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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회의는 언제 개회되었는가?

예림의집 2016. 11. 14. 16:11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언제 개회되었는가?

목사들과 평시도들이 모인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영국 의회 명령에 의해 1643년 7월 1일부터 1649년 2월 22일에 걸쳐 가진 회의이다. 이 회의는 웨스트민스터사원 예루살렘실에서 열렸다. 스코틀랜드 교회에게 감독제도의 예배형식가 청교도 성직자 제명과 "주일 성수 규례집"을 강요하고 새로운 예배 형식을 도입해 커다란 불만이 있었던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이 회의는 영국 교회의 교회 정치와 예배 형식을 확립하고 그릇된 비방과 해석으로부터 영국 교회의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 영국 의회가 소집했다.
1643년 10월 영국 의회는 웨스트민스터 회의 참가자들에게 "현재 대주교와 주교 등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앞으로 변화되어야 할 교회 정치를 대신하여 그들 사이에 공통된 권징과 정치를 다루어 이후에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가장 합당한 예배 모범 혹은 예배 형식이 교회 안에 존재하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이 회의는 치리회 권한은 없었으나 이런 의제에 관하여는 의회와 협의했다. 선출된 회의 회원 중 20명은 영국 교회 목사들이었고 이들 대다수가 이 회의 회집의 반대를 선포한 왕으로부터 좌석을 할당받지 못했다. 그리고 개회 때 참석한 목사는 69명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장로교인이었고, 10명은 자유교회 소속, 6명은 교회가 국가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에라스투스주의자였다.
전체 참가자 수가 120명의 목사와 30명의 평신도였다. 1644년 회의는 의회에 공예배 지침서를 제출한 바 있고 1646년에는 신앙고백서를 제출했다. 1647년 회의는 의회에 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을 보냈다. 스코틀랜드 총회는 즉시 이것을 받아들였으며, 영국 위회는 공예베 지침서(예배모범)와 신앙고백서를 비준했다. 이 둘은 요리문답과 함게 영국과 아일랜드 장로교회의 표준이 되었으나 영국에는 스튜어트 왕정이 복고되어 감독제도가 재확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