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실천신학

명령 정죄형보다는 위로 희망형을 먼저 활용하라

예림의집 2016. 11. 10. 11:27

명령 정죄형보다는 위로 희망형을 먼저 활용하라

신자든 불신자든, 성경이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라고 하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신자의 입장에서 표현하자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 외에도, 사탄의 말을 포함하여 수없는 인간의 말이 들어 있다. 그나마 이마저도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는 점을 볼 때,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를 인간에게 전달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는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부분도 있지만 예수님이나 선지자, 사도들이 전달한 내용도 많다. 그렇다면 하나님이나 그분의 메신저들이 인간에게 진리를 전달할 때 어떤 말씀의 유형이나 구조를 사용했을까? 이것은 오늘날의 메신저들에게도 '효과적인 전달'에 관한 아주 중요한 단서를 재공한다. 현대의 설교자들은 설교의 전달 유형으로 분석해 보면 대개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교훈과 책망과 명령 일변도의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말씀을 전달하는 유형이다 .이들의 설교에는 삶의 구체적인 변화를 위한 권면과 호소가 들어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으나, 청중의 자발적인 헌신은 유발하지 못하고 오히려 반항심과 거부 반응을 초래하기 쉽다는 약점이 있다.
두 번재는, 칭찬과 위로와 격려 드으 축복 일변도의 긍정적인 방식으로 말씀을 전달하는 유형이다. 이들의 설교는 청중의 마음을 쉽게 열고 감동을 준다는 것이 장점이지만, 헌신과 결단과 변화를 촉구하는 교훈적 적용이 빠져 있다는 점이 아쉽다.
청중의 마음에 감동은 주지 못한 채 헌신만 강요하는 설교도 문제지만, 감동만 주고 헌신과 결단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지 못하는 설교 또한 문제가 있다. 감동 없는 훈계가 청중을 따분하게 만든다면, 훈계 없는 감동은 무력한 청중을 낳을 수 밖에 없다.
현대 스피치와 커뮤니케이션의 원칙 한 가지는 '긍정적이고 밝은 내용만 전하고 부정적인 얘기나 권위주의적 표현은 되도록 하지 말라'는 것이다. 현대 설교이 방향도 마찬가지다. 강압적이거나 책망하고 명령하는 설교에 익숙한 설교자는 부드러우면서도 은혜로운 메시지를 선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 역시 현학적이거나 권위적이거나 강압적인 모습을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대설교가로 알려진 곽선희 목사는 "말로만 하는 설교에는 힘이 실리지 않습니다. 삶으로 나타나는 설교가 더 힘이 있습니다. 오늘날 설교자는 솔직함과 진실성, 긍정적 사고방식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이 인정할 만큼 진실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오늘의 설교는 구원의 메시지, 소망의 메시지, 긍정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쪽으로 흘러가는 추세다. 그렇다면 설교가 효과적이 되려면 무조건 긍정적인 쪽으로 흘러가야만 한다는 말인가?
여기에서 성경에 나오는 모범적인 설교자들의 설교 방향과 유형을 분석해 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될 듯하다. 위대한 전도자요 설교자였던 바울 사도는 '직설법'과 '명령법'이라는 수사 기법을 자주 사용하였다. 필자는 직설법과 명령법을 각각 '선포와 호소', '신학과 교리'라는 개념보다는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축복과 승리의 선포', '그 복된 선포로 나타나게 될 인간의 긍정적이고 효과적인 반응'으로 보고자 한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직설법 동사의 근본적인 기능은 주어오 ㅏ술어 사이의 객관적인 사실 관계를 기술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세셤 메이첸은 "기독교는 강정이나 열정이 아니라 사실에 토대를 둔 종교이며, 승리에 대한 직설법으로 시작한다."라고 말했다. 또 신학자 로버트 루이스 대브니는 "설교는 정보를 제공하고 가르치고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이것이 직설법이 지니는 가치와 필요성"이라고 했다.
보수적인 계통에서는 설교의 시작부터 훈계와 책망만 늘어놓는 경우가 많다. 영국의 유명한 목회자 로이드 존스의 말대로,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그저 '훈계의 연장'으로 보는 것 같다. 이들은 설교 시작부터 사람들을 꾸짖고 책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설교하는 내내 청중을 몰아붙이고 강압하고 휘둘러 대며 훈계하고 책망하고 강요한다.
하지만 기독교는 결코 그런 모습으로 출발하지 않는다. 반드시 승리와 축복과 위로의 선포로 시작한다. 이렇게 기독교가 승리에 대한 직설법으로 출발하긴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아주 중요한 사실이다. 직설법만이 아니라 명령을 통해 보충하는 것이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명령법을 '요구, 명령, 훈계 등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기본적인 동사의 형태'라고 정의하며, 신학자 싱크레어 퍼거슨은 "직설법은 명령법으로 나아간다"고 설명했다. 이제 직설법과 명령법의 모범적 실례를 성경에서 찾아보자.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오 ㅏ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 네 평생에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수 1:3; 5-6a)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오직 강하고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라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수 1:6b-7).
위의 본문에서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와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는 직설법이고, 이어지는 "강하고 담대하라"는 명령법이다. 그 다음 내용도 마찬가지다.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는 직설법이고, "오직 강하고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가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명령법이다.
오늘날의 설교에는 '조건부 율법주의'가 만연한다. 수많은 설교자들은 '이렇게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멸영하고, '복을 받기 위해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항상 '만일'이라는 전제를 깐다. 하지만 참 복음주의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 행하라.', '다 이루었음을 믿고 따르라', '축복을 받았으니 순종하라.' 등이다. 항상 '신분과 복음'이 앞서고 그 다음에 '그러므로 이렇게 살라'고 강조하는 식이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전하신 설교 방식이 바로 그랬다. 먼저 축복과 성리로 가득 찬 직설법을 제시하신 후에 그에 적합한 삶과 헌신을 명령하신다.

다음으로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행하신 설교를 살펴보자.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4-15)." 여기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는 직설법이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명령법이다.
요한복음에서도 또 다른 예를 찾을 수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시 말라 하시니라(요 8:11)."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는 부분은 직설법이고,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명령법에 해당한다.
위의 말씀은 모두 직설법으로 출발하여 결국 명령법으로 매듭지어진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또한 너를 정죄하지 않겠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뤄 놓으시거나 예수께서 스스로 행하신 승리와 은혜와 축복의 사실을 먼저 제시한 후, 그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을 권명하고 촉구하는 방식이다. 예수님의 대화나 설교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처음부터 강압적으로 명령하거나 강요하는 경우는 없다. 예수님은 은혜와 위로와 축복과 놀라운 일을 먼저 언급하여 청중의 마음을 여는 수사법을 유감없이 활용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