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 증 학
서 론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이 발전시켜 온 전통적인 변증학적 방법론은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를 마음대로 타협하며 가감하고 있다. 고작해야 로마 가톨릭의 변증학은 자연인이 이미 가지고 있는 요소들 위에 그리스도의 지혜와 공로를 덧붙이라고 권할 뿐이다. 또한 적극적인 의미에서 자연인을 구원하고 나아가서는 자연인의 문화까지도 구원하기 위하여 그의 생각과 삶에 강력한 도전을 가할 수 있는 그리스도가 결여되어 있다는 결점이 있다.
개신교의 신학과 변증학은 그리스도를 모시고 섬기지 않기 때문에 생각에 있어서나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 죄 가운데 빠져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을 주목표로 해야 한다.
제Ⅰ장 기독교 신학
우리가 기독교를 역사적인 종교로서 진정하게 변증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결국 기독교의 기초요, 우리가 그것을 기초로 하여 철학적인 논쟁을 벌이게 되는 기독교적 유신론을 그와 동시에 변증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한 일이다.
1. 신 론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비공유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으로 나눈다.
비공유적 속성들에는 하나님의 독립성, 불변성, 무한성 등이 있으며, 공유적 속성들에는 빛의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주권적이신 하나님등이 있다.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들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그리고 공유적 속성들은 그의 내재성을 각기 분명하게 나타낸다. 이 둘은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고 있다. 즉 초월성에 대한 기독교적 인식과 내재성에 대한 기독교적 인식은 그 보조를 같이한다.
1) 하나님의 인격성 - 하나님은 절대적인 인격체이시다. 하나님께서 이성적이며 도덕적인 활동을 하심에 있어서 그 자신의 존재외에 다른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으심을 인식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인격성에 관한 참다운 개혁주의적 교리를 갖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들 자신이 인격체라는 점에 있어서만큼은 하나님과 같을 수 있으며 또 하나님과 같아야만 한다고 말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제한된 인격을 가진 자들이란 점에 있어서, 언제라도 하나님과 같지 않음을 고백해야만 한다.
2) 삼위일체 - 단일성 속에서도 각기 다른 삼위가 각각 존재하는 것이다. 다수성과 동일성이 꼭 같이 어디로부터 파생됨 없이 본래적인 것이다.
2. 인간론
1)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입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피조물이 하나님과 같을 수 있는 한도 내의 모든 면에 있어서 하나님과 같다. 인간이 인격체라는 면에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과 같다. 인간이 참된 지식과 참된 의와 참된 거룩을 따라 지음 받았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적 성품의 탁월성이 하나님을 닮았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건 그의 피조물적인 지위에서 그 위로 나아갈 수 없다.
인간은 신적인 자존성, 불변성, 무한성, 단일성을 가지신 하나님과는 결코 동일할 수가 없다.
2) 인간과 우주의 관계 - 인간은 자신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와 더불어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즉 인간은 선지자로써 이 세계를 해석하고, 제사장으로써 이 세계를 하나님께 봉납하며, 왕으로서 이 세계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스리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이론과는 반대로 모든 비기독교적 이론들은 인간과 인간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의 흥망 여부는 오로지 우연적이며 그 양자 사이의 관계란 우발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3) 인간의 타락 - 인간이 타락하였다는 사실은 창조의 사실만큼이나 중요하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법, 즉 하나님께서 피조물 속에 제정하신 그의 규례들에 부합되도록 살았어야만 했다. 인간이 범죄 하였을 때에 그가 행한 일이란 모든 면에 있어서 하나님 없이 자기 뜻대로 뭔가를 행하려고 시도한 셈이었다. 그 결과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지식에 대한 그릇된 이상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모든 지식을 하나도 빠짐없이 절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인간이 만들어 낸 지식에 대한 그릇된 이상과 관련하여 우리는 여기서 또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보게 된다. 즉,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 낸 지식에 대한 그릇된 이상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게 될 때에 그것을 자신의 유한성에 돌려 책임전가를 꾀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죄에 대한 책임을 결코 지지 않으려는 생각에서 그것을 자기 자신의 주변과 자기 자신 내부의 환경에 전가 시키고 있다.
3. 기독론
성육신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다. 인성을 항상 지니고 계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가 가지고 계신 신성에 인성을 또 취하셨던 것이며, 그리스도의 양성의 조화는 ‘충돌 없는 완전한 조화’로서 칼케돈 신조의 표현처럼 “서로 혼동되거나 변화되거나 혹은 분열되거나 분리됨이 없는 두개의 성품으로서 매우 밀접하게 연관된”조화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제2위이셨다면 그는 신격이 지닌 비공유적 속성들을 가지실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심지어 그가 성육신하신 후라 할지라도 그의 영원한 속성들을 시간에 매여 있는 순간적인 속성들에 뒤섞일 수가 없으셨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영원한 속성은 언제나 순간적인 것과 구별되어 우위를 지니며 존재하게끔 되어 있다.
4. 구원론
우리가 죄악된 존재이므로 구원이 아무리 우리들 가까이 이미 있다 하더라도 구속이 우리들에게 직접 적용되지 않는다면 구속은 하등에 소용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누군가가 그 몫을 실제로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어야만 비로소 우리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께서 행하여 놓으신 일을 취하여 구속을 우리들에게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며 이 성령께서도 존재론적 삼위 가운데 한 분이시다.
5. 교회론
눈으로 볼 수 없는 보편적 또는 우주적 교회는 그리스도를 그 머리로 하여 하나로 모였으며 지금도 그렇게 모이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모일 선택된 자들의 전체로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요 몸이며, 모든 것을 충만히 채우는 그리스도의 충만이다.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영원은 순간에 매인 일시적인 것들에 선행하며, 인간의 구원을 결정하는 분은 다름 아닌 바로 하나님이시고 선택받은 자들의 전체란 바로 불가시적 교회이다. 인간의 구원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은 전혀 개입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행동의 결과이다.
6. 종말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미래를 해석하셨고, 미래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바대로 되어질 것을 믿는다. 하나님께서 미래를 좌우하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원한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실상 무의미한 일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언급하셨던 만물의 재창조나 미래에 대한 약속,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등의 내용에 대해서 우리는 역사를 오로지 하나님의 해석에 의거하여 해석한다.
반틸의 변증학은 기독교가 갖는 소위 공통분모적인 핵심이 아니라 개혁주의적 신앙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현대의 신정통주의라고 하는 에밀 부룬너나 칼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제 Ⅱ 장 기독교 실재론
1. 영원적 단일성과 복수성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존재를 정의하심에 어떤 비존재와 자신의 존재를 비교하심으로써 그리하지 않으신다. 어느 무엇도 하나님과 비교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 있어서의 하나와 여럿은 그 모두가 전부 궁극적으로 본원적이다. 하나님 안의 단일성은 다양성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아니며 그 안에서의 다양성 역시 단일성보다 조금도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 삼위일체 내에서 삼위는 서로가 서로를 조금도 남김없이 이해하고 계신다. 아들과 성령은 아버지와 더불어 존재론적으로 동등하다.
하나님의 존재 속에는 보편에 관련되지 않은 개별자가 존재하지 않으며 개별자 속에 완전하게 나타나 표현되지 않는 보편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진정한 구체적 보편을 소유하게 되는 것은 믿는 방법 외에 그 어떤 다른 길을 찾을 수가 없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기독교의 교리에서 뿐이다.
2. 시간적 단일성과 복수성
하나님께 있어서 비존재란 실로 그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비존재는 하나님께서 개연적으로 활동하실 수 있는 활동의 바탕이 된다.
피조 되어진 하나와 여럿 또는 피조 된 실재의 여러 양상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동등성이 존재한다. 반면 이들 사이에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에 의한 종속적 관계도 역시 존재한다.
기계론적 법칙들은 목적론적 법칙들보다 하위에 놓여진다.
3. 죄와 죄에 따른 저주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저주가 피조물 전체에 임하였다. 인간은 사단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와 동시에 죄와 싸워 그것을 치유하는 힘을 이 세계에 집어넣으셨다. 이 치유적 사역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평화를 가져오기 위함이었는데 그가 가져오신 이 평화는 어두움의 세력을 완전히 파괴한 후 그 위에 세워져야만 하는 성질의 것이었다. 구속을 통하여 창조의 목적이 달성된 것이다.
제 Ⅲ 장 기독교적 인식론
인식론에 대한 고찰은 반드시 존재론에 대한 논의를 수반하여야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지식 그 자체만을 숙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창조주이심을 주장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존재가 영원하심을 주장하시며 그 반면에 사단의 존재는 피조된 것이므로, 따라서 그 사단은 하나님의 존재에 의존적인 것임을 주장하셨다. 사단은 요컨대 하와가 이러한 존재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했던 것이다. 사단은 하와에게 우리가 무엇을 아는가를 물음 없이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의 문제를 결정지어야만 한다고 속삭였던 것이다.
그리고 하와는 지식의 문제를 해답함에 있어서 존재의 문제를 무시하고 말았다. 하와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말았다. 하와는 하나님의 존재가 궁극적임을 부정하였다. 하와는 그것으로 실상 모든 존재는 본질상 같은 수준 위에 있다는 사실을 확고히 주장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고도 독립적으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죄는 인간의 마음과 심성을 극단적으로 파괴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것이다. 인간 내부에 하나님께 대한 인식이 있으려면 그는 반드시 거듭나야만 한다. 거듭남이 없이 인간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인식론에 있어서 죄의 문제
1.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는 지식 : 하나님은 스스로 충족하신 분이시므로 전지하시다. 만일 하나님의 내부에서 지식과 존재가 그 하나님 자신에게 관련된 것으로서 동일시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 이외의 어떤 다른 존재에 의존적인 분이 되고 만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아시되 단 한번의 영원하신 통찰 행위로써 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는 실재적인 것이 곧 이성적인 것이요, 이성적인 것이 곧 실재적인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세계를 이해하시는 지식 :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은 자신에 대한 지식에 의존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서 세상을 만드셨다. 따라서 세상의 존재 그 자체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 또는 계획에 의존해 있다. 확실히 하나님께서는 세계와 인류를 그 자신의 외부적인 존재로서 살펴보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영원부터 그들이 존재하게 된 것으로 보아 오셨기 때문에 이제는 그들을 그들 나름대로의 실제적인 일에 종사하고 있는 그대로의 실제적인 존재로서 살펴보고 계신다. 우주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은 논리적으로 그가 우주에 관해 영원 전부터 작정하셨던 바에 의존한다.
3.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지식 : 인간의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에 유추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지식은 원형적이지만 인간의 지식은 원형에 종속적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의미를 떠나서는 존재와 의미를 가질 수가 없다. 우리에게 부여된 의미는 오로지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필히 어떤 분명한 목적을 실현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셨다. 인간의 목적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영광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포괄적으로 완전히 알 수가 없으며 앞으로 장래의 어느 때에 가서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완벽하게 알게 될 것으로 기대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지식이 참되다는 점에 있어서 하나님과 비슷하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지식이 결코 전포괄적이 될 수가 없다는 점에 있어서 하나님과 같지 않다.
4. 우주에 대한 인간의 지식 :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에 힘입어 존재한다. 인간의 환경은 인간을 선행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본원적인 배경이시며, 이 배경은 그 자신을 알고 있는 인간을 완전하게 해석하는 배경이기도 한 것이다. 즉, 인간의 배경은 비인격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본원적인 배경이시며, 이 본원적인 배경은 인간 그 자신뿐만 아니라 인간의 직접적인 배경 전체를 통괄하신다. 우리가 우주에 관한 지식의 객관성을 논함에 있어 만일 지식의 객체와 주체를 모두 하나님과 관련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완전하거나 만족한 논의를 해낼 수가 없다. 우주가 인간에 의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하여 해석되어지지 않는다면 세계 전체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지식의 객체는 그것이 비록 인간의 지성과 관계 지어졌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지성과 관계 지어지지 않으면 진정하게 해석되어질 수가 없다.
5. 죄와 죄에 대한 저주 : 죄는 하나님과의 윤리적인 단절이지 형이상학적인 단절은 아니다. 윤리적인 면에서의 죄의 영향은 인간의 지성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죄는 인간의 인격 전체에 상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성적인 것 그 자체도 사실은 윤리적인 것이다.
A. 아담의 의식: 인간은 스스로가 피조물임을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B. 타락한 의식: 타락한 의식은 무신론적 가정을 근거로 하여 세워졌다.
C. 중생한 의식: 원칙적으로 아담의 의식과 위치로 회복되었다.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그가 죄에 빠져 타락하였다는 사실을 다시금 인식하게 된다. 중생한 의식은 은혜로써 구원받았음을 인식한다.
중생한 의식은 오직 원칙적으로만 회복되었을 뿐이다. 인간 내부에 잔존하는 죄의 부스러기들 때문에 심지어는 중생한 이후에도 그 자체의 원리대로 살아 나가지 못하며,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이렇게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절대적으로 선한 사람들 속에도 상대적인 악이 존재하게 된다.
제 Ⅳ 장 기독교 윤리학
윤리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
* 선행이란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한 것이어야 한다.
* 인간은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시키고자 노력하게 될 어떤 기준이나 표준을 그 스스로 설정할 수 없다.
1. 윤리학과 기독교적 인식론
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 인간의 원초적 완전성은 기독교 사상의 전체적 체계의 기초에 깔려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이 본래 완전한 도덕적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주장한다.
② 죄와 죄에 따른 저주 : 죄가 사람의 지성을 어둡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죄는 인간의 의지를 부패케 하였다. 이렇기 때문에 외부적인 계시로서의 성경은 인간의 죄 때문에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인간의 중생치 못한 의식은 그 자체의 본질로부터 울려 나오는 하나님의 명령들에 전적으로 순종할 수가 없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중생하지 못한 의식 그 자체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부터 울려나오고 있다.
③ 중생한 의식 : 중생한 의식은 다시 한번 원칙적으로 그것의 본래적 위치에 복귀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중생한 윤리의식은 원칙적으로 변화한 것이다. 따라서 잘못을 범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계속하여 쉬지 않고 성경에 비추어 그 자신을 검토하는 일에 힘을 써야만 한다. 또한 중생한 의식은 도덕적 문제에 대한 어떠한 해답도 자기 자체 내에서 스스로 만들어 내지 않는다.
생생하지 못한 의식은 인간의 죄 때문에 모든 인간의 도덕적 결정에 성경에 검증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반면에, 중생한 의식은 인간의 죄 때문에 모든 인간의 도덕적 결정이 성격에 의하여 검증을 받음이 옳음을 확증한다.
④ 로마 카톨릭교 :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간의 의식에 대한 견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상과 질료의 구조를 주로 원용하여 전개시킨 것이다. 인간의 자율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인간은 적어도 어떤 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로부터 완전하게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본다. 토마스는 만일 인간의 모든 행동들이 그것들의 궁극적이고도 최종적인 근거를 오로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의지에 두고 있다면 인간을 책임 있고 자유로운 존재로서 생각할 수가 없다고 본다. 이와 같이 로마교에는 권위에 대한 참된 성경적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⑤ 복음주의 - 루이스는 윤리와 문학과 인생의 모든 부분에서 객관적인 표준을 찾고 있다. 그리고 그는 객관성이 여러 곳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어떤 일반적 객관성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마치 사람들이 그것을 저버린 것이 거의 근대적인 현상이거나 아니면 전혀 근래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일어난 일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비록 그가 높은 인기를 누린 기독교 변증가이지만 그가 사람들을 복음에 돌아오도록 부르는 일에 있어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방법을 그토록 대폭적으로 따르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시해야 하고 안타까워 할 수밖에는 없다.
2. 윤리학과 기독교적 실재론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인 합리성이시며 따라서 절대적인 의지이시기도 한다. 이 말이 강하게 뜻하는 바는 하나님께서는 선하게 되실 필요가 없으셨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선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는 능동성, 수동성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 안에서는 영원한 성취가 있을 뿐이다.
윤리학을 다룸에 있어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의 차이점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모든 인간 행위의 필수적인 전제임을 주장한다. 그러나 비그리스도적 윤리는 기독교인들이 믿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다. 비기독교적 사상은 인간의 의지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도 배경을 갖는다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비기독교적 윤리는 궁극적인 행동주의를 표명하고 있다.
3. 인간과 최고선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
(1) 비기독교의 최고선
인간의 윤리의식이 정상적임을 가정하는 것에 이들은 윤리의식이 피조된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것으로 가정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이러한 가정적 상관성을 인정하며, 창조교리를 이와 같은 가정적 기초에 서서 부정하고, 나아가서는 악의 궁극성을 가정적으로나마 결국은 부정하고 마는 것은 윤리적으로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즉, 이러한 전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함께는 살아야 하지만 또 다른 면에서 생각해 볼 때에 서로가 남을 희생시켜야만 살아나갈 수 있는 사람들의 집단 속에서 겨우 받는 것을 전제로 하고 주는 행위, 즉, 급부와 반대급부의 원리를 윤리적 이상으로 제시할 수 있을 뿐 그 이상의 아무런 고상한 윤리적 이상도 제시할 수 없게 된다.
(2) 성경적 최고선
성경적인 최고선은 개개인 속에 깊숙이 존재하는 악과 사회에 내재하는 죄와 악을 근원적으로 소멸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어 그들로 따르도록 할 절대적인 윤리적 이상ㅇ르 가지고 있다. 이 절대적 이상은 바로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절대적 이상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계에서 악을 소멸할 계획을 세워 착수 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윤리의 기준의 문제에 있어서나 동기의 문제에 있어서 개혁주의 신앙이 주장하는바 기독교적인 입장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여러 가지 가르침과 창조, 타락,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에 대한 여러 가지 성경적 가르침, 즉 이러한 모든 것들에 대한 교리에 그 중심을 두고 있다.
제 Ⅴ 장 기독교 변증학 (접점)
신자가 불신자에게 기독교적 인생관을 제시할 때에 신자가 그것에 호소하여 불신자의 마음과 생각에 접촉할 수 있는 접점, 즉 공통의 이해가 닿아 있는 영역이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즉 신자와 불신자가 공유할 수 있는 지식의 방법론이 과연 존재느냐 하는 것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 불가능성을 전제해야 한다. 기독교 변증학자가 보통사람에게 기독교를 전함에 있어서 분명히 주의하고 생각해야 할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류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결국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일들과 그 경험 세계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인간 자신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밝히 보여 주는 빛으로서 제구실을 하며 그 자체를 드러내 증거해야만 한다. 반틸은 우리가 비기독교 철학의 소유자인 현대 인간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신지식에 호소하는 것임을 거듭 강조한다. 인간은 모두가 신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진리를 알 수 있고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 인간은 모두가 다 그의 마음 속 깊이 그가 신의 피조물인 것과 그가 또한 신 앞에서 죄인인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1. 로마 카톨릭교
로마 카톨릭교는 첫째로 피조 되어진 인간이 지니는 본성의 대해서와, 둘째로 죄가 들어옴으로써 인간의 본성에 미친 영향에 대한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다. 개신교는 이러한 교리에 반대하여 본래적인 의는 창조와 더불어 동시에 주어진 것이요. 또한 자연적인 것임을 주장한다. 첫째로 인간 본성의 본래적 구조를 매우 낮게 평가하는 견해를 전제로 하고 있다. 둘째로 본래적인 의에 관한 교리는 로마 교회의 빈펠라기우스주의에서 나온, 반펠라기우스주의를 옳은 것으로 승인하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다.
로마 카톨릭교는 기독교의 변질된 형태로 간주되어야하고, 사실상 최악으로 변질된 기독교이다. R.C는 교리의 전반에 걸쳐 기독교적인 요소와 비기독교적인 요소를 언제나 혼동함으로써 항상 비일관성을 벗어나지 못해 왔다. 특별히 결론 내릴 수 있는 R.C의 변증학자들의 오류는 불신자들과의 접점을 ‘공통적인 영역’에서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2. 복음주의
복음주의적 노선의 변증학 가운데 가장 뛰어난 교과서적 저술로는 버틀러 감독이 쓴 그 유명한 유추론』이 있다. 버틀러는 신학적으로 알미니안적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자연인 이 “이성을 올바로 사용하기만 하면 자연 만물의 형성 본질과 그것이 나아가는 과정 모두를 ” 바르게 알고, 또 해석할 수가 있는 것으로 믿는다. “이성을 올바로 사용하기만 한다면 자연인은 거의 누구나가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3. 일관성의 결여된 칼빈주의
워필드 자신이 매우 잘 말한 바대로, 우리는 기독교의 어떤 최소한의 핵심을 옹호하여 변증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의 문제에 관한 이성의 역할이란 제목을 핫지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첫째로, 그는 이성이 계시를 받아들이는 도구로서 필수 불가결하다고 보았고, 둘째로, “이성이 계시의 신빙성을 판단하여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셋째로 “이성이 계시의 증거를 검증하여 판단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여 특수주의를 사실상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할 경우에 기독교가 이성을 사용하는 그 자신조차도 해석한다고 주장할 수가 없게 된다.
4. 개혁주의적 입장
개혁신학은 인간의 마음이 파생적임을 주장한다. 인간의 마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자연히 하나님의 계시를 접하고 있다. 인간의 자의식은 하나님을 아는 신 의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인간이 지닌 피할 수 없는 신 의식이라 불렀다. 순수한 성경적인 입장은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법이 그 속에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접점으로 확신한다.
제 Ⅵ 장 기독교 변증학 (방법론)
기독교적 방법론은 기독교 인간론과 마찬가지로 통일성 있는 전체로서의 기독교적 입장의 한 국면들이다. 개혁주의적 변증학의 방법론은 기독교의 본질을 그대로 반영하는 개혁주의적 인생관과 세계관을 다른 공격으로부터 옹호하는 것을 그 목표로 삼아야만 한다.
자연인과의 접점을 자연인의 식역아래 깔려서 자연인에 의해 항상 억누름을 당하고 있는 신의식에서 찾고자 한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함에 있어서 개혁주의적 입장의 변증가는 자연인이 건설해 놓은 체계들과 접점을 설정하고자 노력한다.
1. 전제에 입각한 추론
그리스도인들의 변증논쟁의 유일한 방식은 오직 전제에 입각한 추론일 수 밖에 없는데, 전제에 입각하여 논쟁을 이끌어 간다함은 논쟁자의 방법론 밑에 깊숙이 숨어 있어 그의 방법론 자체를 좌우하는 인식론적 원리와 형이상학적 원리의 근본 성격을 드러내 보이는 방식을 의미하며, 개역주의적 입장을 지닌 변증가는 자신의 방법론이 기독교의 유신론이 내표하는 여러 진리들을 전제로 받아들임을 거리낌없이 인정할 것이고, 그 핵심적인 진리를 (특별히 기독교 유신론이 전제하는) 진리라고 가정하는 방법론만이 진리임을 가정하고 논쟁을 펼쳐 나가는 방식이다.
2. 성 경
개신교의 변증가는 성경을 인간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정확무오하게 영감된 최종적 계시로 믿는 성경관을 고집하게 되며, 따라서 그는 기독교 유신론을 나누어질 수 없는 전체로서 옹호하게 된다.
구속의 계시는 타락 후에 주어진 특별계시로서 주어져야만 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깨뜨린 범죄자들을 은혜의 언약을 통하여 당신과의 언약 속에서 누릴 수 있는 친교의 특권으로 다시금 회복시키고자 하신 뜻은 초자연적 구속의 계시 이외의 어디서도 발견될 수 없다.
개신교도들은 오로지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신 그 하나님의 존재를 옹호하도록 되어있으며, 전제에 입각한 간접적 방법론 이외에 이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할 방법은 없다.
3. 블록 하우스 (Block-House) 방식
진정한 개신교적 추론 방식에는 기독교 유신론의 모든 국면이나 부분의 의미가 비로 그 기독교 유신론을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통일체로 생각하는 것에 크게 좌우됨을 강조하는 것도 포함된다. 개신교도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이야기 할 때에, 그를 통하여 세상이 지은 바 된 영원한 말씀, 즉 하나님의 아들이 부활하신 것으로 이야기한다.
이 세상의 모든 사실이 해석될 수 있으려면 기독교 유신론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실체적 존재와 죄인들에게 그러한 하나님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성경의 무오한 권위가 전제로써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결과적으로 추론적 사고를 통해서 나온 시간 내적 실재에 대한 어떤 판단이나 명제는 또한 시간 내적 존재들 그 자체에 내포된 사실적 성질이 띠게 된다. 그것을 이해하려고만 하는 면에 있어 잘못되었다는 그들의 주장은, 로마 카톨릭과 알미니안주의의 변증가로 하여금 비기독교적 원자론의 본질적 정확성을 인정하게 만들고 만다.
제 Ⅶ 장 기독교 변증학 (권위와 이성)
1. 비 기독교적 견해
① 사실적 대상이 무수히 존재하기 때문에 필요하게 되는 권위 : 비이성주의 관념의 포함된 일종의 권위에 대한 반대를 표명할 이유가 없다는 것은 매우 중요사실이다.
② 자연인이 기꺼이 용납하는 두 종류의 권위 : 이성이 실질적으로 우연의 모든 영역을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유래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제시된 모든 형태의 권위는 자연인이 내재적으로 갖고 있어 외부적인 권위와는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자연인 고유의 표준에 의해서 검증되어야만 한다.
2. 현대 신학의 견해들
슐라이에르마허는 단지 일종의 종교적 현상론을 주장할 뿐이다. 만일 어떤 이가 자율적 이성을 비난하는 대신에 자율적 감정을 내세운다면 그것은 별로 칭찬할 만한 일이 되지 못한다.
바르트가 주장하는 이야기에 대해서 그 중의 몇 가지 사소한 내용들을 바꾸기만 하면 바로 에밀 브룬너나 라인홀드 리버나 맥카이 같은 신학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바르트의 신학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아들의 신학에 있어서도 그들의 신학들을 지킬 박사와 하니드 씨의 스타일에 따라 두 가지부분으로 갈라놓는 요인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자율적인 종교 의식이다.
3. 로마카톨릭교의입장
이성의 관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 로마카톨릭의 신학자들이 “성 토마스 (St. Thomas)를 최고의 신학자로 떠받드는 것과 아울러 아리스토텔레스를 최고의 철학자로 여기고 있는 사실을 주지함으로써 그 첫걸음으로써 그 첫 걸음을 띄어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질 송이 얼마나 영웅적으로 이성의 자율성의 개념을 옹호하려고 애쓰고 있는지를 인식, 둘째로, 로마 카톨릭이 주장하는 인간관, 특히 하나님과 연관시켜 그들이 말하는 인간의 자유의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4. 알미니안주의적 입장
개혁주의의 선택 교리가 인간의 책임을 제대로 다루고 있지 않는다고 공격하는 점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선택교리야 말로 이 세상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알미니아주의자는 개연성이라는 말이 신자들과 자연인들 사이에서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처럼 초자연계시의 개연성을 말하며, 성경에 기록된 계시의 역사적 사실(feet)들에 대하여 자연인에게 말하고자 할 것이다.
5. 개혁주의적 입장
자연인이 형상학적으로 해석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의 사상을, 그리고 인식론적으로는 인간 마음의 자율성의 사상을 전개하기 때문에 개혁주의 변증가는 그가 먼저 이러한 생각들에 도전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개혁주의 변증가가 자연인에게 제시하는 사실은 첫째로 하나님은 자존적 존재의 사실이다. 둘째로 만물의 창조와 특별히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일이다. 셋째로 우주 안에서 일러나는 모든 일들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와 전 포괄적 계획의 사실이다.
제 Ⅷ 장 일반은총과 스콜라주의
1. 모든 사람은 피할 도리 없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
신의식을 갖고 있다고 칼빈은 말했다. 사람은 “그들의 인격 속에 무수한 하나님의 활동이 전개되는 어떤 작업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 계시를 말함”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대하여 윤리적 책임을 몸에 지닌 피조물인 인간에게 더없이 객관적이다. 둘째로, 인간은 그 자신 둘레에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에 대한 가장 명백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사람에게 내재하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은 로마교 신학의 존재의 유비 개념에 반대한다. 로마 카톨릭에 따르면 인간은 마치 하나님의 면전을 피할 수 있는 것처럼 되어 있다. 인간은 비존재의 영역 속으로 완전히 빠져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2. 자연신학
하나님에 대하여 증거하는 그러한 세계의 기초 위에서만 모든 다른 사실을 해석하는 것으로서 스스로 증거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존재 할 수 있다. 현대 사상고대 사상보다 좀더 참밀 하게 주관적이란 점에서 차이나 날 뿐이다. 칸트 철학의 경우 명백하게 인간의 주관이 인간 경험 내의 통일의 원천으로 설정되어 자연히 과학에 있어 통일성의 근원으로 설정된다.
3. 개혁주의 신학자들간의 차이점
일반은총에 관한 아브라함 카이퍼는 박사의 개념에 대한 각종의 비판을 다룬 한 소책자에서 그와 같은 일을 하고 있다. 그 소책자의 제목은 『일반은 총론의 문제점에 대하여』이다. 리델보스는 이 소책자에서 저자가 같은 제목으로 펴낸 전략한 소책자에서 제시한 바 있는 일반은총에 대한 본인의 견해를 비판하였다.
리델보스에서 있어서 이 두 가지 점, 즉 개혁주의 신앙과 로마 카톨릭 사이에 존재하는 질적, 양적 차이는 오로지 질적 차이에서 유래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칼빈이 바울을 따르며 아퀴나스를 반대하였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인간의 궁극적인 계시적 성경을 전제함으로써만 일반은총 교리에 철저하게 윤리적 성격을 유지할 수 있게된다.
제 Ⅸ 장 전제에 입각한 논증
개신교의 변증학은 인간의 창조주이시오, 구속주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자신을 밝히 보이신 하나님을 사랑의 순종심으로 청종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성경 속에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불신자와의 풍성한 대화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기초이다.
인간적 서술이 가능한 것은 단지 성경이 가르치는 것처럼 세상과 인간이 서로를 위하여 창조되었으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을 통하여 그들의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1. 성경의 하나님은 다른 어떠한 신들과 비교할 수 없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세적 삼위일체를 구별한다. 존재론적 삼위일체란 신성내부에서 상허간의 맺고 있는 관계 속의 삼위를 말한다. 경제적 삼위일체란 피조된 세계와 연관된 삼위 하나님의 활동을 지칭한다.
두 가지 요점을 합쳐서 나는 하나님에 대하여 그가 창조하신 세계와 그 자신이 맺고 계신 관계이고, 나는 자족적이신 삼위일체의 하나님 내부의 어떠한 종속설도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반박하였다.
2. 하나님의 뜻이 만물을 다스린다.
칼빈은 근접 원인과 원격 원인을 구별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포기하지 않고도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3. 무로부터의 창조
하나님께 당신은 이런 것을 할 수 있고 저런 것은 할 수 없다고 명령할 어떠한 논리의 비인격적 법칙도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고 작정하셨습니다.
완전하게 지음 받은 그 인간은 그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또한 그에게 법을 주시는 분이심을 인정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를 만드신 바 바로 그 자신의 존재의 법에 따른 그 자신을 따름으로써 그는 언약을 성실히 지키는 자였다.
4. 죄와 죄의 내용
“자연과 성경” 이란 논문은 에덴 동산에 있던 한 사람인 아담의 이야기의 역사성을 가정하지 않으면 완전히 이해될 수 없다.
반틸은, 역사의 시점에서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그들 모두를 대표하여 행동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택한자와 택함을 받지 않은 자들은 그들의 공통적 대표가 그들을 대표하여 이미 행한 그것들을 같이 갖고 있다. 여기서 역사의 시점에 에덴 동산에 있던 아담에 대해 이야기한 것으로 그때 그들 자신들은 역사적 개개인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5.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
창세기의 내용의 역사성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기독교의 역사성이 유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빈번히 주장해 왔던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의 관념적 범신론에 깊이 빠진 데다가’ 하나님을 ‘구체적 보편’으로 주장하므로 일관성이 있으려면 결국 그리스도의 유일성마저 부정해야만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6.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를 위해 죽으셨는가?
찰스 핫지는 조직신학 책의 한 장을 위의 제목과 같은 제목으로 시작하고 있다.
(1) 그것은 첫째 ‘그리스도의 사역의 성격‘ 에 관련된 것은 아니다 (2) 그것은 “어거스틴 파에서 무한한 것으로 생각하는 바, 그리스도의 속죄의 가치의 관한 것도 아니다.
(3) 그것은 “대속의 적합성에 관한 것도 아니다. 한 사람에게 적합했던 것은 모두에게 적합했다”. (4) 또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해서 사신 바 된 구속의 실제적 적용에 관한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일반적 의의의 진실성을 위한 일반은총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반론을 펼치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1)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며 (2) 핫지가 그리스도의 사역의 ‘단지 부수적’ 영향
(3) 불신자들 눈에 마치 모순인 듯 보이는 기독교의 교리들은 사실상 모순이라는 생각에 반대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7. 변증학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계획을 계시하는 모든 피조 세계의 본질적 명료성을 주장함에 있어서 칼빈은 죄와 그것의 결과의 사실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굴하지 않는다.
첫째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은 다음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1) 나는 보다 진솔하게 거기서 인생 전체에 대한 해석을 이끌어 낼 원천이요.
(2) 나는 계시가 어디서 나타나던지 간에 자신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는 객관적 명료성을 갖는다고 강조했다.
(3) 나는 칼빈과 마찬가지로 불신자에게 복음을 제시하기 위한 접촉점을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바 되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 내부에 신성에 대한 지울 수 없는 감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4) 연역적 방법과 귀납적 방법을 분리시키지 않으며 자연의 사실들에 대한 추론과 인간 의식의 본성
우리는 비록 온건하지만 단호하게 조금도 비굴한 변명을 늘어놓음 없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를 주장하게 된다. 우리는 표면아래 숨어있는 모든 인간 속에 나타난 신성의 감각이 있음을 안다
제 Ⅹ 장 기독교의 변증
개혁주의 변증학은 로마 카톨릭과 복음주의적 변증학이 그러하듯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됨을 인하여 하나님께 대한 ‘공통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인과 성도가 모두 인식론적으로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에라도 그들은 공통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당연시하지 않는다.
신분적 회복되고 보완된 의식은 첫째로 중생한 의식이 회복된 것이다. 둘째로 중생한 의식은 아담의 의식이 보완된 것이다. 셋째로 중생한 의식은 정도에 있어서가 아니라 원칙적으로 회복되었다.
1. 신학의 있어서의 이성의 위치
① 우리는 아담이 소유했던 것 같은 원죄 이전의 의식은 이제 더 이상 현세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② 우리는 위에서 설명된 객관적 의미에 있어서가 아니라면 인간 이성 일반 또는 일반 적인 인간의 의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
③ 우리가 중생하지 못한 의식을 다룰 때, 우리는 그것이 채용하고 있는 일원론적 가정 에 따라서 있는 그대로 생각해야만 한다.
2. 신앙을 옹호함
암스테르담 소개 자유 대학의 고 발렌타인 헵 박사의 취임 연설문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 연설문의 제목은 “개혁주의적 변증” 이었다. 헵은 여기서 개혁주의 그리스도인은 변증학의 문제에 대한 그의 접근에 있어서도 자연히 개혁주의적 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개혁주의 변증가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구별을 단연코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의 기본으로 삼지만 로마 카톨릭과 복음주의 변증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개혁주의 변증가의 주장은 만일 이 구분이 인간이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든 것의 기본이 되지 않으면,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근본적으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3. 신자와 불신자의 대화
카넬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경험의 사실과 모든 사람이 반드시 사용해야만 하는 논리가 성경의 진리를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그와 같은 비난을 벗어나고자 할 것이다.
개혁주의 그리스도인인 화이트씨가 그 자신의 입장의 풍성함을 어느 만큼이라도 인식하고 성경이라 불리우는 엑스레이 기계를 통해 찍은 블랙씨의 모습을 그에게 직접 보여주면서 블랙씨에게 도전할 용기를 갖추고 있을 때, 그는 ‘순환 논법’을 쓰고 있다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4. 일관성 있는 증언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상당양의 로마 카톨릭 신학의 누룩을 그들이 믿는 개신교 속에 반입했음이 분명해진다. 알미니안주의는 그것이 당연히 그래야만 할 수준보다 훨씬 본격적이지 못하고 또 훨씬 일관성이 결여된 개신교 신앙이다.
효과적 증거는 첫째 요건은, 증거를 하는 그 입장이 납득될 수 있는 것이어야 만 한다는 점을 항상 명심해야만 한다. 효과적 증거의 둘째 요건은, 증거를 받는 사람에게 그가 왜 자신의 입장을 버려야 하며 이제 그에게 제시된 이 입장을 받아들여야만 하는지를 보여주어야 만 한다는 것이다.
5. 성경의 권위
인간은 창조주께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사용하여 피조물 차원에서 하나님을 따라 그사고를 모방하여 생각하도록 할 목적으로 주신 사고의 도구를 이용하여 오히여 하나님은 결코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결코 그 자신을 계시하실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확신시키는 수단으로 만들어 버린다.
6. 하나님 존재의 증거들
화이트씨가 그의 “칼빈주의 5대 강령”을 잠시 망각하고 그레이씨와 합세하여 블랙씨를 이 세상이 펼치는 장엄한 미술관 속으로 끌어들여, 그 모든 아름다운 모습을 낱낱이 보여주어 블랙씨로 하여금 그들과 더불어 자발적으로 “자연의 모든 합창대가 한 목소리로 그것의 창조주께 찬양에 찬양을 드리도다” 라고 외치게 만들 것으로 분명히 확신할 것이다.
제 ⅩⅠ 장 암스테르담과 구프린스턴
1. 워필드와 카이퍼
카이퍼는 죄악된 인간의 사고 행위는 그저 무익한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진리를 파괴한다. 죄악된 인간을 특별한 원리가 그를 도전하려고 그에게 다가올 때 그것을 파괴하러 마주 달려나간다고 말한다. 워필드는 기독교가 객관적으로 변증될 수 있다고 주장한 점에 있어서 과연 옳았던 것이다. 그리고 자연인은 그에게 제시되는 도전을 영적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나 지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2. 윌리엄 브렌톤 그린 2세
그린은, “성경이 이성적으로 합당하기 때문에 우리기 성경의 복종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궁극적으로 이성에 합당한 것으로 믿는 것은 성경이 모든 이성의 근원이 되시는 그분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형이상학은 ‘첫째 되고 가장 근본적인 진리들의 관한 과학’ 이다. 따라서 변증학의 형이상학은 단지 일반적 진리의 기본적 원리를 논의하기 위하여 세워질 것이 아니라 특별히 기독교와 독특한 관계를 유지하는 원리를 확립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다.
(1) 초자연적 존재의 실재성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제약들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베이컨, 데카르트,버클리 칸트, 해밀톤, 로체 등과 같은 철학의 대가들로부터 이와 같이 언급을 설명하고 확립하는 것 이상 쉬운 일이 없다는 것을 금하고 있지 않은가?
(2) 초자연적 존재의 현현
“초자연적인 존재는 그 자체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그 나타낸 바대로 알려지지 못할 선험적 불가능성은 없다. 단지 그것의 존재가 확실해졌다는 것만 감안하더라도 그 이상은 확실시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올 수는 없다.
(3) 초자연적 존재의 인격성
① “초자연적인 존재는 인격적일 수 있다”, “초자연적인 존재는 인격성을 향한 어떤 지향성을 띠지 않는다면 존재할 수 없다.
② “진실로 초자연적인 존재가 분명히 존재한다면 그는 적어도 인격적인 존재이어야만 할 것임에 틀림없다”
③ “초자연적인 존재는 비록 그가 적어도 인격적이긴 해야 하지만 인격적인 것 그 이상의 어떤 것일 수는 없다.
(4) 초자연적 존재의 인격적 현현 또는 직접적 현현
먼저 자연이 필히 일률적이어야 하는 것만큼 일률적이어야 하는 것만큼 일률적이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고 추론할 충분한 이유가 있으나 전혀 이유가 되지 않는다. 이 문제에 있어서 절대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자연의 일률성이 한 번도 방해를 받는 적이 없었다고 양보를 하더라도 우리의 반대자는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한다.
구프린스턴 변증학을 특징지우는 것이 바로 이러한 완강한 주장, 즉 변증학은 하나님의 존재나 기독교의 사실들 같은 문제를 중립적으로 다루어야만 한다는 주장이다.
3. 플로이드 해밀톤
해밀톤은 인간이 그 자신에 입각하여 자기 자신을 밝혀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칼빈은 자신에 관한 지식을 즉각적으로 그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전재한다고 말한다. 해밀톤이 사용한 것과 같은 방법론을 사용하여 생각하는 것은 알미니안주의자와 로마 카톨릭의 노선에서는 것이다.
그는 성경의 역사성이 “현대 과학의 분명하게 발견되고 질 증명된 사실과 조금도 상충되지 않음을” 발견했다.
4. 카이퍼
카이퍼는 순수하게 형식적인 그 무엇인 믿음의 개념으로부터 출발하여 영적 과학자들에 있어서 내용을 가지고 있는 믿음의 개념에로 선회하여 마무리 지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아주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것은 카이퍼가 그의 주된 주장을 명확하게 제시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의 주장은 피조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다.
5. 바빙크
인간 자신은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필히 알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사고’ 또는 ‘관념적 존재’ 와 직접적이며 즉각적으로 일치시킴으로써 아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바빙크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권리를 이와 같이 낮춤으로써 다시 한 번 칼빈의 신학과 불일치한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신학의 주류와도 일관성을 잃고 있다. 바빙크는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가 일반계시이든 특별계시이든 간에 내재적으로 분명하다는 점을 거듭거듭 지적한다.
결 론
반틸의 변증학 방법론은 하나의 유신론적 증명으로서 그는 자신의 방법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를 위한 논증은 반드시 전제를 가진 논증이어야만 한다. 기독교의 진리성에 대한 최선의 유일하고 절대적으로 분명한 증명은 그 진리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그 어떤 것의 증명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반틸의 전제주의적 방법론은 철저하게 창조주-피조물의 구별에 의존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반틸은 기독교를 변증함에 있어서 인간의 마음 안에 억압되어 있는 신지식에 호소하는 전제에 의한 이론을 하지 않고 비기독교인과의 접촉점을 인간의 이성에서 찾으려고 한다는 이유로 가톨릭 신학자들과 알미니안 신학자들을 규탄할 뿐 아니라 개혁주의 신학자들 중에서 구 프린스톤의 신학자 워필드와 화란의 신학자 카이퍼와 바빙크등을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반틸의 변증학은 기독교를 변증하는 데에 있어서 탁월하고 온전히 기독교적인 논리를 전개하고 있으며, 특별히 그의 특징적이고 명확한 변증학의 방법론이 바로 이미 전제를 깔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전제에 입각한 논증이라는 독특한 방법론인 것이다. 그는 기독교의 참된 변증학은 성경 안에서 절대적인 권위로 그에게 말씀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와 성자, 성령을 처음부터 그의 전제로 삼아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 완고하여 고집을 부리는 것 같은 진부함만이 보이는 것 같다. 이러한 반틸의 전제주의적 방법론은 분명, 기독교 변증의 방법론으로서 탁월한 것으로 언제나 기독교 변증의 기본적인 목표는 바로 기독교 신앙의 바른 이해를 도모하고, 또한 불신자들에게 어떻게 기독교의 사상 체계와 신앙의 본질들에 대해서 전해야 할 것인가를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신자들에게 기독교를 소개하고, 기독교의 정당성과 탁월함을 가르치고 변증하는데에 있어서 기독교의 진리의 체계보다 더 선행되어야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기존의 변증학의 역사는 철학적 용어에 대한 부담과 철학적 사고 방식에 대한 전제로 인해 기독교의 본질에서 이탈하여 단순한 철학적 합리화에 머무르는 경향이 많았고, 또한 기본적인 신학 체계 역시 철학위에 세워 놓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 변증의 작업이 늘 공허함을 주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반틸이 역사나 철학에서 뛰어난 학문적 수준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점이다. 즉, 이미 수십 세기에 걸쳐서 철학과 신학 사이에서 수많은 대화들이 오고 갔으며, 일반적 접근 방법을 통해서 기독교를 일반적인 용어와 체계로 전달하려고 하는 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런 시도들은 교회 밖의 일반인을 교회로 전도해 오는 수단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교회를 세속화에 물들게 하고 말았다. 바로 이런 점에서 본인은 반틸의 사상과 그가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전제에 입각한 논증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기독교의 변증은 절대적으로 기독교의 신앙과 신학의 체계를 전제하고 시작해야 한다. 본질을 떼어놓고 그 본질에 대해 변증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사역에 있어서도 반틸은 무엇인가 분명한 기준을 그의 전제주의적 방법론을 통해 제시해 주고 있다.
올바른 신학적 작업을 통해 올바른 교회를 세우고, 또한 전도와 가르침, 그리고 우리가 나아갈 방향등에 대해 가장 기본적이고도 본질적인 것을 제시해 준 좋은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리며, 다시 한번 기본에 충실하고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 교회를 세우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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