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실천신학

기독교 철학적 인간학 재형성 전망

예림의집 2015. 7. 14. 09:08

기독교 철학적 인간학 재형성 전망

GERRIT GLAS

 

1. 인간은 누구인가?

 

존재의 궁극적인 의미와 중요성을 찾는데 있어서 인간에 대한 질문보다 더 강렬하게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질문은 없다. 일상의 삶의 분주함 속에서 사람들은 그 질문을 지나쳐 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그들에게 질병과 사건, 또는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 일이 일어날 때까지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인간에 대한 질문, 그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하나의 방식이나 또 다른 방식으로 악이 명백한 상황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이유가 없지 않다. 그것은 역사가 시작되었을 때, 최초의 인간커플이 숨었을 때, 서로에게 그리고 창조주에 대하여 벌거벗고, 상처받기 쉬운 그들 스스로를 자각하는 것을 드러내는 방법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일반 사람이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 오늘날에도 여전한 방법이다.

 

인간에 대한 철학적 질문은 결코 순수하게 학문적인 일수는 없다. 유태인 사상가 아브라함 여호수아 헤스첼은 이것에 관하여 매우 명백하다.

 

철학은 우리에게 우리 공부방의 고립에서 뿐만 아니라 잔인한 비틀거림의 순간 그리고 재난의 위협에 직면한 순간에도 관계에 의해서 살아가기 위한 지혜를 제공해야만 한다. 인간에 대한 질문은 배움의 기관에서 뿐만 아니라 죽음의 수용소의 수감자들 앞에서 그리고 핵폭발의 우산 앞에서도 국고 되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심지어 모든 종류의 폭력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오늘날 가장 긴급한 것이다. 정체성이라는 주제의 다양한 측면을 생각해 보라. Depillarization는 교회와 다른 기관들의 세계관의 전통적인 언어 안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더 이상 명료하게 표현할 수 없는 여지를 가져왔다. 이주 노동자들, 도망자 그리고 망명자들의 유입이 다문화 사회를 이루었다. 그들의 기행은 그들 자신의 정체성은 서양 사람들을 참조했다.(1991 크리스테바의 예를 보라)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는 사람이 자신스스로를 되찾게 하였다. 그리고 약자들이 불안과 위협을 느끼는 풍조에 기여했다. 통신의 새로운 수단들은 사람들이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왔다. 네트위크 사회에 있어서 정체성은 브랜드로 표현된다. 자신이 된다는 것은 강하여지고, 당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줘야 하고 사진에 당신 스스로를 넣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것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불안정과 혼란을 느낄 수 있다. 거기에는 의미의 결핍이 있고, 납득할만한 모델들과 역할들이 필요하다. 후기 근대에 개인은 의존적이고, 가난하고 힘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 철학적 인간학: 간결한 설명

 

1. 철학적 인간학의 과업

인간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는 도덕적, 사회문화적, 철학적, 언어적 그리고 심지어 생물학적인 많은 측면들이 있다. 과거로부터 이러한 측면들의 상호관계를 연구하는 것이 철학적 인간학의 과업이 되어져 왔다. 우리는 이것을 철학적 인간학적 질문의 구조적인 측면으로 부를지도 모른다. 철학자들은 이 연구가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사람들의 관점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 왔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오리엔테이션을 원하고, 의미를 찾고, 존재가치 만드는 어떤 것의 조사에 있어서 지평을 철저하게 조사하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결론적으로 인간의 삶은 불안과 활력에 의해서 특징지어진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철학적 인간학이 인간의 본성의 질문에 관한 것이라고 진술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구조적인 본성 그리고 활력에 관한 질문이다. 예를 들자면, 보편적인 인간본성이 있는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이 보편은 더 특별하게 특징지어질 수 있는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질문은 몇 가지 보충 질문들로 나누어진다. 나는 그것들 가운데 세 가지를 선택했다.

 

1. 인간과 동물 사이의 구별에 대한 질문.

2. 육체와 정신(또는 마음)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

3.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

 

이 세 가지 질문들 모두는 동시대의 철학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매우 간단한 기사에서 이것을 설명하겠다.

 

2. 인간과 동물 사이의 구별

인간에 대한 많은 번영은 진화론적 생물학, 사회생물학, 그리고 후에 접목되어진 진화론적 심리학에 의해 고취되었다. 그 연구는 동물과 인간행위 사이의 유사성에 대한 것이다. 동물 세계는 본성적인 선택 그리고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해 결정되어진다. 유사하게, 인간 세계에 있어서 우선적인 행위의 종류들은 가장 높은 재생산적 이점 그리고 생존적인 가치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타적 행위에 대한 토론은 도덕적인 행위가 진화론적 메커니즘에 의해서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방법을 보여준다.

 

확실히, 이러한 개념들의 어떤 추종자들에게 인간과 동물은 다르다. 그 차이는 인류가 세계 안에서 미완성이고, 무기력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동물들과 비교하면 아기들은 지능발달이 늦다. 동물들과는 대조적으로 살아있는데 필요한 기술들이 결핍되어 있고, 외부 보조자와 양육자에 의존한다. 그것은 발전하는 동안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들에 적응하는 법을 배운다. 인간이 되는 것은 이러한 구체적인 환경 장비의 결핍과 같은 단점을 다양한 상황들에 그것은 그것에 관하여 소위 지연이론이라고 불려지기를 기대했던, 여전히 결정되어지지 않은 동물들로서의 단지 인간을 말한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언급한 것이다. 아놀드 게헤런은 이 묘사들은 의도적으로 모호하다고 지적했다. 인간은 단지 미완성일 뿐만 아니라, 그의 과업을 위해 아직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그리고 언제나 적응과 생존에 필요한 기술들을 얻는데 바쁘다. 그는 또한 세계에 열려있다. 문자 그대로, 어떤 사람도 아직 결정된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것은 이것은 되어질 수 없다는 신념과 같은 것이다.

 

만약 어떤 것이 인간 본성에 있어서 보편적이라면 그것은 전혀 뚜렷하지 않은 것이고, 환경과 자기와의 관계에 있어서 끊임없는 자기위치이다.

 

3. 육체와 정신(마음 또는 영혼) 사이의 관계

도서관들은 육체와 정신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다량의 책들을 보유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서 필요한 것을 스스로 엄격하게 제한한다. 육체와 정신 사이의 관계에 대한 관점들은 대략 두 개의 중요한 그룹들로 나눌 수 있다: 일원론적인 개념들과 이원론적인 개념들

 

 

 

 

 

 

 

 

 

 

이원론적 개념들은 그들이 죽음의 인식과 일치하기 때문에 언제나 직관적으로 매력적으로 여겨져 왔다. 정신(혹은 영혼)은 삶의 정신, , 살아있는 육체로 정의 되어진다. 이 정신은 가장 높은 정신적인 능력들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호흡, 체온 그리고 운동을 포함한다. 싸늘하고 딱딱한 송장은 정신이 빠져나간 육체이다. 마지막 호흡은 영혼의 이탈의 순간이다.

 

이원론적인 관점의 놀라운 면들이 있다. 계급이원론에 있어서 정신은 육체의 그것보다도 더 높은 체계이다. 예를 들자면, 플라톤은 감각과 실제를 나누었다. 몸은 영혼의 감옥이다. 영혼은 영원한 이디아의 높고 신성한 세계에 참여하는 삶을 위해 헌신한다. 그러나 영혼은 이러한 추구를 감각적이고 더 낮은 땅의 욕망들로 가득한 육체에 의해서 방해받는다. 플라톤의 우화에서 우리는 유명한 한 쌍의 말을 통제하려고 시도하는 수레를 모든 사람의 비유를 읽는다. 하나는 고귀하고 훌륭하다. 반면 또 다른 하나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말이 땅에 남기 위하여 그것의 날개를 접는 동안 날개를 가진 말은 천국의 문을 향해서 날아가고자 애쓴다. 비록 그가 육체와 관련한 영혼의 위치에 대해서 높고 낮음을 계획한 것이 그 첫 번째 의미는 아니라 할지라도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우리는 마찬가지로 계급주의적인 관점을 발견한다. 그것은 각각이 영혼의 독특한 양식을 나타내는 다양한 정형화된 원리들의 질서를 가져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식물에게서 나타나는 영양적인 영혼, 동물 세계에서 더 우세하게 나타나서 느끼는 영혼과 인간을 대표하는 생각하는 영혼 사이를 구별한다.

 

이원론의 또 다른 측면은 이원론적 상호작용설이다. 이 접근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사람 가운데 한명인 르네 데카르트는 육체와 급격하게 다른 두 가지 물질들로서의 영혼을 기술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육체는 공간적인 범위에 의해서, 그리고 영혼은 생각하는 능력에 의해서 특징 지워졌다. 그는 물질적인 육체데 대해서 비물질적인 의식을 위치시켰다. 비록 그들이 뇌와 낮은 부분에 있는 작은 조직인 송과체에 의해서 서로서로 영향을 미친다 할지라도 육체와 영혼은 모두 다른 체제이다. 육체-마음(또는 육체-) 문제에 대해 함께 책보다 더 최근의 이원론적 상호작용설의 추종자들에 속한다.

 

이원론의 또 다른 측면은 부수현상설이다. 여기에서는 정신과 마음은 뇌 활동의 부수생산물로 여겨진다. 인과관계의 방향은 일방적이다. 육체 즉, 뇌 정신적 과정의 원인, 그것은 주변의 다른 방법이 아니다. 정신적인 활동은 신경적인 활동의 원인일 수 없다. 물질적인 육체로부터 분리되어진 그 어떤 독립적인 것도 마음에 기여할 수 없다. 부수현상설은 때때로 일원론적인 개념들에 속한 것으로 간주되어지곤 한다. 이 후자의 개념으로 사용되어진 또 다른 최근에 더 인기 있는 용어는 제거할 수 없는 물리주의이다. -거기에는 하나의 실재가 있기 때문에 물리주의이다. 제거할 수 없는 물질적인 실재, 정신적이 현상은 물질적인 현상을 경감시키지 않기 때문에 물리주의이다. 그들은 그 대신에 물질적인 세계에서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사상이다.

 

다양한 육체와 정신의 이원론 가운데 언급되어져야만 하는 마지막은 정신물리적 병행론이다. 데카르트와 같이 이 관점의 방어자들은 육체와 마음은 분리되어져서 전혀 다른 두 가지 물질들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들은 데카르트와는 다르다. 그들이 상호작용의 가능성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육체와 마음 사이에는 그 어떤 인과관계의 연결들이 없다. 당신의 얼굴이 붉게 변했을 때, 이것은 내면의 화난 감정의 영향이 아니다. 우리는 실제로 마음의 상태가 몸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나란히 달려가기 때문이다. 육체와 마음 사이의 관계는 동시발생적인 것이다. 이러한 접근이 종교적인 측면들에 있으므로 하나님은 육체와 마음 두 가지 모두에 서로 같은 연쇄적인 사건들을 일으키는 분으로 여겨진다.

 

일원론적인 사건들은 특징이 육체와 마음사이의 필수적인 구별의 거부로 나누어진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들은 육체적인 것들에 의해 경감되어진다. 아주 드물게 다른 경우에 있어서 육체적인 것들이 정신적인 것들에 의해서 경감되어진다. 소위 정체성이론이라 불리는 이론이 세 번째 다양성을 제공한다. 육체와 마음 둘 다 모두 하나의 발현이고,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는 실재이다. 육체와 마음은 독립체로 분리되어져 있지 않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같은, 따라서 일치하는 것들에 대해서 나타내고 작용하는 방법들이다.

 

위에 기술된 다양한 이원론들과 일원론들은 관념적이 형태들이다. 최근에 뇌와 마음 사이의 관계에서 토론되어지는 것은 인지심리학과 신경생물학의 발전에 의해 영향을 받아 매우 실재적이다. 토론자들은 단순히 언급되어진 측면들의 중간생성물 또는 합성물 형태들의 전 범위를 토론한다. 전망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정체성 이론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관계되어져 있다. 오늘날 이 단어는 보통 물질주의(또는 육체주의)의 형태를 언급한다. ‘동일한이라는 그것은 육체적인(또는 물질적인) 세계이다. 정신적인 속성을 가진 존재는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정신적인 독립체들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또는 다른 방식으로, 정신적인 현상을 가진 존재는 인식론적인 실재로 인식되어진다. 그러나 형이상학적인 실재(제거되어지지 않는 또는 경감되어지지 않는 육체주의)는 아니다. 제거되어지지 않는 육체주의는 일원론자의 형이상학과 이원론자의 인식론을 결합시킨다.

 

4. 개인적인 정체성

오늘날 많이 토론되어진 철학적 주제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개인적인 정체성의 주제이다. 우리는 앵글로 색슨족 인에서 또는 분석철학, 해석학 그리고 포스트모던 사상 안에서 광범위한 흥미를 발견한다.

 

철학에 있어서 개인적인 정체성의 이수는 의식철학의 많은 다루기 어려운 문제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져 있다. 이러한 질문들은 단순히 이론적인 것들이 아니다. 그들은 직관적인 이끌림의 정도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기본적인 이슈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의식을 피해갈 수는 없다. 결국, 그 질문은 반성의 방식에 의해서 대답되어진다. 의식이 없이는 어떤 반성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것을 어떻게 경험했는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려고 시도하자마자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힌트로 얻는다. 그 누구도 내가 했던 방식의 것을 경험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누구도 내가 나 스스로를 의식하는 방법으로 그가 그 스스로를 의식할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내가 사람이고, 대상이라는 의식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두 가지 중요한 철학적 문제들이 등장된다고 말한다.

1. 유아론(문자적으로, ‘자신에서 혼자)의 문제: 나는 어떻게 다른 사람을 이해하게 만들 수 있는 나는 어떻게 일들을 경험하는지; 나는 나 자신 안에서 잠그고 있지 않는가?

2. 다른 사람들 마음들의 문제: 나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세계 내면 접근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이 문제들이 데카르트와 같이 전통적인 생각을 시작의 유산들로 보는데 어렵지 않다.(참조; Van Woudenberg 1992) 궁극적 확실성에 대한 그의 추측에서 그는 모든 아는 것을 위해서의심의 여지가 없는 출발점처럼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다) 명성에 도달하였다.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사실들 표현에서(나는 그들을 오직 나의 의식의 내용을 경유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또는 분별력 있는 인식(환상에 정지할 수 있는)속에서도, 아니면 성취된 개념들(그것들은 관습과 전통들로부터 진행된 것으로)에 있어서 역시 지지되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유일한 확실성은 조직적으로 의심하는 의식과 같이 나의 의식에 존재이다. - 그리고 그와 같이 모든 것을 알기 위한 흔들림 없는 출발점. 나의 존재의 그 사실은 - 나는 이다 - 생각에서 세워진다. 나는 이다, 나는 존재한다, 그것이 반드시 나에 의해 표출될 때마다 진실이거나 또는 나의 마음에 생각된다.(Cescartes, 2nd Meditation) 그것으로부터(1641) 정체성은 불가분으로 (자기의)의식과 함께 결박되어졌다.

 

이 접근은 많은 문제점들이 야기된다, 그 두 개는 그냥 유아론과 다른 사람들의 마음들의 문제가 언급된 것이다. 두 문제들에 일반적 반응은 사람이 그들의 경험들, 그들과 같이 나 자아또는 자기들이 하는 경험들을 포함하여서 보고할 수 있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보고가 완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시 나의 표현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하기 위하여 유지를 한다. 자기의 문제일 경유 주로 묘사적인 완정성의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최초로 의심하였던 것보다 철학적인 문제가 더 적게 될 것이다. 완정성은 경험적인 문제이지 원칙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개인적 정체성의 해결은 현재에서 또는 표현된, 자기 한 사람의 자기-의식에서, ‘자기에 대하여 보고(구두로)하기 위한 능력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이 해결책은 그러나 문제의 중심에서 얻지 못한다. 이 표현들이 참고하는 이 보고들은 자기’-표현된 것들이 무엇이든지 표현()과 함께 일치하지 않는 의식적인 의 표현들이다. (자기)는 그것의 표현과 같은 동일 적이지 않는다. 표현 뒤에 있는 것은 늘 묘사되고 있는 나(또는 자기)이다. 그리고 표현되는 자기 그자신이 있는 만큼 거기에는 다시 다른 사람 숨겨진 나또는 자기가 나오는 표현이 된다. 이것은 희미해지는 나즉 무한한 회복에로 인도하는 나(또는 자신)이기를 위한 연구의 주제이다. 데카르트의 존재에 적용한 것은 즉 생각 하는 에게로 추적하여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 하나는 똑바르게 그 나에 도달하지 못하지만 생각하는 그런 상태의 의식에서는 도달한다. 그러나 이 의식의 시작에서 다시 그것의 생각하는 행동의 의식하는 ‘- 등등, 무한적으로, 남아 있는 모든 것이 우리가 부르는 자기는 그림자 같은 생각까지이다. 더 나아가서 하나는 더 많은 수수께끼 같은 가 되는 반대로 추론한다.

 

정확하게 이것은 정체성에 대한 생각에서 정체성, 특정적 전통에 대하여 생각하는데서 다른 전통의 시작점이다. 그것은 다른 David Hume(1711-1776)과 같이 시작하는 것에서 오늘날까지 Derek Parfit and Daniel Dennett. Hume(1739-1740, 300 [Book 1. Part , Section 6])이 계속해서 말한다. “나의 부분을 위해서, 나는 나 자신을 부르는 안에서 가장 친밀하게 떠오를 때 나는 늘 일부 특정 인식 또 다른, 열에 대한 또는 찬 것, 빛 또는 그늘, 사랑 또는 증오, 아픔 또는 기쁨 등을 우연히 발견한다. 나는 나 자신을 인식 없이는 어떤 때에도 결코 잡을 수 없을 것이며, 그리고 그 어떤 것도 인식 외에는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나 또는 자신은 인식들의 모음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떤 측정에도 거기에는 나 자신 안에서 단수 또는 동일함이 발견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흄에 따르면, ‘개인적 정체성은 우리가 시간에서 그들의 유사성과 연속성으로부터 그들의 결집에서 끌어내는 연속성의 본질에 대하여 말한다. 최근에 Parfit(1984)가 유사성 입장에 변호하였다.

 

이것은 의식의 철학에서 개인적 정체성의 주제에 접근하는 우리에게 또 다른 어려움을 가져다준다. 우리는 생각하는 것이 I 생각하는데 대하여 질문하도록 돌이킬 때, 그 나는 그림자로, 이론적인 존재로 바뀌는 것을 알았다. 나를 알기 위한 모든 시도는 자신으로부터 주체로서 나는 동시에 소외하게 되는 것인 객체화로 결말이 난다. 자기반성에서 자기는 표면상 대상, 더 존재하는 또는 주체를 알아가는 것에 덜 자유스럽게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데카르트 주체와 객체 사이 틈은 자기-지식에서 반복된다. 그러나 Jean Paul Sartre(1936/1960)가 말한 것과 같이 나라는 것은 물체도 객체도 아니다. 표현상 객체인 자기는 자기-경험의 가장 기초적인 논거에 의한 공정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나 자신과 함께 연결되었으며, 나는 내가 나의 자아의 최고가 드러나는 그 행동에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물체 또는 프로젝트로서 내 앞에는 나 자기를 갖고 있지 않지만 그러나 내 뒤에서 나의 자기를 떠난다. 무의식적인 사람, 자신을 잊어버리는 무의식적인 사람은 - 그는 그가 존재하는 자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한 사람이다. 요약하면 오로지 자신에 대한 존재 의식만으로 인간 정체성에 연결 짓는 것은 자기의 객체화의 문제로 달리는 것이다. 자기-객체화에 가까이하는 데카르트에서 피할 수 없음과 운명적인 두 가지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 존재가 자기-관련과 본질적으로 주체인 사실에 공정을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은 개인적 정체성이 의식의 데카르트 철학의 구조에서 생각되어지지 않는 것을 가르친다. 그래서 많은 철학자들이 이 접근을 비판하였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공격적으로 충분한 이것은 종종 자연주의를 더 또는 적게 완화된 종류로 인도된다. 예를 들어, 한 접근은 자연주의(육체적) 과정의 주제에서 정신적 현상을 형식화하여 나타낸다. 이것은 우리가 단지 여기에서 초기의 환원주의(또는 유물론주의자)가 갖고 있는 의미가 아니다. 많은 정신병질환자들에 따르면 사실상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선택적이며 묘사되는 신체적 과정들, 또는 몸 또는 머리의 기능적인 상태 또는 환경에 초점이 된 묘사, ‘무엇보다는 오히려 어떻게에 집중된 묘사의 특별한 방법이다.

 

리처드 로티는 말하는 언어의 예를 사용한다. 언어는 정말로 후두, , 구강과 입술들의 움직임에 의하여 생성된 소리들의 연속으로 구성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체적인 움직임의 분석가들은 우리에게 소리의 의미를 주지 않는다. 소리 의미의 공부는 신체의 그것보다 다른 언어에서 장소를 취한다. - 즉시 관찰하는데 의존할 수 없는 언어이며, 그리고 그 결과로서 해석자들을 의존해야만 할 것이다.(Rorty 1980, 355)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우리가 의미가 생성되는, 비 물질 내용에 있어서 소리 의미에 귀착시키는 사실은 생각하고 있는 것의 잘못된 습관의 결과이다. 의미들은 정신적인 실체들도 영도 아니다. ‘의미과 같은 용어들은 어떤 비 물질들의 무엇에 참고하지 않는다. 즉 그들은 구체적인(후두운동, 두뇌 행동) 어떻게에 참고한다. 본질적으로, 철학은 잘못된 생각을 위한 치료의 종류이다.

 

개인의 정체성의 주제에 적용한 이것은 자연주의자에 따라서, 나 또는 자기 상상적인 정신의 눈에 의하여 소개된 개념들의 시리즈로서의 생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을 의미한다. 영은 무대 뒤에서 관찰자로서 나와 함께 극장 내부에 있지 않다. HofstadterDennett(1981)에 의하여 편집된 책의 제목은 비판에서 힌트가 있는 말에서 게임이다. 마음의 나, 거기에는 많은- 종종 익살스런- 개념의 넌센스가 나타나는 경험들인 많은 생각들이다. 그리고 어떻게 자연주의자들 접근이 심리학자들과 자기의 경험의 도덕적 측면(심지어)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이 많다.

데닛은 제목이 된 설명된 의식 책에서 그의 관점을 요약하여 말한다. 거기에 그는 자기라는 것을 말함은

 

어떤 오래된 수학적 점수, 그러나 귀속들의 수만에 의하여 정의된 추상[나 또는 자기에게 귀속되는 특색, GG]과 그리고 그의 Center of Narrative Gravity 그것인 살아있는 몸의 일대기로 이루어져 있는 해석(자기- 귀속들과 자기-해석들을 포함하는)이다. (Dennett 1991, 426-427)

 

self는 데닛에 따르면 추상적이다. 그는 내가 그리고 세상의 남아있는 사이 경계와 함께 기본적으로 해야만 하는 조직의 원칙으로서 그것에 대하여 생각한다. 한 거미는 자신이 그의 영역에 경계를 구분하기 위하여 망을 위해 실을 뽑아내는 것과 같이 인간들은 말들과 행동들의 망을 엮는다. 그리고 그것의 자기의 이름을 붙인다. 사람들은 독재(나는 이다)와 자기 해석의 망 뒤에서 그의 본부(의식)라는 생각을 하는 완강한 경향을 갖고 있다. 아직까지, 이 모든 것은 인식 환영이라고 데닛은 시사한다. 본질적으로 self자신은 개밋둑 또는 벌집으로부터 매우 많이 다르지 않다. 관찰하는 이것들은 우리 역시 보이지 않는 일부 운영자들이 일을 하는 그 환영을 갖고 있다. 확실한 것은 인간들과 동물들은 다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언어를 갖고 있음이다. 즉 자기- 변호에 있어서 우리들의 기본 전략은 우리가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이런 이야기들과 사건적 목적처럼 원칙처럼 빙빙 돌리지 않는다. - 거미들이 자신들의 망을 빙빙 돌리지 않는 것처럼; 그것은 오히려 그 이야기들이 우리를 망에 걸리게 한다. 의식과 우리의 이야기체의 자아는 그들의 자료에서가 아니라 이 이야기들의 생산이다. 즉 자기는 우리를 구성하는 사회적 과정의 한 유물이다.(Dennett 1991,422-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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