 때의 일입니다. “함께 주님을 찬양합시다. <목마른 사슴이>를 부르겠습니다.”라고 하니까 한 자매님이 손을 번쩍 들고 대뜸 말합니다. “목사님 그 찬양 이제 그만 좀 불러요. 너무 불러서 지겹습니다.”이것은 약과입니다. 심지어 일부 찬양 사역자라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번에는 경쾌한 곡을 선사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좋아하시는 찬양곡을 불러 드리겠습니다!”누가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부른단 말입니까? 이 순간 하나님은 어떠한 표정을 짓고 계실까요? 이는 찬송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대상이 누구인지 전혀 고려하지 않는 촌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