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구약신학

서론

예림의집 2014. 9. 22. 16:40

 

서론


오늘날 구약신학은 부인할 여지없이 위기에 처해 있다. 유럽과 미국의 학자들이 최근에 쓴 전공 논문과 학술 논문을 보면, 근본적인 이슈와 핵심적인 문제들이 아직 결정되지 않고 격렬한 논쟁 가운데 있음을 보여준다. 구약신학이 시작된 지 1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라이트는 그의 책 『구약성경과 신학』에서 이제 자신의 입장이 변하여 “아이크롯트 편에 서겠다”고 말했다. 이전에 그는 그의 대표작인 『일하시는 하나님: 낭송으로서의 성경신학』에서 구약신학을 구성하는 질문에 대해 자신은 폰 라드의 신학적 입장에 가까이 있다고 말했다. 이와 반면에, 프랑스의 신학자 야꼽은 그의 최근작 『구약신학의 근본 문제』에서 구약신학의 성격, 기능, 방법에 대한 토로느이 장으로 다시 들어가, 자신의 옛 입장을 단단히 다지며 옹호하고 있다. 화란의 신학자 프리젠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영어로 번역된 『구약신학의 개요』 제 2판을 완전히 수정하고 보완하여 교통 개념을 새롭게 다지고 있다. 차일즈는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작품, 『위기에 처한 성경신학』에서 미국에서 일어난 소위 성경신학 운동의 내용과 기여 및 실패를 소개하면서 이미 그 운동이 “종말”과 “몰락”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그는 “새로운 성경신학”을 위한 새로운 방법론을 제안한다. 차일즈에 필적하는 유럽의 작품은 독일 학자 크라우스의 『성경신학: 그 역사와 문제』로서 이 책은 유럽에서 일어난 성경신학 운동을 1770년 이후로부터 다루고 있다. 이 대작은 구약신학 연구와 연관된 핵심 문제를 길게 다루고 있다.

해링톤은 그의 저서 『성경신학의 길』에서 “성경신학의 방법론, 범위와 영역”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구약신학과 신약신학을 대표적인 신학자들의 입장에 근거하여 설명하고 있으나, 성경신학의 복잡하고 상충된 관계들을 잘 묘사하지 못했다. 이 점에서 크라우스는 이슈와 문제들에 대해 훨씬 종합적이고 민감한 글을 써내려가고 있는 반면에, 해링톤은 로마 가톨릭교의 입장을 잘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약 4년간에 걸쳐 다섯 권의 구약신학이 나왔는데 이런 기록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쉽지 않을 것이다. 가톨릭 학자인 다이슬러는 『구약성경의 근본 메시지』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구약신학을 제시히면서 폰 라드의 신학적 입장을 공격하고 구약성경에 통합적인 중심이 있다고 피력하였다. 그는 하나님과 세상,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구약의 중심이라고 한다. 구약성경의 기본 메시지는 창세기, 출애굽기, 신명기, 선지서, 제사 전통과 지혜 전통이 일관성있게 증언하는 바와 같이 초월적이며 초시간적이고 거룩한 인격적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침벌리는 다이스러와 함께 구약신학을 구성하는 원리로 하나의 주제를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구약신학은 “구약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표현으로 엮여져 있으므로” “「구약 신학」은 구약성경이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을 그 내적인 연관성을 따라 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침벌리는 그의 책 『구약신학 개요』에서 구약 성경을 “연설의 책”으로 봄으로써 그것을 “역사책”으로 여기는 폰 라드와 거리를 둔다. 포러가 쓴 『구약성경의 신학적 기초 구조』는 하나님의 통치 개념과 신인 사이의 교통 개념이라는 이중적 개념을 따라 구약을 소개한다. 그는 프리젠과 부버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의 작품은 일관성있는 구조를 갖고 있지 않다.

맥켄지의 『구약신학』 역시 마찬가지다. 이 책은 (침멀 리가 다루지도 않은)“제의”로 시작하며, 그 다음에 “계시”, “역사”, “자연”, “지혜”, “정치적, 사회적 제도”를 다룬 후에 “이스라엘의 미래”로 마무리 짓는다. 맥켄지는 구조적 원리(중심, 개념, 혹은 모티브)나 특정한 구조를 따르지 않고 “개인적인 연구와 흥미를 따라 선택된 특정한 제목”을 따라 구약신학을 형성해 간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구약신학에 대한 포괄적인 지침서가 될 수 없고 그것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순수히 서술적인 신학을 추구하는 이상의 네 작품과 대조적으로 레만은 그의 작폼 『성경신학 제1부:구약성경』에서 구약신학을 성경신학의 일부로 보며, 그것을 “점진적인 계시 원리”와 “성경 전체의 거대한 통일성”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성경신학이란 성경 역사의 배경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연구하는 것”이며, “성경에 기록된 언약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레만은 성경신학의 틀 안에서 이스라엘 종교 역사와 구약신학을 합성하였다.

구약신학의 역사를 살펴볼 때 1978-1981년은 독특한 시기였다. 왜냐하면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너무나 많은 구약신학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기간 동안 구약신학에 대한 일곱 개 이상의 대작이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영어나 독일어로 나왔다. 베스터만은 『구약신학의 요소들』을 출판하였고, 침멀리의 『구약신학 개요』가 영어판으로 번역되었다. 클레멘츠는 『구약신학: 새로운 접근』을 출판하였다. 그의 “새로운 접근”은 구약성경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유대인과 기독교의 두 공동체를 고려하며 구약성경의 기본적인 통일성을 유지하는 주제로서 “율법”과 “약속”을 두 개의 주된 범주로 제시한다.

북아메리카에서는 세 명의 복음주의 학자들이 구약신학의 격렬한 논쟁 속에 뛰어들었다. 카이저는 그의 책 『구약신학을 향하여』에서 약속이란 중심 주제를 역사의 축을 따라 제시하였다. 마텐스는 그의 구약신학을 『하나님의 설계: 구약신학의 한 초점』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다이어네스는 전통적인 하나님-사람-구원의 틀을 따라 『구약신학의 주제들』을 소개하였다.

테린은 그의 걸작 『희미한 임재: 새 성경신학을 향하여』에서 지배적인 언약 중심의 성경신학에 도전함으로써 새로운 파라다임을 제시하여 학계와 신학계의 공동체에 큰 기여를 하였다.

1985년 차일즈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그의 작품 『정경적 맥락에서 본 구약신학』에서 구약신학을 위한 “정경적 접근”을 다루어 이 분야를 위한 새로운 기초를 제시하고, 오랫동안 확립되어온 방법들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핸슨은 이미 여러 권의 책을 출판하여 자신의 대표작 『부름받은 백성: 성경에 나타난 공동체의 성장』을 위한 준비를 미리 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활동을 고백하며 증거하는 두 개의 믿음의 공동체, 즉 고대와 현대의 상호 교류를 강조하였다. 그는 구약뿐 아니라 성경 전체가 과거에 계시된 절대적 진리로, 현재 믿음의 공동체를 위한 믿음의 기준으로 여겨져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계속 열려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이 방법을 통해 핸슨은 그의 존경하는 스승, 차일즈로부터 멀리 떠나고 있다. 이 두 학자들은 구약신학을 하는 데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두 개의 상충적인 방법론을 실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최근에 들어서 구약신학이 오직 기독교인의 작업인지, 혹은 유대인들도 참여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고 있다. 구약신학 혹은 히브리 성경신학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함께 혹은 힘을 합하여 할 수 있는 작업인가? 그것이 너무나 중립적인, 혹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방법론과 절차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이 작업을 하는 학자의 개인적 믿음은 아무래도 상관 없는가? 순수한 “원래 의미(What it meant)”를 지지하는 입장이 여전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우리가 가진 성경은 전반부 구약성경과 후반부 신약성경을 합하여 성경 전권을 이루고 있다. 결과적으로 “신약”과 대칭되는 “구약”이라는 명칭은 기독교적 입장이므로, 구약신학을 차라리 “히브리 성경신학”이로 부르자는 제안이 나오고 있다. 이 명칭은 최근 수년 동안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의 연례모임에서 구약신학 분과에서 제안된 것이다. 학문 분야의 이름을 바꾸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후에 다루려고 한다.

지금 이 단계에서는 몇몇 유대인 학자들이 구약신학 논쟁에 뛰어들고 어떤 의미에서 히브리 성경신학 작엄에 참여하길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 같다. 물론 그들은 독특한 관점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로서, 레벤슨 교수는 이 주제를 다루는 글을 썼고 일종의 히브리 성경이 유대교나 기독교 전통에서 “토착화”되었기 때문에, 아주 제한된 “조그만 문학적, 역사적 맥락” 안에서만 “에큐메니칼[믿음 상호간] 성경신학”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최근 동향을 조명하는 작업을 마무리하기 전에 구약신학 분야의 역사와 발전에 대한 두 개의 최신 작품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 레벤트로우는 『20세기의 구약신학 문제들』을 출판하였다. 이 간결한 작품은 풍부한 참고자료들을 담고 있으며, “20세기 구약신학의 주된 문제들에 관해 쓴 방대한 참고자료 에세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이 책은 “역사”이 문제와 역사가 구약신학 연구에 미치는 영향과, 최근의 토론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진 대학원 학생들이나 전문인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구약 신학자들이 어떻게 구약을 소화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다루고 있지 않고, 또 원판이 너무 오래 전에 출판되어 성경 연구에 대한 문학적 파라다임의 영향을 다루지 못하고 있다. 이 책에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사이에 관계가 전혀 없다.

구약신학의 발전 과정에 대한, 영어로 쓰여진 최고의 작품은 헤이즈와 프루스너의 공저 『구약신학: 그 역사와 발전』이다. 헤이즈는 프루스너가 박사학위 논문(1952)으로 쓴 제 1부를 확대하고 수정하고 현대화하였다. 이 책은 무게가 있으며 특히 초기와 1950년대의 연구에 기여를 하고 있다. 그 이후의 30년 간 20세기에는 엄청난 연구들이 다양하게 쏟아져 나왔지만, 이 기간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처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저자들의 관심이 아니었을 수 있다. 이 책은 바로 이 시대에 대해 초점을 모으고 있다.

구약신학 분야와 연관된 이슈는 너무나 많고, 우리가 곧 보게 되겠지만 점점 더 복잡하게 되어간다. 구약신학은 고백적인 작업인가? 혹은 구약신학은 그 어떤 종교적 기본 입장도 배제해야 하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과학적 작업인가? 그것은 전통이 만들어 지던 과정을 연구하는 신학으로서, 재구성된 전통의 충돌과 당시에 작용하고 있던 사회-문화적 힘을 묘사하는 것인가? 그것은 성경 본문을 쓴 저자들의 의도를 묘사하는 것인가, 혹은 본문을 쓸 때 받았던 영향력들을 묘사하는 것인가, 혹은 본문을 쓸 때 받았던 영향력들을 묘사하는 것인가? 그것은 하나 혹은 여러 개의 철학적 체계를 사용하여 과거와 현재의 거리를 메우는 것인가? 그것은 역사적 연구나 종교사 연구, 문학적 연구나 신학적 연구의 일부인가, 혹은 여러 다양한 접근들을 합성하는 것인가? 이와 같은 심충적인 문제들과 또 다른 문제들을 우리는 다루려고 한다.

이렇게 전문 논술집의 형식으로 최근에 계속 많은 글들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은 구약신학의 성격, 기능, 방법과 형태에 대한 논쟁이 아직도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최근에 나온 구약신학 책들은 구약신학과 보다 넓은 성경신학의 작업이 유동적임을 보여준다. 최근이 동향은 옛날보다 훨씬 더 복잡해졌다.

따라서 모든 책임있는 주석가와 신학자는 구약(신약)신학과 성경신학의 성격을 결정하는 기본 이슈를 계속 파고들 것이다. 이 책은 철저하고 완전한 작품은 아니지만, 내가 볼 때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다루려고 한다. 우리는 현대 구약신학에서 논쟁 중인 기본 이슈들의 뿌리를 드러내기 위해 성경신학과 구약신학의 기원과 발전을 다루려고 한다. 따라서 현대의 논쟁에 나타난 근본 문제들 가운데 핵을 이루는 몇 개의 중심 문제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폭넓은 기초 위에 서 있다. 이 토론의 바탕 위에 구약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한느 우리의 제안을 마지막 장에서 제시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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