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성경적인 인식론

예림의집 2014. 4. 10. 21:28

성경적인 인식론

 

 

성경적인 인식론을 말하려면 성경적인 해석학을 근거로 이해해야 한다. 영존하신 하나님. 스스로 계신 야훼, 성부 하나님을 인식해야 하는데 그것은 성경의 여러 문맥에서 볼 때,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는니라.”(요14장)과 독생하신 예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1:18)의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을 뺄 수가 없다.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말씀하듯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 인식론이 가능하다.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예전에 니고데모처럼 찾아가서 육신적으로 만날 수 없다. 지금은 보좌 우편에 계셔서 천상의 사역을 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 말씀처럼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문맥상 ‘성경'은 구약성경을 가리킨다. 아직 신약이 정경화되지 않은 때이기 때문에 구약의 기능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을 기독론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유기적 영감, 축자적 영감)으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은 열린 책이기도 하지만 닫힌 책이기도 하다. 성경을 읽는다고 예수님을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역사적 예수는 발견할 수 있겠지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도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을 통해 볼 때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인식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말씀과 성령, 성령과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고(믿어지게 되고), 믿어진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현존하시는 분으로 성부 하나님이 계시되는 것이다. 성경은 객관적 원리이고 성령은 주관적 원리인데 이 둘의 관계는 “cum verbo”(말씀과 더불어)의 관계이다. 신비주의자들은 말씀없이 성령께서만 역사하신다고 하며 루터파는 말씀으로만 역사하신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말씀과 더불어 성령이 역사하신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3위 하나님의 위격(person, persona)이라 함은 존재방식에 있어서 인격적 주체로서 독립적인 존재라고 이해할 수 있는데 “perikoresis” ①상호침투(통)와 ②공재로 설명할 수 있다. 성부는 성자 안에, 성자는 성부 안에 있다고 하는 것처럼. 그래서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불변하시는 한 하나님이시다. 세 개의 무한이 아니고 하나의 무한이다. 이 무한은 영원인데 가장 큰 개념으로 두 개의 영원이 있을 수 없다. 성부, 성자, 성령은 동일본질의 하나님이시다. 나중에 삼위일체를 다룰 때 더 다루겠다. 여기서 잠깐 소개한 것은 ‘신론’이라 할 때 성부 하나님만이 아니라 삼위일체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인식의 원리가 성경에서 나온 것이고 참되다고 믿는데 어떤 근거로 참되다는 것을 믿는가? 영원불변하신 하나님, 원인을 자기 속에 가지는 하나님, 완전한 인격적 존재인 하나님, 이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낸 것을 계시라고 하는데 그 성경은 참되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기독교가 참이고 성경이 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기독교 밖에 있는 사람과 기독교 안에 있는 사람의 인식론의 원리가 달라지는데 여기에 접근 방법이 세 가지가 있다. (참고. H. Henry Meeter의 “The Baxic Idea of Calvinism” p45-52)

 

① 비교 종교학적 접근

종교 현상들을 비교함으로서 기독교의 탁월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상대주의를 깔고 들어가는 것인데 더 문제는 그 비교를 평가하는 자의 기독교에 대한 호불호에 따라 평가가 달리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기독교만 유일한 참 종교다라는 결론을 내리기 불가능하다. 제한적으로 유용성은 있다. 기독교가 들어간 곳과 불교가 들어간 곳을 비교하며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인 우위를 근거로 기독교의 탁월성을 증명할 수도 있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들도 많다.

 

② 기독교 변증의 방법

변호하여 증명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방법은 기독교 인식론과 맞지 않는다. 그런데도 성경은 변증의 방법을 때로 사용한다. 예를 들면 엘리야와 모세, 예수님도 변증의 방법을 사용했다. 기독교 변증이 유용하지만 변증의 한계가 있다. 그 한계는 변증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지게 할 수 없다. 이미 믿은 사람이 자신의 신앙을 변증할 수 있지만 그 변증을 통해 믿음의 경로에 진입할 수 없다. 초월적인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가 생기게 되면 중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아무 반론이 생기지 않도록 절대적인 논증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이 방법은 제한적 유용성이 있지만 한계가 있다. 기독교를 박해하는 사람들의 입을 잠시 막을 수 있다.

 

③ 성령으로 말미암는 계시의존 신앙의 방법

성경은 믿음을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 영생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는다. 믿음은 논리로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 1884년 북만주 지역에 75명의 조선인이 집단적으로 세례를 받는 일이 있었다. 로스와 메킨타이어 목사가 집례했다. 이들이 세례를 받기까지 과정을 살펴보면 선교사도 없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없었는데 세례를 받게 되었다. 매서인이 쪽복음을 전해주면서 그것을 읽게 되면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죄인임을 깨달아 세례를 받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 박춘권의 회심사건: 토마스 선교사를 처형했던 관원으로 성경을 도배하다가 복음을 깨닫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에 청종케 하시니라.”(행16장) “Paulus Dixit” 들리니까 의지가 작용하여(청종) 결단에 이르게 하신다. 이 때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 즉 복음에 대한 말이다. 이것은" Testimonium Spiritus Sancti internum"(성령의 내적인 증거)이다. 복음을 근거로 하여 초월적인 성령의 내적인 증거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결과가 믿음이다. 성령의 이중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말을 여시고 듣고 있는 루디아의 마음을 여시는 역사의 결과가 믿음이다. 그리고 믿음에서 믿음으로 점점 더 나아가게 된다. 어떤 철학자를 만나 토론을 한다고 했을 때 토론 중에 예수님을 믿었다 하더라도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이다. 이 방법이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경의 근거(행16:14“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롬10: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요5:39“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문맥)가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두 사람(헤르만 바빙크와 찰스 핫지)을 통해 살펴보겠다.

H. Bavinck

왜 당신은 성경을 믿습니까 하는 질문에 대하여 유일한 대답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라는 것이다. 그럼 당신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하는 질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이 질문에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어야만 한다. 성경 속에 이성적으로 과학적으로 따져보면 이해되지 않은 것들이 많다. 터툴리아누스는 “나는 불합리함으로 믿는다.”라고 했다. 이 말은 만일 성경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한 구절, 한 구절 다 이해된다면 이 책은 인간 수준의 책으로 믿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사55:11과 같이 그는 창조주시요 영원불변하시며 자존하시는 하나님이고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며 그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이해되지 않는 성경을 믿는 이유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C. Hodge

'Reason must judge of credibility of a revelation." (이성이 성경이 믿을만한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이성을 너무 과대평가했다. 이성은 두 가지 유한이 있다. 유한은 무한을 이해할 수 없다. 죄로 심각하게 부패된 존재가 어떻게 초월자의 계시를 믿을만한 것인지 판단자가 될 수 있는가? 이 말이 Hodge의 전체 신학의 틀과 상충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에 대해 C. Vander Stelt은 Hodge 를 스코틀랜드의 상식철학의 영향을 받았다라고 말한다. John M. Frame도 똑같은 논리로 비판한다. Robert L. Reymond의 "개혁주의 변증학"의 3장의 내용을 보면 분석적으로 설명했다. Bernard Ramm의 "복음주의 신학의 흐름의 내용"을 인용하자면 “트레티누스의 저서 <변증적 신약 강요>가 오랫동안 신학교의 택스트북으로 사용되었는데 C. Hodge가 이 사람의 책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 아들 A. A. Hodge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트레티누스는 개신교 스콜라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것을 대본으로 하고 조직신학 책을 썼다.”라고 평가했다.

 

성경의 내용을 다 입증하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믿는다는 것에 대한 불신자들의 논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할 수 있다.

① 복음의 아름다운 삶을 통해 그를 부끄럽게 하는 방법

② 대항하여 변론하는 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 당신도 역시 똑같은 처지에 있다는 것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불트만의 “전제없는 주석은 불가능하다.”는 말처럼 모든 논의는 전제없는 것이 당연하다. H. 도예베르트의 <철학적 사고의 초월적 문제들, 1948>에서 “사유의 이론적인 태도와 그 내적인 구조”라는 챕터가 있는데 이것을 도식화한다면 다음과 같다.

versus

전 이론적 태도 / 전제 이론적 태도 / 과학적 태도

 

생각한다는 것은 논리성을 가지는 것인데 그 생각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논리적이고 과학적이고 이성적인가를 따져봤을 때 그것은 아니다라는 대답을 줄 수 밖에 없다. 인간의 사유는 논리적이지만 모든 것이 그렇지는 않다. 우리 생각 속에 과학적이고 이론적인 태도가 있지만 전 이론적 태도와 마주보고 있다. 과학자들을 세 범주로 나눌 수 있는데 ①무신론적 성향, ②유신론적 성향, ③불가지론적 성향이다. 이 세 범주에 속해서 과학행위(가설-입증-이론)를 하는데 이 행위는 논리적이고 이론적이고 과학적이지만 과학자는 이미 입증되지 않은 전제(세 범주)를 가지고 과학행위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학행위를 통한 해석은 이미 전제가 있는 해석이 되기 때문에 객관적일 수가 없다. 따라서 누구든지 전제없는 논리를 하는 사람은 없다. 도예베르트가 이 작업을 하게 된 것은 임마누엘 칸트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칸트는 이성의 한계를 폭로했지만 이성을 가지고 이성의 한계를 비판했기 때문에 그 자체로 한계를 가진다. 따라서 이성의 자율성을 강조한 것이다.

 

지식이 먼저인가 믿음이 먼저인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Fides precedit intellectium” 믿음은 지성보다 앞선다.(안셀무스, 어거스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교육학적으로 복음이 인지되는 과정의 측면에서 볼 때는 들어야 믿음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듣는다고 해서 믿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성령의 내적인 증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인은 은총이고 수단은 말씀이다. 여기서의 믿음은 맹목이 아니다.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믿음은 계시에 기초해서 생겨나는 믿음의 원인은 성령의 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성경은 신학의 객관적 원리이고 성령은 신학의 주관적 원리이다. 이 계시는 신정통주의(특별계시)나 중세 스콜라주의(일반계시)도 아니라 이 계시 속에는 특별계시와 일반계시가 다 포함되어야 하는데 일반계시가 특별계시에 의존적인 관계를 가져야 한다. 그 이유는 유한성의 한계 때문이고 죄로 심각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에 의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