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언약도의 교회와 국가 관계
-잉글랜드에서 교회와 국가관계 문제는 헨리 8세가 교황의 횡포를 반박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개신교 성장을 위하여 주요 논제가 되었다.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은 위정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모든 면에서의 변화를 촉구한 힘은 왕과 의회의 권세였다. 헨리8세는 천주교의 교리를 그대로 받았지만 교황의 권위는 거절하였다. 그는 의회의 결정에 의하여 자신을 교회의 머리로 선언하였다.
-한편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 아주 달랐다. 위로부터 종교개혁의 물결을 수용해 온 잉글랜드에 비하여 스코틀랜드는 아래에서부터 출발하였고 대륙의 개혁의 물결을 직접 확인하며, 체험한 존 낙스의 지도는 일찍부터 개혁원리에 입각한 교회와 국가 간의 올바른 성경적 견해를 정립하였다.
-낙스의 사상은 잉글랜드의 개혁가들에게 온 영향을 미치게 되어 초기 청교도들은 대부분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를 잉글랜드 교회의 모델로 삼고 개혁 원리를 펼쳐갔다.
-그러나 낙스의 장로교회적 사상은 순탄하게 심겨지지 않았다. 1603년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까지 통치하게 되는 왕직 통합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위협하는 요소가 된 것이다.
1. 17세기에 현존한 이론들(시험)
17세기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성은 크게 4가지로 등장하였다.
①교황권 지상주의(Ultramontanism):
②국가 만능주의(Erastianism):
③임의 기부제도(Voluntaryism):
④국교제도 원리(Establishment Principle)
-기도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정책에 있어서 저항
-국가는 교회를 보존하는 일에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방비해야 한다.
2. 언약도들의 견해
-초기 청교도들이나 장로교도들인 언약도들은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를 국교제도 원리(Establishment Principle)에 두었다. 이것은 교황권 지상주의도 아니고 국가 만능주의도 아니다. 더욱이 임의 기부제도도 아니다. 국교제도 원리는 교회와 국가가 엄격히 구분(분리가 아님)되며 기능 역시 분명히 나누어진다는 이론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0장 4항: 하나님께서 세우신 정권들과 그리스도께서 속량해 주신 자유는 서로 파괴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서로 붙들어 주며 보호해야 함이 하나님의 뜻이다.
23장 국가 위정자에 관하여
①전 세계의 대 주재요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나라 백성들 위에 각기 위정자들을 세우시고 자기 관하에서 봉사케 하신다.
②기독신자들이 각기 나라의 관직에 임명되었을 때에 그 일을 맡아 수행하는 것은 합법적이다.
③위정자는 정규 예배시의 말씀 선포와 성례를 집행함과 천국의 열쇠(교회 치리권)를 가지지 못한다.
④모든 사람들이 위정자들이나 정부를 위하여 마땅할 일들은 다음과 같다
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대한 비난 문제
-교회와 국가관의 바른 성경적 관계에 있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비난하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①신앙고백서 안에 국가 만능주의를 옹호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②국가가 필요하면 교회를 핍박해도 된다는 여지를 품고 있다는 것
③개인의 양심을 뭉개 버릴 수 있다는 것
4. 결론
-문제는 ‘불신세력이 절대적 통치권을 행사하는 국가의 정부에 대하여 교회가 과연 그러한 책임이행을 요구하는가?’이다.
제 10장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에서 스코틀랜드 대표단의 역할
-필자가 본 주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몇 가지 놀라운 사실 때문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는 분명히 잉글랜드 수도에서 열린 잉글랜드 목사들의 종교회의였다. 스코틀랜드 대표단들은 엄밀히 말해서 그 종교회의의 회원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록 발언할 수 있는 권리는 있었을지라도 투표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코틀랜드 대표단들은 이 종교회의와 이상한 관계를 가졌을 뿐 아니라 수적으로도 전체 총대에 비해서도 너무나도 적었다.
1.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의 배경사
-1560년 개신교주의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두 나라에 불안정하게 세워졌다. 유럽 대륙의 가톨릭 세력들을 직면하고 있는 두 나라는 그 어떤 때보다 서로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1637년 7월 23일 성 자일레스 교회에서 새로운 예배 예식서가 읽혀질 때 그들은 백성들의 강력한 저항에 의하여 새 예식서 사용을 중시하였다.
-1641년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찰스 1세와 그의 군대는 그 이듬해에 청교도적인 잉글랜드 국회와 더불어 전쟁을 하게 되었다.
-잉글랜드 의회가 두 명의 청교도 목사와 함께 특사를 에딘베러에 보냈을 때, 그 결과는 두 나라 사이에 하나님께 엄숙한 서약 형식으로 한 독특한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거룩한 협약과 언약(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는 8명을 선출(5명의 목사와 3명의 장로)하였고 그들 중 누구든지 3명(두명은 반드시 목사)은 런던으로 내려가도록 위임하였다.
2. 스코틀랜드 대표단들(The Scottish Commissioners)
-알렉산더 핸더슨 목사와 조지 길레스피 목사
-로버트 베일리와 사무엘 루터포드 목사
-메이트란드 장로와 아키발드 존스톤 장로
3. 웨스트민스터 스코틀랜드 대표단들이 직면한 문제들
①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그 당시에 분리된 두 개의 독립 국가였다는 사실
②종교회의가 회합되어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과 관련된 것들
-많은 부분에서 영국 의회의 인준을 받아야 했다.
③종교회의 내에 있는 잉글랜드 사람들의 그룹들
-독립교도들: 토마스 구드윈, 윌리암 브리지, 제레마이야 버러스
4. 웨스트민스터 문서 형성에 있어서 스코틀랜드 대표단들의 공헌
-거룩한 협약과 언약 문서와 더불어서 4가지 중요한 문서가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에 의해서 작성되었다.
①공예배 지침서
②신앙고백서
③대·소요리 문답서
④교회정치조례
5. 교회 정치 조례
①장로교회 교회정치 형태(The Form of Presbyterian Church Government)
②교회정치 지침서(The Directory for Church Government)
6. 장료교회의 발전과 불일치(Presbyterian Development and Disagreement)
7. 거룩한 협약과 언약의 영향
8. 스코틀랜드 대표단들의 후기 역사
맺는 말
①기독교와 정치적 혼돈은 이 시기에 산 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큰 고통을 주는 일이었다.
②우리가 이 시대로부터 배우는 것은 성경에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이 없다고 굳게 믿을 때 불관용이 더 해를 끼친다는 것이다.
③우리는 장로교 지도자들의 장점보다 단점을 더 집중하여 생각해 보았다.
④어쩌면 우리가 여기서 배우는 최고의 교훈은 성경적인 진리의 균형이 교회법에 대한 논쟁에 있어서 얼마나 쉽게 상실되어 버리는가를 주목하는 것이다.
⑤17세기는 교회 정치의 온전한 체계를 성경에서 순종하도록 명령하고 있다는 것을 확증시키려는 너무 지루했던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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