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구약신학

오경 문서설의 역사

예림의집 2014. 9. 20. 16:31

 

오경 문서설의 역사

 

18세기 계몽주의의 분위기 가운데 태어난 합리주의 철학이 두각을 나타내기 천까지는 모든 기독교회가 오경의 자체 주장, 즉 B.C. 15세기에 살았던 역사적모세에 의해 쓰여졌다는 사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아주 소수의 유대인학자들, 예를 들자면 범신론자인 스페인게 유대인인 베네딕트스피노자 (Benedict Spinoza, 이 이름은 espinoso<“가시돋힌”>에서 유래되었다)는토라의 일부분이 후대에 기록되었을 수있다는 가능성을 비추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추측은 유럽의 학계에서 거의 무시되었다.

 

그러다가 자연신론의 역사비평주의와 초자연을 거부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눈에 뜨이게 되었다.(스피노자는 1670년에 Tractatus Theologico-Politicos에서 오경이 못세에 의해 쓰여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3인칭 ‘그’를 제시 하였다. 모세가 썻다면 ‘나’라고 했어야만 했다. 또한 모세는 신면기 33장에 있는바와 같이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기록할 수 없었다. 따라서 에스라가 오경을 마지막으로 편집한 자라고 스피노자는 주장하였다. 이 제언이그의 생전에는 거의 무시되었지만 19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그라프, 퀴넨, 벨하후젠의 의해 문서설을 결정짓는데 괄목할 만한 기여를 하였다.

 

1. 초기의 연구진행

 

오경이 몇 가지의 다양한 문서들로 구성된 것이며 그것들은 모세로부터 5세기가 지난 후 서로 다른 장소와 시간에 형성된 것이라는 문서설은 프랑스 의사로서 창세기를 문학적으로 분석하는 데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진 아스트룩(Jean Astruc)으로부터 시작이 된다. 창세기 1장에는 오직 엘로힘(하나님)만이 나타나고, 2장에는 주로 여호와(혹은 야훼)로 언급되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그의 책『모세가 창세기를 만들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원래의 메모들에 대한 추측들』(Conjectures Concerning the Original Memoranda Which It Appears Moses Used to Composed the Book of Genesis. 1753)에서 그는 이 현상을 모세가 창조에 대한 두 가지의 다른 기사를 제공하는 두 개의 다른 기록들을 자료로 사용한 것으로 추측이 된다고 설명하였다. 계속해서 그는 주장하기를 이 두 장을 구성하면서 모세는 하나님을 엘로힘의 이름으로서만이 알고 있는 저자(아마 더 이전의 저자)로부터 하나를 인용하였고 다른 하나는 여호와로 알고 있는 다른 저자로부터 인용하였다고 한다. 아스트룩의 제안이 즉각적인 호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문서구분의 기준이 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학계로부터 큰 반응을 얻고 문서설의 기초적 가정이 되었다(이때 학계에서는 호머의 서사시를 여러개의 다른자료로 구분하게 되었다).

 

그 다음 단계는 아이히호른(Johann Gottfried Eichhorn)이 1780-1783년 에 출판한 『구약서론』(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으로 넘어갔다. 그는 창세기 전체와 출애급기의 첫 두 장(모세가 불붙는 가시덤불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한데까지)를 여호와 문서(J)와 엘로힘 문서(E)로 나누었다. 그는 서로 다른 ‘평행기사들’과 ‘중복을’(예, 홍수에대한 ‘두기사’)을 두가지의 ‘자료’로 연결시키고 각각의 특징들을 분리시켜 냈다. 처음에는 모세가 이 ‘모세이전’의 기록된 자료들을 편집하는 일을 했다고 말했지만 후에는 그의 『구약서론』에서 오경이 모세시대이후에 기록된 것이라는 그 당시 점점 유행해 가던 견해에 동조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J-E의 구분이 오경 전체에 미치게 되었다.

세 번째 단계는 드 베테(Wilhelm M.L.De Wette)의 신명기 연구이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Dissertatio. 1805)과 『서론』(Beitrage zur Einleitung, 1806)에서 그는 오경중 그 어느것도 다윗이전 시대의 것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신면기는 열왕기하 22장에 따르면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대제사장 힐기야가 발견한 율법책의 모든 표식이 담겨있다고 하였다. 왕과 제사장이 함께 수도 밖에 있는 모든 예배처와 희생을 여호와께 드리는 곳을 폐쇄할 목적으로 뭉치게 되었다. 예배를 중앙으로 집중시키는 것은 모든 왕국의 부분들을 더 가깝게 정치적으로 뭉치게 하는 것이며, 경건한 자들의 모든 헌금을 예루살렘 제사장들의 금고에 쏟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책은 정부의 캠페인을 조작이 된것이며 그것을 발견한 것은 어떤 심리적 충격을 주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이것은 그 책의 연대를 621년(요시야 종교개혁연대)혹은 바로 직전으로 고정을 해 준다. 이리하여 D문서가 생기게 되었다. 그것은 기원에 있어서 J나 E와는 전혀 별개이며 ‘여호와가 선택할 도시’라는 언급(12장을 보라)을 통해 정부의 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형성된 것이다. 이리하여 오경의 ‘자료’가 세가지 문서로 구성이 되었다. -E(가장초기의것), J. 그리고 7세기 문서 D.

 

그렇지만 엄격히 말하자면 드 베테는 문서설 학파에 속하지 않고 파편(단편)이론가에 속한다. 오경의 단편설을 처음 주장한 것은 스크틀랜드의 로마 가톨릭신부였던 게데스(Alexander Gegges)였다. 게데스는 서로 다른 수많은 파편들이 솔로몬 시대에 토라로 편집이 되었으며 그들 중 어떤 것은 모세 시대의 것이었거나, 혹은 그 이전 시대의 것이었고, 역사적 맥락에 맞게 합성되엇다고 주장하였다.

 

게데스의 관점들은 바터(Johann Vater, Kommetar uder den Pentateuch, 1802)로 이어졌고, 그는 창세기만을 39개의 단편들로 분석하였다(이것은 물론E를 또 몇 가지로 나누는 것이었다.) 어떤 단편들은 모세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초종적인 배열과 종합은 바벨론 포로 시대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B.C557-538). 바벨론 유수와 이후에 포로귀환을 예고하고 있는 오경의 이들 구절들(즉, FP26:27-45과 신28:58-63)에서 이후기 이론의 근거가 성립되었다. 창세기 49장에 담긴 예언 조차도 그 예언이 성취된 후의 후대의 성취를 함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명기 28:64-68은 로마에 저항하는 유대인들의 제1, 제2의 폭동, 그로 인해 유대인들이 지중해와 근동 전역으로 흩어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 폭동기가지 실제로 성취된 바가 없다는 것은 주목해 보아야 할 사항이다. (제18장 pp. 371-372참조). 드 베테는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의 역사적 기록들이 오경의 법규들을 드러내지 않고 잇음을 가정하면서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철저히 무시되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자료분석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율법은 후대의 유대인의 왕정 시대가 도래하기까지 생길 수가 없었다고 결론짓게된다.

 

드 베테로부터 후펠드(Hupfeld)가지 문서설은 별로 큰 변화를 겪지않고 발전하였다. 이 막간의 기간에 오경 편집에 대한 다른 이론가들이 생겼다. 에발트, 블릭, 델리취가 옹호한 보충이론(the supplementayy theory)은 모든 다른 문서들 배후에 깔 있는 것으로 B.C. 1050-950년. 곧 사울과 다위ㅅ, 솔로몬의 시기에 있었던 기본 문서, 혹은일련의 전통단위(E)의 존재를 가정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후대인인 J 의 저자에 의해 보충되고 첨가되엇다. J의 저자는 초기으 E자료를 거의 수정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것에 삽입시켰다.

 

괴팅엔 대학과 튀빙엔 대학으 교수 에발트(Heinrich Ewald)는 『창세기의 구성』(Komposition der Genesis. 1823)에서창세기의 본질적 기초는 모세 때의 것은 아닐지 몰라도 아주 오래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아이히호른이 주장한 바 히브리어 텍스트에 있는 반복과 표제들을 다른 저자의 작품이라는 이론을 비판하면서 초기 아랍의 작품들(저자의 통일성이 불문시되는것)이 셈 문장의 중심적인 특징인 이 반복과 표제를 사용하였음을 강조하였다. 그의 책 『이스라엘의 역사』(Geschichte Lsraels, 1840)에서 모세가 개인적으로 십계명(출20장)과 가장 오래된 법들을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다. 창세기 14장과 민수기 33장은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초기의 자료들도 사사시대에 살았던 익명의 한 dbei 족속에 의해 만들어진 언약의 책에 추가되었다. 솔로몬 시대에 기원의 책(a Book of Origins)이 E문서의 대부분 자료를 포함하여 어떤 익명의 레위인에 의해 쓰여졌다.

 

세 번재 보충이 된것이 모세의 전기형식으로 9세기(엘리야시대)에 만들어졌다. 그 후에 선지자 해설자가 나타났고 마지막으로 웃시야시대(8세기 중엽)에 한 유다 지파 사람이 나타나 여러곳에서 ‘야훼’라는 이름을 등장시키고 최종의편집자로서 모든 자료를 재구성하였다. 에발트가 1840년에 쓴 작품은 실제적으로 보충이론으로부터 결정체 이론(the crystallization theory)으로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것은 각 시대의 편집자가 모세의 자료를 가지고 자기 자신의 작품에 여기 저기 뜯어 붙인 것으로 보지 않고 전체를 재구성하는 것으로 보는 수정을 가져왔다. 이리하여 계속되는 분자들의 층에 의해 일종의 문학적인 ‘결정체’가 다져지게 되었다.(이 결정체 이론을 주장한 또 다른 학자들은 크노벨(August Knobel, 1861년)과 슈레이더(Eberhard Schrader, 1869년)로서 그들은 오경을 다룰 때 성장과정을 약간 단순화 시켰다).

 

위에 언급된 보충이론자들 중 두 번째 인물은 블릭(Friederich Bleek)이다.

그는 1822년 문서분석을 여호수아서까지 확장시킴으로써 종래의 다섯 권으로 된 오경개념을 떠나 육경개념을 떠나 육경(Jexateuch, 6권)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모세의 전통은 그 최종적인 기록 형태에 있어서 육경으로 나타난다고 그는 주장한다. 1836년 그는 창세기 연구를 통해 그 중 몇 문단은 진정으로 모세의 것으로 인정해주었다. 통일왕조(약10세기)대에 어떤 익명의 편집자가 창세기의 가장초기형태를 수집함으로써 첫 번째 보충이 시작되고, 두 변째 보충은 요시야 왕 시대(약 B.C. 630년 혹은 620년)에 신명기를 편집한 익명의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는데그가 여호수아서를 육경의 형태로 만들게 되었다. 블릭은 후에 구약서론을 출판하고 그 재판을(1865년) 영어로 번역하여 내어 놓았다(1869년). 이 작품에서 그는 그 당시 문학 비평이 지니고 있던 극단적인 이론들을 비판하였으나 전체적인 문서주의자의 접근법에 대해서는 지혜롭지도 않고 정당치도 않게 많은 양보를 하였다. 위에 언급된 셋째의 인물인 프란츠 델리취(Franz Delitzsch)는 에발트나 블릭보다는 훨씬 더 보수주의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1852년 출간된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그는 오경 중에서 텍스트 자체가 모세의 저작권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모세의 것이라는 견해를 표명하였다. 나머지의 율법들은 진정한 모세의 전통을 제시하슨 것이나 가나안 정복시기까지 제사장들에 의해 명문화되지 않았다. E 문서 중 모세의 것이 아닌 부분(non-Mosaic Parts)은 언약의 책을(출 20:23-23:33) 다 모든 엘리에셀 (아론의 셋째아들)에 의해 아마 편집되엇을 것이다. 조금 후에 다른 편집자가 신명기를 포함하여 여기에다 보충을 하였다. 델리취는 구약성경 증거의 전 권에 걸쳐 훌륭한 주석을 만들어 내었다. 그 중에 어떤 것은 헹스텐베르크의 제자인 카일(Karl Friedrich Keeil)과 함께 출판하였다. 그 인생의 후기에는 (1880년) 그 당시에 lqo적이던 문서설의 수정된 형태로 자신의 입장을 바꾸었다(부수적으로 말하자면 프란츠 델리취는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델리취와는 구별되어야한다. 그의 아들은 앗수르 연구에서 뛰어난 학자였으며 구약비평의 비평의 분야에서는 그 보다 더 자유주의적인 견해를 가졌다).

 

앞에서 우리는 독일 성경신학계에서 보수주의의 기수였던 헹스턴베르크(Ernst Wilhelm Hengstenberg)에 대한 잠간 언급했었다. 그는 모세오경의 모세 저작권을 잘 오호하였으며 아스트룩과 아이히호른 때부터 학자들 사이에서 지지되고 있던 문서 구분의 중요한 논거들을 정교하게 반박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이 1847년 『창세기의 진정성』(The Genuineness of the pentateuch)이란 제목으로 영어로 번역이 되었으며, 그것은 보수주의 구약계의 대표적 학자로 일하였다. 미국에서는 프린스톤 신학교 교수로 있던 알렉산더(Joseph Addison Alexander)와 그린 (William H두교 Green)이 동일한 견해를 맹렬하게 주장하였으며 문서비평학계에 치명적인 비평을 하였다. 그들의 비평은 자우주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결코 성공적으로 반박된 적이 없었다.

 

1853년에는 후펠트(Hermann Hupfeld) 의 분수령적인 작품 『창세기의 자료』(Die Quellen der Genesis)가 나왔다. 이것은 “문서설의 역사에 있어서 크페르니크스적 혁명”으로 알려졌다. 그는 먼저 E문서를 철저하게 분석한 결과 두 개의 구별된 문서가 있음을 알았다. 그 중 하나는 E로서 문체, 어희, 주제에 있어서 J와 너무 흡사하며, J에서 발견되는 자료들에 대한 암시들을 종종 하고 있는것으로서(아마 후대의 것임)엘로힘 기자의 작품 중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것이었다. 사실 하나님의 이름 엘로힘만 없다고 하면 J에서 이문서를 구별해 내는 것이 굉장히 어려울 것이다. (이와 같은 구절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문서를 구분하는 타당한 기준으로서 엘로힘괴 여호와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건전하다는 학설을 붕괴시키는 것임을 주목해야한다). 후펠트는 E문서의 나머지 부분으로부터 이 부분(창세기 20장에서 시작됨)을 뽑아내어 가장 초기의 문서로 판정을 한후 『기본문서』(Grundschrift)라고 이름을 붙이고 E문서는 후대의 비평가들이 P(제사문서)라고 명명한 것과 거의일치한다. 후대의 E(나중에 단순히 E로표기됨)는 J(여호와문서)보다 약간 오래된 것이다. D (신명기적 작품)는 물론 가장 후대의 것이다(요시야시대의 것으로 추정됨) 그러므로 후펠트에 따르면 문서들의 정확한 순서는 PEJD가 된다.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바는 E를 구분하는 것이 후펠트에 의해 독창적으로 마나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이전에 예나의 일겐(Karl David llgen of Jena)이 창세기의 17개의 다른 문서로 구성되어있으며 그 중 두명의 엘로힘 저자와 한 명의 여호와 저자가 있다고 1798년에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편설 학파의 산물이었으며 별로 푹넓은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후펠트의 『창세기의 자료』는 E, E, J의 연속성을 강조하며 이것들을 각각 구분해 버릴 때 구분된 단위들이 각가 독특한 의미를 지니며 구분된 작픔으로써의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논증하려고 한다. 그러나 후펠트 이론에서 가장중요까지의 모든 자료들을 재분류하고 보충하였으며 그 마지막 편집자가 J를 E의 단어나 구절로 착색을 하고 또 E를 J의 것으로 변색시켰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문제가 생길 때마다. R(익명의 편집자)의 서투른 솜씨를 탓하게 되었다.

 

후펠트는 문서설에 있어서 새로운 흥미를 학자들에게 불어넣었다. 그 중 가장 큰 관심을 끈 것이 기본 문서인 E이다. 1866년 그라프(Karl Heinrich Graf)

가 누구보다 먼저 논쟁을 제기하였다. 그라프는 그의 선생 로이스(Eduard Reuss)와 같이 오경에 있는 이 제사규례가 신명기보다 (B.C.621) 더 후에 생긴 것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D가 J와 E의 법들을 반영하긴 하지만, P의 율법 부분은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P의 규례들을 포로시대 때의 것으로 여겨야 한다.(B.C. 587-539). 물론P 에 있는 역사적인 내용을 담은 P. E. J. D와 율법적인 P의 순으로 되었다. 그는 E가 J에 의해 추가되었으며 요시야 시대의 E이 D의 저자에 의해 편집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P는 그라프가 제시한 것처럼 분리된 상황속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화란의 학자 퀴넨(Abraham Kuenen)은 그의 책『이스라엘의 종교』(De Godsdienst van Israel)에서 P의 역사적 부분이 율법적 부분에서 분리 될 수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엿다. 그리고 그라프가 제사규례들이포로시기나 포로후 시기에 만들어졌음을 증명하였기 때문에 모든 P문서가 후대의 것으로 돌려졌다. 즉, 후펠트가 오경에서 가장 초기의 문서로 생각했던 것이 가장후대의 것으로 돌려졌음을 의미하며, 그 문서는 후에 에스라가 느웨미야 8장에 언급된 공적인 성경통독의식을 통해 오경 전체를 다 수집함으로써 그 최종적인형태를 갖게 되었다. 이리하여 문서들의 순서가 새롭게 짜여졌다. 즉, P, E, D, P의 순이다. J는 토라의 기본문서이다 (왜냐하면 J는 ‘신인동형적’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종교가 진화하는 과정 중 가장 초기 단계를 반영해 주기 때문이다). J 다음이 E이다. D는 요시야시대, 즉 유대의 왕조가 붕괴되기 전에 추가 되었다. 에스겔이 포로시기에 활동하는 동안 성결법전(H)이 레위기 17-26장으로 구성되어 P의 가장 초기형태로 만들어졌다. P의 나머지 부분은 6세기 후반, 혹은 5세기 전반부에 형성되어졌다. 즉, 모세가 죽은지 약 1000년 후인 에스라 시대에 이것들이 등장하였다.

 

후펠트, 그라프, 퀴넨 후에 새로운 문서이론의 시대가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에 의해 도래되었는데, 그는 1876년『육경의 구성』(Die Komposition des hexateuchs), 1878년에 『이스라엘역사에 대한서론』(Proiegomenazur Geschichte Israels <Berlin : Druck & Verlag von G. Reimer)을 출판했다. 비록 벨하우젠이 문서설에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하지 않았지만 그는 문서설을 아주 세련되고 설득력 있게 다듬어 주었다. 그 역시 진화론에 근거하여 JEDP를 지지하였다. 그때는 다원의 『종의 기원』L 나타나 학계나 곽계를 다장악할 때였으며 벨하우젠과 그이 제자들이 제시한 원적 정령숭배에서 정교한 유일신까지 발전해 갔다는 이론은 헤겔의 변증법9그당시 철학계의대표적 학파)가 다원의 진화론에 잘 맞아떨어졌다, 문서설은 그 시대에 무르익어갔고 벨하우젠의 이름은그것을 변증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곧 전 독일에 널리 영향을 미쳤고(Kautzsch, Smend, Giesrbecht, Cornill등), 영국과 미국에서 점차 받아들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