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구약신학

출애굽기

예림의집 2014. 9. 29. 17:22

 제 5 강 출애굽기

A. 출애굽의 연대

*미니멈리스트-극도의 회의주의
-구약을 믿지 않음
-구약을 역사적으로 보지 않음

1. 복음주의권 내의 논의 15세기설 vs. 13세기설
 (레이몬드 딜러드와 트램퍼 롱맨, 최신구약개론: 85-91)
 
전통적인 설: 15세기설(주전 1447년정도) -성경본문상의 가장 명백한 이론
근거구절
1. 열왕기상 6: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년 시브월 곧 이월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
솔로몬 제 4 년: 주전 967 + 480 = 1447년.
하지만 이 480년이란 숫자는 상징적인 숫자일 가능성이 없지 않음. 12x40=480. 12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그리고 40은 한 세대의 길이. 그러므로 사백팔십년이란 이스라엘의 역사를 구분하는 이상적인 기간.
2. 사사기서 11:26 “이스라엘이 헤스본과 그 향촌들과 아로엘과 그 향촌들과 아르논 연안에 있는 모든 성읍에 거한지 삼백년이어늘 그 동안에 너희가 어찌하여 도로 찾지 아니하였느냐?”
 
입다가 암몬 왕과 외교적인 의견교환을 하고 있는 것.
암몬 왕은 모압이 전에 암몬 족속의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모압 지역을 다시 차지하려고 하고 있음.
그에 대한 대답으로 입다는 이스라엘이 삼백년 전에 이 땅에 들어온 이래 이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음. 따라서 출애굽은 그보다 40년전.
 
그러나 이 구절은 여러가지 난점을 가짐.
1) 입다의 연대를 솔로몬의 연대만큼 확실하게 알 수 없음. 그러나 대략 출애굽의 연대를 주전 15세기로 잡는데 도움을 줌.
 
현대의 대안: 13세기설--고고학적인 발견에 보다 경도된 의견.
 
근거
1. 출 1:11: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
고고학자들은 이 두 성이 현대의 텔 엘 마스쿠다(Tell el-Maskhouta)와 타니스(Tanis)라고 보았는데, 이 두 장소에는 15세기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특히 텔 엘 마스쿠타는 라메세스 2세(Rameses II, 주전 1290-1224년경)에 의해서 지어짐.
 
2. 고고학적인 증거: 팔레스타인의 유적층들은 모두 13세기에 일괄적으로 파괴된 것으로 보임(Albright, Wright, Yadin). 만약 이 13세기의 유적층들이 여호수아의 정복활동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출애굽(이보다 약 40년 앞섬)은 15세기의 사건일 수 없다. 또한 넬슨 글루엑(Nelson Gluek)은 트랜스요르단 지역에 대한 조사작업을 통해서 이 지역에 주전 1900년-1300년경에 사람이 산 증거가 없다고 주장.
 
2번에 대한 Bimson의 논박(J.J. Bimson, RedatingtheExodusandConquest(JSOTS5;Sheffield:JSOTPress,1978).
1) 라암셋과 비돔이 타니스 및 텔 엘-마스쿠타와 동일시 될 수 있는가?
à 현대의 학계는 칸틸을 타니스보다 선호. 이 칸틸에는 15세기에 사람이 거주한 증거가 있음.
à 또한 비돔은 텔 엘-레테바 혹은 헬리오폴리스등과 동일시될 수 있는데, 이 유적지들 역시 13세기보다 이른 시기의 역사를 갖고 있다는 증거가 있음.
à 글루엑의 조사작업은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너무 원시적.
 
결론
비록 최근에 와서 학자들은 출애굽의 연대를 후대로 보는 경향이 우세하지만 확정적인 것은 아님. 출애굽의 연대에 대한 학자들의 태도는 법적으로 형이 확정되기 전에 피고를 어떻게 취급하느냐 하는 문제와 유사. 보수주의 학자들은 아닌 것으로 판정이 나기까지는 성경상의 기록이 바르다고 간주하고, 비평학자들은 바른 것으로 판정이 나기 전까지는 성경의 기록보다 성경외적인 증거들을 더 상위의 증거로 간주.
 
“아무런 의문 없이 정복활동의 연대를 확정할 수 있는 보다 많은 자료들이 등장하기까지는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 그리고 이처럼 판단 유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옳다고 한다면 두 가지 연대설이 모두 하나의 임시 가설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둘 중 그 어느 것도 교조주의적으로 주장되어서는 안 된다”(B. K. Waltke, “The Date of the Conquest,” WTJ52[1990]:181-200;특히 200쪽을 보라).
 
B. 출애굽기의 구조 및 플롯
I. 서론(1:1-7)
II. 출애굽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됨(1:8-15:21)
III. 이스라엘이 광야에서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됨(15:22-18:27)
IV.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음(19:1-24:11)
V.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성막을 만듬(24:12-40:38)
 
* 출애굽기의 플롯은 다음의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숨겨진 하나님à 드러난 하나님
(2) 하나님에 대한 앎à 하나님의 섬김으로
(3) 바로를 섬김à 하나님을 섬김으로
 
* 이와 관련해서 “알다”([dy)란 주제는 상당히 중요하다.
-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귀결된다.
-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함께 거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C. 열 재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출 5-15장을 드러냄의 플롯으로 이해하는 것은 열 재앙의 신학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준다. 현재까지 열 재앙을 복음주의적으로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시각이 존재한다. 첫 번째 시각은 “자연주의적 시각”이다. 두 번째는 열 재앙을 “신들의 전쟁”이라는 관점으로 보는 시각이다.그러나 이제는 “드러냄의 플롯”이 열 재앙에 대한 가장 적절한 시각을 제공해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 기존 견해들의 장단점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그리고 나서 드러냄의 플롯이라는 시각이 가장 적절함을 제시하고자 한다. 
 
             자연주의적인 연구는 열 가지 재앙 본문의 역사성을 인정하되 이것을 자연현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이 주장을 하는 학자들 중에서도 특히 호트(Hort)란 학자는 좀 더 과감한 주장을 하였다. 그는 각 재앙들이 인과론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출애굽기 본문상의 재앙의 순서대로 발생했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재앙들은 과도한 강우로 인해서 나일 강이 비정상적으로 심하게 범람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처럼 극도로 높은 수위의 물결은 아비시니아와 에디오피와 고원의 특색인 밝고 붉은 빛의 토양과 편모충이라고 불리는 붉은 빛의 미생물들이 씻겨 내려오게 만든다. 이 토양과 미생물들은 나일 강이 붉고 탁하게 변하게 만든다. 이 때문에 고기들이 죽게 되는데 이 것이 첫 번째 재앙이다. 죽은 고기 떼는 개구리가 강변을 떠나게 만든다. 이것이 둘 째 재앙이다. 첫번째 재앙의 토양과 미생물들은 개구리가 바칠루스 안트라치키스라는 병원균에 감염되게 만든다. 이것이 갑작스러운 개구리의 죽음의 원인이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재앙은 모기와 스토목시스 갈치트란스 파리일 가능성이 있다. 모기와 파리는 나일강의 홍수가 물러가고 난 뒤에 고인 물웅덩이 속에서 자유스럽게 부화된다.
             가축들에게 죽음을 가져온 다섯 번째 재앙은 탄저열 때문이다. 이 병은 오염되어 죽은 개구리가 그 원인이다. 인간과 가축에 독종이 나는 여섯 번째 재앙은 피부 탄저병이다. 이 병은 주로 넷 째 재앙의 파리 떼에게 물렸을 때 전염된다.
             이 맘 때쯤에 내린 우박과 뇌우, 즉 일곱 번째 재앙은 삼과 보리는 망쳐 놓았지만 밀과 나맥은 메뚜기 떼(여덟 번 째 재앙)를 위해 남는다. 엄청난 수의 메뚜기 떼가 출몰하게 되는 이유는 처음에 홍수를 야기시킨 아비시니아 고원의 비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의 짙은 어둠, 즉 아홉 번 째 재앙은 특히 심한 “밤신”(bamsin) 때문에 발생했을 것이다. 이 밤신은 2월말으로부터 시작해서 3월 초까지 남쪽으로부터 와서 이집트를 강타하는 “모래 폭풍”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폭풍은 2-3일 정도 계속 된다. 이 폭풍은 홍수의 결과로 범람한 나일강 물에 의해 운반된 진흙더미에서 발생한 두꺼운 층의 미세한 붉은 먼지들에 의해서 훨씬 더 악화되었을 것이다.
             이 설을 따르는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열 가지 재앙에 있어서 기적적인 요소는 이런 자연적 재해가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이런 재해가 특별히 엄청나게 강하게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즉 재해 자체가 이적이 아니라 이 재해의 어마어마한 강도와 규모가 이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은 몇 가지 중대한 문제점들을 갖는다. 첫 째, 이 이적들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굳이 자연주의적인 설명이 필요한가 하는 점이다. 이 이적들을 자연주의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의 기적이나 물 위를 걸은 기적을 자연주의적으로 설명하려는 것과 비슷하다. 이적은 초자연적이기 때문에 이적인 것이다. 이 이적들이 초자연적인 것이라는 점은 애굽의 마술사들이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라고 말한 것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8:19).
             둘 째, 각 재앙들 사이에는 인과관계론적인 설명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요소들이 많다. 예를 들어 두 번째 재앙의 경우를 신중히 살펴볼 때 본문은 개구리가 갑자기 죽게 된 것이 병원균에 의한 감염이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본문이 말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모세는 바로에게 언제 개구리 떼를 사라지게 하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다(8:9). 그리고 바로가 그 시기를 정하자 모세는 이 시기의 결정을 바로 스스로가 정한 것임을 명확히 한다. “왕의 말씀대로 하여 왕에게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같은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니”(8:10). 실제로 개구리들은 바로가 정한 그 때에 다 죽었다. 따라서 성경본문이 말하고 있는 바는 이 개구리들이 병원균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적에 의해서 죽게 된 것임을 바로 자신과 독자들이 오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처럼 열 재앙에 대한 출애굽기의 본문은 결코 자연주의적 해석이 바탕하고 있는 인과론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자연주의적인 해석보다 더 성경본문에 충실한 해석은 열 재앙을 “신들의 전쟁”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즉 열 재앙은 여호와 하나님이 애굽의 신들을 치시는 과정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 해석이 가진 강점은 성경 본문상에서 지지 구절들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출 12:12는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고 말함으로써 열 번째 재앙이 “애굽의 모든 신”에 대한 심판과 관련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참고, 민 33:4). 또한 출 18:11은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 교만하게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본문들에 고무되어 이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한 발 더 나아가서 열 재앙과 신들의 관계에 대한 도표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재앙
관련된 애굽 신들
1. 나일강의 물이 피로   변함
하피(Hapi), 나일 강의 신
기타 물고기   신들(Hat-mehit   등)?
2. 개구리
헤켓(Hekhet), 개구리 머리를 한   여신
3. 이
케프레르(Kheprer)
4. 파리
케프레르(Kheprer)
5. 생축의 죽음
아피스(Apis), 황소신, 다산의 상징
황소는 애굽의   큰 신들인 프타(Ptah)와 레(Re)와 여신 이시스(Isis)와 하토르(Hathor) 등의 현신이기도 함
6. 독종
세크메트(Sekhmet)
아몬-레(Amon-Re)
7. 우박
누트(Nut), 하늘의 여신
슈(Shu), 하늘을 떠받치는 신
테프누트(Tefnut), 습기의 여신
8. 메뚜기
세네헴(Senehem)
9. 흑암
아몬-레(Amon-Re), 태양신
10. 장자의 죽음
바로의 장자

            
             위에서 열 번째 재앙은 애굽의 모든 사람과 가축의 장자, 그리고 바로의 장자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열 재앙을 애굽의 신들에 대한 여호와의 공격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은 바로 역시 애굽의 신앙 속에서 신으로 간주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애굽 종교의 최고 신인 레(Re)의 아들이자 현신으로 간주되었으며, 호루스(Horus) 신 자신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바로의 뒤를 이어 바로가 될 장자에 대한 공격은 곧 신에 대한 공격이 된다.
             이 해석은 장단점을 다 갖고 있는 듯 하다. 우선 장점을 말한다면 출애굽기 9:14가 말하고 있듯이 “내가 이 번에는 모든 재앙을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에게 내려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바로와 애굽 사람들이 깨닫게 하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그들의 숭배의 대상이었던 신들을 치는 것이었을 것이다. 여호와가 자기들의 신들을 벌하는 모습을 볼 때 바로와 애굽 사람들은 당연히 여호와가 이들보다 더 큰 신이라는 논리적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이 가지는 결정적인 단점은 위의 성경구절들 중 재앙과 신들의 전쟁 개념을 명시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는 12:12와 민 33:4는 오직 열번째 재앙과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말 이 재앙들이 애굽의 신들에 대한 공격이었다면 왜 출애굽기 본문은 이 점을 좀 더 명시적으로 제시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또한 비록 학자들이 열 재앙의 각 재앙을 애굽의 이런저런 신들과 연결시키려고 애를 썼지만 그 각 경우가 다 출애굽기 본문이 의도하고 있는 것인지가 확실하지 않다. 위의 도표에서 제시된 커리드(Currid)의 견해를 다른 자료들에서 구할 수 있는 도표와 비교해보면 이 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결국 이 도표들은 학자들의 호기심에서 파생된 가상적인 시도들일 뿐 그 어느 것도 확정적인 것은 아니다.
 
             위에서 지적한 난점들을 고려해 볼 때 지금까지 제시된 견해들은 수용하기가 곤란한 듯 하다. 나는 열 재앙을 본문에 근거해서 설명할 수 유일한 대안은 위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드러냄의 플롯으로 보는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이 재앙들은 바로와 애굽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이 온 땅의 유일한 주권자임을 보여주는 역할을 했고, 이스라엘에게는 신앙의 증거의 역할을 했다.
 
             이처럼 드러냄의 플롯의 입장에서 볼 때 열 재앙을 통해서 파생된 결과들을 본문에 근거해서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가) 11:3은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고 말하고 있다. 5:2에서 바로는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고 말한 바가 있다. 바로는 여호와에 대한 인식과 이스라엘의 운명을 서로 결부시키고 있다. 이제 바로와 애굽 사람들은 열 재앙을 통해 여호와를 뼈저리게 체험하고나자 이스라엘에 대한 시각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더 이상 이스라엘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대리자인 모세를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아주 위대하다”라는 표현은 원문을 직역하며 “매우 크다”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이집트 벽화의 그림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 벽화들은 각 사람이나 신을 그 중요성이나 권위에 따라 다른 크기로 그린다. 신은 인간보다 아주 크게 그리며, 인간들 중에서도 왕은 신하와 백성들보다 크게 그린다. 그런 그들이 모세를 “매우 크다”라고 본 것은 모세가 자신들보다 훨씬 더 권위있는 존재, 어쩌면 신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로 하나님은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같이 되게 하였은즉”이라고 말씀하신다. 열 재앙의 과정을 통해 모세는 바로와 애굽 사람들에게 실제로 신과 같은 존재로 인식되게 되었다.
             (나) 이 드러냄의 플롯의 결과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회복된다. 앞에서도 살펴 본 적이 있는 출애굽기 12:27은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열 재앙을 내리시는 과정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권능은 이스라엘의 경배를 이끌어낸다.
             (다) 열 재앙은 하나님의 예언들이 성취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창 15:14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고 말씀하셨다. 또 출 3:21-22에서는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나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여인들은 모두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거류하는 여인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의 자녀를 꾸미라. 너희는 애굽 사람들의 물품을 취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출 12:35-36에서 성취된다.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만드셨다. 이처럼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게 된 이유는 당연히 열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권능을 뼈저리게 체험했기 때문이다.
             (라) 열 재앙의 드러냄의 플롯을 통해 나타난 가장 중요한 결과들 중의 하나는 당연히 출애굽이다. 출애굽이 이뤄짐으로써 5:2에서 바로가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고 함으로써 촉발되었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이제 그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되자 그는 이스라엘을 내보낸다.
             (마) 드러냄의 플롯은 출 14:31이 보여주듯이 이스라엘의 “믿음”으로 귀결된다.
 
D. 출애굽기 19:1-25 언약과 거룩
1. 19:1-24:11의 구조
출애굽기 19:1-24:11은 다음과 같이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A. 언약의 준비(19:1-25)
                           B. 십계명(20:1-17)
            X.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20:18-21)
                           B´. 언약의 책(20:22-23:33)
             A´. 언약의 체결(24:1-11)
 
여기에서 B-B´의 본문은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면서 주어진 율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머지 A-A´, X 부분은 내러티브로 이루어져 있다. 쟝르만으로도 구조가 자연스럽게 나뉜다.
 
2. 설명
             1절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출애굽한 후 세번째 달 1일에 시내 광야에 도착한다. 그리고 3절에서 하나님은 시내산 위로 모세를 부르신다. 이것은 3:12에 이미 언급된 사항이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이 3:12는 다음과 같은 점들에 있어서 중요하다. 첫 째, 이 산에서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모세가 받은 소명의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된다. 둘 째, 3:12에서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 하시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을 주셨다. 이제 이 산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성막을 건설하면 모세에게 주신 임마누엘의 약속은 이스라엘 전체를 향한 임마누엘의 약속으로 승화될 것이다(출 29:45-46).
             4-6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을 것을 제안하신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크게 다음의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가)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은혜, 즉 출애굽과 광야에서의 구원이 언급되고 있다(4절).
             (나)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에 충실할 것에 대한 촉구가 들어 있다(5a절)
(다) 언약 준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진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물, 선택한 백성, 제사장 나라,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5b-6절).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언약과 구원의 관계이다.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은 것은 이들이 언약을 잘 지켰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이들은 언약을 맺기 전에 이미 구원을 받았다. 언약은 그 다음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언약에 대한 준수가 무시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언약 준수는 5b-6절이 말해주듯이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가는 조건이다. 비록 언약은 구원을 받은 후에 맺어졌지만 언약의 말씀들을 잘 지키고 순종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보물, 선택한 백성, 제사장 나라, 거룩한 민족”이 되게 해줄 것이다. 이처럼 언약 준수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을 통해서 맺어진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조건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보물, 선택한 백성, 제사장 나라, 거룩한 민족”이라는 사명에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민족”이라는 문구가 주는 의미이다. 이 두 문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보물, 선택한 백성”이 되는 것이 결코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사명은 하나님과 세상의 중계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 점은 이스라엘 내에서 제사장의 역할과 비교한 다음의 그림을 보면 선명하게 이해가 된다.
 

 
이 그림에서 보듯이 이스라엘 내에서 제사장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관계의 다리를 놓아주는 역할을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세우셨을 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관계의 다리를 놓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그 선택은 궁극적으로는 온 세상을 향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 19:5-6의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창세기 12:1-3의 소명의 말씀과 상응한다. 특히 “너는 복이 될지라…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궁극적인 목적이 그가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게 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19:5-6에서도 온 세상의 주께서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선택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이스라엘 자신이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하여 온 세상이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말씀들을 가지고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을 것을 제안하셨다. 이 제안을 받았을 때 이스라엘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신약 이후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율법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율법을 준수하는 것을 조건으로 언약을 맺는 것에 대해서 당연히 이스라엘이 싫어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7-8절에서의 이스라엘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이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들이고 준수할 것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이구동성으로 약속하였다. 그 들이 그렇게 흔쾌히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기를 받아들인 이유는 아마 그들이 이 대목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들을 베푸셨기 때문일 것이다.  4절에서 하나님께서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으니라”고 하신 것, 즉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신 것과 광야에서 놀라운 능력으로 그들을 보호하신 것을 그들 자신이 인정하는 것이다. 18:10-11에서 이방인인 이드로도 인정한 것을 그들 역시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서 인정하는 것이다. 출 1-18장에서 자주 반복된 “내가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리라”는 말씀대로 자신들이 알게 된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우리들과 달리 최소한 이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과의 언약 체결은 환영할 일이었지 마지 못해 동의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재료
연결고리
고리구멍
1
성막(!k'v.mi)
미쉬칸
1절
가늘게 꼰   베실
청색 자색   홍색 실
그룹이 정교하게   수놓아짐(1절)
6절

청색 실
2
성막을 덮는   막(!K"v.Mih;-l[; lh,ao)
7절
염소털
11절

재료언급
없음
3
막(2)의 덮개
(lh,aol' hs,k.mi)
14절
붉게 염색된  
수양가죽
 
 
4
웃덮개
(tro[o hsek.mi)
14절
타하쉬의 가죽
 
 

 
재료
도금
받침
갈고리
지성소 휘장
청색 자색   홍색실
가늘게 꼰   베실
그룹 형상
정교한 수
 
 
 
지성소 휘장   기둥(4개)
조각목



성막 휘장
청색 자색   홍색 실
가늘게 꼰   베실
그룹 형상   없음
아랫 단계   수
 
 
 
성막 휘장   기둥(5개)
조각목



뜰 휘장
청색 자색   홍색실
가늘게 꼰   베실
그룹 형상   없음
아랫 단계   수
 
 
 
뜰 휘장   기둥(4개)
조각목?
언급없음

 
E. 두려워말고 두려워하라(20:18-21)
             하나님께서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 등의 여러 가지 신현현상들을 동반하신 상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에 직접 하늘로부터 십계명을 선포하신 것은 그들에게 커다란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18-19절). 그 결과 그들은 자신들이 직접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들을 듣는 대신 모세가 하나님과 자신들 사이에서 중계자 역할을 감당해주기를 부탁하였다.
             이런 백성들의 부탁을 듣고 모세는 20절에서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이는 너희를 시험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오시기 때문이며, 너희 앞에 그를 향한 두려움이 있음으로 해서 너희가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사역).
 
그는 먼저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이어서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두렵고 떨리는 방식으로 말씀하신 이유가 “너희 앞에 그를 향한 두려움이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모순된다. 그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요구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요구를 동시에 하고 있다.
             우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의 측면을 보도록 하자. 하나님과의 만남은 두려움을 불러 일으킨다. 이것은 신구약을 통틀어 성경이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는 바이다. 출 3:6에서 본 것처럼 모세는 자신이 하나님과 만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두려워한다. 유명한 이사야의 소명 기사(사 6장)에서 그는 하나님을 알현하는 순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말하였다. 이와 비슷하게 다니엘은 신적 존재와의 만남으로 인하여 자신이 겪은 체험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 큰 환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 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라고 하였다(단 10:8).
             이런 현상은 비단 구약만의 현상은 결코 아니다. 베드로는 게네사렛 호수에서 밤새도록 고기를 못 잡다가 예수의 말씀을 듣고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은 적이 있다. 이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한 자락을 보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그의 고백은 표면적으로는 문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외쳤던 탄식을 연상시키는 그의 이 고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체험이라는 측면에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의 만남이 이런 반응을 가져오는 예는 계시록에서도 볼 수 있다. 세례 요한은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자 같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계 1:17). 그는 오직 예수께서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실 때에야 겨우 그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었다.
             이처럼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때 보이는 반응은 불가항력적인 두려움이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출 20:20에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두려움의 체험을 주시는 이유가 그들로 하여금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설명한다.
             “어떻게 우리가 죄를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의 화두이다. 이에 대한 답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두려움이다. 두려우신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만이 죄를 이기는 힘이 된다.
             그러나 이 두려운 하나님은 또한 이스라엘과 관계 맺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바로 이 때문에 모세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관계는 두려움에만 기초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20절의 모세의 말은 상호모순되는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첫 째,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한다. 둘 째, 그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 모순된 두 가지 요소들의 신비로운 결합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제대로 맺는 방법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 해결불가능한 모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F. 출 24:12-40:38의 설명
1. 본문의 구조
             출애굽기 19:1-24:11은 다음과 같이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A. 언약의 준비(19:1-25)
                           B. 십계명(20:1-17)
            X.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20:18-21)
                           B´. 언약의 책(20:22-23:33)
             A´. 언약의 체결(24:1-11)
 
여기에서 B-B´의 본문은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면서 주어진 율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머지 A-A´, X 부분은 내러티브로 이루어져 있다. 쟝르만으로도 구조가 자연스럽게 나뉜다.
 
2. 해설
* 성막: 다가오시는 하나님과 다가갈 수 없는 하나님의 변증법
* 다가오시는 하나님: 출 25:8
* 다가갈 수 없는 하나님: 거룩성의 차등 현상
a) 성막의 덮개
 
b) 성막의 휘장
 
c) 성막에 사용된 바느질 기술
             성막 본문을 읽을 때 꼭 알아두어야 할 점을 하나 더 언급하도록 하자. 성막 제작시에 여러 가지 천들을 가지고 각종 물품을 만드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이 때 천들을 가지고 작업할 때 사용하는 기술들에 대해서 히브리어 원어는 엄밀하게 세 개의 용어를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불행히도 현재의 영어 성경들이나 한글 성경들은 이것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지 못한 듯 하다. 앞으로 성경번역시에 이 기술 용어들에 좀 더 유념해서 번역해야 할 필요가 있다.
 
             (1)“정교한 수”(마아세 호셰브, bvexo hfe[]m;, the work of a skilled craftsman) (26:1,31; 28:6,15)
             이 기술은 성막에서 가장 귀한 것들을 제작하는데 사용된다. 성막의 가장 안 덮개인 “성막”과 지성소의 휘장, 그리고 제사장 의복 중 가장 귀한 것들인 에봇과 가슴받이의 제작에 이 기술이 사용된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2)‘수 놓는 작업”(마아세 로켐, ~qero hfe[]m;, the work of an embroiderer) (26:36; 27:16; 28:39)
             이 기술은 중요성에 있어서 다음 단계의 것들, 즉 성막과 뜰을 구분 짓는 휘장, 뜰의 문에 치는 휘장, 그리고 제사장 의복 중 허리띠의 제작에 사용되었다.
 
             (3)“짜기” (마아세 오렉, bvexo hfe[]m;, weaving, 28:32; 39:22,27)
             이 기술은 성막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덜 중요한 것들, 즉 제사장 겉옷이나 속옷 등의 제작에 사용되었다.
 
             이처럼 천으로 작업할 때 사용하는 기술들에도 위에서 말한 “거룩성의 차등” 원칙이 엄밀하게 적용되었다.
 
3. 성막의 외형적 완성과 내적 완성(40:1-16)
             출애굽기의 마지막 부분의 40:1-16은 부속들이 다 완성된 성막을 조립하고, 성결하게 해서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담고 있다. 이 본문에서 배우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첫 째, 이 본문은 조립을 통한 성막의 외형적 완성(2-8절)과 성막의 내적 완성(9-15절)으로 나뉜다. 성막은 그 외형적인 건물이 완성되었다고 해서 결코 건설이 끝난 것이 아니다. 성막의 진정한 완성은 그것의 내적인 완성이다. 이 내적인 완성은 30:22-33의 지시를 따라 만든 관유를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발라 그것들을 거룩하게 하는 절차를 말한다(9-11절).  이 기름부어 거룩케 하는 절차가 없이는 성막은 결코 완성된 것이 아니다.
             둘 째, 성막의 내적 완성은 거기에서 사역할 제사장이 성결케 되는 절차를 포함한다(12-15절). 아무리 성막이 외적으로 완성되었고, 그것이 기름부음을 통해 내적으로도 준비되었다고 해도 그 안에서 일할 사역자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사역자의 기름부음과 성결케 됨이 없이는 성막은 제 기능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적 완성은 사역자의 거룩을 통해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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