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의집 1252번재 이야기
예림의집 이야기하나님과 대화하는 101가지 방법...
놀라움의 쪽지
결려의 메모나 성경구절을
적은 쪽지로
누군가를 놀라게 해보세요.
그 쪽지를 도시락이나
자동차 안, 책상 위에
몰래 넣어둬 보세요.
그리고 나서
당신을 격려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도 하나의 쪽지를
숨겨두세요.
우연히 그 쪽지를 발견할 때마다
한 번 더
하나님께 감사드리세요.
예림의집 칼럼™예림의집이 드리는 삶의 지혜...
단순한 믿음
"어머니가 내게 진에서 들으신 예기를 해 주셨을 때 난 단지 그것을 믿었고 그리고 완전히 나았습니다." "글쌔요, 난 단싱이 나만큼 상태가 안 좋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군요." 청년은 그의 소매를 걷어 놀립니다. "이것을 보세요. 뱀에 물린 자국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난 당신보다 훨신 더 심했었습니다." "글쌔요, 내가 그 원리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나도 보고 나을 텐데요." "원리는 이것입니다. 보면 살리라!" "당신은 내게 불합리한 것을 애기하는 군요. 하나님이 놋으로 상처를 문질러라. 그러면 그로부터 무언가가 나와서 상처를 치료해 준다고 하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네요."
나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아 왔습니다. 한 사람이 누군가를 데리고 천막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당신을 구원해 주셨는지 말씀해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놋뱀을 보기만 하면 된다는 얘기를 해줍니다. 이어서 또 다른 사람들을 부르면 그들 역시 같은 대답을 합니다.
이 사람은 참 이상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풀이나 뿌리를 구해다가 끓여서 약으로 사용하라고 하셨더라면 내가 믿었을지 몰라요. 하지만 놋뱀을 바라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아요. 난 그렇게 할 수 없어요." 나중에 천막 밖 진중에 있던 이 사람의 어머니가 들어와서 말합니다. "얘야, 내가 지금 최고의 소식을 가지고 왔단다. 난 진중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거의 죽어가던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두 완전히 나았단다."
그러자 아들은 말했습니다. "나도 낫고 싶어요. 죽는다는 생각은 너무 고통스러워요. 난 약속의 땅으로 가고 싶어요. 이런 광야에서 죽는 것은 싫어요. 하지만 난 그 치료법을 이해할 수 없어요.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아요. 내가 순식간에 나을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요." 결국 이 사람은 자신의 불신 때문에 죽고 맙니다.
오늘의 QT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평화의 제안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요한복음 14장 27절은, 예수님이 임박한 죽음을 준비할때, 제자들을 위로하신 말씀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이 마음에서 우러나온 계시는 다가올 교회 시대의 소망을 주시는 이유를 확립했습니다.
평안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대립과 불안의 세상에 사는 오늘 우리에게 지침으로 남습니다. 그분이 평안은 세상의 주는 것과 다르고 세상에서 얻게 되는 덧없는 행복과 기쁨과 다릅니다. 예수님의 평안은 걱정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세상 무엇으로도 할 수 없는 마음을 평온하게 해 주십니다.
당신이 예수님의 평화의 제안을 받아들일 때, 당신이 알지 못하는 것같이 영적 온전함과 정신적인 정결함을 경험하기 위해 준비하십시오. 걱정은 갑자기 쓸모가 없어질 것이고, 염려는 곧 아침 이슬처럼 곧 증발할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시련과 때때로 일어나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지는 못할지라도, 세상을 이기신 분에 대해 확신을 가질 때(요 16:33), 참으로 소망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적은 승리하지 못합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고난을 영적 성숙의 도구요, 그분은 우리 삶을 지키시는 능력을 가지신 분임을 증명하는데 사용하실 것입니다.
"아빠 아버지, 당신의 평안은 당신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세상을 이미 이기신 분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마음껏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하소서. 주님의 은혜로 나의 삶의 모든 고난과 역경을 넉넉히 승리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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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찬양 세미나 강의입니다...
CCM은 따라 부르기 힘듭니다.
“CCM은 따라 부르기 힘듭니다. 교회에서 쓰지 못할 노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처음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저는 고심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이들에게 설명할까?’ 우리나라 찬양 문화는 교회에서 얼마나 활용가치가 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제가 언젠가 교회의 찬양집을 편집할 때 제가 작곡한 “성령으로 하나 된 교회”라는 곡의 악보를 실었는데, 처음에는 성도님들이 알지 못하는 곡이라고 불평이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곡은 종이 한 장을 낭비한 셈입니다. 그렇다고 그 노래가 필요 없는 찬양일까요?
교회 내에 찬양 사역자들은 새 찬양에 민감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찬양을 알리고 보급하는 일을 사명처럼 여깁니다. 실재적으로 새로운 찬양들이 이들을 통해서 각 교회에 보급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끔은 모험을 감행합니다. 새로운 찬양을 부르는 것이지요. 그러면 몇몇 성도들의 표정이 불만 섞인 표정으로 바뀝니다. 제일 앞에 앉아 계시던 수석 장로님의 얼굴이 제일 먼저 일그러집니다. 그러나 모른 채하고 몇 주 그 찬양을 하다 보면 그 찬양은 어느새 성도들에게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제가 작곡한 “성령으로 하나 된 교회”도 결국 그 교회의 주제곡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실 교회만큼 노래 문화가 발달되어 있는 곳도 없습니다. 모이면 꼭 서너 곡씩의 노래를 부르게 되니까요. 대중음악 가수들 중에 어렸을 때 교회 한 두 번 안나가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바탕에는 회중 찬송의 역할이 큽니다. 엇박자도 많지 않고, 멜로디 라인도 단순한 노래들을 통해 찬양 문화가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에 나오는 CCM들은 참 따라 부르기 힘든 곡들도 있습니다. 거기에 ROCK이 나오고 RAP까지 등장하니 골치가 아플 지경입니다. 저도 이 부분은 동감합니다. 저도 따라가기가 힘에 붙이니까요. 저도 찬양 집회 현장에서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점점 줄어가는 것이 아닌가 걱정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CCM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는 것은 경솔한 일입니다. 효용성의 가치만으로 문화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큰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문화적 경쟁력 차원에서 ‘점점 어려워지는 CCM’을 이해하는 포용력을 주문하고 싶습니다. “난해해진 CCM”보다 더 어렵고 복잡한 싸이의 “강남스타일”도 잘 따라 부르던 요즘 세대들의 높아진 감각에 어떻게 하면 진정한 찬양을 보급할지 고민이 됩니다. 찬양 선곡의 주체가 되는 찬양사역자들이 잘 선별하여 적절한 곳에 알맞은 곡을 사용하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찬양에 대한 바른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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