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의집 1255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이야기하나님과 대화하는 101가지 방법...
하루쯤은 다르게
월요일 아침은
융통성 있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정해 보세요.
오전 내내 꿈 속을 해메보세요.
반대로 오후 내내 찬양을 들으며
또 하나님을 찬양하며 보내보세요.
저녁 식사를 한 후에는,
다른 여가를 포기하고
기도와 묵상으로 그 시간을 채우세요.
아니면,
하루동안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주시는 어떤 변화에도
마음을 열어 두세요.
하루 일과를 기꺼이 바꾸어 보세요.
점심 시간에는 늘 하듯
혼자 먹지 말고
누군가와 함께 하고,
최근 후 바로 집으로 가지 말고
아픈 친구에게 문병을 가고,
저녁에는 TV 앞에 앉아 있지 말고
산책을 나가 보세요.
순간 순간 마음에 주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따라가 보세요.
예림의집 칼럼™예림의집이 드리는 삶의 지혜...
죽어가고 있는 군인
피츠버그 상륙작전 이후 머프리스보로의 한 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밤중에 누군가가 그를 깨우더니 다른 병실의 환자 한 사람이 그를 만나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그 환자에게로 갔을 때, 그 환자는 값자기 자기가 죽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는 "할 수만 있다면 내 팔로 당신을 일으켜 세워서 천국에 보내드리고 싶군요.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습니다. 난 당신이 죽는 것을 도울 수 없습니다." 그 환자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누가 할 수 있나요?" "주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자 그 환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습니다. "그분도 날 구원할 수 없습니다. 나는 평생동안 죄를 짓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죄인을 구언하시기 이해 오셨습니다." 이 때 그는 북부에 있는 그 사람의 어머니를 생각해 냈습니다. 그 어머니는 분명 그 환자가 평안한 가운데 죽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래서 그 환자의 곁에 있기로 결심한 그는 몇 시간 안에 죽을 것으로 알려졌던 그를 위해 두세 번 기도했습니다.
그는 그 환자에게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혼에 대해 걱정하고 있던 한 청년과 나누신 대화를 들려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3장을 폈습니다. 그 환자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그가 14절과 15절 말씀인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를 읽어 내려갈 때, 그 환자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런 말이 거기 있습니까?"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 환자가 다시 한번 읽어달라고 부탁하기에 그렇게 하고 나니 그 환자는 침대에 팔을 의지하고 손을 모으며 또 다시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읽어 주실 수 있습니까?" 그는 그 말씀을 세 번 읽어준 후 나머지 말씀도 계속 읽어 내려갔습니다.
다 읽고 나서 보니 그 환자의 눈은 감겨 있었고 손은 접혀 있었으며 얼굴엔 미소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환자의 표정은 너무도 밝아 보였습니다. 그 환자에게 아주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 환자의 입술이 떨리는 것을 보고 그 환자에게 몸을 기울여, 그 환자가 아주 작은 소리로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더 읽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 환자는 그 두 구절에 의지한 채 몇 시간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에 그의 처소를 얻기 위해 그리스도의 구원의 마차에 올라탔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당신은 이세상의 많은 나라들을 방문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에 의해 거듭나지 않고는 존 번연이 환상 가운데 보았던 천국은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여기저기서 많은 나무를 볼 수 있지만, 구원자를 통해 믿음으로 눈이 밝아지지 않고는 생명나무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거듭나지 않으면 처국을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세상의 많은 왕들과 지배자들을 볼 수 있지만 거듭나지 않고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는 볼 수 없습니다!
오늘의 QT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십자가의 능력이 무엇인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 1:18)."
세계적인 전도자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사역을 마무리 할 즈음에 어떤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목사님 지금까지 수많은 나라와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지금까지의 사역 중에서 혹시 아쉬운 것이 있었습니까?" 빌리그레이엄 목사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복음이 교회 밖에만 필요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삼스럽게 깨닫는 것은 교회 안에 복음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습니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은 변화되었습니까? 많은 사람이 십자가 복음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정작 삶은 변하지 않습니다. 정말 십자가 복음은 삶 하나 바꾸지 못할 정도록 무기력한 것일까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성도들에게 약속된 삶은 정말로 놀라운 것입니다.
1. 아무런 부족함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만족한 삶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여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니라"(요 4:14).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는 약속의 말씀은, 마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다면 이제 아무런 부족함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만족할 것입니다.
2. 주위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는 삶입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7-38). 생수의 강이 흘러난다는 말은 주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다면 가정, 직장, 학교에서 놀라운 은혜를 끼치며 살아야 합니다.
3. 시험을 만날 때 넉넉히 이기는 삶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37).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큰 시험을 당하고, 그 어떤 위협과 고토잉 따라온다 할지라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삶과 여러분의 삶을 비교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약속된 삶을 누리고 있습니까?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너무나 놀랍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약속과는 달리 좌절과 낙심일 때가 많습니다. 왜 이런 모순이 생기는 걸까요? 십자가의 도가 하나니므이 능력인 것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 "하나님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미련하게 보인다고 했습니다. 반대로 구원을 받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어떤 사람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가 능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많은 성도가 교회는 다니지만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도 없고 간증할 것도 없는 종교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능력이 아니라 종교적인 상징일 뿐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진리를 믿으면 다 구원을 받습니다.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나는 속죄의 은혜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번 짚어 봐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믿고 있는가?' 우리는 너무 쉽게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믿음은 정말 엄청난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랑을 정말 믿습니까? 그렇다면 원수 같은 살마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정상입니다. 여러분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을 정말 믿습니까? 그렇다면 더 이상 은밀한 죄는 없어져야 정상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이 있다고 정말 믿습니까? 그렇다며 ㄴ고난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을 품는 게 정상입니다.
인천에 있는 부평감리교회의 첫 번째 기도 제목이 "순교자를 배출하는 교회가 되게 해 주옵소서."라는 것입니다. 어덯게 이런 기도 제목을 낼 수 있나 싶습니다. 그러나 천국을 바라보는 영안이 열리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천국을 진짜 믿으면 고난도, 순교도 특권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미운 사람들이 용서가 안 되고, 두려움과 염려가 떠나지 않고, 항상 기뻐고 감사하며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사실은 십자가의 도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알고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진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 안은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고자 하는 열의가 대단합니다. 그런데 말씀대로 살 수 있다는 믿음은 없습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모르는 이야기가 아니지만 항상 기뻐할 수 있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에 은혜를 받지만 실제로는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올은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소위 모태신앙입니다. 중학교 친구 중에 지금은 교회 장로가 된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그러나 중학교 때 저는 그 친구와 정말 친했지만 그를 전도하지는 않았습니다. 30년 만에 그 친구를 만났을 때, 친구의 부인이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중학교 때 목사님과 그렇게 친했다고 들었는데, 왜 그때는 전도하지 않으셨어요?" 너무나 부끄러워 할 말이 없었습니다. 솔직히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제가 모태신앙이지만, 중학교 시절에는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목하시고 쓰시는 사람은 정말로 예수 믿는 사람, 곧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19세기 러시아에는 기독교인이 9,000만 명, 성직자만도 6만 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원 5만 4,000명의 손에 나라가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능력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돈의 능력은 다 알고 있습니다.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떤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 시간 그것을 깊이 묵상하고 고백합시다.
"아빠 아버지, 나에게 십자가의 능력은 나의 삶의 이유입니다. 주님의 그 십자가의 능력으로 지금 내가 있습니다. 그 복음이 나를 살게 합니다. 나는 그 복음이 다른 이들의 살메도 능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먼저 내 스스로가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하시고, 나아가 그 십자가의 능력을 널리 전파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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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M은 예배에 쓰일 수 없습니다.
“CCM과 찬양은 구분해야 합니다. CCM은 또, 예배에 쓰일 수 없습니다.”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의 편견이었습니다. CCM은 기독교적인 대중음악이기 때문에 '찬양'과는 다르며, 구분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배에 쓰일 수 없다는 지적은 25년 전 제가 주장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찬송가만이 예배에 쓰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에게 있어서 찬송가의 존재는 특별합니다. 예배에 꼭 필요한 성경과 같은 위상으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찬송가를 감히 성경과 같은 반열에 놓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찬송가가 비록 성경과 함께 책으로 묶여 있다고 해서 그런 착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유일한 계시의 책입니다. 그러나 찬송가는 찬송가 공회 회원들이 모여서 회의를 통해 선곡해서 넣은 곡입니다. 하나님의 저작자이신 절대 진리인 성경과 인간의 회의를 거쳐 모은 노래를 같은 반열에서 취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찬송가에 담긴 곡이 영감이 있다는 논리도 편견입니다. 찬송가 중에는 1800년대 미국 기독교 부흥 역사 때 부를 찬송 곡이 없어서 당대 유행가에 가사만 기독교적으로 바꿔 만든 노래가 상당합니다. 특히 고난주간에 부르는 <오 거룩하신 주님> 멜로디의 경우는 독일의 선술집에서나 부르던 사랑노래였습니다.
제 말의 요지는 찬송가를 우습게 보자는 것이 아니라, 음악에 대한 가치기준은 시대에 따라, 문화에 따라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노래에 담겨진 가사의 농도이지, 스타일이나 음악적인 감각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감히 말하지만, CCM은 그런 의미에서 정신만 복음에 튼튼히 기초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예배에 쓰일 수 있습니다.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하고, 노래하는 곡이면 됩니다. 물론 교회 전통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매주 아니 날마다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에 CCM을 비롯한 찬송들을 어떻게 사용할까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CCM은 대중음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에 못 쓴다는 것은 편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찬송가도 전형적인 대중음악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대중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것이 대중음악이라면 찬송가가 더 실질적인 대중음악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건 찬송가에 있으니까 예배에 사용할 수 있는 곡이고, 이것은 경망스러운 CCM이니까 예배에 쓰이면 안 된다고 하는 식으로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2천 년 전 바리새인들의 그것과 무슨 다름이 있는지 곰곰이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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