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우스 1세(590-604)
1. 생애
-네 명의 라틴 교회의 박사들(Doctors of the Church) 중의 하나로 인정됨: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제롬(Hieronymus), 암브로시우스(Ambrose).
- "590년 수도원에서 불려 나와 로마의 감독직에 취임한 그는 교황권을 공고히 하고 로마 제국의 폐허 위에 교회를 서구 세계에서 살아남은 하나의 강력한 지배력으로 건설하는 데 있어서 어느 누구보다도 크게 기여한 사람이다."(스티븐 니일, 기독교선교사, 홍치모·오만규 공역, 78)
-그레고리우스는 로마의 유력한 원로원 가문에서 태어났다(540). 젊은 나이에 고위 관직에 오른 뒤 573년 이전에 로마의 장관(로마 시장praefectur)이 되었다. 그러나 수도원 생활에 매력을 느끼고서 막대한 유산을 처분하여 빈민 구제와 수도원 설립하였다-시칠리아에 6곳, 로마에 1곳을 설립하였는데, 로마에서는 카엘리우스 언덕에 자리 잡은 궁정 터에서 설립하였다.
-그는 자신이 설립한 로마에 있는 수도원에 수사로 들어갔다. 수도원에서 그는 지극히 검소하게 살았으며, 건강을 해칠 정도로 철저한 금욕 생활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중 이 시절을 회상하면서, 이때가 자기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3년 뒤 교황이 새로 즉위하면서, 로마의 부제(집사diacon) 7명 가운데 하나로 임명되어 로마 시에 행정책임을 맡게 됨. 현재는 49명.
-교황 펠라기우스 2세(Pelagius II, 579-590)에게 콘스탄티노플 주재 교황대사(apocrisiarius)로 파견되었다. 그는 헬라어를 배우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 직책을 유능하게 감당하였고. 585/6년경에 다시 로마로 돌아와 있었으며, 성 안드레아(Andreas) 수도원의 대 수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성직자단과 원로원과 백성의 만장일치에 의해 교황에 선출되었고, 14년 뒤인 604년 3월 12일 죽었다.
-그는 수도원 출신으로서 최초로 교황의 권좌에 등극하였다. 그는 교황이 된 뒤에도 수도원 시절과 다름없이 매우 검소하게 살았고, 수사들을 측근으로 삼아 그들을 주교와 교황특사로 임명했으며, 로마 공의회에서 성 베네딕투스의 수도회칙을 승인했고, 수도원들의 자유와 재산을 보증했으며, 자신의 모범과 영향력에 의해 베네딕투스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자신의 임기 내내 자신이 사도 베드로의 계승자이자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확고한 의식을 가지고 교황청과 영원한 도성을 지키고 그 세력을 증진하는 데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 부었다.
*천사성
-시가행진을 하면서 회개 의식을 함
-잘못해서 벌임 임했다(많은 질병과 전염병)
-천사성 앞에 올 때 칼이 칼집에 꽃혔고, 질병이 그쳤다는 우화가 전해짐.
2. 그레고리우스 I세의 활동
*로마 교회 지도자로서의 활동: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을 다가올 심판에 앞서 주님의 백성을 보살피는 책임을 받은 자로서 여기고, 자신이 맡은 사람들을 사랑에서 훈계하고 보호하고 지원해야 할 의무를 지닌 "하나님의 종들의 종"으로 여겼다
-그는 먼저 시칠리아, 이탈리아, 프로방스에 걸쳐 있던 로마 교회의 막대한 재산에 대한 관리에 개혁을 단행하였다. 즉 그 수입을 지역의 주교나 세속군주들이 가로채는 경우가 많았고, 그레고리우스는 이 토지들에서 나오는 수입은 가난한 자들이 먹고 입고 지원받아야 하는 몫이라고 여겼다.
-이에 그는 자신의 대표들을 임명하여 그 토지들의 경영을 감독하고, 직접 많은 시간을 들여서 곡식을 심는 문제에서부터 가축에게 사료를 공급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지시를 내렸다. 이러한 교회의 수입의 회복을 통해 그레고리우스는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 그리고 여타의 '우리 시대의 불안'의 희생자들을 지원할 수 있었다.
-많은 편지들을 통하여, 농사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함. 세밀한 관리. 깊은 관심과 살핌
-[예배개혁]그레고리는 교회 의식을 체계화하고 완성했고, 그것에 훨씬 더 장엄한 면모를 띠게 했다. 자신의 이름이 붙은 새로운 찬송형식(그레고리우스 성가, Cantus gregorianus)을 지닌 미사를 위한 교송을 모았다. 예배와 예규를 개선하였다.
-[올바른 목회자의 선임] 그는 주교들을 임명했고, 의무에 태만하거나 범죄를 저지른 주교들을 견책하고 면직시켰다. 당대에 만연하던 성직 매매 관행을 단호히 반대했으며, 성직자들에게 사역의 대가로 수수료를 징수하거나 혹은 주더라도 받지 말라고 경고했다
*정치지도자로서의 활동:
-그레고리우스는 교황에 즉위하던 바로 그 순간에 로마 시를 위협하고 있던 롬바르드족과 협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로마 황제/총독과 상의를 하지 않은 채로 롬바르드족 군주들과 조공 지불을 조건으로 휴전 협상을 진행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동로마 황제와 롬바르드족과의 전면적인 휴전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한 왕과 교황이 직접 나서서 휴정협정을 한 첫 번째 사례.
-“그는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제국 군사력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탈리아와 그 백성에게 평화가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에 반드시 휴전이 성사되어야 한다고 보았다(워커, 기독교회사, 247).”
-비슷한 방법으로 그레고리우스는 메로빙거(프랑크) 군주들의 착취 정책 아래 교회의 행정과 목회가 부패해 있는 상황에 관심을 갖고서 메로빙거 왕들과 편지를 주고받았고, 그들과 동로마 황제 간의 항구적인 평화조약 체결을 주장하였다.
-정치적 안정과 평화에서 교회와 교인들의 안녕이 유지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위와 같은 활동을 통해 그레고리우스는 사실상 중부 이탈리아의 독립 군주이자 이탈리아 평민들의 보호자 지위에 서게 되었다. 또한 그의 정책들은 8세기 교황들이 동방 제국에 대한 종속 관계를 끊고 새로 구성된 프랑크 왕국과 동맹을 맺는 선례가 되어 주었다.
-교회와 국가가 긴밀하게 연결되는 계기가 되었다.
3. 로마 교회 밖의 기독교 세계에 대한 그레고리우스 1세의 활동
*동로마 교회와의 관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요하네스(John the Faster, 582-590 재위)가 자신을 "에큐메니칼 총대주교"(전 세계 교회의 머리Oekumenischer Patriarch)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자, 그레고리우스는 5 곳의 총대주교(로마, 안디옥,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는 각각 동등한 총대주교이며, 자신의 권위를 옹호하였다. 어느 누구도 "보편교회의 총대주교"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없다고 강조하며, 자신을 "하나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로 나타내었다. =>로마 교황이 스스로를 칭하는 공식명칭
-그레고리우스는 색슨족 왕 에델베르트(영국 Ethelbert of Kent)의 카톨릭 기독교도였던 프랑크족 공주인 베르타(Bertha)와의 결혼을 이용하여 영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의 성 안드레아 수도원의 수사였던 어거스틴(Augustine)과 몇몇 수사들(30여명)을 파송하였고, 597년 켄트(Kent)에 상륙한 어거스틴은 에델베르트를 개종시키는데 성공하고 601년 부활절에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어거스틴은 켄터베리에 수도대주교좌를 두었고, 그곳에 교회를 세웠으며, 근처에 수도원을 지었다. 그는 604년까지 로체스터와 런던에 주교구를 설치하였다.
-그레고리는 약 850여 통의 편지로 교회의 문제들과 자신의 이상과 권위를 다른 이탈리아 밖의 교회들에게 전하였다. 스페인, 갈리아, 아프리카 그리고 심지어 일리리아의 수도대주교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서방 세계의 귀족들과 왕들, 여왕들, 동방 세계의 황제들 및 총대주교들과 서신을 주교 받았다.
-서방 세계의 수장으로서 이탈리아, 갈리아, 스페인 그리고 브리타니아 교회들을 보살폈고, 몇몇 수도대주교들에게 팔리움(Pallium: 대주교가 착용하는 영대)을 보냈으나, 법적 관할권은 주장하지 않았다. 정당성 부여.
=> 후일 그레고리우스 7세는 로마 교황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이 추기경이 되는 자를 로마로 불러 팔리움의 착용식을 행하였다.
4. 그레고리우스 1세의 저서 및 사상
*<목회 규율>(Liber regulae pastoralis):
-그레고리우스는 기독교 주교를 영혼들을 보살피는 목자로 보았다. 이 책은 그레고리우스가 교황의 직에 오른 지 채 1달도 되기 전에 완성한 것으로 여겨지며, 그가 죽기 전에 이미 그리스어로 번역되었고, 9세기경에는 알프레드 대제에 의해 앵글로 색슨어로 번역되었으며, 중세 서방에서 이 주제에 관한 중요한 교과서가 되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설교를 성직자들의 주요 의무들 가운데 하나로 규정하며, 이 일에 자신이 몸소 좋은 본을 보였다. 그는 성직자들에게 임직 초기부터 교만 죄를 범하지 않도록 단단히 주의를 준다. 고위 성직자가 되면 겸손을 배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성직자는 말뿐 아니라 살아가는 모습으로도 설교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직위의 필요상 지극히 숭엄한 일에 관해 말해야 하는 사람은 지극히 숭엄한 교훈을 삶으로 예증할 필요도 똑같이 강하게 느껴야 한다. 설교로 명하는 것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 직접 본을 보여주게 되면 그의 설교가 청중의 마음에 깊이 파고 들어간다."(필립 샤프, 교회사전집 4, 219)
-그는 또한 이 책에서 명상과 행동을 겸해서 시행하라고 조언한다(교만죄를 짖지 않도록):
"우리 주님은 늘 산에 올라 기도에 힘쓰셨지만, 성읍들에 들어가 기적도 많이 행하셨다. 이렇게 하시어서 성직자들에게 높은 세계를 열망하면서도 동시에 약한 자들의 처지를 헤아릴 줄 알아야 함을 보여 주셨다. 따뜻한 마음이 실린 자애는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올수록 훨씬 더 높은 곳으로 힘 있게 올라가는 법이다." (필립 샤프, 219)
-영적 지도자는 영혼의 내면생활을 잊을 만큼 외적 일들에 몰입해서도 안 되고, 내면생활에만 몰입하느라 외적 일들을 소홀히 해서도 안 된다:
"교리의 말은 자비의 손으로 전하지 않으면 궁핍한 자의 마음으로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필립 샤프, 219)
*그레고리우스의 <목회규범>
-“목자의 직임을 수행할 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이 사람은 사람들이 본받아 살 수 있는 모범으로 모든 면에서 자신을 발전시켜야 한다. 모든 육체적인 격정에 대해서는 죽고 성령의 가르침을 따라 살고, 이 세상의 모든 행복을 뒷전에 제쳐두고 어떤 불쾌함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내면적인 가치 추구를 하는 자여야 한다. 최고로 잘 어울리는 복장으로 몸은 너무 약하지 않고, 영은 너무 창피하지 않을 정도가 되어서 몸과 영이 그를 방해하지 않아야 한다.
-그는 남의 것을 탐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되고 자기 것을 풍성하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동정심을 발휘하는 데에 앞장서고 용서에는 빨라야 한다. 하지만 마땅하지 않은 관대함 탓에 정직의 성채를 이탈하는 데로 기울어져서는 절대로 안 된다. 허락되지 않은 것은 탐하지 않아야 하며, 다른 사람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경우에는 자기 자신의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안타까워해야 한다.”
-좋은 지침서를 구하거나, 내가 직접 만들어 보자(A4 1장).
*<욥기에 나타난 윤리들>(Morals on Job):
-그레고리우스는 여기서 수도원의 영성에 관한 그의 이해를 보여준다. 욥기를 알레고리 방식으로 해석한 이 책에서 그는 적극적인 도덕적 생활뿐만 아니라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명상하는 생활을 강조하였던 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마찬가지로 그도 하나님 나라를 인간이 얻으려고 분투하는 목표로 보았다.
-그레고리의 욥기 주석에서“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어떤 본문 구절들을 우리는 역사적(-문자적) 해석을 하면서 빠르게 지나간다는 사실이다. 어떤 본문들은 앞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을 눈 여겨서 우의적의 해석 방법을 도구 삼아서 철저하게 조사한다. 그리고 또 어떤 것들은 우의적으로 고양시켜야 하는 윤리적 요점만을 천착하면서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어떤 것(성경구절)들은 우리가 한꺼번에 모든 수단을 사용하고, 그래서 삼중성을 전달하려고 하면서 대단히 세밀하게 탐구한다. ...”
*<이탈리아 교부들의 생애와 기적들에 대한 강론들>(Dialogues on the Life and Miracles of the Italian Fathers): 4권
-신앙적인 영웅담
-이 책은 네 권으로 되어 있으며, 누르시아의 베네딕투스와 그 밖의 이탈리아 성인들의 생애와 기적, 그리고 영혼 불멸에 관하여 다룬다. 그의 사후 수 세기 동안 성직자들과 수사들뿐만 아니라 평신도들 사이에서도 회람되었고, 그로써 중세의 대중 신앙 형성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꿈, 환상, 신앙의 능력을 드러내는 기사들로 가득한 이 책은 폭력과 혼란과 문화적 쇠퇴로 얼룩진 시대에 기독교 신앙의 삶이 무엇을 의지 처로 삼았는지를 이해하는 데 좋은 열쇠가 된다.
*그레고리우스 성례전, 미사를 위한 교송(Antiphon) 등
-인터넷으로 들어볼 것
-그레고리우스의 생각은 꾸준히 묵상(contemplation)과 금욕(Ascetic)의 지향하였고, 그는 교황의 자리보다 수도사의 자리를 더 갈망했다. 그레고리우스는 세상으로부터의 벗어남과 그 자신의 삶에서 경험하는 세상에서의 섬김 사이에 긴장을 고려할 뿐만 아니라, 양자를 조화를 위해 숙고하였다.
5. 그레고리우스 1세에 대한 평가
*보쉬에(Bossuet): 일반 역사가
"이 위대한 교황은 황제들에게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했음에도 롬바르드 족을 굴복시켰고, 로마와 이탈리아를 구원했고,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들의 느닷없는 교만을 꺾었고, 자신의 교리로써 온 교회를 깨우쳤고, 겸손이 뒷받침된 열정으로 동방과 서방을 지도했으며, 세계에 교회 정부의 완벽한 예를 남겼다"
*랑케(Ranke):
"초기 교황들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그들은 항상 억압받는 신앙을 보살피고, 이교와 싸우고, 기독교를 북유럽 민족들에게 전파하고, 독립된 성직 위계체제를 수립하는 일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 일은 어떤 위대한 일을 목표로 세우고 실천하는 인간 존재의 위엄에 속하며, 이러한 경향을 교황들은 상승의 기세로 간직했다."(필립 샤프, 교회사 4, 203)
영국제도의 선교
I. 중세 이전의 영국(로마의 영국 침략)
-캐사르(Caesar)는 기원전 55년과 54년 두 차례 섬으로 쳐들어갔다. 당시 브리튼은 여러 수많은 왕들이 할거하고 있었다. 여기서 캐사르는 로마의 전통적인 정책을 밀어 붙인다. 그것은 일부의 왕과는 제휴하고 일부는 정복하는 형태의 관계를 맺는 것이며, 그 후 일단 철수하게 된다.
-캐사르에 의한 잉글랜드의 점령을 기점으로 하여, 이 섬이 거의 온전하게 로마의 통치하에 들어온 것은 클라우디우스 황제(A.D 41-54)시였다.
-"브리타니아 지역에 오래 전부터 거주한 주민들은, 아일랜드인들과 스코트인들과 갈리아인들과 마찬가지로, 켈트족의 혈통을 물려받은 사람들이었다. 반라로 다니던 이 야만족은 싸움을 좋아하고 사납고 복수심이 강했으나 내부 갈등으로 분열되었던 까닭에 쉽게 정복되었다. 이들은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을 이름만 바꾸어 받아들였으며, 숲과 강과 산의 정령들로 이루어진 무수한 지역 신들을 숭배했다. 산림의 왕인 떡갈나무에 각별한 존경을 바쳤다. 대지의 결실과 적군에게서 탈취한 물건들을 신들에게 바쳤고, 민족의 운명이 위태로울 때는 인신제사까지도 바쳤다. 드루이드(Druid)라 부른 그들의 사제들은 고요하고 음울한 숲에 마련된 통나무집이나 동굴에게 거주하면서 교육과 종교를 관장했고, 자연과 의술과 점성술의 비결들을 안다고 자처했으며, 사람들에게 점을 쳐 주었다."(필립 샤프, 교회사전집4, 34)
*영국에서의 교회는?
-영국에는 콘스탄티누스의 개종 이전에도 기독교가 존재했었다. 추측하건대 아주 이른 시기부터 영국 서부에 로마령 갈리아의 기독교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켈트 기독교가 존재하고 있었던 듯하다. 특히 글래스턴베리(브리스톨 근처)는 갈리아와 지중해 무역에 참여했던 고대 항구였고, 명백한 초기 기독교 성지였다. 로마군이 점령하였던 도회지들과 마을들에도 기독교가 존재하였다. 아를(Arles) 공의회(314)에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세 명의 영국 주교들이 참석하였다.
-4세기 말엽에 접어들면서 로마군은 영국에서 점차 철수하였고 (대개 갈리아에서 일확천금을 얻으려고 하던 제국의 찬탈자들에 의해), 신경 쓸 수 없는 영역이 되었다.
-브리타니아에 대한 로마의 지배는 A.D. 410년경에 종결되었다- 그 결과 로마군을 떠나보낸 속주 주민들은 영국 동부 해안에서는 이교도 색슨족의 노략에 맞서서, 그리고 북쪽에서는 스코틀랜드로부터 남하할 기미를 보이던 픽트족을 맞서서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 갈리아와 스페인과는 달리 영국은 철저히 로마 제국화한 것이 없었고, 따라서 제국 군대와 관리들이 떠난데다가 색슨족, 앵글족, 주트족의 노략이 전면적인 침공과 점령으로 바뀌자 영국은 5세기를 지나면서 점차 부족 조직으로 전환되었고, 도회지들의 인구는 서서히 분산되었다. 밀려들어오는 색슨족과의 갈등을 배경으로 하여 "아더 왕"의 전설들이 발생했다.
[영화 아더 왕, 2010 개봉]
*앵글로 섹슨
-가경자 비드(Bede the Venerable)는 <영국 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 of the English People)에서 옥세르(Auxerre)의 주교 게르마누스(Germanus)가 영국에 있는 동료들의 요청으로 그곳을 두 번 방문하였다고 적는다(429, 444-5).
-이중 첫 번째 방문은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의 확산을 막으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이 방문의 목적에는 전임 갈리아 지방주둔군 사령관으로서 영국군을 지휘하여 북부의 작센족과 픽트족 연합군을 막아달라는 요청에 부응하기 위한 것도 있었다.
-게르마누스가 영국을 두 번째 방문할 무렵에는 북해를 건너온 영국의 대적들이 이미 동부와 남부해안 지대들을 점령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다음 세기가 지나면서 영국인들과 기독교는 점점 더 서쪽으로 밀려나다가 결국 콘월, 웨일스, 그리고 북쪽으로는 스트래스클라이드에 갇히게 된다.
-물론 초기의 색슨족은 이교도 야만족으로서 사제들을 잔혹하게 학살하였고, 교회들과 수도원들은 파괴되었으며, 로마의 문명과 문화도 심각한 파괴를 경험했다.
-그러나 시간과 더불어 (7세기에 이르러) 기독교는 이 새로이 영국을 차지한 종족에게도 전파되었다. 이렇게 옛 브리타니아에 존재했던 교회의 잔존 집단과 그들이 혐오하는 새로운 세력이 지닌 새 교회 사이에는 교리적인 차이보다는 강렬한 적대감이 형성되었다.
II. 초창기 아일랜드 수도원 교회
-410년이 지나가면서 로마제국을 실질적인 지배는 분명하게 종지부를 찍고, 모든 군대가 영국으로부터 물러났다. 그러나 이 섬에 남아났던 기독교인들은 선교를 감행하였고, 장차 영국 제도를 개종시키는 데까지 발전하게 될 활동에 착수하게 된다. 이 활동은 아일랜드인들 가운데서 뚜렷하게 결실을 맺게 된다. 먼저 주목할 인물이 “아일랜드의 사도" 패트릭(Patrick, 389?-461)이다.
-410년이 지나가면서 로마제국을 실질적인 지배는 분명하게 종지부를 찍고, 모든 군대가 영국으로부터 물러났다. 그러나 이 섬에 남아났던 기독교인들은 선교를 감행하였고, 장차 영국 제도를 개종시키는 데까지 발전하게 될 활동에 착수하게 된다. 이 활동은 아일랜드인들 가운데서 뚜렷하게 결실을 맺게 된다. 먼저 주목할 인물이 “아일랜드의 사도" 패트릭(Patrick, 389?-461)이다.
-“완전한 시골뜨기이며, 죄인이고 모든 믿는 자들 중에서 가장 초라하고도 가장 천대받을 나 패트릭은 타부르니의 반나벰 마을에 살던 장로 포티투스의 아들인 집사 칼포르니우스를 아버지로 두었다. 그는 그 인근에 (작은) 땅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서 나는 포로가 되었다. 당시 16살이었다. 그때는 내가 참 하나님을 몰랐고, 아일랜드로 수천 명의 사람과 함께 사로잡혀 갔다. 아일랜드로 납치해 간 다음에 매일같이 나는 그런 이유로(곧 노예이기에) 양을 돌보았고, 낮에는 자주 기도하였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점점 다가왔고, 하나님을 경외함과 믿음이 자라고 하루에 100번 밤에도 거의 그만큼 기도(주기도문, 사도신경, 짧은 기도문을 외우는 것)할 만큼 마음이 움직였다. 그렇게 몇 년 후에 나는 다시 브리타니아에서 내 부모와 함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나를 자기들의 아들로 영접해 주면서 내가 겪은 모든 고통은 지나고 이제 다시는 자기들을 떠나지 말라고 진심으로 애원하였다.
보십시오, 우리는 사람이 없는 곳에까지 복음이 전파된 것에 대한 증인들입니다. 도대체 어떻게(바로) 한 번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오늘까지 우상과 귀신을 섬길 뿐이었던 아일랜드에 이제는 주님의 백성이 생겨났고,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려서 아일랜드 왕들의 아들과 딸들을 그리스도의 수도사와 동정녀들로 생각하는 데까지 이르렀다는 말인가? 나는 그들을 떠나서 브리타니아로 가려고 계획하였고 내 조국과 내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기에 기꺼이 그렇게 '준비하였는데' 그뿐 아니라 골(Gaul) 지방까지 가서 형제들을 만나고 내 주님의 성인들의 면모를 대하려고 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토록 원한 것을 아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에 사로잡혔다"(행 20:22)
그러므로 나의 하나님 자신이 세상 끝에서 "얻은"(사43:21 비교) 자기 백성을 내가 버리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인내를 주시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내 하나님을 위해서 충실한 증인이 되기에 부족하지 않게 해 주실 것을 간구하였다..(Libri Epistolarum Sancti Patircii Episcopi)”
-“성 페트릭의 스코틀랜드 노래”(S. Patricii Canticum Scotticum)는 패트릭이 그 섬의 족장을 회심시킬 무렵에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 찬송은 그토록 중요한 사역을 위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도움을 청하는 기도이다.
*오늘 내가 나를 결속시키는 것은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권세와,
나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지혜와,
나를 하감하시는 하나님의 눈과,
내 말을 들으시는 하나님의 귀와,
내게 말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나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과,
내 앞에 나 있는 하나님의 길과
나를 보호하는 하나님의 방패와,
나를 방어하는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생각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계시고,
그리스도가 나에게 말하는 모든 사람의 입에 계시고,
그리스도가 나를 보는 모든 눈에 계시고,
그리스도가 내 말을 듣는 모든 귀에 계십니다.
(필립 샤프, 교회사전집 4, 59-61)
-성 패트릭은 365 혹은 700에 이르는 교회를 세웠고, 많은 수의 주교들을 축성했으며, 3000명의 사제들을 임명했다(당시 아일랜드 섬의 인구는 기껏해야 20~30만 정도였다).
-그는 왕국의 법을 변경하고, 소경들을 고치고, 아홉 명을 죽음에서 일으키고, 아일랜드에서 뱀과 개구리를 모조리 쫓아냈다. 패트릭의 기념일은 3(5)월 17일이며, 이날에는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들이 대규모 행렬을 벌인다.
-성 패트릭의 날
2. 페트릭 이후의 발전
-패트릭이 아일랜드에 금욕생활 공동체를 도입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수도원 공동체들이 아일랜드 교회의 목회 중심지들이 된 것은 그가 죽은 뒤, 그 다음 세기의 일이었다.
-이런 한 발전의 기원은 대개 성 피니아누스(St. Finnian)가 미스(Meath)지방 클로나드에 수도원을 설립한 때(540년경)로 잡을 수 있으며, 그 뒤를 이어 콤갈(St. Comgall)이 얼스터에 세운 벵거 수도원(벵거는 단순히 '수도원'이라는 뜻이다)과 소 성 피니아누스(the younger St. Finnian, 579 죽음)가 설립한 모빌 수도원과 같은 수도원들이 등장하였다
*특징:
1. 수도원들을 다스린 대수도원장들은 대개가 그 부족의 왕족 출신이었고, 주교직을 겸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이런 식으로 행정구를 기초로 조직된 로마제국의 주교구는 수도원 및 본질상 부족을 기초로 조직된 주교구로 대치되었다.
-부족사회를 이루고 있던 이곳에서는 수도원과 대수도원장이 오히려 도시교회와 주교보다 목회의 중심이 되었고, 주교는 대수도원장 혹은 일부 경우에는 수사들 중 하나가 맡는 경우가 많았다.
-이 수도원들은 금욕주의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면서도 선교, 구제, 종교 및 세속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고, 7-8세기 아일랜드 수도원주의는 그것으로 유명하였다. 수도원 공동체들은 단지 목회 및 선교 사역의 초점들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학문, 예술, 교육의 중심지들이 되기도 하였다.
2. 켈트족 수도사들은 어린이 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 일을 하면서 그들은 개종하기 전의 켈트족 성직자(드루이드)의 역할을 했다. 어린이는 한 수도사에 맡겨지는데, 그 수도사는 그 어린이의 영적 부모가 된다.
-만일 귀족의 아들이 일시적으로 수도사에게 맡겨졌다가 나중에 가족에게로 돌아가거나 혹은 하나님께 바쳐진다면 그들은 수도 생활의 초심자가 되었다
3. 켈트족 영성의 특징은 동방 수도사들의 금욕주의를 연상케 하는 엄격한 금욕주의였다. 수도사들은 강한 육욕과 싸우기 위해서 얼음처럼 차가운 연못에 뛰어들거나 두 팔을 십자가형으로 한 채 여러 시간 기도했다.
-하루에 한 끼만 먹었는데, 특히 “겨울철에 행하는 엘리야 금식일, 봄철에 행하는 예수의 금식일, 그리고 여름에 행하는 모세의 금식일”에는 육류나 생선이나 계란을 먹지 않았다.
-이러한 금욕적 실천 외에 쉬지 않고 기도하고, loricae라고 불리는 긴 기도문을 암송했다. 이렇게 함으로 수도사들은 유혹과 시험에 맞섰다.
4. 켈트족 수도사들은 밭을 경작하는 일, 가축을 기르는 일, 보석 세공, 책을 필사하는 일 등 손노동에 전념했다. 수도사들은 처음에는 지식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성경을 읽고, 라틴어로 예배를 보아야 했기 때문에, 곧 라틴어 공부에 몰두했고, 유럽 대륙에서 전해온 라틴어 문법과 교과서들을 배우고 필사하게 되었다.
-그들은 영성을 기르기 위해서 시편에서부터 시작하여 성서를 묵상했다. 기도에는 팔을 십자형으로 하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150편의 시편을 날마다 암송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최근의 연구들에서 7-8세기 아일랜드의 성경 주석이 조명을 받기도 하였다.
*발전:
-복음전파에 열을 올렸다. 이탈리아까지 수도원을 세웠다.
-6세기 말엽 뱅거 대수도원 출신의 수사 콜롬바누스의 사역에 힘입어 이 전승은 갈리아와 이탈리아에서 번성하였다. (그는 이 지역들 보비오<Bobbio> 수도원을 세웠다. 그러나 콜롬바누스의 <수도회칙>은 베네덱트 <수도회칙>과 접촉하면서 점차 수정되었고, 샤를마뉴와 앙리앙의 대수도원장 베네딕트(Benedictus of Aniane, 750?-821) 시대에는 베네딕트의 형태가 유럽의 모든 수도원에게 표준이 되었다
콜룸바Columba, 521-597
-이들 아일랜드 수도 순례자들 가운데 최초이자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은 콜룸바(Columba, 521-597)였다. 클로나드 대수도원 출신이자 오네일(O'Neill of Connaught) 왕조의 일원이었던 콜룸바는 왕 달리아다(Dalriada)의 후원과 보호 아래 아이오나섬(iona, 오늘날의 아가일셔에 포함됨) 수도원 공동체를 세웠다.
-이 수도원 공동체는 아일랜드에서부터 칼레도니아의 픽트족에게로 들어가 선교를 하였고, 그들의 추장들을 개종시켰으며, 아일랜드에서와 마찬가지로 수도원 제도를 토대로 그곳에 교회를 조직하였다. 실상 그는 스코틀랜드의 사도라고 할 수 있다.
-“콜룸바와 그의 후계자들의 수고에 힘입어 아이오나는 기독교 선교 역사상 가장 존경과 흥미를 자아내는 지점의 하나가 되었다. 이곳은 이교 세계의 어둠을 비추는 등대였다. 북단의 그 영웅적인 선교사들이 발휘한 자기 부인의 열정을 실로 비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인간이 살기 힘든 기후 속에서 강도들과 들짐승에게 노출된 채 야만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일생을 다 바쳤다. 콜룸바와 그의 친구들은 돌과 나무로 된 기념비 하나 남기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것이라곤 섬 남부에 그가 상륙한 곳을 알리는 표지와 , 그의 시신이 그의 종의 시신과 함께 뉘었던 빈 석관이 전부이다(필립 샤프, 교회사전집 4, 77).”
아이오나 공동체의 선교 사역은 콜룸바가 죽은 뒤에도 계속되었고, 7세기의 2/3가 시작될 무렴 영국 북동부에 정착해 있던 이교도 앵글로 색슨족에게까지 확대되었다.
-베르니키아의 왕 오스왈드의 요청에 아이오나 공동체는 성 아이단(St. Eidan, 651년 죽음)을 파견하였다. 자신의 왕국 가까이에 있는 섬 '린디스판"에 수도원을 설립했다. 70-80년의 가장 주도적인 수도원.
-"그들의 수도원은 오랜 세월 동안 북 아일랜드의 거의 모든 수도원들과 픽트족의 모든 수도원들 중에서 으뜸이었고 그 사회를 끌고 가는 지도권(의 위치)를 가졌다.”
콜룸바 2세의 수도원 규칙
-사랑하는 형제들인 거룩한 교부들은 식사하기 전이나 잠자리에 들기 전 또는 마땅한 시간에 죄의 고백을 하라고 규정하였다. 이는 고백과 속죄는 죽음으로부터 자유하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백을 할 때 사소한 죄일지라도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식사 때 강복(benedictio)을 갈망하지 않고 아멘으로 화답하지 않는 자는 여섯 대의 매로 다스려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식사 때 다른 형제가 필요하지도 않은데 말을 한 자도 여섯 대의 매로 가르쳐야 한다. 숟가락에다 십자성호를 긋지 않고 그것을 먹는 자, 또 말할 때 소음을 일으키는 그러니까 일상보다 크게(말하는) 자도 여섯 대의 매로 다스려야 한다.
*등불에다 십자 성호를 긋지 않는 자, 그러니까 어린 형제가 등불을 켜서 선배에게 십자 성호를 긋도록 하지 않으면 (그는) 여섯 대의 매를 맞아야 한다. 어떤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면 여섯 대, 식사용 나이프로 식탁에 구멍을 낸다면 열 대의 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소홀함, 망각 또는 태만으로 인해서 놀라울 정도의 많은 양의 액체나 고체를 버리게 한 것을 용서하려면 오랜 기간의 속죄가 필요하다. 12개의 시(현재, 유행가, 게임, 오락 등)를 노래한다면 12시간 동안 그는 교회에서 쭉 뻗고 누워서 어떤 지체도 움직이면 안 된다.
-아일랜드 수도원의 또 다른 특징인데, 현재 존재하고 있으며, 또 모든 잘못에 대해서 상응하는 속죄를 기록하고 있는 참회서에서와 비슷하게 콜룸반의 “수도규칙”에서 속죄는 “더 이상 교화한다든가, 개선한다든가 치유한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우선 처벌이다. 나쁜 것을 행한 자는 상응하는 ‘속죄율’[에 따라서 속죄해야 한다. 하지만 속죄는 ‘무엇보다도 갚음의 성격’을 가진다. 반면에 ‘죄인의 치료와 개선은 두 번째 목적’이다”.
클로나드 수도원장 피니안의 고해규정서
“욕설을 하는 죄를 짓고 회개한 사람은 오랫동안 금식해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성직자와 논쟁을 벌인 사람은 한 주일 동안 빵과 물을 금식해야 한다. 성직자가 한두 번 양이나 돼지 등의 동물을 훔쳤다면, 일 년 동안 빵과 물을 금식해야 하며 자신이 훔친 물건을 네 배로 갚아 주어야 한다. 수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그 죄가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졌다면, 그 수녀는 6년 동안 빵과 물을 금식해야 한다. 만일 성직자가 처녀나 여인에게 육욕을 품고서 그 일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그는 7일 동안 빵과 물을 금식해야 한다.”
-고해 규정들은 수도사들에게 적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평신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전해졌다.
-고해 규정서에 규정된 형벌들은 서로 대치할 수 있었으며, 가치 대조표도 마련되었다. 이년 동안의 보속은 사흘 동안 성인의 무덤 속에 들어가 퇴수(금식하고 나옴退修) 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었다. 금식을 지탱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대신에 무릎을 꿇고서 50편의 시편을 암송하고 무릎을 꿇지 않고 66편을 암송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었다.
-쿰메안(Cummean)의 고해 규정서에는, 시편 암송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며 금식도 할 수 없는 참회자는 자기 대신에 속죄 행위를 수행해줄 수도사를 선택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심지어 보속은 금전으로 대신할 수도 있었다.
-로마 교회 전통의 제도화에 밑 걸음이 되었다.
<고향을 떠나서>
-켈트족의 금욕주의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한 가지 형태는 자신의 고향을 떠나 유랑 생활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이나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도들의 본보기를 좇아, 켈트족 수도사들은 자신을 자신의 부족들에게, 또는 수도원에 묶어두는 모든 속박을 끊어버리고서 여행(peregrinatio)을 시작했다. 켈트족은 아일랜드, 웨일즈, 콘월 등지를 떠나 잉글랜드나 유럽 대륙에 정착했다.
-6세기 경의 켈트족은 자기들의 원수인 앵글로 색슨 사람들을 “낙원에서 만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을 개종시키기를 거부했었지만, 7세기의 아일랜드 수도사들은 스코틀랜드와 북부 잉글랜드에 정착했다.
선교사들이 아일랜드를 떠날 때는 대개 열두 명으로 구성된 무리를 지도자 한 사람이 인솔하는 형태를 취했다.
성 콜룸바와 열두 형재, 스코틀랜드 고지대를 향해 떠남(563)
성 모혼나, 콜룸바에 의해 열두 명의 일행과 함께 픽트족에게 파송됨
성 콜룸바누스가 열두 형제들과 함께 프랑스와 독일로 감(612)
성 킬리안이 열두 명과 함께 프랑코니아와 뷔르츠부르크로 감(680)
성 엘로퀴우스가 열두 명과 함께 벨기에로 감(680)
성 러드버트 혹은 러퍼트가 열두 명과 함께 바이에른으로 감(700)
성 윌리브로드가 열두 명과 함께 프리지아로 감(692)
-방랑 생활과 연관하여 켈트족들은 이교도들을 복음화하려는 열망을 지녔다. 켈트족 수도사는 “사막”을 열심히 찾아다니면서도 농부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선교사가 되었다.
-콜룸반의 제자인 갈(Gall)과 유스터스(Eustace)는 각각 알라마니아인(Alamanic)과 바바리아인들을 개종시켰다. 유스터스의 제자인 오머(Omer)는 플랑드르 사람들을 복음화 했다. 아만드와 엘로이에서와 같이 대륙의 수도사들도 선교의 열정을 내었다. 그들이 세운 수도원은 선교사 “양성소”였다.
-8세기부터 앵글로 색슨족 수도사들이 등장했다. 그들 역시 선교 정신이 충만하여 독일 개종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윌리브로드와 보니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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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스코틀랜드 선교
패트릭이 아일랜드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는 동안에, 영국 기독교도 북쪽으로 스코틀랜드를 향해 뻗어나갔다. 이 선교를 이끈 인물이 성 니니안이었다(St. Ninian, Nynia).
영국의 수도원들 가운데 아일랜드 전승을 특징지은 학문에 대한 사랑이 여러 수도원 학교들에서 보존 및 발전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났던 것으로 추측되는 학교는 노섬브리아의 웨어마우스와 재로우(Jarrow)학교였다. 재로우 출신의 비드(Bede, 672-735)는 <영국 교회사>에서 그가 로마 가톨릭 신앙으로 교육을 받은 브리튼 주민이었다고 전한다. codex amiatinus는 비드가 있던 Jarrow 수도원의 산물이다.
A. 신학자 베데(the Venerable Bede, 674-735)
재로우 수도
codex amiatinus
"codex amiatinus: 세계에서 가장 큰 책 가운데 하나, 이 책은 송아지 가죽으로 된 1030장 2060 페이지의 책으로 각 장이 한 마리의 송아지로 만들어 졌으며, 가로 세로가 27.5, 20,5 인치에 달한다. 두께가 10인치에 무게는 75,5파운드이고 책 표지는 약 90 파운드이다.
<- 이 책은 비드의 생전에 체올프리드 감독 아래 재로우(Jarrow)에 있는 필사실에서 만들어졌던 세 권의 책 가운데 하나 남은 것으로, 대재앙 이후 수도원에서 동일한 시기에 만들어졌던 것들 가운데 유일하게 보존된 것이다.
<- 이 책은 제롬의 라틴어 번역인 히브리어 법전의 현존하는 최고본이기 때문이며, 성경연구에서는 여전히 결정적인 성경본문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i) 비드가 속한 수도원이 숙련된 필사자들을 갖추고 있는 대단히 부유한 수도원이었으며,
ii) 이 수도원은 성경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곳이었고, 교회 내에서 학문적 용도로 사용될 보기 쉬운 세 권의 책으로 구성된 최상의 본문을 만들어 내는 데 시간과 노력을 아낌없이 바칠 용의가 있는 사람들이 존재했으며,
iii) 그와 같은 기획은 자신의 자료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한 위대한 학자의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했다.
"라틴어 읽는 법을 배운 사람들은 이 사도신조와 주기도문을 잘 알고 있겠지만, 학식이 없는 사람들, 즉 자기 나라 말만을 아는 사람들은 그들의 언어로 이것을 말하고 정성스럽게 노래할 수 있도록 배워야 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한 일이다. 이것은 평신도들, 곧 대중의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서만 이루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라틴어에 능한 성직자와 수도사들에게서도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것은 그럼으로써 믿는 자들의 전 공동체가 그들의 신앙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이며, 그 신앙의 힘 안에서 악한 영들의 공격에 맞서 어떻게 그들 자신을 무장하고 방어해야만 하는지를 배울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탄원하는 자들이 한 목소리로 부르는 합창이 무슨 내용을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빈번하게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의 영역을 제안했던 것이다.“
<영국 교회사 중에서>
III. 영국의 선교
북쪽에서 아이단과 그의 후계자들의 선교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교황 그레고리1세가 파송한 선교사들이 이미 영국 남동부에 도착하여 켄트와 이스트 앵글리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교황이 솔선하여 그곳에 선교사들을 파송한 것은 켄트의 왕이자 험버 이남 색슨족의 상황인 에텔버트(Ethelbert)와 기독교도인 프랑크족 공주 베르타(bertha)간의 결혼을 이용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선교사들은 원래 로마에 있는 그레고리 자신의 성 안드레아 수도원의 탁발수사 어거스틴(Augustine)과 서른 명의 수사들, 라우렌티우스라는 사제를 발탁하고 그들에게 프랑크 왕들과 갈리아 주교들에게 보내는 추천장들과 도서들을 준 뒤 잉글랜드로 파송했다. 이들은 그들의 기치로서 은 십자가를 들고, 또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그린 판자를 들고 왔다.
왕은 멀지만 강성한 로마에서 온 새 종교의 의식적이고 웅변적인 외양에 감동을 받았다.
"여러분의 말과 약속이 무척 훌륭하군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낯설고 불확실하므로 잉글랜드 전체 백성과 함께 오랫동안 모셔온 종교를 버릴 수 없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여러분이 먼 데서 오셨고 우리에게 유익을 주고 싶어 하시므로 지내시는 데 불편이 없도록 해 드릴 것이며, 전도를 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을 여러분의 종교로 귀의 시키든지 금하지도 개의치도 않을 것입니다."
왕은 선교사 일행이 켄터베리 시에 체류하도록 허락했다(596년).
주교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주는 대 그레고리우스의 기원
“... 앵글족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의 당신의 형제애에서 나온 노력으로 말미암아 오류를 떨쳐내고 거룩한 믿음의 빛으로 감싸게 되었기 때문에 여기 모든 믿는 자들의 마음에 얼마나 큰 기쁨이 왔는지 누가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 ‘나의 아버지께서 지금도 일하시니 나도 일하노라’(요5,17)라고 말씀하신 분의 역사가 아니라면 이것이 누구의 역사이겠습니까? 세상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그분의 능력으로 회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과거에) 배우지 못한 선포자들을 선택하여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지금도 그분은 앵글족 중에서 약한 자들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일으키려 하심으로 같은 일을 행하시고 있습니다 ...”.
왕 에델베르트에게 보낸 대 그레고리우스의 편지
“... 영예로운 아들이시여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조신한 마음으로 보존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신앙을 당신을 섬기는 백성들 가운데 펼치는 일에 매진하십시오. 당신의 정직함의 열심을 회심하는 일에 몰두시키면서, 그것을 키워나가십시오. 우상숭배를 몰아내시고, 이방인들의 신전을 파괴하시고 견책, 엄포, 달램, 처벌, 선한 행실에서의 당신의 본을 통해서 당신 신하들이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게끔 하십시오. ... 당신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그분의 영광을 찾고 보존하려 하시는 바로 그분이 바로 당신의 명예로운 이름도 후손들 가운데에 더욱 명예롭게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과거에 극도로 하나님을 경외했던 황제 콘스탄티누스도 로마제국이 거짓 신 숭배를 버리도록 만들었고, 이 나라를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로 전능하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게 하셨으며, ... 이 덕분에 그의 칭송이 과거 황제들보다 월등하고 ... 그의 명예가 그의 앞에 있던 자들보다 훨씬 빛나는 것이다. ...”
약 1년 뒤인 597년 어거스틴은 에텔버트를 개종시키는 데 성공한 뒤 601년 부활절에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레고리의 계획에 따르면, 어거스틴은 런던에 수도대주교좌를 제우고, 자신의 휘하에 12개의 주교구를 두게끔 되어 있었다. 또한 서부의 켈트교회에 대해서도 관할권을 갖게 하고, 기회가 주어질 경우 요크에 영국 북부를 책임질 두 번째 수도대주교좌를 세우도록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교황의 이러한 낙천적인 계획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어거스틴은 런던이 아닌 켄터베리에 수도대주교좌를 두었고, 그곳에 교회를 세웠으며, 근처에 수도원을 지었다. 604년까지 로체스터와 런던에 주교구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고 왕 에텔버트가 죽은 뒤(616), 이교의 반발이 일어나 교회가 켄트 바깥 지역에 내린 뿌리가 얼마나 얕았는지를 드러낸다.
영국이 사실상 기독교를 받아들인 시점에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었다. 한편으로는 켈트족과 아일랜드 전승을 물려받은 서부와 북부 기독교인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 출현한 남부의 색슨족 기독교인들 간에 갈등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색슨족 교회는 유럽식을 본떠 지역 주교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을 뿐만 아니라, 의식적으로 로마와 교황청에 충성하였다.
이 갈등은 부분적으로는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브리튼(켈트)족 기독교인들과 이교 침략자들 간의 해묵은 무력 투쟁에 기원을 두고 있었다. 서부 브리튼족으로는 대대로 원수지간이었던 앵글족과 색슨족을 동료 기독교인들로 보기가 쉽지 않았다. 이러한 갈등의 뿌리는 교회 문제들에도 있었다. 켈트족 기독교의 기풍과 조직은 로마교회의 선교로 설립된 기독교와 달랐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더 좋아했다.
후스토 곤잘레스의 <중세교회사> 25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전통에 속해 있는 자들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노섬브리아 왕국의 상태는 심각했다. 왜냐하면 국왕은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전통을 따랐고, 왕후는 로마 전통을 따랐기 때문이다. 특히 부활절 날짜가 서로 달랐으므로 한편에서 금식하고 있는 동안 다른 한 쪽에서는 잔치를 벌였다.”
어거스틴은 이런 문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브리튼족 성직자들을 설득하였으나, 이들은 민중이 동의하지 않는 한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관습을 포기할 수 없다고 버텼고, 교회회의를 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브리튼의 성직자들은 이 로마에서 온 고위 성직자의 권위적인 태도에 동의하기를 거부한 것이다(cf. 필립 샤프, 교회사 전집 4, 47
668년 교황 비탈리아누스(Vitalian)는 소아시아 타르수스(다소) 출신 테오도루스(Theodore, 620/-690)를 켄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테오도루스는 영국 전역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그 대주교구에 맨 처음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관할 지역의 모든 교회들을 체계적으로 방문함으로써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시찰 결과를 토대로 기존 교구들을 재조직하고 새 교구들을 신설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허트퍼드 교회회의(673)를 주재하여 교회정치 기본법을 제정하고 정치권력이 여전히 분열되어 있던 상황에서 교회를 전국적인 조직체로 구성하도록 하였다. 켈트 수도원의 비밀고해와 사면 관행을 받아들이도록 장려하는 정책을 폈고, 아일랜드의 관습에 따라 비밀고해와 사면을 수도원에 속하지 않은 평신도들에게 연례 의무로 부과하였다.
테오도루스의 조직력과 목회력은 무엇보다도 색슨족이나 켈트족 어느 한쪽을 편애하지 않고 두 전승이 서로 보완하고 살찌우는 단일체로 융합한 사실에서 드러난다.
영국의 갈등 해결에 큰 공헌을 한 사람으로서 노섬브리아의 왕 오스위(Oswy)를 들 수 있다. 그는 자기 왕국에서 교회회의를 개최하고 양 진영의 주장을 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로마 주교가 주깨로부터 직접 천국 열쇠를 받은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이자 대표라는 사실을 전해 듣고, 그는 결단을 내려 영국 전체를 로마에 충성하도록 만들었으며, 종교개혁까지 영국교회는 교황의 가장 충실한 신자였다.
"잉글랜드의 개종은 지적이고 도덕적이었다기보다 명목적이고 의식적이었다. 교육이 성직자들과 수사들에게 한정되었고, 교육 내용은 십계명과 사도신경, 주기도문, 그리고 약간의 라틴어가 전부였다. 헬라어와 히브리어는 가르치지 않았다. 앵글로색슨 성직자들의 교육 수준은 브리튼 성직자들에 비해 아주 근소하게 나은 정도였다. 로마가 궁극적으로 승리를 거두게 된 원인은 주로 우수한 조직, 사도로부터의 직접적 계승, 로마 제국의 명성 때문이었다. ... “
(필립 샤프, 교회사 전집 4,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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