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천년기설(千年期說)

예림의집 2014. 4. 19. 11:18

 

천년기설(千年期說)

 

1. 요한계시록이란?

 

계시록은 어떤 책일까? 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로 역임하고 계신 권성수 교수는 그의 저서인 <요한계시록>의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계시록의 말씀을 주신 것은 읽는 자들과 듣는 자들이 미궁에 빠져서 헤매도록 주신 것이 아니라......“그 가운데 있는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을 받도록 주신 것이다(1:3)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계시록은 계시록이다.” 어떠한 장르에도 구애받지 않는, 계시록은 그 본질적인 의도를 밑바탕으로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이 말씀을 계시하신 하나님의 뜻을 읽어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같은 책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이렇게 계시록은 하나님이 독자들을 곤란에 빠뜨리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 아니라 읽고 듣고 복 받도록 주신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독자들 편에서 볼 때 그것은 상당한 당혹과 혼란과 논쟁을 야기하고 있다.

 

그렇다. 계시록은 묵시문학적 특색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기록된 방법들이 철저히 비유적이고 은유적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많은 궁금증을 낳게 한다. 이러한 많은 계시록에 관한 의문들 중 가장 큰 논점으로 부상한 것이 “천년기설” 이다.

2. 천년기설의 개념과 역사적 등장 배경

계시록 20장으로부터 천년기설은 등장한다.(계 20:4)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왕국에 천년이라는 기간을 말하는 성경구절은 성경 전체에서 계시록 20장 한 부분에서만 언급하고 있으며, 이 왕국을 설명하는 것이 “천년왕국설” 이라고 한다. 또한, 예수님의 재림이 천년왕국 전에 이루어지는가, 후에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천년왕국‘ 자체가 하나의 상징으로서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인가에 대한 논쟁과 주장들이 각각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 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무천년설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조명해 보고자 한다.

무천년설의 시초는 교부들로부터 그 기원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어거스틴은 무천년설의 형성에 크게 공헌하였는데, 이유는 그의 계시록에 대한 해석이 무천년설의 근본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19세기 까지 무천년설은 후천년설과 뚜렷한 구분 없이 존재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 후천년설이 인기를 상실하고 쇠퇴함에 따라 양가자 보다 분명히 구별되기 시작했다. 양자 모두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교회 시대를 천년 왕국으로 보고 있으나 후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지상 통치를 인정하는데 비해 부천년설은 그것을 부정하고 영적인 통치만을 인정한다. 따라서 대다수의 후천년설자들이 그들의 입장을 조정하여 무천년설을 수용하게 되었다.

개혁 교회와 루터 교회, 정통 장로교회 계통의 보수주의자들이 주로 무천년설을 지지하며, 미국의 칼빈 신학교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무천년설을 가르친다.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벌코프(L. Berkhof), 카이퍼(Abraham Kuyper), 바빙크(Herman Bavinck), 렌스키(Lenski), 영(E.J. Young), 보스(Geerhadus Vos) 등이 있다. (모자르면 종말론 입문에서 참고)

 

Ⅱ. 무천년설

 

무천년설(amillennialism)은 천년왕국이 미래에 별도의 왕국으로 임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현재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리시는 것이 천년왕국이라고 본다. “무”천년설이라고 하면 마치 천년왕국을 믿지 않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데, 사실 무천년설은 천년왕국을 믿지 않는 입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어간에 천년왕국이 실현된 것을 믿는, “실현된 천년 왕국설” 이다. 이 입장은 현재의 천년왕국에서는 선과 악이 동시에 증대되가가 절정에 이를 때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도 죽은 자들은 부활하고 불신자들은 최후심판을 받는다고 본다.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은 죽은 신자들의 영혼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현재 하늘에서 다스리는 것을 천년왕국이라고 본다. 무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영광스럽고 완벽한 신천신지가 올 것으로 본다.

 

1. 무천년설의 근거

 

1) 계시록해석

 

후크마는 계시록은 “점진적 병행주의(progressive parallelism)- 계시록의 7개의 단원들이 서로 평행선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어느 정도의 종말론적 점진성을 나타냄(종말론 321쪽)- 에 의해 해석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입장에 의하면 계시록은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교회와 세상을 다음과 같이 서로 병행되는 7부분으로 묘사한다.

a. 1~3장 : 영화된 그리스도의 현현과 당시 교회와 초림과 재림어간의 모든 교회에 주신 메시지.

b. 4~7장 : 7인(교회의 고난과 박해를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의 7인 두루마리를 떼시는 그리스 도 승리의 배경으로 보여줌)

c. 8~11장 : 심판의 7나팔로 교회의 신원, 보호, 승리를 보여줌

d. 12~14장 : 그리스도 출생 이후 용(두 짐승)과 교회의 대결

e. 15~16장 :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마지막 진노를 쏟는 7대접

f. 17~19장 : 바벨론 (세속과 무신론적 세력들)과 바다짐승과 땅짐승의 멸망

g. 20~22장 : 붉은 용의 운명(그리스도 대적들의 전멸), 최후심판, 그리스도와 교회의 최후승리, 새 하늘과 새 땅.

 

이 일곱부분이 서로 병행하면서 종말적 진전을 보여주며, 마지막 단계는 다른 부분들보다 훨씬 더 미래의 사실들을 보여준다. 즉 계시록 개별 부분도 진전하지만, 계시록 전체도 진전하는 것이다.

 

Ⅲ. 무천년설에 대한 주요 논점

 

사실 무천년설에 대하여 진행되고 있는 논쟁들은 곧 계시록 20장의 해석의 문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년기설 자체가 오직 계시록 20장을 근거로 등장한 이론이며, 무천년설 또한 계시록 20장에서 그 근거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다는 점에서 계시록 20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바로 천년기설에 대한 입장을 세우는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1) 계시록 20:1~3절의 사단의 결박에 대하여

 

이 부분에서는 사단이 결박당하는 사건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을 계시록 자체에서 해석하면 초림부터 재림 어간에 이루어진 사건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 반론자들의 견해이다. 무천년론자들의 토대가 되는 점진적 병행주의에 근거하여 해석되는 계시록의 구조를 상기해 본다면 계시록 12~14장과 20~22장은 서로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12~13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승천 후 재림까지 사단군이 전면전을 시도하지만, 같은 주제로 같은 이야기를 하는 20장에서는 사단이 안전하게 투옥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두 이야기, 같은 주제로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는 듯한 이 부분들에 대하여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의문이 제기된다.

이러한 반론에 대하여 무천년론자들은 “사단의 이중성” 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이것은 쉽게 설명하자면 계시록을 근거로 사단의 속성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결박당한 사단” 이며 또 다른 하나는 “만국을 미혹하는 사단” 이라는 것이다. 즉, 사단이 물론 지금 이 땅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는 하나 그 영향력은 너무도 미미하여 성도들을 미혹할 수 도 없고 그리스도의 이루어 가시는 사역을 방해할 수 도 없다는 의미이다. 구약시대에서, 사단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 이외의 다른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도록 방해할만큼 하나님과 대립적인 세력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역, 마태복음 28장의 지상명령에 대하여는 사단이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능히 이루어 내실 것이라고 무천년론자들은 주장한다.

 

2) “점진적 병행주의” 해석의 문제

 

위에서 살펴본 계시록 20장의 해석에 대한 문제는 곧 두 번째 논쟁점, “점진적 병행주의”로 계시록을 해석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방법인가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진다. 문제가 제기된 것은 서로 다른 개별적 섹터에 속해있는 19장과 20장의 문맥상의 상관관계 때문인데, 무천년설 옹호론자들에 의하면 계시록17장~19장과 20장~22장은 서로 다른 부분이므로 19장은 예수님의 재림사건에 대한, 20장은 예수님의 초림에 대한 기록이어야 한다. 그러나 반론자들에 의하면 계시록 19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전쟁하시는 모습으로 강림하셔서 20절에서는 마침내 승리하심을 보이고 있으며, 바로 이어지는 20장에서는 이렇게 승리하신 왕 그리스도께서 사단을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버리시는 것이라 이해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다고 한다. 이러한 계시록에 대한 해석적 시각은 또 다른 쟁점으로 연결된다.

 

3) 성경해석 원리의 문제

 

이렇게 19장과 20장의 연결되는 문제는 곧 성경해석시 원접문맥보다는 근접문맥에 우선순위를 두고 해석해야 한다는 성경해석 기본 원리에 어긋나게 됨을 보여주기도 한다. 무천년론자들은 계시록 20장을 해석할 때, 계시록 전체적인 문맥적 흐름을 고려해 읽는다기보다는 부분발췌식으로 복음서와 바울서신 같은 계시록 외부의 책들을 근거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서 먼저 그 뜻과 의미를 해석해야한다는 것입니다.

 

4)‘첫째부활’의 의미의 문제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계시록 20장 5절에 나오는 ‘첫째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무천년기 주의자들은 ‘첫째부활’이 영적인 것 곧 중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반론자들은 그것이 중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부활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의하면 앞서서 계시록 20:4절에서 살아난 자들이 어떻게 죽었는가를 살펴보면서 ‘목 베임 당하여’ 죽은 것이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하므로 당연히 살아나는 것 역시 육체적인 부활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한 문맥에서 서로 연결되고 있는 '죽음'과 '부활'에서 앞의 것은 육체적인 것으로, 뒤의 것은 영적인 것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해석원리상 맞지 않기 때문에, 따라서 그들이 육체적으로 죽었지만 이제 다시 육체적으로 "살아서" 그리스도의 왕국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정상적인 해석이라는 의견이다.

이에 무천년기론자들은 “살아서” 라는 말에 사용된 헬라어는 ekjeisan이라는 단어인데, 이 엑제이산이란 단어가 육체적인 생명을 의미한다고만 볼 수는 없다고 반박한다. 그 근거로 이 단어가 다른 곳에서 육체적인 의미를 넘어서 영적인 의미로서도 사용되고 있으며 그 근거로 에베소서 2:5과 요한복음 5:25-29절 말씀에서 이 자오(엑제이산의 현재형)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을 든다. 이 두 구절에서는 영적인 생명을 얻음과 육체적인 부활이라는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된다. 요약하자면 이것인데, 다른 성경에서 ‘엑제이산’이라는 단어가 육체적인 부활 뿐 아니라 영적인 부활로도 사용되었다면, 계시록 20장에서도 그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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