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하나님의 숨으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왜 숨으실까?

예림의집 2014. 4. 14. 20:33

질문: 하나님의 숨으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왜 숨으실까?

대답: 우리들의 인식의 한계 때문에 그렇습니다. 루터가 하나님은 숨어계신다라고 말합니다.

Deuo Absconditon 은닉되신 하나님, 계시된다는 말은 숨어계시기 때문에 계시된다는 말이 됩니다.

이런 것은 유한성의 한계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피조물로 머물러 있는 한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파악할 수 없기에 숨어있다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죄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의 영향 때문에 본래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질문2: 우리 인식의 한계 때문만이 아니고 이사야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숨어계시는 것도 있지 않나요?

인식의 한계 때문만은 아닙니다. 자기의 의지로 나타내기도 하고 숨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그 의미까지도 포함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질문3: 동물의 영혼에 대한 간략한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인간하고 다름에 있어서 알고 싶습니다.

대답: 인격적 존재는 지정의로 나눕니다. 지, 정, 의지는 분리된 의미일까요? 아닙니다. 사유하는 전인이 지성이고, 느끼는 전인이 감성이고, 결단하는 전인을 의지라고 합니다. 전인적인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동물에게 동물에게 지정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주인을 기억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행동을 한다는 것은 의지가 있습니다. 지정의지의 현상적 면모들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하고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정도차이? 질적인 차이? 이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하기 전에 성경에 근거를 해야 합니다. 보통 우리는 짐승에게 혼이 있다고 합니다. 짐승에 있는 혼을 각혼(깨달을 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혼이라는 말은 네페쉬, 프쉬케라고 합니다. 영어로 할 때는 소울이 됩니다. 이것이 혼인데, 동물에게는 영이라고 말하는 프뉴마, 루아흐가 동물에게 사용되었느냐? 전도서 12:3을 보면 짐승의 혼은 아래로 내려가고 사람의 영은 하늘에 올라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영과 혼으로 번역된 원문이 같습니다. 동물에게도 루아흐가 사용된 용례가 있습니다.

문제는 성경 해석학의 문제입니다. 어휘가 같다고 같은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물에게도 같은 단어가 쓰였다고 해서 개념이 같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루아흐를 다 쓰고 있는데, 근본적인 차이는 창세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동물은 아닙니다. 동물은 혼은 죽으며 소멸되어 버립니다.

 

지난 강의에 이어서 합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불가이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유한성의 한계이고 죄악성의 부패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인격적인 존재가 아닙니까? 하나님이 계시하기를 원하시면 계시하는 것이고, 숨어계시기 원하시면 숨어계십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불가이해하기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능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요 17:3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요일 5:20 우리로 참된자를 알게 하신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둘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완전 무결한 지식은 아닙니다. 그러나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참되고 진정한 지식을 주셨습니다.

 

C. Hodge와 C. Vantil은 이것에 대한 이유를 말합니다.

핫지는 완전 무결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그의 변증학책 337에 보면

➀하나님은 불가 이해하기 때문에 그 지식이 완전 무결하다고 말합니다.

➁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부분적이기 때문에 완전 무결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반틸은 그의책 41에 보면

반틸은 천국에 이를 때 지금보다 더 많이 알겠지만, 완전함에 이르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천국에 가서도 피조물은 피조물로 남아 있기에 천국에서도 계속 우리의 지식이 자라겠지만, 이것이 제거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 신학적 이해입니다.

 

신플라톤주의나 신비주의자들은 신의 본질에 참여하기에 우리가 완전히 알 수 있을 것으로 얘기할 것입니다. 고전 13:12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생각해 볼 때, 하나님과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전체적인 부분을 살펴볼 때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ESV에는 온전하게 라는 부분이 Fully로 번역되어 있는데, 우리 인식 능력에 차고 넘치도록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은 신 지식은 불가이해하면서도 가지성을 가지고 있는데,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지만 참된 지식이다. 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다시 사도행전 16장으로 넘어가십시다.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케 하셨다.

복음을 전할 때에 바울의 말을 청종케 하셨다.

열어주셨다는 것 때문에 믿음은 직관적입니다.

믿음은 추론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따져보거나 추론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직접적이 아닙니다. 계시에 근겅하여 믿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기초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여기에 객관적인 하나님의 계시와 주관적인 성령의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신 지식의 선행 조건이 이것들입니다.

여기에서 지식은 신앙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 두가지가 다 있어야 하는데, 계시만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자아계시, 자기계시. Self revelation

이것이 없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해 주셔야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것은 필수불가결한 선 조건이 됩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단추가 하나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사다리를 놓을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분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 안에 운행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신학이라고 하는 분야하고 일반학문이라는 분야의 본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우리는 추론할 수 있습니다.

둘다 배울학자를 씁니다. 어휘가 같다고 개념이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문맥이 개념을 일차적으로 정합니다.

일반학문은 어떤 사건을 연구할 때 그 대상 위에 올라가서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대상을 관찰하면서 대상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여 분석하여 체계를 세우게 됩니다.

모든 일반적 학문은 인간이 그 대상위에 올라간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학의 독특성은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셔야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자기를 계시해 주시는 한 그 계시를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궁구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 대상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지식이 가능하게 하는 주체는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신학을 하는 인간은 오히려 하나님 아래에 서는 것입니다.

계시해 주시는 한 그것을 근거로 하여 궁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신학을 한다거나, 우리가 신학을 한다는 말은 엄격하게 말하면 말이 안됩니다.

그분이 신학하게 하신다. 라고 해야 옳은 말이 됩니다.

 

여기서 한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계시해 주실 때에 인간은 계시를 접촉하거나 소유하게 됩니다.

그 계시에 의존하여, 우리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인가요?

여기에 대한 대답은 성경의 대답에 근거하여 대답을 해야 합니다.

이성이 발견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그 계시를 읽어보고 따져보고 믿을만하다 신빙성이 있다 하고 따져보고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을

루이스 벌코프 조직신학 34페이지, 박형룡 박사의 책 65페이지.

“하나님 자신을 객관적으로 계시하신 후에라도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신앙의 눈에 열어서 보여주는 것이다.”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계시를 주신 후에라도 하나님께서 자기 계시를 열어서 믿음의 눈 앞에 보여주신다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귀에 들리게 하신다.

우리는 저절로 믿게 되었습니다.

 

신비한 역사를 통해 기독교가 기독교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자, 성경교사들은 믿음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의 본래 의도가 무엇인지 해석학적 도구를 가지고 본문의 의미를 찾은 다음에 성경의 의미를 설교하면 됩니다.

우리의 일은 거기까지입니다. 그 이후의 일은 주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헤르만 바빙크도 같은 것을 얘기합니다.

개혁교의학 3판 365페이지를 보면

1. 객관적 계시

2. 주관적 계시를 얘기합니다.

1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지만 2는 우리에게 낯섭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원리상 말씀 계시다.

본질상 적절하지만 하나님의 행동 역시 계시이다. 창조, 하나님의 행동이지만 역시 계시입니다.

행위 자체가 하나님이 어떠하다는 것을 계시합니다.

말씀 계시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의 다바르는 말씀 뿐만이 아니라 행동도 함께 얘기합니다.

그분의 말씀은 다 바르다. ^^

 

바빙크가 하는 말이 하나님이 객관적인 계시를 주시는데, 여기에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 조명을 해주시지 않으면 믿을 수도 없고, 그 내용을 수납할 수도 없다.

바빙크는 하나님께서 주관적인 역사를 주관적인 계시로 내용을 사용합니다.

문제는 주관적 계시가 있다. 표현 자체만 보면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바빙크는 그의 책에서 주관적인 계시는 객관적 계시의 새로운 요소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주어진 객관적인 계시를 조명하는 것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K. Runia라는 네덜란드 교수는 주관적 계시라는 개념이 조명이랑 같다고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최홍석 교수는 바빙크의 주관적 계시라는 것이 조명보다는 훨씬 역동적이라 말합니다.

바빙크는 특별 계시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3가지 방편을 말합니다.

신현, 예언, 이적 하지만 이 모두는 그리스도를 지향합니다.

이적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말합니다. 이것이 표적중의 표적이요, 이적 중의 이적입니다.

예언도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모든 언약은 예수님이 실체가 됩니다 .

신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바빙크는 이 3가지 방편을 통해 특별 계시가 전달되는데,

우리는 구원사의 긴장을 보면 성경이라는 형태로 특별계시를 접촉할 수 있는데,

다른 계시는 필요 없습니다. 계시의 충족성. 새로운 계시가 필요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 신현을 발견하는데

그 능력이 환원되어 그 능력이 나타난다고 바빙크는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의 역동적인 능력입니다.

주님을 더 깊이, 더 살깊게 알아갑니다.

영적인 이적은 계속된다. 중생, 회심, 신앙 - 영적인 이적입니다.

 

주관적 계시는 객관적 계시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조명과 비슷한 개념이지만,

바빙크가 말하는 개념은 역동적이고 다이나믹 합니다.

복음이 우리의 실존을 변화시킵니다. 이런 점에서 역동성을 가지고 해석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궁극적 판단은 성경이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가지고 판단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말한 내용이 성경적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거룩한 종교의 백과사전이라는 책의 제3권 497페이지.

바빙크랑 비슷한 개념이 나타납니다.

칼빈에서도 비슷한 개념이 있습니다.

박형룡에서도 서론 172페이지에 있습니다.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전혀 믿을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다.

기독교 개념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계시 체계 속에서 다이나믹한 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 때문에 혼란도 생길 수 있습니다.

바르트의 계시 개념 자체가 좀 다이나믹 합니다.

개혁신학 적인 전통의 역동성하고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벌코프의 말을 인용해보면 34페이지에

바르트가 얘기한 것이 진리의 요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계시에 대한 교리 체계는 개혁신학과 동떨어져 있다.

실존주의적인 요소가 들어온 것입니다.

 

내재주의 <-> 초절주의

Schleiermacher 바르트

Schleiermacher는 헤겔과 칸트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주관 속에서 발견되는 진리를 얘기합니다. 인간을 낙관적으로 이해했습니다.

이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초절주의가 나왔습니다.

바르트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속에서의 신학자입니다.

키에로케고르, 니체, 도스트예프스키,

초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도 초월성을 얘기합니다. 무한한 질적인 차이를 말합니다.

바르트 신학의 문제는 반동 성향 때문입니다. 초월성만을 강조했기 때문에 문제가 있습니다.

균형의 문제입니다.

내재성에 대한 것을 무시하게 됩니다.

 

바르트의 초기에 초절주의를 강조했는데, 후기에 내재성에 대한 관심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미 때가 늦어서 그는 그의 신학을 수정할 수 없었습니다.

 

계시체계를 비교해 보려고 합니다.

구자유주의

바르트

개혁주의

성경이 인간의 말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도 있다고 하며 섞여 있다고 말함

성경은 인간적인 것이고 오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유기적 축자된 영감

믿을 수 없는 것을 빼면 도덕적 책이 됨.

계시 사건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

 

the witness to divine Revelation

성령의 조명적 역사가 있지 않으면 믿을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 인간의 죄성 때문에. 또한 유한성의 한계

 

계시 자체가 아니고 계시에 대한 증거입니다.

성경은 웅덩이에 불과함.

 

수평적 이원론

수직적 이원론

 

 

생득적 신지식, 후천적 신지식

이것은 사실 철학적 문제입니다.

철학자들에게서 시작된 문제이지만 신학자들에서도 이 문제가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에서 지식이란 일반 계시와 관련해서만 말할 수 있는 지식으로 제한해야 됩니다.

날때부터 신 지식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후자는 후천적으로 신지식이 획득된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관념론, 후자는 경험론자들에 의해서 주장되었습니다.

 

경험론자들 중 존, 로커, 홉스와 같은 사람들의 지식에 대한 명제는 모든 지식은 경험 속에서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감각을 통해 모든 지식의 자료가 우리 속에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백지와 같다고 말합니다. 아무것도 기록되지 아니한 백지와 같은 상태로 태어남.

르네상스 이전에 베이컨이 먼저 터를 놓았고, 유명론자들이 경험론에 있어서 터를 놓았습니다. 헬라 철학의 원자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관념론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시세로(키케로), 데카르트, 라이프니찌.

이들은 대개 생득적 신지식을 말합니다.

진리에 대한 지식은 잠자는 기억으로 갖고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이성이 궁극적인 판단의 기초가 됩니다. 이신론, 합리주의, 계몽주의가 이것에 의해서 나왔습니다.

데카르트는 신존재를 이렇게 증명합니다. 무한하고 완전자에 대한 개념이 내안에 분명히 있는데, 이 개념은 밖으로부터 경험을 통해 들어왔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내 안에서 짜 놓은 것도 아니다. 날 때부터 주어진 것이다.

무한하고 완전한 신은 결코 속일 수 없다.

 

기독교적으로 볼 때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롬 1:18-19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 속에 보임이라.

알만하다는 것은 알수 있는 소질을 말합니까? 지식 자체를 말합니까?

 

사실은 이 두 체계가 칸트에 이르러서 통합적으로 합쳐집니다.

생득적인 것은 지식 그 자체가 아니고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능력 소질, 인식의 구조가 날 때부터 갖고 태어나는 것이다.

인식의 구조가 주어지는 것이지 지식 자체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칸트에게 있어서 인식 가능하게 하는 그 형식을 3가지로 말합니다.

1. 직관의 형식 - 시공계

2. 사유의 형식 - 12범주들

3. 이성의 형식 – ➀신지식, ➁도덕적 원리, 양심, ➂불멸성

태어난 후 지식이 들어오게 되면 자연적으로 분류가 일어나서 지식 체계가 이루어지게 된다.

 

칸트의 주장은 신학자들의 말과 비슷합니다.

루터파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 문제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다루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