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제 6장 논리(logic)와 증거(evidence)②

예림의집 2014. 10. 9. 20:52

증거(evidence)

 

기독교 진리를 변증함에 있어 하나님과 그의 계시를 전제(presuppose)해야 한다고 하면 변증을 위한 어떤 증거도 배격하거나 부정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온 우주의 사실들이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는데 증거를 배격하거나 부정할 필요가 없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중 어느 하나도 그를 나타내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 세상의 모든 사실들의 해석은 하나님 없이는 불가능하다. 반틸은 이것을 세상에는 “야생적 사실(brute fact)은 없다”고 표현하곤 한다. 이 말은 세상엔 하나님에 의해 “해석이 안 된 사실”은 없다는 뜻이다. 또한 이 말은 순전히 우연에 의해서 주어진 사실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세상 철학자들이나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사상이나 연구를 아직 해석이 가미되지 않은 야생적 사실들이 주어져 있음을 전제로 시작한다. 그들은 주어진 사실들이 우연에 의해 주어진 사실들이라고 전제하고 그것을 해석하며 연구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들의 사유나 이성이나 지식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이고 궁극적이라는 소위 나름대로의 신앙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 믿는 자들도 역시 사실들을 도구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그 사실들은 해석 안 된 야생적 사실들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해석된 사실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난 증거는 없다. 달리 말하면 모든 사실들은 하나님을 증거한다. 반킬은 “어떤 사실이 사실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은 계시적 사실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떤 사실이 주어졌다고 하면 그 사실은 하나님에 의해서 해석된 사실, 즉 하나님을 증거하는 계시적 사실이다.

전제주의적 변증학이 거부하는 것은 증거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고 성경의 권위를 부인하는 의미으 증거이다. 즉 자율적 증거를 부인한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사실들을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들에 관한 철학을 배격하는 것이다. 반틸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모든 형태의 역사적 고찰들은, 그것이 직접적으로 성경 분야에 관한 것이든지 아니면 고고학이나 다른 일반 역사에 관한 것이든지 간에 기독교의 입장이 주장하는 것들의 진실성을 확증하게끔 되어 있다. 그러나 난 불신자들이 갖고 있는 사실에 관한 철학을 도전하지 않은 채 끝없이 사실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으려 한다. 진정으로 효과적인 역사적 변증학은 모든 사실이 기독교 유신론적 입장의 진리를 입증하는 사실들이며 또한 필히 그래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반틸은 “하나님의 계시는 모든 곳에 또한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유신론적 증명들은 절대적으로 유효하다(valid)”고 말한다. 그는 또한 강조하기를 유신론적 증명들의 유효성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반영하는 한도에서 가능하며 그것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다시 진술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또한 그의 증거에 관한 개념을 칼빈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인간은 그 자신 둘레에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에 대한 가장 명백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경이로운 지혜를 증거함에 있어서, 하늘과 땅은 모두 우리에게 무수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 증거는 천문학과 의학 그리고 모든 종류의 자연 과학이 설명하게끔 되어 있는 한층 심오한 증거뿐만 아니라 가장 무식한 농부라 할지라도 그것을 알아볼 수밖에 없는 분명한 증거로서 그는 그의 눈을 뜨기만 하면 이 증거를 바로 보게 된다.

 

이러한 반틸의 주장은 단지 특별 계시로서 성경의 내용만이 아니라 일반 계시로서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 과학이나, 의학이나, 고고학이나, 사건이나, 사물이나, 모든 것이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반틸은 증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정하고 있다. 단지 믿지 않는 자들이 그 증거를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으로, 즉 우연성에 의거한 중립적인 것으로 보는 것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전제주의적 변증학에서 증거를 인정하는 이유는 단순히 증거들의 개연성(probability) 때문이 아니라 그 증거들의 절대적 확실성(certainty) 때문이다. 이 말은 기독교의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불신자와 어떤 증거의 개연성이 더 높으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그 증거가 인간의 자율성을 위해 주어졌는냐 하나님을 위해 주어졌는냐를 따져야 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는 증거는 오직 사람에게 납득이 된 후에야 유효하게 된다. 달리 말하면 사람이 납득하지 않으면 그 증거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무리 증거가 확실하다고 해도 자신의 자존심이나 인생관과 어긋나면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다. 기독교가 원하는 증거는 이런 식의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해석된 사실로 구성된 증거이기 때문에 100% 하나님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주장하는 증거는 사람이 납득하거나 말거나 객관성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실을 증명하는 데 있어서 경험주의 혹은 실증주의에 의존한다. 다섯 가지 감각으로 확인해 보고 실험 도구를 사용해 확인하기도 한다. 과학자들은 어떤 주어진 사실들이나 자료들을 가지고 가설과 전제를 세운다. 경험주의는 어떤 사변적이거나 종교적이고 미신적인 것을 배격하며 경험주의만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라는 전제로 시작한다. ‘경험주의만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다’라는 주장은 사실 경험이나 실험을 통해서 아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객관적이지도 중립적이지도 않다.

사실 경험주의는 실재에 대해 극히 일부분만 알려준다. 현대 과학 문명이 이루어 놓은 업적들과 혜택들이 경험주의적 과학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으로 인해 경험주의가 모든 것을 해석해 주고 경험주의만이 올바른 지식을 전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현대 문명에 있어서 인간성 상실, 도덕적 부패, 생태적 변화, 사회적 혼란, 인간 불신, 소외, 자기 정체 상실, 불안 등은 경험주의적, 과학적, 실증주의적 관점으로는 설명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자들은 기독교의 진리를 부인하고 배척할 때 그런 경험적, 과학적, 실증적 기준을 가지고 공격한다. 더 위험한 것은 기독교 진리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경험주의적 차원에서 기독교를 변호하려 하며 그들을 설득하려 한다는 점이다.

경험주의(과학주의, 실증주의)의 궁극적 전제는 증명해 보여야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증명하지 않아도 아는 사실들이 많고 도무지 증명할 수도 없는 사실들도 많다. 우리가 기억할 수도 없지만 우리 부모님이 나를 낳으신 것을 알고, 증명할 수는 없지만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했음을 우리는 안다. 믿을 만한 친구의 말은 증명하지 않아도 우리는 사실로 인정한다. 조지 마르로테스는 ‘사람은 자기가 아는 모든 사실을 증명을 통해서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 주장하기를 “증명해 보이라는 요구는 항상 아니지만 가끔 적절하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의심이 갈 때 적절한 것이지 만약 그 요구가 일반적인 요구라 한다면 결국 증명은 끊임없이 계속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또 그는 지적하기를 “증명이란 우리 지식의 일반적 기준이 될 수 없다. 왜냐면 어떤 시술(statement)이 사실이리라 먼저 확신하기 전에는 그것이 증명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한다. 이렇듯이 증명은 혹은 증거 제시는 인식 과정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증거를 활용함에 있어서 여러 다양하고 복잡한 요소들이 게입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과학적 실험 방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항상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것은 아니다. 과학적 실험은 단순히 관찰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주어진 자료를 분석하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면 이러한 분석과 평가의 기준은 무엇인가? 사실 과학은 단순히 객관적 자료를 수집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과학적 이론이 온 우주를 설명하는 일반적 이론이라는 주관적 신념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전 과학적 이론이 나중 이론으로 인해 계속 번복되어 왔다. 그러니 한 특정한 이론을 온 우주를 설명하는 일반적 이론으로 믿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맹신적인지 알 수 있다.

과학에 관해서 토마스 쿤처럼 획기적인 평가를 한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는 비록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과학은 중립적이지도 않고 객관적이지도 않음을 밝혔다. 그는 과학이 지난 수 백년 동안 사실들 위에 계속 발전해 왔고 많은 데이터를 냈다고 믿는 것은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과학의 역사는 신학 혹은 형이상학의 역사와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학자들은 사실들에 맞추어 해석을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해석 시스템에 맞추어 무엇이 사실인가를 결정한다. 모든 사실들은 해석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패러다임’이다 과학 역사를 살펴보면 과학은 일률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한 패러다임은 그것을 따르는 일종의 공동체를 이루는데 그 안에서 그 패러다임을 신뢰하고 어떤 의심도 하지 않고 그 안의 충실한 구성원들로 이루게 된다.

 

쿤은 또 주장하기를 과학 한 분야에서 분명한 것이 다른 분야에는 그렇지 않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지구 중심으로 하는 천문학은 지구가 돈다는 사실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듯이 과학 세계에 있어서도 분석, 평가, 해석, 기대, 신념 등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것들의 기준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를 지적해야 한다.

이렇게 사실들을 설명하는 서술들 역시 야생적 사실이 될 수 없다. 사실 모든 증거들에는 이미 해석이 주어졌다.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계시가 나타나든지 인간이 부여한 의미의 해석이 부여되었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반틸은 말하기를 “자연인은 근본적으로 종교와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는 근본적으로 원자와 중력의 법칙에 대해서도 잘못 알고 있다”고 말한다. 즉 자연인은 어떠한 것도 진실로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 법칙 자체는 알고 있겠지만 그 법칙의 의미와 이치는 모른다. 왜 중력의 법칙이 있고,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떻게 그 법칙이 자연에 적용되는지, 왜 적용되는지는 모른다. 이라한 형이상학적 혹은 인식론적 문제를 알지 못하고 법칙 자체만을 안다고 해서 모든 것을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연인은 증거로 제시되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고 그들의 증거는 처음부터 왜곡되어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반틸의 증거 개념은 그의 전제(presupposition) 개념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 진리 체계 안에 그 전제와 증거가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진리를 변증할 때 전제 대신에 증거를 제시하는 것도 아니요 전제적 변증에는 증거가 결여된 것도 아니다. 실제적으로 증거를 제시할 때 우리는 항상 전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전제는 증거로 말미암아 표현되고 증거는 전제로 말미암아 그 의미가 발견되고 더 확실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반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연 속의 계시와 성경 안의 계시는 어느 한쪽이 결여되면 같이 무의미하게 되고, 둘 다 함께 취하게 되면 같이 열매를 맺게 된다.” 물론 성경이 모든 주어진 세계와 사실들을 다스리는 최종적 권위를 지니고 있다.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 계시 역시 계시로서의 권위를 지니고 있지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자연을 해석하는 준거점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사실들을 만드신 분이시며 그 사실들의 해석의 길도 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