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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림의집 1256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2018. 4. 10. 08:38

예림의집 1256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이야기|하나님과 대화하는 101가지 방법...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4글자


잠시 하나님과 

단 둘만의 시간을 가져 보세요.

당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ACTS"이 머리 글자로

하나님께 대화해 보세요.

A=Adoration(찬양)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고 

그 이유를 말하세요.

C=Confession(고백)

단신이 지은 죄를

하나님께 자복하세요.

T=Thanksgiving(감사)

특별한 선물이나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세요.

S=Supplication(간구)

마지막으로

특별한 욕구와 소망을

하나님께 아뢰세요.




예림의집 칼럼™|예림의집이 드리는 삶의 지혜...


거듭나지 않은 자들이 잃게 되는 것


당신은 이곳에서 불리는 시온의 노래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할례 받지 못한 귀로는 한 가지, 곧 모세와 어린 양의 노랫소리는 들을 수 없습니다. 그 멜로디는 오로지 거듭난 사람들의 귀만을 기쁘게 할 뿐입니다. 당신은 세상에서 아름다눈 저택들을 많이 볼 수 있지만 기억하십시오! 거듭나지 않고는 그리스도께서 준비하신 그 처소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당신은 세상에서 가끔 혼인 만찬에 초대를 받게 되겠지만 거듭나지 않고는 어린 양의 혼인 만찬에는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당신은 오늘밤 꿈에서 천국에 들어간 당신의 어머니의 얼굴을 볼 수 있고, 그분이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지만, 당신이 거듭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어마니의 모습을 영원히 보지 못할 때가 올 것입니다.



오늘의 QT|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죄를 깨닫게 하는 능력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누가복음 5장 8절)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을 위한 십자가입니다. 지옥에 가야 마땅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내가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이것은 깨닫는 것이 얼마나 큰 능력인지 모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살마과의 관계도 달라집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록 있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이 죄인임을 고백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제대로 깨달은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상투적인 표현으로 "말할 수 없는 죄인을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지 못합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간음하고 그 죄를 숨기려고 우리야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저지를 일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 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소와 양을 가지고 있는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양 한마리를 빼앗아서 손님을 대접했다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을 때 다윗은 얼마나 분노했습니까? 

다윗은 그 부자를 향하여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이 죽을 자라"(삼하 12:5)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말은 자기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자신이 그런 죄인이라는 사실은 께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누가복음 5장 8절에서 예수님 말씀대로 엄청 많은 물고기를 잡은 베드로는 무엇이라 고백했습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는 엄청난 물고기를 잡았지만 좋아하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베드로가 갑자기 더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 말씀을 통해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는 순간 영안이 열렸습니다. 영안이 열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발견하는 순간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깨달은 순간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날 이후 베드로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죄를 짓는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약속하신 대로 성령께서 강림하셨습니다. 성려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그런데 그 설교를 듣고 있는 유대인들의 마음에 갑자기 통렬한 죄책감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하면서 울부짖으며 베드로 앞에 나아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 그들에게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18세기 미국에 대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 부흥의 불길은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의 설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주일날 에드워즈 목사는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이란 제목의 설교를 준비하고 주일 예배 때 설교 원고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저마다 통회 자복하기 시작했습니다. 1600년대, 1700년대 미국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죄를 많이 지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말씀을 통하여 다가오시는 빛 되신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죄를 께닫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그 죄를 그 밤에 해결하지 않고는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부흥은 그렇게 왔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자신의 죄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이 거듭남의 시작이며, 제자됨의 시작입니다. 자신이 얼마만 한 죄인인가를 깨닫는 것이 십자가의 능력을 아는 것입니다. 다음은 어는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1984년에 그는 군목으로 임관하기 위해 훈련소에 입소했습니다. 그런데 장교 훈련을 받다가 그만 고관절 부위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국군통합 병원으로 후송되어 응급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군의관은 엑스레이 사진을 살펴보더니 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며 최선을 다하겠지만 완벽하게 치료하기는 어려워 아마도 십중팔구 다리를 절게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 이야기었습니다. '내가 장에인이 되다니....' 저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급하게 다음 날로 수술 스케줄이 잡혔습니다. 저 역시 너무 당황스러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부모님과 아내에게는 연락을 해야겠는데 마땅히 연락을 부탁할 사람조차 없었습니다. 수술 준비를 마친 의료진과 위생병이 나가고 저는 수술 대기실에 홀로 남겨졌습니다. 시계를 보니 밤 11시가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하나님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 저는 큰 소리로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 응답이 없으셨습니다. 저는 다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세 번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아, 아무 대답이 없으시다니...." 순간 저는 속에서 뜨거운게 확 치밀어 오르며 통곡이 터져 나왔습니다.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다리를 절게 해게 되었다는 사실이 비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 내가 엉터리 목사였구나!" 라는 사실이 나를 비참ㅂ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설교도 열심히 하고 3대째 목사요 사람들로부터 "훌륭하다.", "모범적이다." 라는 칭찬을 들어온 저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내가 그 순간 하나님을 어떻게 찾는지도, 어덯게 해야 응답을 받는지도 모른다는 것이 너무 끔찍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때 문득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군 선교를 위해 군목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면의 진정한 동기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사병생활보다 장교생활이 더 편해 보여서 지원한 것입니다. 또 목사 안수도 일찍 받고, 제대하여 유학도 다녀오고, 나중에 큰 교회 담임목사가 되는 것이 그 당시 저의 꿈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서 사실 제 안에는 하나님을 이용해서 성공해 보려는 교활한 야심이 잇었던 것입니다. 저는 제 안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세상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이 다 들어 있음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그날 밤 하나님께서 제 마음속 깊은 곳까지 샅샅이 드러내 보여 주실 때 저는 밤새 얼마나 울며 회개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 것은 모르고 사람의 눈에 안 보이면 죄가 아닌 줄 알았습니다. 새벽녘이 되자 저는 제가 당한 사고가, 사고가 아니라 은혜였음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이 모습 그대로 어떻게 목사가 될 수 있을가?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으니까 하나님께서 내 다리를 치셨구나!"

그때 비로소 진짜 저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토록 깊게 뿌리박힌 죄를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씻어 주시기를 구하면서 그 새벽에 저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러자 다리를 절지 않도록 고쳐달라던 저의 기도 제목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 이 오른쪽 다리를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사지가 멀쩡하면 또다시 야망대로 살 테니 차라리 하나님을 위해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제 진짜 하나님의 종이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감당하다가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나의 종아, 수고했다!' 이 말씀 한 마디만 해 주시면 저는 원이 없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오른쪽 다리를 바치겠다고 고백하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이때 흘린 눈물은 두렵고 비참해서 흘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저는 분명히 느꼈습니다. "내 인생이 바뀌고 있구나! 지금까지는 내 마음대로 살았는데, 이제부터는 진짜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다!"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격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감사하게도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그 후 두 번의 추가 수술 끝에 저는 온전히 치유되어 다리도 절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다리가 지금가지 약간의 일기예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감사합니다. 그 흉터를 보고 만질 때마다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주님을 바라보았던 그때를 떠올리게 되니 정말 복된 흉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님, 저도 마음 깊이, 뼈속가지 제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고2 겨울 수련회 때이지요. 지금은 오래되어 그때의 감동과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 때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나는 주님 앞에 발가볐겨졌으며 내 죄가 들어나 주님께 눈물로 회개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때의 그 뜨거움을 지금도 나의 삶에서 경험하게 해 주옵소서. 나의 죄가 그 때에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음을 압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의 십자가가 필요한 존재이오니 주님의 보혈을 저를 날마다 깨끗게 하옵소서. 그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주님께 나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의 향기|악보를 클릭하면 찬양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찬양 세미나 강의입니다...

찬송은 성도의 의무


세미나 및 집회를 하려고 처음 교회를 방문하면 제일 많이 듣는 말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찬송에는 취미가 없는 가 봅니다.”“저는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찬송에는 재능이 없나 봐요.”

저는 처음에 이런 질문을 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찬송도 모르고 성경도 정독을 안 하는구나!’성경 곳곳에 찬송은 취미나 재능이 아니라고, 하나님은 멋진 공연을 보시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울어나는 찬송을 원하신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고운 목소리, 멋진 환상곡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찬송을 원하십니다. 취미라는 것은 강제성이 없습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일 뿐입니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찬송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 할지어다(시 9:1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바로다(시 33:1)”,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 할지어다(시 150:6)”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찬송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누구의 명령이 아닌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 주님의 말씀에 "아멘"하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거짓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찬송을 받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그분을 찬송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고 감히 말할 수가 있을까요? 이 명령에는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습니다, 찬송은 달란트나 은사나 은혜가 아닙니다. 찬송은 어떤 특정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호흡이 있는 자는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주님을 찬송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