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교회의 표지

예림의집 2014. 5. 19. 20:37

 

④교회의 사도성(apostolicitas)

-종교개혁은 교회의 ‘사도성’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오류를 바로 잡는 가운데서 교회의 표지로서 말씀의 순수한 선포와 성례의 합법적인 거행 그리고 권징의 표지로서 말씀의 순수한 선포와 성례의 합법적인 거행 그리고 권징의 합당한 시행을 거론하였다. 교회의 ‘사도성’은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주님의 일을 행하는 교회의 본연의 직무와 관련된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세우시고 땅 끝까지 이르도록 하셨다(마 10:5; 28:19-20; 행 1:8). 주의 사도들의 말씀을 받는 사람들은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주님을 배척하는 것이라고 하셨다(마 10:40; 요 20ㅣ21-23). 교회의 직분을 위하여 부여된 성령의 은사들은 주로 이러한 복음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도구들이었다(고전 12-14장; 롬 12장).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다. 그러니 “친히 모퉁잇돌”이 되신 분은 그리스도 예수시다(엡 2:20). 교회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았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비밀”이다. 그리하여 교회의 직분을 맡은 자를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부른다(고전 4:1; 엡 3:4). “그리스도의 일꾼”에게는 그리스도가 가르치고 행한 것을 아는 진리의 보혜사 성령이 임재한다(행 1:2; 10:41; 요 14:26; 15:26-27; 16:13-15).

-교회의 ‘사도성’은 로마 가톨릭이 말하듯 인적인 혹은 제도적인 승계에 있지 않다. 그것은 사도적 가르침의 계승에 있다. 로마 가톨릭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그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는 주님의 말씀을(마 16:18) 곡해하여 마치 베드로가 교회의 터가 되는 양 미혹에 빠져 있다. 그리하여 교황의 어록을 저통과 같이 여겨서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부여하고 있으며, 땅에서 풀고 매면 하늘에서도 그러하신다(마 10:40; 요 20:21-23). 소위 ‘영쇠의 권한’이 마치 교황을 위시한 사제들에게 있다는 듯이 허장성세한다. 그들은 이를 “교리의 사도적 계승”이라고 부른다.

-교회의 사도성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①교회는 그리스도이 대속적 공로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들은 오직 말씀을 들음으로-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모든 믿는 사람이 말씀을 맡았다. 이런 의미에서 만인이 제사장이다. 곧 만인이 사도이다.

②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그리스도시다. 그가 대제사장으로 자신을 친히 제물로 삼아 드리심으로 이제 그 의를 전가하심으로 성도를 다스리신다. 그 다스림이 중보이며, 그 방식은 자신의 영을 부어주심에 있다. 그리스도의 영-주의 영-즉 보혜사 성령은 주님이 가르치시고 행한 것을 알게 하신다. 이는 그리스도를 아는 진리와 지혜의 영이시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소식 외에 그 무엇도 구원의 복음으로 받지 않는다. 교회는 가르치기 전에 먼저 듣는 곳이다.

③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대로 가르치고 선포하는 일을 맡았다. 교회의 사도적 권능은 오직 그 맡은 말씀의 능력에 놓여있다. 복음이 역사하여 이를 받으면 하늘이 열리고 이를 배척하면 하늘이 닫힌다.

④교회의 조직과 교회 구성원에게 부여된 은사는 말씀을 섬길 뿐 말씀을 넘어설 수 없다. 교회를 통한 새로운 계시는 없다. 새로운 계시를 이루는 새로운 은사는 없다. 드러내심과 이루심이 오직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는다.

⑤교회의 유일하신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교회 그 자체 혹은 교회의 직분은 중보하는 자리에 설 수 없다. 중보자의 영광을 취할 수는 더덛욱 없다. 오직 복음은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하늘로부터 우리 속으로 들어와 역사하며 그 권능과 은혜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놓여있으며 그 영광은 홀로 하나님이 취하신다. 그러므로 교회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말씀을 대체하는 새로운 계시를 조작하거나, 말씀을 교회의 이름으로 자의적으로 승인하거나, 해석하거나, 말씀의 권능을 취하거나, 그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있을 뿐이다. 교회는 천사들이 날개를 채우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곳일 뿐, 주님의 자리에서 일점일획의 영광이라도 취하는 곳이 아니다.

 

제 5장 교회의 표지

-참 교회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교회는 왜 환난을 당할 때 타협하고 연명하기보다 죽음의 길을 택하는가? 교회가 교회답게 남기 위하여, 교회에 대한 유형적 파괴를 무릅쓰고라도 지켜야 할 무형적 가치는 무엇인가? 사데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자(계 3:1)”라고 책망을 받았다.

-성경은 교회가 살아있음과 죽어 있음을 판가름하는 ‘무엇’을 말씀에 대한 교회의 순종에서 찾는다. 우리가 교회의 속성에서 고찰했듯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터에 서고(사도성), 말씀으로 거룩해지고(거룩성), 말씀으로 하나이며(유일성), 말슴으로 하나가 된다(보편성).

-로마 가톨릭은 교회는 무오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참되며, 그 참됨이 제도나 직제를 통하여 자연히 드러난다고 보았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참 교회를 변증하면서 그 표지들을 심각하게 논의하였다. 혹자는 모든 표지들은 말씀의 순수한 가르침과 전파에 있다고 보아서 단일한 표지를 말하기도 하고, 혹자는 이와 함께 성례의 합당한 거행을 덧붙인다. 그러나 대체로 후대의 개혁주의자들은 이 둘과 함께 권징의 적절한 시행을 추가한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입장이 서로 배치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례의 거행과 권징의 시행도 모두 말씀에 따라서 온당히 행해질 것을 그들이 표방하는 한, 모두 일원론으로 보아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말씀과 성례만을 두 표지로 거론하나 실상 권징을 매우 강조하는 입장에 서 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들의 교회의 표지에 관한 논의를 너무 논쟁적으로 파악하려고 들어서는 안 된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1560)는 제 25조에 참 교회의 세 가지 표지를 분명히 적시하고 있다. “the Worde of God trewly preached. and the Sacraments richtlie ministered. and Discipline executed according to the Worde of God. be the certaine and infallible Signes of th trew Kirk(verbi divini syncera praedicatio, sacramentorum legitima ninistratio, et disciplina convenienter verbo Dei exercita, sint certa et minime fallacia verae ecclesiae indicia.” 벨직 신학고백서(1561) 제 29조에서도 이 셋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셋 모두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the pure Word of God)”에 따라야 한다고 공표함으로써 모두 한 기원에서 비롯됨을 드러내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교회의 세 가지 표지에 관한 특정한 조항이 따로 있지는 않지만 대·소요리 문답서와 더불어 이들을 매우 강조하였다(소요리 88-87문; 신앙고백서 제 7장 6조; 27-30장)

-교회는 스스로 신뢰할 만하지 않다. 그러므로 자증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가르침을 좇아야 한다. 종교개혁을 말씀의 개혁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에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잠 29:18; 사 8:20; 렙 8:9; 호 4:6). 교회의 사명은 말씀과 세례로 주의 백성을 모으는 일이다(마 28:19). 교회는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요 10:27), 그리스도의 말씀을 간직하고(요 8:31032; 14:23). 진리를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일꾼들을 통하여 일한다(딤후 2:15). 루터는 교회는 교회의 일곱 가지 표지들을 말함다; 말슴, 세례성찬, 열쇠권의 순수한 시행, 봉사자들의 합법적 선택, 공적기도와 교육, 십자가. 그리고 이후 말씀과 성례의 순후한 거행만을 거론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표지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음을 갈파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 없이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 존재한다. 루터는 오직 택자들은 교회 안에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도 교회 안에만 있다고 보았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루터의 말은 옳다. 그러나 그 역은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다.

-칼빈은 루터와는 달리 ‘교회의 말씀’이 아니라 ‘말씀의 교회’를 더욱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 계시고, 절대적이며, 객관적이다. 말씀은 자증하며, 자기가지성이 있다. 말슴의 권위는 그 저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은 인격으로 친히 말씀하신다. 교회의 터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교회가 있었다. ~~~~~

*성경: 원규범(규범하는 규범)

*교리: 이차적 규범(구범된 규점)

-서머나 교회는 환란과 궁핍이 많았으나 실상은 부요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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