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교회의 가시성과 유기성

예림의집 2014. 4. 15. 21:31

교회의 가시성과 유기성

-교회의 비가시성은 그것이 보이지 않는 유기체라는 점에만 있지 않다. 교회의 비가시성은 가시적 교회에 역사하는 은혜가 비가시적이라는 점을 함의한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에 의한 구원의 작용에 관계된다. 은혜는 보이지 않으나 성도의 삶과 성례들을 통하여 여러 양상으로 나타난다. 지상의 가시적 교회는 비가시적 교회와 일치하지는 않지만, 비가시적 교회에 기초하지 않고는 참 교회로 설 수 없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머리이심이 비가시적 교회뿐만 아니라 가시적 교회의 본질을 함께 제시하는 소이가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교회의 비가시성은가시적 교회와의 역동적인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파악된다.

①보편적 교회는 비가시적이다. 왜냐하면 가시적인 지교회에서 전체를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시적 교회의 지역적 보편성 즉 ‘보편적 비가시적 교회’가 부인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가시적 교회의 보편성은 특히 ‘우주적(universalis)’이라고 지칭된다.

②‘택자들의 모임’으로서 교회는 비가시적이다. 그러나 지상의 가시적 교회가 택자들의 모임이라는 사실이 거부되지는 않는다. 다만 이는 참 교회의 마땅한 바를 드러내나 그것이 가시적으로 알려지지 않는다.

③‘부름 받은 자들의 모임’으로서 교회는 비가시적이다. 그러나 성도의 구원에 있어서 효과적인 소명이 있듯이, 가시적 교회도 소명의 공동체로서 산다. 다만 그것을 가시적으로 볼 수는 없다.

-교회의 비밀은 비가시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의 관계 속에 스며들어 있다. 교회의 비가시성으르 가시적으로 추론하거나 확정하는 것은 무오하다. 그것이 이성이든, 감정이든, 윤리든, 어떤 도덕적 선 혹은 행복이든-무엇으로도 교회의 비가시적 요소를 가시화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 물론 성도는 보이지 않은 은혜와 그저 받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의를 삶 속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내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열매로 알되, 열매가 본질은 아닌 것이다. 그것은 곧 우상숭배와 다름 없다-787년 제 2차 니케아 공의회는 우상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는데, 이는 교회론 특히 교회 예배의 타락을 의미한다. 교회의 가시성에 주목하여 성도가 지상에서 은혜로 완전해질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도 금해야 한다.

-성도가 완전을 향해 나아가듯이 교회도 그러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도가 그렇듯이 교회는 완전하지 않다. 교회는 개혁되고 있다는 점에서만 개혁적이다. 즉,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지고 있어야 한다.

-ecclesia reformata est semper reformanda!

-교회의 비가시성과 가시성은 ‘승리적 교회(scclesia triumphans)’가 아직 이 땅에서는 보이지 않는다거나 혹은 완성되지 않았다거나 하는 차원의 논의가 아니다. 이는 지상의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여전치 ‘전투적 교회(ecclesia militans)’라는 측면에서 부각되어야 한다.

-교회는 동시에 비가시적이며 가시적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구원의 모든 서정에 미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구원받은 언약백성들의 연합체인 동시에 그들의 어머니며, 동시에 유지체(organization)이고 제도적 기관(institute)이다. 이런 구별은 비가시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를 나누는 것과 경우가 다르다. 가시적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으로서 직분과 은혜의 방편들 가운데서 제도적 기관으로 믿음과 삶의 교제 가운데서 유기체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가시적 교회가 유기체며 조직체로서 역동성을 갖는 것은 그것이 비가시적 교회에 대한 영원한 경륜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4. 교회: 신자들의 어머니(mater sanctorum)

-하나님 아버지의 부성적인 돌봄, 사랑, 자비, 긍휼, 호의 가운데 있는 언약의 자녀들은 필히 교회의 모성적 양육(nutritio materna)을 받게 된다. 교회를 성도들의 어머니로 여긴 것은 이미 초대교회 교부 터툴리안의 글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이후 키프리안, 어거스틴 등에 의해서 그 의미가 심화되었다. 다만 중세 로마 가톨릭은 이를 오용하여 교회의 제일 본질로 삼음으로 가시적 교회를 비가시적 교회보다 우선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섭리의 방식으로 “우리의 능력에 맞추셔서” 교회를 주시고 믿음을 더하심으로써 우리가 날마다 진보하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복음의 보물을 맡기셔서 말씀을 통하여서 성도들이 참 경건에 이르는 외적인 도움을 받도록 하셨다. 그들은 유아기와 아동기를 지나는 동안 교회의 도움과 섬김, 보호와 지도를 받아서 성인이 되고 궁극적으로 “믿음의 목표”에 이르게 된다.

-사도바울은 교회를 구성하는 우리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의 자녀들이라고 하셨다(갈 4:25). 성도는 율법 하에서뿐남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도 “모성적 돌봄”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 자신께서 아버지가 되시는 어떤 사람에게든 진실로 교회는 어머니가 될지니라(키프리안)”

-지상의 삶을 사는 동안 가시적 교회는 어머니의 역할을 한다. 교회가 성도를 잉태하여 낳고 젖을 먹여 기른 후 마지막 때까지 보호하고 양육해 주지 않으면 아무도 영생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교회는 먼저 “가르치는 교회”이기 전에 “듣는 교회”여야 한다. 먼저 하나님의 택한 받은 백성들의 모임으로서의 비가시적 교회의 은총이 있고 돌보는 교회의 역할이 따른다. 먼저 성도 각자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연합이 있어야 교회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 즉 “성도의 교제”가 “성도의 어머니”로서의 교회의 성격보다 앞서야 한다. 로마 가톨릭은 이 관계를 뒤집어 놓았다.

-성도는 교회라는 “학교”를 떠나서는 구원의 진리를 배울 수 없다(사 37:32; 욜 2:32).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교육”을 통하여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 것과 아는 일에 있어서 장성하길 바라며 이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자 하신다(엡 4:10-13). 교회는 “영혼의 영적 양식”으로서 교리를 먹인다. 그리하여 말씀을 들음으로써 믿음이 자라며(롬 10:17) 궁극적으로 “신앙의 일치”에 이르도록 이끈다.

*두 음성 이론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특별한 은혜는 사람의 혀와 입을 사용하셔서 그 지체들이 “자신의 음성”을 듣게 하신 것이다.

-가르치는 직분이 사도와 교사에게 부여되지만 오직 성령의 감화로 듣게 하시고 듣는 자로 하여금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고전 2:4; 3:7; 15:10; 갈 3:2).

-성화의 과정에 있는 성도가 완전하지 않듯이 지상에 있는 교회는 오류가 없지 않다.

-주님께서는 교회의 주름 잡힌 것을 펴고 티를 씻어내심으로써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신다(엡 5:26-27). 교회는 거룩한 주님의 몸이지만 완전히 거룩해 가는 과정에 있다.

“교회는 날마다 진보하므로 거룩하다. 교회는 아직 완전하지 않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지상의 개교회가 “성화의 증거”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에도 그 존재는 인정하신다.

-교회는 비록 완전하지 않더라도 여호와의 영원한 거처요 쉴 곳이 된다(시 132:13-14).

-성도들은 교회의 품 안에서 “서로 간에 고통을 감내하며”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가야 한다(엡 4:3).

-세례는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아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표이다.

-주님께서 돌아오라고 부른 자를 누가 감히 거부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나타나서 성도가 그분과 화목하게 되었으니(딛 1:9; 3:4; 딤후 1:9; 고후 5:18) 누가 스스로 헤아려 그 사랑으로부터 혹은 자신을 혹은 남을 끊을 수 있겠는가? 오직 이러하므로,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죄행에 대한 항속적인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의 자녀로서 어머니와 같은 교회의 품속에 즐거이 머물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