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역사신학

개신교 선교의 준비

예림의집 2014. 9. 15. 21:22

 

개신교 선교의 준비

 

<개괄>

1866년 General Sherman호 사건 :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의 순교. 중국에서 활동하던 토마스 선교사가 배를 얻어 타고 평양으로 들어가다 문정관을 만나 야소교를 전하러 왔다고 밝힘. 천주교와의 차별화가 필요했을 만큼 당시 서학에 대한 한국민의 반발이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조선과의 통상을 압박, 내부적으로 수구파와 개화파와의 갈등이 심화되는 계기가 됨.

1873 대원군 하야 -> 개화의 물결을 가속화시키는 계기

1876 일본과의 강화조약(전형적 불평등조약) -> 조선을 속국화하려는 계획. -> 국내적으로 열국의 힘으로 일본을 견제코져하는 움직임 태동.

1882 한미 수호통상조약 체결 : 비교적 평등조약. 조약의 내용은 쌍방 공관 주재에 관한 것

1883 미국의 한국내 공관개설 ; Foote공사

한국 ; 견미 사절단(민영익등 12명, 주로 수구파) 파견.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크게 놀랐으며, 미국에서도 호기심이 강했다. 가우처 목사와의 만남 -> 그는 후에 한국 선교를 강력히 건의, 결국 아펜젤러를 파송하게 됨.

견미사절단은 수구파에서 개화파로 전향.

1884 중국의료선교사로 있던 알렌, 본국에 청원하여 조선에 입국.

12.4 갑신정변 - 실패였으나, 개화파의 존재를 부각시킴. 이때 민영익의 중상을 알렌이 치료 -> 왕실시각의 변화를 초래 -> 의료원 개원의 계기가 됨.

1885 광혜원 개설 : 한국선교의 큰 전환점. 언더우드등 많은 선교사들의 선교 거점이 됨.

브라운 선교사 “한국파송 선교사들은 어느 지역 선교사보다 복음적이였고, 대단히 총명하였다”고 평가

1887 성서 번역위원회 조직(아펜젤러, 언더우드) -> 울프(성공회 중국책임자) 초청, 그가 조선에 와서 선교의 비젼을 발견, 영국에 편지를 띄움 -> 이 편지가 호주의 신문에 게재되고, 이를 보고 감동한 데이비스 남매가 한국선교 결심.

1889 데이비스 남매(호주)가 한국 도착. 오빠가 1년만에 전염병으로 사망. 이를 계기로 호주선교회에서 한국선교회를 적극 시작하게 됨.

마포삼열 선교사 입국.

1890 선교경험이 풍부한 네비우스 입국 -> 세미나를 개최 -> 네비우스의 선교 정책 수립

자립, 자치, 자전. 성경 중심의 선교의 장을 열게 됨

1891 ISAFM(Inter Seminary Alliance For Foreign Mission:전국신학교해외선교대회) 집회에 언더우드, 윤치호가 강사로 초빙됨 -> 3명이 한국선교 자원

1892 Sunkin, Tate, Reynolds 세 사람이 남장로교 파송으로 옴

1893 「장로교 공의회」 결성(북,남장로교,호주 선교회)-> 한국에 장로교중심의 선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1895 청일전쟁 : 평양을 중심한 전쟁에서 청,일 두 나라에 대하여 적개심을 갖고 있었을 때, 선교사들이 백성들을 끝까지 도움 > 선교사를 친구로 여기게 됨. 복음화의 계기가 됨.

1898 카나다 선교회 시작.(맥킨지의 죽음을 계기로) - 게일

1901 평양신학교 설립. - 1884년 선교시작 후 17년만에 신학교 설립(미국은 100년)

1903 원산 부흥운동

1905 을사보호조약

1907 평양 대 부흥운동

감리교 협성신학교 설립

1910 한일합방. - 선교사들은 찬성하는 쪽에 섬

1911 105인 사건. 서양 선교사들을 제거키 위한 음모. 총독 살해음모를 선교사들에 누명케 함. 이를 계기로 선교사들은 일제에 대하여 경계하며 반발하게 됨.

1916 「신학세계」 발간(협성신학교)

1918 신학지남 발간

1919 삼일운동. 원인 ; 기독교의 민족의식 고취의 발로 <- 기독교 민족의식의 climax

민족교회 형성의 시작 -> 실패로 인하여 신앙이 내향화, 종말론 발흥

일본 : 무력통치의 한계를 깨닫고, 문화정치를 시작

1927 박형룡, 백낙준 등 외국 유학생 귀국

1930 자유주의 논쟁

1934 총회의 자유주의에 대한 결정

자유주의 집필자의 기고 불가/창세기저작설 부인하는 김영배,김춘수 목사 면직

박형룡, 표준성경주석 집필

1935 현대신학 난제 선평

1938 평양신학교 폐교. 신사참배 강요에 따라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철수, 폐교.

1940 신학지남 폐간.

조선신학교 설립(보수주의의 공백을 틈타) -> 1934년 총회 경고자들이 시작

1940-1945 자유주의 확산. 해방후에도 지속.

45년 이후 선교사들 귀환

1946 조선신학교 인준.(미 남장로교회)

신사참배 거부자 출옥에 따라 한상동, 박윤선 목사, 고려신학교 전신 성경학교를 개설

1947 51인 진정사건. -> 박형룡 박사를 만주에서 초빙,귀국.

1948 장로회 신학교(총회 인준) 교장으로 박형룡 부임

1952 고신 분리

1953 조선신학교, 기장으로 분리

1959 WCC문제로 통합과 합동이 분리(44회 총회)

통합측 - 연동 총회 개최, 합동측 - 승동총회

1960 4.19 - 장로교는 이 문제를 논할 겨를이 없었다.

1967 「67년 신앙고백」 : 미국의 신앙고백변경 수용문제로 이견.

한경직 목사의 통합 거부, - 분열을 고착화

1973 빌리그래함 서울 대회. CCC 중심, 대학중심의 선교 열기 시작

1974 EXPOLO '74 -> 선교헌신자들의 대거 출현

1977 민족 복음화 대 성회

1979 이영수 총회장의 주류에 대해 비주류가 분리->비주류의 중심:호남측

1980 세계 복음화 대 성회

1981 KETS (한국복음주의 협회회)를 조직. (합동:김의환, 고신:오병세, 서울:조종남, 통합:한철화)

1981 합신 분리(김명혁)

KETS 새로이 활발한 활동시작

CCC, IVF (해외 복음주의 운동에 영향을 받음)등 새로운 복음주의 운동

새로운 교회 모델 제시(하용조,이동원,홍정길, 옥한흠등)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 -> 과연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나?

1) 근본 정통주의

2) 토착화 신학

3) 양극단을 피하려는 복음주의

 

󰡔한국의 개신교 선교의 준비 󰡕

* 한국 선교 ; 적기에 이루어졌다 -> 때가 차매

1) 불교, 유교, 천도교가 설득력을 잃어갈 때

2) 주변의 여러 환경 - 국내의 정치 상황과 관련하여

 

1. 국내 정치 상황 - 1866년 제네럴 셔먼호 사건이후의 국내 정치 이슈=개항

1) 위정척사파 - 이항노, 기정진, 김평묵, 최익헌등

* 개항반대 - 전통적인 종교, 문화의 계승발전을 구국의 길이라고 주장, 개항시 전통문화가 파괴된다고 생각.

* 기독교 배척 - 천주교의 탄압 강화, 기독교를 오랑캐 종교로 매도. 기독교 = 위험한 종교로 봄. ∵ 기독교가 동양의 전통적 위계질서를 파괴해버린다고 보았기때문(남여평등 교리)

* 대안 - 유학=정학이라고 명명

* 1860년과 1870년 사이 세력이 강했음. 대체적으로 한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 개화파와 수구파의 세력 다툼 ; 전환점의 두가지 사건

① 갑신정변(1884.12.) 실패였으나, 개화파의 세력의 실존을 보여준 계기

이후 정책의 결정에서 개화파의 입장도 고려하게 됨.

② 영남 만인소 사건(1881년 3월) 온건 개화파의 김홍집이 일본에서 청인 황순원의 글 「사의 조선책략」을 왕에게 헌사. 동서에는 저자는, 남하하는 러시아의 견제를 위해 한국, 청나라, 일본, 미국이 연계하여 견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데, 왕이 이를 받아들이려한다는 소문에 위정척사파가 반발하여 상소한 사건

 

2) 東道西器派 - 온건개화파, 김윤식,김홍집등 <- 흑묘백묘론

* 모델 : 중국식 개화 -> 중국이 온건한 개화로 고유한 전통을 상실하지 않으면서도 경제적인 여유를 갖는 국가가 되었다고 본 것. 즉 전통을 보존하되 서양의 기술문명을 부분적으로 도입하자는 것.

* 그러나 이들은 양쪽으로 비난받음

 

3) 급진 개화당 -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등

* 모델 : 일본 -> 한국과 비슷한 여건의 일본의 발전 원인을 명치유신으로 보았던 바, 명치유신의 핵심을 서구의 문물을 과감히 수용한 정책으로 이해.

* 이들의 주장

① 서구 기술문명의 수용을 위한 봉건질서의 재편

② 서구 문화의 기간이 된 기독교도 과감히 받아들일 것을 주장

③ 양반제도의 타파(지배층과 피지배계층과의 균형을 위함)

* 결과 - 갑신정변, 실패로 박영효와 김옥균 일본으로 망명

① 박영효의 상소문 “...오늘날 천주교와 야소교가 왕성한 구미 각국은 그 나라가 가장 강하고 왕성한데, 우리의 조선 유교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둘 다 쇠퇴하여 이 때문에 국세가 침약하였으므로 한심하고 탄식할 따름이다..”

② 김옥균 - 서양의 부강이 기술문명에 있고 그 기술 문명의 뿌리는 기독교라고 확신

조선이 살 수 있는 두길 = 의술과 교육 그리고 기독교 전래로 봄

그는 일본 청산학원 설립자 맥클레이 선교사를 만나 한국선교를 호소함.

-> 이후 가우처 목사의 요청으로 한국 선교를 타진하기 위해 맥클레이 선교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1884년 6월), 다리 역할을 해준 사람은 왕의 총애를 받던 김옥균이었다.

맥클레이 선교사의 요청을 김옥균이 왕에게 전달하고 왕은 삼일만에 병원 선교와 교육을 허용.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중 개화파를 통해 한국선교의 장을 열게 됨.

 

2. 중국에서의 준비

중국 선교 : 6세기 경교이후 18세기들어 Robertson,Hudson Taylor 등에 의해 시작.

 

1)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

* 존 로스 - 1873년 압록강변에서 한문성경을 한인촌에 배포. -> 이로써 3명이 예수를 영접

1874년 고려문 방문, 이웅찬을 만남. 이웅찬은 로스의 한국어 선생이 됨.

1875년 이웅찬은 세사람의 의주청년 백홍준,이성화,김진기에 감화,이에 참여케 함.

이후 존 로스는 성경번역에 착수

1876년 네 사람이 성서번역 중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맥킨타이어 선교사에게 세례.

1879년 서상륜 세례

1883년 김청송 세례받음.

1882년 요한복음과 누가복음 출간.

1884년 마가,마태복음

1885년 로마서,고전후,갈,에베소서 번역

1887년 ‘예수성교젼서’, 즉 신약 완간 <-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성경번역 모임시작 시기

* 존 로스의 참고성경 - 중국어 성경(주로), 헬라어 성경, 두 권의 영어 성경

* 존 로스 성경의 특징 - 한문을 쓰지 않음. 이는 한국인에 의한 성서번역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됨

* 중요점 - 성경번역하던 이들이 예수를 영접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귀향.

특히, 김청송은 고향으로 돌아와 쪽 복음을 배포 -> 이를 통해 1884년 12월 75명이 영접

* 결 론

① 한국의 선교는 성서 번역에서 출발했다.

②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의 복음 전파.

③ 뿐만 아니라 교회가 한국인 스스로에 의해 자립의 틀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3) 일본에서의 준비

* 이수정 - 임오군란(1882년) 이후 박영효와 도일, 일본의 농업정책에 관심.

따라서 일본의 최고 농학자 율전박사에게 사사받던 중, 그의 인격에 매료되고, 그의 종교인 감리교에 관심 -> 율전박사가 안천영이라는 일본목사를 소개 -> 도일 후 9개월만인 1884년 4월 29 일 노월정 교회에서 세례

* 이수정의 세례로 일본에 있던 외국선교사들은 한국선교에 관심을 갖는 계기

* 이수정은 이후 미국의 유명 선교지 The International Review of the World에 한국선교를 호소하는 호소문을 기고(1884. 3.호) -> 이 편지에 감동된 두 사람이 한국선교사로 결심 ;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 이수정은 귀국후 즉시 체포되어 처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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