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기독교강요 요약

예림의집 2014. 4. 3. 17:41

제 1 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제 1 장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면 이 둘은 어떻게 서로 관련되어 있는가?

1. 자신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모든 지혜 두 부분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 
이 두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먼저이며, 어느 쪽의 지식이 다른 쪽의 지식을 만들어 내는가를 구별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먼저, 자기 생각을 돌려, 자기가 "힘입어 살며 기동"(행 17 : 28) 하고 있는 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살펴볼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은 은사들 중 그 어느 하나도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없으며, 심지어는 우리의 존재 자체도 오직 한분 하나님 안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악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선하신 일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자신을 미워하기 전에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할 수가 없다. 인간이 자신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곧 자신의 재능에 만족하고,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알지 못하거나, 잊어버리고 있는 한, 자신에 대하여 만족하지 않을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우리를 일깨워서 하나님을 찾게 한다. 뿐만 아니라, 마치 손으로 끄는 것처럼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2.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자아에 대한 지식이 없다

 인간은 분명히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나서, 다음으로 자신을 자세히 검토하지 않는 한, 결코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지 못한다. 왜냐하면 명백한 증거에 의해서 우리 자신의 불의, 더러움, 어리석음, 불결함을 스스로 확신하기 전에는, 우리는 항상 자신을 의롭고, 바르고, 현명하며, 거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신만을 바라보고 이러한 판단의 유일한 표준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가 본래 위선으로 치우쳐져 있어서, 일종의 공허한 의의 형상이 의 그 자체를 대신하여 우리를 충분히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위엄과 인간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하심를 느낄 때마다 충격을 받으며 압도 당한다고, 성경이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그 두려움과 놀라움은 바로 여기에서 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의 위엄과 비교해 보기 전에는, 결코 자신의 비천함을 깨닫거나 충분히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추론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는 이러한 놀라운 사건의 많은 실례를 사사기나 여러 예언서에서 자주 보게 된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말이 자주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공통적으로 표현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삿 13 : 22, 사 6 : 5, 겔 2 : 1, 1 : 28, 삿 6 : 22-23). 욥기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순결을 표현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능력, 그리고 부패를 인식케 하는 가장 강력한 논증을 사용한다(욥 38 : 1).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하여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자신이 "티끌과 재"(창 18 : 27)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했으며, 엘리야도 자기 얼굴을 겉옷으로 가리우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심을 감히 견뎌낼 수가 없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매우 두려운 것이다(왕상 19 : 13).

제 2 장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이 지식의 목적은 무엇인가?

1. 경건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필수 조건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그의 영광에 얼마나 합당하며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종교(religion) 또은 경건(piety)이 없는 곳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타락하여 저주받은 인간이, 중보자 그리스도를 구속 주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그런 종류의 지식에 대하여는 아직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아담이 자기의 무죄함을 그대로 보존하였더라면 우리는 자신의 참된 질서에 따라 살게 되었을 것이라는 그 근본적이며 단순한 지식에 대해서만 말하려는 것이다. 인간성이 오늘날 같이 파괴된 상태에서는,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화목 시키지 않는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거나 구원의 창시자로 알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며, 또한 어떤 면에 있어서도 하나님에 대하여 호의를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며, 섭리로 다스리시며, 선하심으로 양육하시며, 각종의 축복으로 우리를 채워 주신다는 것을 아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화목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하나님은 먼저 우주의 창조와 성경의 일반적인 교훈에서 자신을 창조주로 나타내셨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얼굴을 안에서(고후 4 : 6 ) 자신을 구속주로 보여 주셨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식하는 것은, 종교를 낳게 하는 경건을 우리에게 올바로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합된 것을 말하는데, 이 사랑은 그의 은혜를 깨달아 앎으로써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는 것, 하나님의 부성적인 사랑으로 양육을 받고 있다는 것, 자기가 누리고 있는 모든 축복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 이러한 모든 것을 인식하기 전에는 결코 그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들이 완전한 행복을 하나님 안에 두지 않는 한, 진정으로 중심에서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지 못할 것이다.

2.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신뢰와 경외를 포함 한다

첫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먼저 두려움과 경외를 가르치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
둘째, 이 지식으로 우리는 일체의 선을 하나님에게서 찾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으므로 또한 그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창조의 권리에 따라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 자기의 생명은 하나님으로 부터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계획과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져야 한다는 사실 등을 즉시 인식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인간의 마음을 점령할 수 없다.              
 경건한 마음은 처음부터 오직 한 분이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깊이 생각할 뿐, 어떤 공상적인 신을 꿈꾸지 않는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사람은 만물이 그의 지배 하에 있음을 알고, 그가 만물의 안내자요 보호자이심을 믿기 때문에 전적으로 그를 신뢰하게 된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모든 축복의 창시자이심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고통스러울 때나 궁핍할 때에는 즉시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의 보호를 구하며, 그의 도우심을 기대하게 된다.
 여기에 실로 순수하며 참된 종교가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엄숙한 두려움과 결합된 신앙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이란 자발적인 경외를 포함하고 있으며, 율법에 규정된 것과 같은 정당한 예배를 수반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실을 더욱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곧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경배하되 아무 뜻 없이 하고 있으며, 다만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를 진심으로 경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의식이 화려한 허식으로 있는 곳마다 마음의 진실성을 찾아보기는 매우 힘들다는 사실이다.

제 3 장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본래부터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박혀 있었다.

1. 이 자연적 은사의 특성

 인간의 마음속에 타고난 본능에 의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각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아무도 무지를 구실로 삼아 도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성한 위엄을 어느 정도나마 깨달아 알 수 있는 이해력을 모든 사람 각자에게 심어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신선한 물방울을 떨어뜨려 주신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한 분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과, 이 하나님이 바로 그들의 창조주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생활을 바쳐 하나님의 의지에 순종하지 않을 때에는 반드시 자신의 증거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게 된다. 만일 하나님에 대한 무지가 어디선가 발견된다고 하면 이에 대한 실례는 분명히 보다 시대에 뒤진, 문명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유명한 이교도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뿌리 깊은 확신을 갖지 못할 만큼 미개한 국민이나 야만적인 종족은 없다. 비록 다른 면에서 볼 때 짐승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까지도 항상 무엇인가 종교의 씨앗을 그 속에 지니고 있다. 이러한 공통적 관념은 인류의 정신을 깊이 점령하고 있으며, 집요하게 사람들의 가슴속에 밀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가 존재하던 날부터 종교 없이 지낼 수 있었던 나라, 도시, 간단히 말해서 종교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가족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이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념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고 하는 하나의 무언의 고백이 아닐 수 없다.

2. 종교는 임의의 발명물이 아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순박한 민중들을 속박하기 위해 교활하고 교묘한 간계로 종교를 창안해 내고, 이 하나님 예배를 만들어 낸 그들 자신은 하나님의 존재를 전혀 믿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생각이라 하겠다.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속박시키기 위해, 교활한 사람들이 종교에 필요한 여러 가지 것들을 조작해 내서 이것으로 일반 대중에게 존경심을 일으키며, 공포심을 갖게 하였다는 사실은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씨앗에서 싹이 움트듯이 인간의 마음에 종교적 영향을 낳게 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신념이 없었다면 아마 그들은 결코 이 일을 성취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종교라는 명목으로 소박한 민중들을 교활하게 속인 그들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전혀 갖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말이다.
 
 가장 대담하게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 일수록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에도 가장 심하게 놀라는 것이다(레 26 : 36). 이렇게 놀라게 되는 것은, 그들이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강한 힘으로 그들의 양심을 때리는 하나님의 복수에서 온다. 실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감추며 하나님의 임재를 자기 마음에서 지워 버리기 위하여 온갖 구실을 찾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항상 두려움의 올무에 걸리게 된다. 가끔 이러한 공포는 잠시 동안 사라져 없어진 것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즉시 돌아와서 새로운 공격를 취한다. 이것은 자신이 바로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념이 항상 실재한다는 사실을 예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3. 실제적인 불신앙은 불가능 하다.
 
 인간의 마음에 결코 지워 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인식이 새겨져 있다는 것은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항상 확신하게 될 것이다. 참으로 모든 사람에게는 어떤 신이 존재한다는 신념이 태어나면서부터 고유하다. 그리고 이 신념은 선천적으로 모든 사람의 골수에까지 깊이 고정되어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하나님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 사악한 자들의 완고함 자체가 바로 충분한 증거가 된다. 디아고라스(Diagoras)와 그 동료들은 모든 시대가 믿어 오던 종교들을 희롱하였고, 디오니시우스(Dionysius)는 하늘나라의 심판을 조롱하였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냉소적인 비웃음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양심이라는 벌레가 쇠를 부식시키는 어떤 무엇보다도 더 예리하게 그 속을 파먹고 있기 때문이다.
 그릴루스(Gryllus)는 플루타크(Plutarch)의 저서에서 매우 능숙한 이론으로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곧 종교가 생활에서 상실되면 인간은 짐승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훨씬 더 비참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많은 형태의 죄악에 붙잡혀 그들은 끊임없는 혼란과 불안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짐승보다 더 뛰어나게 하며, 이 예배를 통해서만 인간은 불멸을 추구하게 된다.

제 4 장
이 지식은 부분적으로는 무지, 부분적으로는 악의로 말미암아 질식 혹은 부패되었다

1. 미신 迷信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 신앙의 씨앗을 심어 주셨다는 사실은 경험이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받은 이 씨앗을 마음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백의 한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 더우기 그것을 성숙하게 해서 때가 되어 열매를 맺게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시 1 : 3).  더우기 어떤 사람은 미신에 사로잡혀 있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악한 생각으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지만, 어떻든 이 사람들은 모두다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을 저버린 사람들이다. 그 결과 이 세상에는 진정한 경건이라는 것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한 때 어떤 사람들이 잘못으로 미신에 빠진다고 말한 바 있거니와, 그 뜻은 그들의 단순함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맹목적으로 수고하고 있지만, 이 맹목은 거의 항상 거만한 허영 그리고 완고한 것들과 결탁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만과 결탁되어 있는 허영은, 비참한 인간이 마땅히 자기 수준 이상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의 육적인 어리석음을 표준으로 삼아 하나님을 판단하고 건전한 탐구를 게을리 하며, 호기심에 따라 공허한 사색의 길을 달리고 있는 사실에서 찾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 주신 그대로 하나님을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자신의 억측에 따라 하나님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심연의 문이 열려 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떠한 방향으로 발을 내디디든지 간에 그들은 필경 파멸을 향해 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후에는 아무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봉사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마음에서 만들어 낸 허구와 망상에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와 같은 사악함에 대하여 설득력 있게 말하고 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롬 1 : 22). 그는 또한 바로 앞 절에서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롬 1 : 21)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 죄에 대하여 변명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바울은 그들이 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곧 그들은 절제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분에 넘치는 것을 요구하여 제멋대로 어두움을 자초하고 심지어는 그들의 공허하고 완고한 교만으로 우둔해졌기 때문에 마땅히 받아야 할 대가로 눈이 어두워졌다고 부언하였다. 그들의 어리석음은 이와 같이 허망한 호기심에서뿐만 아니라, 거짓된 신뢰에 따라 제한된 인간의 지식을 넘어 서 보려는 지나친 욕망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조금도 변명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2. 하나님에 대한 의식적 외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 14 : 1, 53 : 1)라고 말한 다윗의 이 말은 다른 곳에서도 곧 찾아볼 수 있겠지만 먼저 자연의 빛을 꺼버리고, 고의적으로 자신을 무감각하게 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본능적인 감각에 의하여 아낌없이 내적으로 이미 부여받았으나 오만하고 상습적인 죄로 말미암아 그 마음이 완고해져서, 하나님에 대한 일체의 기억을 미친 듯이 쫓아버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윗은 그들의 광란이 한층 더 증오스러운 것임을 설명하기 위해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그 본질을 제거하지는 않으나 그 심판과 섭리는 박탈하여 하나님을 하늘에 있는 게으름뱅이로 가두어 버림으로써 사실상 하나님의 존재를 단호하게 부정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세계의 통치를 포기하고 이것을 운명에 맡기며, 인간의 악한 행위를 묵과함으로 인간이 형벌을 받지 않고 육욕에 빠져 살게 한다는 것보다 더 하나님의 본성과 불일치한 것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말살시키고 무분별한 욕망에 빠지는 자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이다. 그리고 사악한 자들이 눈을 감은 후, 보아도 보지 못하도록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은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인 것이다(마 13 : 14-15, 사 6 : 9-10, 시 17 : 10). 다윗은 다른 구절에서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시 36 : 1) 더욱이 그들은 하나님이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악행을 도도히 자랑한다고 하였다(시 10 : 11).
비록 그들이 어떤 신의 존재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의 능력을 제거함으로써 그 영광을 박탈하는 것이다. 바울이 증거한  대로 하나님은 영원히 동일한 분이시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신 분"이시다(딤후 2 : 13). 그러므로 하나님을 공허하며 죽은 우상으로 만드는 자들은, 실은 하나님을 부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곧 그들이 아무리 그들 자신의 의식을 거스려 싸우며 하나님을 이 의식에서 몰아내고 천상에서 파멸시키기를 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대 앞에 가끔 불러내지 않는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음이 커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떠한 공포로도 하나님을 맹렬히 대항하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그러한 맹목적인 충동에 사로 잡혀 있는 한, 그들은 무감각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이 망각은 계속 그들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3. 우리는 자신의 망상에 따라 하나님을 만들어 내서는 안 된다

  참된 종교는 마땅히 우주 법칙에 관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것,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망상에 따라 변질되는 그런 망령 또는 환상이 아니다. 미신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할 때에도 그것이 가면을 쓰고 얼마나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는가를 또한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미신은 하나님께서 관심조차 없다고 입증하신 것만을 붙잡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 그가 기뻐하시는 것들은 멸시 또는 공공연히 거절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거짓된 의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들은 모두 자기 자신의 망상을 예배하며 찬양한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하나님에 대하여 애매모호하고 거짓된 견해를 가진다는 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갈 4 : 8) 그는 또 다른 곳에서 에베소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엡 2 : 12) 지낸 자들이며, 그때에는 유일하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 일에 있어서 그들은 외인이었다고 하였다. 적어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유일신을 생각하든 다신을 생각하든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두 경우에 있어서 다같이 참되신 하나님을 떠나고 이 하나님을 저버렸으며 또한 그를 버림으로써 저주받을 우상 외에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락탄티우스(Lactantius)의 말과 같이 진리와 일치하지 않는 종교는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고 단정해야 한다.

4. 위선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의를 멀리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범한 죄를 벌하기 위해 심판대가 마련되어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그 심판대가 무너지기를 열심히 원하고 있다. 이러한 심정으로 그들은 심판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으신 하나님과 대항하여 싸운다. 그러나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능력이 가해짐을 깨닫게 될 때, 그들은 그것을 멀리할 수도 피할 수도 없기 때문에 무서워서 후퇴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서나 그들을 위압하고 있는 하나님의 위엄을 멸시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어떤 종류의 종교적 행사를 수행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여러 가지 죄악으로 자신들을 부패케 하기를 그치지 않으며 악에 악을 더하고 마침내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범하여 그 모든 의를 파괴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하여튼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체 위장함으로써, 죄의 탐닉을 제재하지 아니하고 자기로 만족하며 또한, 자신의 육체적인 방종을 성령의 고비로 제재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방종에 빠지기를 더 좋아하는 무리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의 공허하며 거짓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거의 종교의 그림자라고 부를 가치조차도 없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이런 혼란한 지식과 종교의 기원인8 경건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를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데 이 경건은 오직 신자의 마음속에만 있다. 그러나 위선자들(hypocrites)은 이러한 왜곡된 길을 걸으면서도 그들이 멀리하고 있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한다. 전생애를 바쳐 시종 일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의 모든 행위에서 대담하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찮은 제물로 하나님을 회유하려고 열중한다. 또한 그들은 마땅히 성결한 생활과 완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함에도 천박한 것들과 무가치한 의식들을 날조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얻으려고 한다.  
 



제 5 장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우주 창조와 그 계속적인 통치에서 빛을 발한다.

(하나님은 창조 사역에서 자신을 계시하셨다. 1-10)
1. 하나님의 자기 현현은 명백하기 때문에 어떠한 변명도 허용되지 않는다.

 축복된 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데 있다(요 17 : 3 ).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도 행복에 이르는데서 제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인간의 마음속에 이미 말한 바 있는 종교의 씨앗을 심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계시하셨으며 우주의 전 창조 속에서 매일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눈을 뜨기만 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실로 하나님의 본질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어서 그 신성은 인간의 모든 지각을 훨씬 초월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물 위에 영광의 명백한 표적을 새겨 놓으셨으며 그것은 너무나 뚜렷하고 분명하기 때문에 아무리 무식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 해도 무지를 구실로 삼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시 104 : 2)라고 아주 적절하게 외쳤다. 말하자면 이 말은 우주 창조 이래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화려한 복장으로 자신을 보여 주시기 시작하신 이후부터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지 자신의 영광의 훈장들을 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는 말과 같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세계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히 11 : 3)이라고 우아하게 표현하였던 이유는, 정교하게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 이 세계야 말로 일종의 거울(mirror)이요, 바로 이 거울로 달리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똑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편 기자가 천체에다 만민이 다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한 이유는(시 19 : 2이하), 그 천체가 너무도 명백하게 하나님을 증거해 주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이라도 그 관찰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더욱 명백하게 밝혀 주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 : 19-20).
 따라서 어떠한 변명도 허용되지 않는다.

2. 하나님의 지혜는 온 인류에게 제시되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보여 주는 수많은 증거는 하늘과 땅에 셀 수 없이 많다. 그것은 천문학이나 의학, 또는 일체의 자연 과학의 엄밀한 연구 대상으로 정해진 심원한 것들만이 아니라 가장 배우지 못하고 가장 무지한 자라도 보지 않을 수 없게 제시되어 그들이 눈을 뜨기만 하면 반드시 그것들을 목격하게 되는 것들이기도 하다. 사실 이러한 학문을 다소나마 수학한 사람들이라면 그 도움으로 하나님의 지혜의 비밀을 보다 더 깊이 통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학문에 무식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를 충분히 관찰할 수 없다든가,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더 한층 나아가 별의 운행을 조사하고, 그 위치를 정하며, 그 간격을 측정하고, 그 특성들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기술과 정밀한 수고가 필요하다.
이러한 것을 연구할 때 하나님의 섭리가 한층 더 명백하게 그 자체를 보여 주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오로지 눈으로만 배운 일반 대중이나, 가장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그 기술의 탁월함은 깨닫게 마련이다. 그것은 특수하면서도 질서 정연한 천체의 무수한 다양성이 그 자체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혜를 풍부하게 보여 주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 인체의 구조에 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곧 우리가 갈렌의 노련한 기술로 인체의 관절, 균형, 미, 효용 등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재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체의 구조가 정묘하기 때문에, 그 창조주가 당연히 놀라운 일꾼으로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것이다

3. 인간은 신적 지혜의 최상의 증거이다.

 오래 전에 어떤 철학자들은 인간을 가리켜서 하나의 소우주라고 한 것은 적절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권능과 자비하심과 지혜의 특별한 표본이며, 우리가 그러한 것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에 대하여 싫증만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경이로움을 그 안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라고 말하고 곧 이어서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 : 27) 라고 첨가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각 사람이 자신을 깨우쳐 주는 하늘나라의 은혜를 내적으로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의 그 게으름은 용서 받을 수 없다. 이와 똑같은 이유로 다윗은 도처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이름과 영광을 간단히 찬양하고, 곧 이어서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시 8 : 4)라고 외쳤다. 그는 다시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시 8 : 2)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인류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맑은 거울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 가슴에서 젖 먹는 어린아이들까지도 다른 웅변가를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전파하는 데 충분한 웅변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그는 선언했다. 그래서 다윗은 악마적인 교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없애고자 하는 자들의 그 광란을 충분히 반박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저하지 아니하고 어린아이를 여기의 논전에 끌어내 온 것이다. 따라서 바울도 또한 아라투스(Aratus)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행 17 : 28)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와 같은 훌륭한 탁월성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심으로써, 자신이 우리의 아버지임을 증명해 주셨기 때문이다. 

4. 인간은 배은망덕하게 하나님을 대항한다.

 인간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무수한 사역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공장과, 동시에 측량 할 수 없는 부요함이 넘쳐흐르는 창고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데 그와는 반대로 더욱 더 교만에 부풀어 스스로 잘난 체한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놀라운 방법으로 그들 안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그들은 깨닫고 있다. 그들은 또한 각종의 많은 은사가 하나님의 관대하심에서 왔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운다. 원하든 원하지 아니하든 간에 이것들이 신성의 표시임을 그들은 알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들을 자기 안에 감추어 버리고 만다. 실로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자신에게 귀속시키고, 하나님을 분명히 볼 수 있도록 마음을 비추어 주는 것들을 땅에 묻어 버리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탈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이 지상에는 많은 기괴한 정신의 소유자들이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도말하기 위하여 인간성 안에 널리 뿌려져 있는 신성의 모든 씨앗을 그릇되게 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신의 영육에서 수백 번이라도 하나님을 발견함에도 불구하고, 이 탁월성 자체를 구실로 삼아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 광란을 한다. 그들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분을 "자연"으로 대치시키고 하나님의 이름을 삭제해 버린다. 그들은 극히 절묘한 하나님의 솜씨를 입과 눈에서부터 심지어는 발끝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각 지체 전체를 통하여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기서도 하나님을 자연으로 대치시킨다. 그러나 영혼의 신속한 운동, 그 탁월한 기능, 그 특수한 은사, 이러한 것들은 특히 쉽게 감춰질 수 없는 신성을 그 면전에 보여 주는 것들이다. 예로 에피큐로스 학파는 키클로페스(Cyclopes)와 같은 자이다.  

 5. 창조주와 피조물의 혼동

 해괴한 것들에 끌리어 영혼의 불멸을 부정하며 하나님으로부터 그 권리를 박탈하기 위하여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그 냉소적인 교설을 부정한 방법에 따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이 있다. 영혼은 유기적인 여러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들은 이것을 구실로 삼아 영혼을 육체에 구속시키고, 육체 없이는 영혼이 존재할 수 없다고 하며 자연을 찬양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최대한 억압한다. 
 천체에 대한 깊은 연구에는 영혼과 육체의 유기적인 조화가 있는 것이 아니고 육체와는 구별된 영혼의 활동이 있다는 사실이다.  하늘과 땅을 관찰하며, 과거와 미래를 결합시키며, 오래 전에 들은 것을 계속 기억에 담아 두며, 즐겨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생각해 낼 수 있는 영혼의 그 다방면의 민첩함 그리고 훌륭한 것들을 발명해 내며 많은 놀라운 발명품의 어머니인 영혼의 그 다방면의 교묘함 이러한 것들은 분명히 인간에게 신성이 있다고 하는 확실한 증거이다. 사람이 잠자고 있는 동안에도 영혼의 배회, 유익한 것들을 생각하며 여러 가지 문제를 추리하며 심지어는 미래의 일을 예시하는 능력 등. 이는 하나님께서 깨어 계셔서 세계를 통치하고 계신다는 증거이다. 
 
6. 창조주는 자신의 주(主) 되심을 창조에서 계시하신다.
 
 우리가 일부러 모르는 척하지 않는 한 이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에게 감추어질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무한히 거대한 이 천지를 지탱하신다. 때로는 단순한 그의 고개짓 신호 만으로도 천둥을 일으켜 하늘을 뒤흔들어 놓으시며, 번개로 모든 것을 뒤 흔들고, 불꽃으로 대기 전체를 태우신다. 때로는 여러 가지 폭풍우로 대지를 휘저어 놓으시며 그가 원하실 때에는 순식간에 그것들을 잔잔케 하신다. 그리고 파도가 높게 일어 계속 땅을 파멸할 것같이 보이는 큰 바다를 마치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그것을 견제하시며 때로는 심한 폭풍을 일으켜서 그것을 놀라운 방법으로 격동시켰다가는 다시 잔잔하게 하기도 하시는 것이다.
 이와 함께 자연의 증거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찬양이 성경 여러 곳에 있다. 욥기와 이사야서, 시편 등. 선지자의 선포한대로 피조물 중에 하나님의 자비를 넘치도록 받지 못한 자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시 145 : 9).

7.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

 하나님의 사역의 제2의 종류, 곧 자연의 정상적인 과정 밖에서 일어나는 사역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증거는 모든 점에서 똑같이 명백하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사회를 다스리실 때 섭리를 잘 조절하셔서 무수한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시지만, 그러나 명백하고 일상적인 지시에 따라 경건한 자에게는 관대하심을, 악하고 범죄한 자에게는 엄격하심을 선언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흉악한 행위에 대하여 형벌로 보복하신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이 무죄자의 보호자요, 변호자이시며, 선한 사람들을 축복하셔서 그들의 생활이 번창하게 하시며, 그들의 궁핍함을 도우시며,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시며, 그들을 재난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그리고 이 모든 일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명백하게 보여 주신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자주 사악한 자와 행악자가 일시적으로 벌을 받지 않은 채 날뛰도록 허용하시며 일시적으로 선한 사람들이 부당하게 많은 역경 속에서 괴로움을 당하고, 심지어는 불경한 자들의 불법과 악의로 압박까지 받게 하신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하나님의 그 불변적인 의의 법칙을 흐리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오히려 이와는 달리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곧 하나님께서 한 가지 죄를 벌하실 때 그의 진노를 명백히 하시는 것은 그가 모든 죄를 미워하신 바는 뜻이요, 그가 많은 죄악을 벌하지 아니하시고 그대로 두는 것은 앞으로 심판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 때까지 그 형벌을 연기하신다는 뜻이다.
 8.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생활을 지배한다.

 이 목적을 위해서 선지자는 절망적인 곤경에서 거의 멸망 직전에 빠져있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갑자기 기적적으로 또는 예상 밖으로 구원해 주신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상기시키고 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들을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하여 마침내는 바른 길로 인도하시며(시 107 : 4-7), 궁핍하고 주린 자들에게는 먹을 것을 주시며(9절), 사로잡힌 자들을 음침한 토굴과 쇠사슬에서 놓아주시며(10-16절), 파선 당한 자들을 항구까지 무사히 돌아오게 하시며(23-30절), 병으로 거의 죽게 된 자들을 고쳐 주시며(17-20절), 뜨거운 열기와 한발로 땅을 태우기도 하시며, 은밀한 자비의 단비로 그 땅을 비옥하게도 하신다(33-38절). 하나님은 가장 비천한 자들을 높이시며 혹은 높은 자들을 그 위엄 있는 위치에서 떨어뜨리기도 하신다(39-41절) 이러한 실례를 제시함으로써 선지자는 우연한 사건으로 간주되는 것들이 다 하나님의 섭리요, 특별히 그의 부성적인 사랑을 여러 모양으로 증거해 주는 것임을 보여 준다. 여기서부터 경건한 자들은 기쁨의 근거를 얻게 되고 불경자와 유기자(遗弃者)들은 그 입을 다물게 된다(42절). 그러나 사람들은 대다수가 잘못에 빠져들어 그와 같은 눈부신 극장 안에 있으면서도 눈먼 자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을 신중히 고려한다는 것은 희귀하고도 특수한 지혜의 문제요(43절), 그리고 다른 일에 있어서는 가장 예리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이를 생각하는 데는 아무 유익을 얻지 못한다고 그는 말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는 흑암 속에 가려져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억제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불경자의 그 흉악함이 순식간에 정복되고, 그들의 오만함이 꺾이고, 그들의 강한 요새가 무너지며, 그들의 무기와 갑옷이 산산 조각나며, 그들의 힘이 무너지고, 그들의 음모가 실패로 돌아가고, 그들이 스스로 거꾸러질 때, 또 하늘 위에까지 높이 오른 그들의 뻔뻔스러움이 땅 한가운데에 내던져질 때 하나님의 권능은 그 자체를 명백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이와 반면에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시 113 : 7), 눌린 자와 슬퍼하는 자를 궁지에서 구해 내시며, 절망자로 하여금 선한 소망을 다시 찾게 하시며, 소수이며 약한 비무장자가 많고 강한 무장자에게 승리할 때에도 또한 하나님의 권능은 명백하게 나타난다. 실로 하나님의 지혜는 모든 것을 가장 적합한 때에 맞춰 처리하시고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모두 혼란하게 하시며(고전 1 : 20 ), 그리고 "지혜 있는 아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고전 3 : 19, 욥 5 : 13 참조) 하실 때, 그의 탁월성을 나타내신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이 최선의 방법으로 다스리시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9. 우리는 머리로 하나님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하신 일을 보고 숙고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을 설명하며 주장하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기 위해 이 이상 더 장황하고 수고로운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위에서 닥치는 대로 말한 것들은 비록 적은 것이긴 하지만 눈으로 쉽게 분별할 수 있으며, 손으로 가려낼 수 있을 만큼 어디서나 분명하고 명백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상고하도록 부름받고 있다는 것을 주의 해야 한다. 이 지식은 공허한 사색으로 만족하며 단순히 뇌리에서 맴도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정당하게 지각하며 마음에 뿌리를 내리게만 한다면 반드시 건전한 것이 되며 풍성한 열매을 맺는 지식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권능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므로, 그 능력을 우리 속에서 느끼며 그 은사를 우리가 향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지식을 통하여 한층 더 깊이 감동을 받아야 하고, 우리의 인식을 통해 파악할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을 공상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 가장 완전한 방법이요 가장 적절한 순서는 다음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된다. 곧 하나님은 주의 깊게 탐색해야 할 분이기보다 경배 받으셔야 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나친 호기심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탐구하려고 시도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역에서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가까이 하시며 친밀히 하시며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을 전달하신 그 사역에서 하나님을 숙고해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은 권능으로 우리 각자 안에 거하시므로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행 17 : 27-28). 이러한 이유로 다윗은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측량할 수 없는 것이라고 먼저 고백하고(시 145 : 3), 곧 이어서 하나님의 사역을 언급하면서 "나도 주의 광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라고 고백하였다(시 145 : 5-6, 시 40 : 5 ).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특별히 하나님에 관한 탐구에 열중할 때 그것이 우리의 정신력을 감탄케 할뿐만 아니라, 우리를 깊이 감동시킨다는 것은 역시 당연한 일이다. 어거스틴(Augustine)이 말한 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압도당하여 하나님을 파악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새로워지기 위하여 그의 사역을 다시 소생해야 하는 것이다.

10.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목적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마땅히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자극시킬 뿐만 아니라, 내세의 소망을 갖도록 일깨우고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그의 자비하심과 엄격하심에 대한 표본은 지금 막 시작되었을 뿐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도 의심 없이 이러한 표본이 위대한 사건들의 서곡이며, 따라서 이것의 완전히 드러남은 그 충분한 제시는 미래의 생활에까지 연기된다고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경건한 사람이 불경한 자로부터 고통을 당하며 해를 받고, 중상으로 부끄러움을 당하며, 능욕과 비난으로 상처를 받는 것을 본다. 이와는 반대로 악한 자는 번영하며 부요하게 되고, 엄연히 안정을 누리고 조금도 벌을 받지 않고 지내는 것을 본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우리가 여기서 즉시 결론짓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분명히 이 세상 밖에 또 다른 세상이 있어서 거기서 불의는 벌을 받게 되고, 의는 상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신자들이 자주 주님의 징계를 받는 것을 보게 될 때, 불경자들이 언젠가는 하나님의 형벌을 전혀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매우 확실하게 믿을 수 있다. 실로 어거스틴의 다음과 같은 견해는 유명한 말이다. "만일 공개적으로 형벌이 현재 모든 죄에 대하여 가해진다고 하면, 최후 심판에 남을 것은 하나도 없을 거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지금 어떠한 죄에 대하여도 공개적으로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없다고 믿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각 사역에서 특히 그 전체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권능이 그림에서처럼 실제로 표현됨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는 하나님을 알도록 초대되고 유인되며, 여기서부터 인류는 참되고 완전한 행복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은 그가 하신 사역에서 가장 명백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 능력의 주요한 목적, 그 가치, 그리고 이에 대하여 우리가 숙고해야 할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은 오직 우리가 겸손하게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우리 안에서 자신의 생명, 지혜, 능력을 보이셨으며 우리를 위해서 의, 선, 자비를 행사하셨는가를 깊이 생각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 불신자들이 인류의 통치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그 심원한 계획을 생각하지 않으므로 다윗이 그들의 우매함을 탄식한 바 있지만(시 92 : 5-6), 그러나 다른 곳에서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는 우리들의 머리털 보다 많다고 말하였다(시 40 : 12 ).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경배 드리지도 않기 때문에 마침내 미신과 혼란에 빠진다. 11-12)

11. 창조에는 하나님의 증거가 나타나 있지만 우리에게는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사역이라는 거울에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영원한 왕국을 아주 명백하게 보여 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는 그 명백한 증거들을 보면서도 점점 더 우둔하여져서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다. 우주의 가장 아름다운 구조와 질서에 대하여 말한다면,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거나 온 땅을 두루 바라볼 때 마음을 기울여 창조주를 기억하는 자가 우리 중에 없다. 오히려 창조주를 무시하고, 나태하게 앉아서 그의 사역을 바라다보고만 있다. 사실, 자연의 통상적인 과정 밖에서 매일같이 발생하는 사건들에 대하여 말하자면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로 지배를 받는다는 것보다는 오히려 맹목적이며 무분별한 운명에 의하여 회전된다고 말하지 고 있다.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것들의 안내와 지도에 따라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필연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신성에 대한 개념을 경솔히 파악하고, 즉시 자신의 육적인 망상과 광란에 빠져 들어가서 마침내는 공허한 것으로 하나님의 순수한 진리를 부패하게 만든다. 우리는 어떤 점에서 서로 동일하지 않은 데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는 자신의 특수한 오류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괴하고 어리석은 것들을 위해서 유일하신 참된 하나님을 버리는 데는 우리 모두가 한결같이 동일하다. 범인이나 둔한 자 뿐만 아니라 가장 탁월하고 다른 일에 있어서는 예리한 식별력을 가진 자라도 다같이 이와 같은 질병에 걸려 있다.

12. 하나님의 현현은 인간의 미신과 철학자들의 오류에 의해서 질식 되었다

 온 세상을 채우고 뒤덮은 그 무한히 더러운 오류의 진창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 왜냐하면 각자의 마음은 미궁과 같아서 민족마다 여러 가지 허위에 각각 끌려갔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이것뿐만 아니라 거의 각 사람마다 자신의 신을 소유하고 있다. 그것은 경솔함과 천박함이 무지와 흑암으로 더불어 결합되어 하나님 대신 자신을 위해서 우상과 환상을 만들어 내지 않는 사람이 거의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거대하고 풍부한 샘에서 물이 분출되어 나오는 것처럼 무진장한 신들이야말로 인간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그들은 각자가 극단적인 방종으로 흘러 하나님에 대해서 이것 저것을 고안해 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여기서 세계를 혼란의 와중에 빠지게 하는 미신의 목록을 구태여 작성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끝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 정신의 그 맹목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는 미신에 대하여 아무 말하지 않더라도 많은 부패를 통하여 충분히 알 수 있다.
나는 여기서 미개하고 교양이 없는 천박한 사람에 대하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성과 교양으로 하늘나라를 통찰하려고 애쓰는 철학자들이 서로 불일치하니 아주 수치스럽다. 지혜가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그 예술과 학문이 세련되면 세련될수록, 그러한 사람은 자기 의견에 더 아름다운 색채를 입혀 위장해 보려고 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엄밀히 조사해 보면 그것들은 모두가 다 허무한 그림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스토아 학파(Stoics)는 자연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여러 가지 명칭을 끌어낼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곧 하나님의 단일성을 파괴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이러한 자신들의 사상이야말로 매우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말은 마치 우리가 각종의 제신에 속아 점점 더 심한 오류에 끌려 들어가는 일만 없으면 공허한 것에 기울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과 같은 수법이다. 애굽인들의 신비주의적 신학은 아무 이유 없이 헛소리를 한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자기들 모두는 용의 주도하게 이에 대하여 생각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단순하고 부주의한 사람은 그럴 듯하게 보이는 것을 처음 볼 때에는 이에 속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 낸 것 치고 종교를 기본적으로 부패하게 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시모니데스(Simonides)는 폭군 히에로(Hiero)에게서 하나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이에 대하여 하루 동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사람들은 이 답변을 칭찬하였다. 다음날 다시 그 폭군이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하자 그는 이틀 동안의 여유를 더 허락해 주기를 요구하였다. 그는 여러 번 날수를 배로 연기하고 나서 마침내는 이렇게 답변하였다. "이 문제에 대하여 오래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희미해집니다." 그가 그렇게 희미한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는 일을 중단하였던 것은 지혜로운 일이었다. 여기서 명백해지는 것은 인간이 본성으로만 가르침을 받는다면 확실하고 건전하며 분명한 지식을 갖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한 원리에 매여 마침내는 알지 못하는 신을 숭배하게 된다는 사실이다(행 17 : 23 ).

(인간은 오류를 고집하는 한 핑계할 수 없다. 13-15)

13. 성령은 인간이 고안해 낸 일체의 종교 행위를 거절하신다

 우리는 이제 순수한 종교를 부패하게 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자신의 견해에 집착하는 자는 모두가 다 필연적으로 이런 데에 빠지게 된다-한 분이신 유일신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자라고 우리는 주장해야 한다. 정말 그들은 마음에 그러한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자랑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며, 그들의 확신하는 바가 무엇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먼 마음속에 하나님 대신 마귀를 두는 자는 모두 다 배교자라고 성령께서 선언하시기 때문이다 (고전 10 : 20 ).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이 복음에서 참되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방법을 배우기 전에는 "하나님도 없이" 지내던 자였다고 말한다(엡 2 : 12-13). 그리고 이 말은 한 국민에게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바울이 다른 곳에서도 주장한 대로 사람들은 모두가 다 우주의 구조에서 창조주의 위엄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졌다고 말했기 때문이다(롬 1 : 21).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은 참되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이 들어가실 여지를 만들기 위하여 전에 이방인들 사이에 신으로 경배 받던 것은 어떠한 신도 어리석고 거짓된 신으로 정죄하는 한편,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지식이 계속 번창하던 시온산 외에는 어떠한 하나님도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합 2 : 18,20). 확실히 예수님 당시의 이방인들 가운데에서 사마리아인들은 참된 경건에 거의 접근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고 하신 말씀을 듣는다(요 4 : 22). 이 사실에서 우리는 그들이 무익하며 잘못된 망상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있어서 한 도시의 관습이나 전통의 여론에 따르는 것은 경건의 띠로서는 너무도 약하고 부서지기 쉽기 때문에, 이제 남은 것은 다만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증거하시는 일뿐이다.
 따라서 인간이 고안해 낸 일체의 종교행위를 거절 한다.

14.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현현은 인간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못한다
 우주의 구조에서 창조주의 영광을 설명하기 위해 그렇게도 많은 등불이 우리를 위해 비춰 주고 있지만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뿐이다. 비록 그 광선이 우리의 온 둘레를 비춰 준다 하더라도 결코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지는 못한다. 분명히 약간의 섬광을 발하기는 하나 그것은 충분한 빛을 방사하기도 전에 사그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사도는 세계를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한, 바로 그 구절에서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 11 : 3)라는 말씀을 첨가하였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곧 보이지 않는 신성이 이와 같은 거울 안에서 나타나게 되지만 하나님의 내적 계시에 의하여 믿음으로 조명되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세계의 창조에서 명백히 보여졌다고 말한 곳에서도(롬 1 : 19) 바울은 그러한 현현을 인간의 통찰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15. 어떠한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다.
 아무리 순수하고 명백한 하나님의 지식에 도달할 본래적인 능력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그 우둔함의 죄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어떠한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리고 실로 우리의 양심이 나태와 배은망덕을 항상 깨우쳐 주지 못하더라도 무지를 구실로 내세우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다음의 변명들, 곧 잘 못하는 피조물까지도 가장 아름다운 음성으로 전해주는 그 진리를 들을 만한 귀가 자기에게는 없다고 인간이 변명하는 것과, 눈 없는 피조물이 보여 준 것을 자기에게는 눈이 없어서 볼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그리고 비이성적인 피조물까지도 교훈을 주는데 정신박약이라 더 이해할 수 없었다고 변명하는 것들이 당연히 용납되기라도 한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만물이 우리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줄지라도 우리가 방황자요 방랑자로서 길을 잃고 헤맨다면 어떠한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의 놀라운 구조 속에서 그들의 마음에 심겨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씨앗을 즉시 부패케 하여 훌륭하고 완전한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사실은 마땅히 그들 자신의 태만에 돌려야 한다.

제 6 장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하는 안내자요 교사로서 필요하다.

1.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자신을 알리신 것은 성경에서 뿐이다.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모든 사람의 눈에 선명하게 비치는 광채는 인간들에게 배은망덕에 대한 일체의 변명을 못하게 하는 데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그것은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동일한 죄의식 아래에 두시기 위해 피조물에게서 생생하게 표현된 자신의 임재를 그들 하나 하나에게 예외 없이 보여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정확히 우리를 우주의 창조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다른 훌륭한 조력자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의 빛을 더하셔서, 이 말씀으로 구원을 알게 하셨던 것은 조금도 헛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에게 더 가깝고 더 친밀하게 모으고자 하셨던 자들을 이 특권을 누리기에 합당한 자로 간주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방황하는 것을 보시고, 유대인을 자기 백성으로 정하신 후, 다른 백성들처럼 하나님에게서 떠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한 울타리 안에 둘러싸셨던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혼란한 지식을 우리 마음에서 바로잡고 우리의 우둔함을 쫓아 버리며 참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교회를 교훈하기 위하여 말없이 교사들을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장 거룩하신 입을 여시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이시다. 하나님께서는 택함 받은 자들이 어떤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지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 경배를 받아야 할 그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신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교회를 위하여 이 계획을 세우시고, 일반적인 증거들 이외에도 자신의 말씀을 첨가하셨다. 이 말씀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보다 더 확실한 표준이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얻어지는 하나님에 관한 두 가지 지식)
 하나님을 세계의 창조주요, 통치자로 파악하는 지식, 죽은 영혼을 소생시키는 다른 내적 지식-> 하나님을 우주의 창조주요, 지음 받은 만물의 유일한 창시자, 통치자로 알뿐만 아니라, 증보자의 위격을 가지신 구속주로서도 이해하게 된다. 



2. 성경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말씀이나 환상으로 나타내셨는지 혹은 인간들의 사역이나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족장들에게 계시하였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 자손들에게 전승하여야 할 것을 그들의 마음에 알리셨다. 하여튼, 그들의 마음에 교리에 대한 견고한 확실성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배운 지식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확신하고 이해하였던 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말씀을 통해 일체의 인간적인 견해를 확실한 신앙, 곧 영원히 불변하는 신앙을 주셨기 때문이다. 마침내는 진리가 계속적인 교훈을 통하여 대대로 이 세상에 영원히 남겨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족장들에게 맡기셨던 그 말씀을, 말하자면 공적인 기록으로 엮으실 것을 결심하셨다.

3. 성경을 떠나면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을 쉽게 잊어버리며, 얼마나 심하게 각종 오류에 기울어지고 있으며, 또한 얼마나 맹렬하게 계속 신기하고 인위적인 종교를 날조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그러면 그 하늘의 교리가 망각으로 파멸되지 아니하고, 오류로 사라지지 아니하며, 인간의 방자한 행동으로 부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록된 증거로 남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주의 가장 아름다운 형성(形成)에 찍혀진 자신의 모습이 충분한 효과를 나타내지 못할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그가 유익한 교훈을 주시기를 기뻐하셨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말씀의 도움을 마련하셨던 것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성실하게 명상하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갈망한다면 이러한 올바른 길을 추구하여 정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와야 한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바로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가 하신 사역을 통하여 진실하게 또는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 하나님의 사역은 우리의 부패한 판단에 따라서가 아니라, 영원한 진리의 법칙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한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가 만일 이 말씀에서 벗어나게 되면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하더라도, 그 길에서 탈선했기 때문에 목적자에게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말한대로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딤전 6 : 16) 그 하나님의 광채는 말씀의 실(丝)로 인도 받지 못하면, 우리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미궁(迷宫)과 같은 것이라고 논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4. 창조의 계시가 전할 수 없는 것을 성경은 전할 수 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시 19 : 1-2). 다윗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계속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 19 : 7-8). 다윗은 여기서 또한 율법의 다른 유용성도 이해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일반적으로 말하려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명상하는 일을 통하여 모든 백성을 자기에게 초청하신 일이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기 때문에 이 말씀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별한 학교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와 똑같은 내용이 시편 29편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여기서 예언자는 뇌성(3절), 바람, 소낙비, 회오리바람, 폭풍우 속에서 땅을 뒤흔들고, 산들을 떨게 하며(6절), 백향목을 꺾으시는(5절) 하나님의 그 위엄있는 음성에 대하여 말하고 나서 마침내는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이는 공중에서 울리는 하나님의 모든 음성을 불신자들은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은 무력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고 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다 말씀을 떠나서 하나님을 찾았으므로 필연적으로 공허와 오류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제 7 장
성경은 반드시 성령의 증거로 확인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 권위는 확실한 것으로 확립될 수 있다. 그리고 성경의 신빙성이 교회의 판단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은 악랄한 거짓이다.

1.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 교회에서 온 것이 아니다

 성경의 권위에 대해 다소의 의견,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준비시킬 뿐만 아니라 모든 의문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공포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되었을 경우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식을 벗어나거나 인간성 자체가 결여되어 있지 않는 한, 그렇게 말씀하신 분에 대한 신뢰를 감히 비난할 만큼 비극적인 오만에 빠질 수는 없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매일같이 하늘로부터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서만 자기의 진리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신성(神圣)하게 보존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요 5 : 39 참조). 마치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하늘로부터 직접 듣는 것처럼 성경의 기원이 하늘로부터 유래되었다고 생각될 때만 비로소 성경은 신자들로부터 완전한 권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실로 이 문제는 더 충분한 논의와 더 주의 깊은 고찰을 하기에 매우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승인을 얻을 때에만 비로소 성경은 그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고 하는 가장 유해한 오류가 현재 널리 유행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영원하시며 침범할 수 없는 진리가 인간의 결정에 의해 좌우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다음과 같이 물을 때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라는 것을 누가 우리에게 믿게 할 수 있는가? 성경이 오늘날까지 완전하게 또는 상하지 않고 깨끗하게 보존되어 왔다는 것을 누가 우리에게 보증할 수 있는가? 만일 이러한 문제들을 위한 확실한 규칙을 교회가 규정하지 않았다면, 한 책은 귀중히 여기고 다른 책은 제거하도록 누가 우리를 설득시킬 수 있겠는가? 따라서 성경은 얼마나 귀중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가. 그리고 어떠한 책이 정경(政经)에 편입되어야 하는가는 교회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그들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라는 이름 밑에서 무제한의 횡포를 즐겨 행하는 이 불경한 사람들은 교회는 모든 것에 대하여 권위를 가진다고 하는 이 한 가지 관념을 단순히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만 있다면, 자타(自他)를 곤란에 빠뜨리게 하는 그 불합리에 대하여는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사실이어서 영생에 대한 일체의 약속이 사람의 판단으로 결정되고 또 그 판단에만 의존된다고 한다면, 그 영생의 확신을 찾고 있는 비참한 양심들의 상태는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한 답변을 얻을 때 그들은 그들의 동요하는 마음과 두려움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만일 인간의 만족에만 의존하는 그런 불안정한 권위를 가진 것이라면, 불경건한 자들은 우리의 신앙을 얼마나 조롱할 것이며, 많은 사람이 우리의 신앙을 얼마나 의심할 것인가!

2. 교회 자체는 성경의 기반 위에 서 있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다."(엡 2 : 20)고 사도는 증거하였던 것이다. 만일 선지자와 사도의 교훈이 교회의 기초라고 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교회가 존재하기 이전에 벌써 그 권위를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교회가 그 기원의 시작을 성경에서부터 가졌다 하더라도 교회가 그것을 결정하지 않았다면 어떤 선지자와 사도가 쓴 책이겠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의심으로 남게 된다고 하는 그들의 교활한 반대도 또한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처음부터 선지자들의 글과 사도들의 교훈에 기초를 두었다고 하면, 그 교리가 어디서 발견되더라도 이 교회의 승인은 분명히 교회보다 앞서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교리가 없이는 교회 자체가 결코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판단하는 권세가 교회에 속하며, 성경의 확실성이 교회의 결정에 좌우된다는 것은 참으로 거짓된 견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가 성경을 받아들여 이에 승인의 인장을 받아야 하는 것은, 의심스러운 점과 논쟁점들을 합법화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성경을 하나님의 진리로 인정하기 때문에 경건의 의무로서 교회는 조금도 주저 없이 성경을 존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 진리의 명백한 증거를 마치 흰 것과 검은 것이 그 색깔이 다르고, 또한 단 것과 쓴 것이 그 맛이 다르듯이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3. 어거스틴의 말을 반증(反證)으로 내세울 수 없다

 “참으로 교회의 권위가 복음을 믿도록 마음을 감동시키지 않으면 그는 복음을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어거스틴의 말이 일반적으로 인용되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이 말을 얼마나 나쁘게 또는 기만적으로 해석 하였는가 함은 전후 문맥으로 보아 쉽게 알 수 있다. 어거스틴은 거기서 마니교도들(Manichees)을 의식하고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마니교도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아무 반론 없이 믿게 하기를 원하면서도 그들이 스스로 소유하고 있는 진리를 증명하지 못한 자들이었다. 사실상 그들이 마니(Mani)에 대한 신앙을 증진시키기 위한 구실로서 복음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그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만일 여러분들이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하겠는가? 어떤 종류의 설득력을 가지고 그를 여러분들의 의견으로 돌아오게 하겠는가?" 그는 여기에 더 첨가하여, "실로 나는 복음을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이 뜻하는 것은 자기가 만일 신앙에 대해 문외한이라면 교회의 권위로 강요당하지 않는 한, 복음을 하나님의 확실한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할 때 인간의 말을 존중하였다고해서 그것이 무슨 이상한 일이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경건한 자의 신앙이 교회의 권위 위에 세워진다고 주장하지도 않았고, 복음의 확실성이 교회의 권위에 의존한다고 가르치지도 않았던 것이다. 다만 그가 말하는 것은 교회의 증언이 불신자들을 재촉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복음의 확실성을 그들이 가지지 못하게 된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조금 후에 그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은 말로 명백히 확증하였다. 곧 "내가 나의 믿는 바를 예찬하고, 당신의 믿는 것을 비웃을 때 당신은 우리가 어떻게 판단하고 또 어떻게 행동해야 된다고 생각하는가? 확실한 것을 알도록 초청하고, 후에 가서는 불확실한 것을 믿으라고 명령하는 자들을 떠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아직 충분히 바로 볼 수 없는 것을 먼저 믿으라고 초청하고, 이 믿음으로 힘을 얻어 우리의 믿는 바를 이해하게 하는 자들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골 1 : 4-11,23) 이제 우리의 마음을 내적으로 강화하며 조명하시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7
이상의 말들이 바로 어거스틴이 하고자 하였던 말이었다. 이 말에서 누구나 다 명백히 미루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 거룩한 인물이 의도한 바는 성경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교회의 동의나 결정에 맡기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가 지적하고자 하였던 것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곧 하나님의 영으로 아직 깨우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존경심으로 인해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갖추어 마침내는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힘써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교회의 권위는 복음의 신앙을 준비하게 하는 서곡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는 대로 그는 경건한 자의 확실성을 전혀 다른 기초 위에 두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4. 성령의 증거는 다른 모든 증거보다도 강하다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고 확신하기 전에는 교리에 대한 신앙이 수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성경에 대한 최고의 증거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사실에서 얻게 된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자신의 예민함과 그들의 말을 듣는 자들로부터 얻은 신앙을 자랑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이성적인 증거를 고집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드러내어 전세계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복종하게 하려 하였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주의하게 또는 거짓되게 부르지 않은 것이 정당한 일 뿐만 아니라 명백한 진리에 의해서도 분명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양심을 위하여 최선의 길이 마련되기를 원한다면 곧 영원히 의심되는 문제로 불안해하거나 동요하지 않고, 또한 가장 작은 말장난에도 놀라지 않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이성이나 판단 그리고 억측에서가 아니라 이보다 훨씬 더 높은 근원, 곧 성령의 은밀한 증거에서 우리의 확신을 찾아야 한다.

5. 성경은 자증 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진심으로 성경을 신뢰한다는 것, 그리고 성경은 스스로 증명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증거나 도리에 종속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성경이 마땅히 지녀야 할 확실성은 성경의 증거에 의해서 얻게 된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 자체의 위엄 때문에 존경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속에서 확증되기 전에는 진정으로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조명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판단에 따라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적인 판단을 초월하여, 성경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인간의 사역을 통하여 흘러 나왔다는 사실을 마치 우리가 하나님 자신의 위엄을 응시하는 것처럼 아주 확실하게 단정한다. 우리는 우리의 판단을 입증하는 어떤 논증이나 진실의 표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의 판단력과 짐작을 성경에 예속시킨다.  우리는 저 비참한 사람들처럼 습관적으로 자기 마음을 미신의 노예로 만들지도 않고, 하나님의 확실한 신적 위엄의 능력이 성경 안에서 살아서 숨쉬고 있음을 실감한다. 
   

제 8 장
인간의 이성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성경의 신빙성은 충분히 증명된다

(성경의 독특한 권위와 감동, 그리고 고전성. 1-4)
1. 성경은 인간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나다

 성경에 대한 이러한 확실성이 인간의 판단보다 더 높고 더 강하지 않는 한 논증으로 성경의 권위를 수호한다든가 교회의 일반적인 동의로 그것을 확립한다든가 혹은 어떤 다른 무엇의 지원을 받아 확증한다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기초가 세워지지 않으면 성경의 권위는 항상 불확실한 채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반면에 우리가 일단 성경을 그 존엄성에 따라 경건하게 받아들이며 일반적인 서적과는 달리 뛰어난 것으로 인정하기만 하면, 이전에는 마음에 성경의 확실성을 강하게 심어 주지 못하고 확신을 주지 못하던 논증들이 이제는 매우 유용한 도움을 주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지혜의 경륜이 얼마나 훌륭하고 질서있게 배열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고, 세상적인 것을 조금도 풍기지 않는 이 교리의 천상적인 성격은 얼마나 완전하며, 이 교리가 그 모든 부분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그리고 책에 위엄을 가져다주는 다른 특성이 얼마나 풍부한지를 주의 깊게 생각한다면 이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놀라운 확신이 생기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언어의 아름다움보다는 오히려 그 주제의 위엄에 의해 우리가 성경을 예찬하게 된다고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은 더욱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는 하늘나라의 그 숭고한 신비가 대부분 평범하고 겸손한 언어로 표현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3. 성경의 고전성
 
 내가 이미 위에서 다룬 문제들과 함께 성경의 고전성 그 자체는 적지 않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저작자들이 애굽 신화에 대하여 많이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모세 시대보다 훨씬 후대의 것 외에는 종교의 유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모세도 새로운 하나님을 고안해 낸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자기네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받아들였던 것을 선언한 데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더불어 맺은 그 언약을 그들이 생각하게 하는 것 외에 모세가 할 일이 무엇이었겠는가?(창 17 : 7). 모세가 듣지도 못한 것을 제시했었더라면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노예 생활로부터의 해방은 틀림없이 그들 모두가 충분히 잘 알고 있었던 사건이었으므로 이 사건이 언급되었을 때에 모든 사람의 마음은 즉시 자극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400년이라고 하는 연수(年数)에 대해서도 역시 그들은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창 15 : 13, 출 12 : 40, 갈 3 : 17). 모세가(그는 다른 모든 저자들보다 시간적으로 이렇게 훨씬 앞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교리의 전숭을 그렇게 먼 근원에까지 더듬어 올라갔다고 하면 성경이 고전성에 있어서 다른 모든 책보다 얼마나 우수한 것인가를 우리는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4. 모세의 예증이 보여 주는 성경의 진실성

 어떤이들은 이집트인들이 자기네의 고대 기원을 세계 창조 이전 6천년까지 소급하는 것을 믿으려고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속적인 저자들까지도 저들의 수다를 항상 조소하고 있으므로 여기서 내가 그것을 구태여 힘들여 논박할 필요는 없다. 더욱이 요세푸스(Josephus)는 아피온 반박문(Against Apion)이라는 저서에서 기억할 만한 증언을 고대 저자들로부터 인용하였다. 이 책에서 우리는 이 율법의 교리가 비록 읽혀지지도 않고 또 참되게 알려지지도 않았지만, 아득히 먼 시대로부터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유명하였다고 결론 지을수 있다.
그리고 악독한 자들로 하여금 어떠한 의혹도 품지 못하게 하고, 사 악한 자들로 변명의 어떠한 기회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위협에 대비하여 최선의 구제책을 강구하신다. 야곱이 약 300년 전에 영감을 받아 자기 자손에 대하여 언급한 것을 모세가 상기 하고 있지만, 그는 이때 어떤 방법으로 자기의 종족을 고귀하게 하였는가? 아니다. 그는 레위 사람으로서 자기 지파에게 영원한 오명의 낙인을 찍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창 49 : 5-6). 그는 분명히 자기 조상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자기의 온 가문이 그와 같은 치욕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불명예스러운 일에 대하여 침묵을 지킬 수도 있었다. 자기 조상이 전적으로 혐오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였고, 자기 개인의 이해관계에 대하여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말하면 자기 지파 사람들이 틀림없이 불쾌하게 생각하여 그들로부터 심한 미움까지 받게 될 것도 마다하지 않은 그였는데 그러한 모세를 어떻게 의심할 수가 있겠는가? 모세가 자신의 형 아론과 누이 미리암의 그 사악한 불평을 기록할 때에(민 12 : 1), 육신의 생각에 따라 말하였다고 볼 것인가? 성령의 명령에 순종하여 말했다고 볼 것인가? 더욱이 그는 최고의 권위에 있으면서도 어찌하여 자기의 아들을 대제사장의 자리에 앉히지 않고 오히려 가장 낮은 위치에 떨어뜨렸던가? 나는 여기서 많은 예증들 가운데서 몇 가지만을 제시했을 뿐이다. 그러나 율법서의 도처에서 우리는 모세가 하늘에서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자임이 분명하다고 하는 충분한 확신을 뒷받침해 주는 많은 증거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적과 예언에 관한 반대설을 논박함. 5-10)

5. 이적은 하나님의 사자(使者)의 권위를 강화시킨다

  세는 수많은 주목할 만한 이적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이 이적들은 그가 말한 율법과 공포(公布)한 교리에 대한 확증들이다. 그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다는 것, 그곳에서 40일 동안 사람과의 교제 없이 있었다는 것(출 24 : 18), 율법을 선포할 때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는 것(출 34 : 29), 사방에 번갯불이 번쩍이며 우뢰와 여러 가지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 오고 나팔 소리가 들려 오되 사람이 부는 나팔 소리가 아니었다는 것(출 19 : 16), 장막의 입구가 구름에 가리워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는 것(출 40 : 34), 고라, 다단, 아비람과 그 악당 전체의 무서운 파멸로써의 권위가 기적적으로 변호되었다는 것(민 16 : 24), 그가 반석을 지팡이로 치자 당장에 물이 솟았다는 것(민 20 : 10-11, 출 17 : 6, 고전 10 : 4 ), 그가 기도를 하자 하늘로부터 만나가 내렸다는 것(민 11:9, 출 16:13, 고전 10:3), 이러한 것들은 모세가 참된 선지자였다고 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내가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데 대하여 혹 누가 반대이론을 제기 한다면, 그러한 교묘한 이론(异论)에 대하여 나는 쉽게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모세가 이 모든 사건을 온 회중 앞에서 공포하였는데 어떻게 그 사건을 목격한 자들을 속일 수 있었겠는가? 물론 모세가 회중들 앞에 나타나서 그들의 불신, 완고함, 배은 망덕, 그 밖의 여러 가지 죄를 책망하면서, 그들이 본 일도 없는 이적으로 직접 그들의 눈앞에서 자기 교리를 확신시켰다고 자랑할 수 있었을까!

6. 모세의 이적에는 논의할 여지가 없다

 이적에 대하여 모세가 말할 때마다 그것은 항상 조금이라도 무슨 기회만 보이면 온 회중을 선동하여 떠들썩하게 반항을 일으키게 할 수 있었던 그런 불유쾌한 상황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에서 명백해지는 것은,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통하여 충분히 확신하였기 때문에 그 이적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너무도 명백하여 세속적인 저자들도 모세의 이적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거짓의 아비는 그 이적들이 마술에 의한 것이라고 비방하였다(출 7 : 11, 9 : 11).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들을 돌로 치라고 할 정도로 모세는 미신을 증오하였다(레 20 : 6).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이런 모세가 마술사였다고 억측할 수가 있겠는가? 분명히 사기꾼들은 하나같이 대중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명성을 얻으려고 열심히 속임수를 쓴다. 그러나 모세는 과연 어떠했는가? 그는 자신과 형 아론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뿐 아무것도 아님을 공언함으로써 일체의 비난의 표적들을 충분히 지워 버렸다(출 16 : 7). 그리고 일어난 사건 자체를 생각해 본다 해도 도대체 어떤 마술이 백성들의 식량을 공급하기 위하여 매일같이 하늘에서 그렇게 충분한 만나를 내려오게 할 수 있었겠으며 또 사람마다 그 날의 적량을 초과하였을 때에 그 만나를 부패하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불신으로 하나님의 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었겠는가?(출 16 : 19-20) 이 외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으로 하여금 많은 엄격한 시험을 당하게 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사악한 자들이 더 이상 불평함으로써 어떠한 성공도 거둘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때로는 온 민중이 교만하고 무례하게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고 또 때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종을 넘어뜨리려고 그들 중 몇 사람들이 음모를 꾸미기도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때마다 모세가 속임수로 그들의 광포함을 피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방법으로 그의 교훈이 모든 시대에 확신을 주었다는 사실을 그 결과가 명백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7. 예언은 인간의 기대와는 다르게 성취 된다

 족장 야곱을 통하여 유다 지파에 최우위를 부여하게 한 것이 예언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 결과가 입증하는 대로 그 사실 자체를 생각해 본다면 아주 분명하게 될 것이다(창 49 : 10). 이 예언을 최초로 말한 자가 모세였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나 그가 이 책을 기록한 지 400년이 지났지만 아직 유다 지파의 왕권에 대하여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사울이 즉위한 후 왕권은 베냐민 지파에 머물렀던 것처럼 보인다(삼상 11 : 15).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삼상 16 : 13), 이때 왕권의 이양에 대한 무슨 뚜렷한 이유라도 있었던가? 양을 치는 평민의 가정에서 왕이 나오리라는 것을 누가 예상이라 할 수 있었을까? 더욱이 그 가정에는 7형제나 있었는데, 가장 나이 어린 막내 다윗에게 그러한 영예가 주어지리라는 것을 누가 생각조차 하였겠는가? 어떻게 그가 왕국을 통치할 기대를 가질 수 있었던가?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인간의 재간이나 노력, 혹은 사람의 생각에 의하여 결정된 것으로서 예언의 성취가 아니었다고 누가 감히 주장할 수 있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모세는 모호하지만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에 대하여 말한 바 있는데(창 49 : 10), 이 예언은 그 후 2,000년이 지나서 실제적으로 성취되었다. 이것이 그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하였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예언들은 건전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결같이 그 예언을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확신할 만큼 하나님의 계시를 아주 분명하게 나타낸다. 요컨대 모세의 한 편의 노래는(신 32장)하나님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맑은 거울인 것이다.

8. 하나님은 예언자의 말들을 확증하셨다

 다른 선지자들에게 있어서도 이것은 한층 더 명백하게 발견된다. 나는 여기서 단지 몇 가지의 실례만을 들고자 한다. 왜냐하면 전체의 실례를 든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시대의 유다 왕국은 평화로웠고 심지어는 그들이 갈대아 사람의 동맹국이라 하여 스스로 안전하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을지라도, 이사야는 그 도시가 파괴될 것이며 그 백성이 포로가 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예언하였다(사 39 : 6-7). 그 당시는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마침내는 실제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오래 전에 예언한다는 것은, 아직 신적 영감에 대한 명백하고도 충분한 증거가 못된다고 치자. 그러나 이사야가 그들의 해방에 대하여도 동시에 예언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 예언의 근원이 하나님 이외에 도대체 어디에서 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고레스라는 이름을 들면서(사 45 : 1), 갈대아 사람들이 이 고레스에게 항복하며 그로 인하여 백성들이 자유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고 예언하였다. 이 예언자가 그렇게 예언한 후로부터 고레스가 태어나기까지는 100년 이상이 경과하였다.  왜냐하면 이사야가 죽은 지 거의 100년이 지나서야 고레스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당시에는 누구도 고레스라는 사람이 나타나 바벨론과 싸워 그 강대한 왕국을 정복하여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 생활을 종식시킬 것이라는 것을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아무런 문자적인 수식도 없이 솔직하게 말한 이 이야기는 이사야가 사람의 추측으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확실한 말씀으로 하였다는 것을 명백하게 증명해 주지 않는가? 그리고 백성들이 잡혀가기 얼마 전에 예레미야가 그들의 포로 생활의 기간이 70년이라는 것과 그들의 해방과 귀환에 대하여도 예언하였는데(렘 25 : 11-12, 29 : 10), 이 사실이야말로 그의 혀가 하나님의 영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한 증거들에 의해 예언자들의 권위가 확증되었다는 것과 그들 자신이 주장한 바가 바로 그들이 말의 신빙성을 옹호하기 위해서 실제로 성취되었다는 것, 이러한 사실들을 부정한다는 것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사 42 : 9).   


9. 율법의 전승(传承)

 나는 어떤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공박함에 있어서 자신의 재치의 예리함을 보이기 위해 도처에서 떠들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모세나 선지자들의 이름이 붙여진 채 읽히고 있는 책들이 실제로 그들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을 누가 우리에게 보증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모세가 실재의 인물이었던가를 감히 문제 삼는 자들까지도 있다. 그러나 만일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키케로 같은 인물이 실제로 있었던가를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러한 어리석은 사람은 마땅히 주먹이나 채찍의 응징을 받아야 한다고 누가 말하지 않겠는가? 모세의 율법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보다도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놀랍도록 보존되었다. 비록 그 율법이 제사장들의 소홀함으로 인하여 잠시 파묻혀 있었으나, 경건한 왕 요시야가 이를 발견한 후부터는(왕하 22 : 8, 대하 34 : 15) 대대로 계속해서 계승되어 왔다. 실로 요시야는 이를 공포할 때에 생소하거나 새로운 것이 아니라, 항상 일반이 널리 알고 있었고 또 당시에 유명하여 잘 기억하고 있던 것이라고 하였다. 요시야는 그 원본을 성전에 보존하고, 사본을 만들어 왕의 서고에 두게 하였다(신 17 : 18-19). 다만 이러한 일들은 있었다. 곧 제사장들이 옛날의 엄숙한 관습을 따라 율법을 공표하기를 중단하였고 백성들이 율법을 읽는 버릇을 게을리 하였다는 것이다. 율법의 권위가 확인되지 않은 때나 그것이 갱신되지 않은 시대가 거의 없었다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다윗의 시편에 정통한 사람이 모세를 알지 못했겠는가? 그러나 이 모든 거룩한 저자들에 대하여 총괄적으로 말한다면, 그들의 저작은 오직 한 길을 통하여 직접 입에서 입으로 그 후손에게 전승되었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어떤이들은 그들의 말을 직접 들었으며 또 어떤 이들은 들은 말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그 말을 듣고 배우기도 하였던 것이다.

10.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자를 이적적으로 보존하셨다

 마카비가(家)의 역사에 나오는 어떤 구절을 가지고 성경의 확실성을 손상시키려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그 확실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생각하여 오던 것 중에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적절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그들의 거짓된 주장을 깨끗이 일소해 버리고 다음으로 그들이 우리를 향해 설치한 공격 무기로 그들을 역습할 것이다. 그들은 안티오쿠스(Antiochus)가 모든 성경을 다 불태우라고 명하였는데, 지금 우리가 가진 사본들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겠느냐고 말한다(마카비전서 1:56-57). 그러나 그 사본들이 어떤 공장에서 그처럼 빨리 위조될 수 있었겠는가라고 나는 반문하고 싶다. 왜냐하면 박해가 끝나자 마자 즉시 그 책들이 나타났으며, 또한 그 교리에 대하여 교육을 받고 이를 익숙히 잘 알고 있던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아무런 논쟁도 없이 그 책들이 바로 성경이라고 인정하였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사악한 자들이 서로 모의나 한 듯이 파렴치하게 유대인들을 모욕했지만, 아무도 감히 유대인들이 성경을 위조했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유대인의 종교를 어떤 것으로 생각하든지 그들은 모세가 그 책의 저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全)역사의 동의로 그 거룩한 유구성이 확증된 이 책들을 가리켜 날조라고 허튼 말을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개 같은 몰염치를 폭로하는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그런 추악한 비방을 논박하는 데 이 이상 더 쓸데없는 수고를 하지 않기 위해 이제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시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배려를 하셨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맹렬히 타고 있는 불길 속에서 끄집어내듯이 이 말씀을 가장 잔인하고 가장 야만적인 폭군에게서 건져내셨던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제사장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아주 강한 지조를 주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이 보물을 후손에게 전승하기 위하여 필요할 때에는 목숨을 바치는 것까지도 주저하지 않게 하셨으며, 또한 총독들과 군인들의 온갖 맹렬한 조사를 좌절시키기도 하셨던 것이다. 사악한 자들이 전적으로 파괴되었다고 확신하던 그 거룩한 기념비가 즉시 되돌아와서 이전의 위치에 다시 한 번 놓이게 되고, 더욱이 그 위엄이 높아지게 된 사실을 하나님의 이적적이며 주목할 만한 성업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왜냐하면 그 후 곧 이어서 헬라어 성경이 나왔으며 이것은 전세계에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이적이 나타난 것은 하나님께서 안티오쿠스의 그 피비린내 나는 포고령 속에서 언약의 서판들을 건져 내셨다는 데에 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거듭되는 재난으로 짓밟힘을 받고 기진맥진하여 마침내는 거의 멸절 상태에 이르는 그 속에서도 이 기록들이 손상되지 않고 본래대로 안전하게 보존되었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당시 히브리어는 멸시를 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종교를 돌보지 아니하셨더라면 히브리어는 완전히 없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후에 그들이 얼마나 자기네 모국어를 순수하게 사용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은 당시의 예언서들을 보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1. 신약성경의 단순성과 천적 특성 및 권위

 신약성경으로 넘어오게 되면 그 진리가 얼마나 튼튼한 지주(支柱)  로 확고부동한가! 세 복음서 기자는 그들의 역사를 낮고 비천한 문체로 기술하였다. 따라서 많은 교만한 사람들은 그 문체의 단순성을 몹시 경멸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교리의 중심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주의하기만 한다면 복음서 기자들이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논하고 있음을 쉽게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진정 조금이라도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복음 제 1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세 복음서의 기자들이 간단하게 요약한 그리스도의 설교는 그들의 기록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멸시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요한은 위엄 있게 책망하면서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는 자들의 그 완고함을 벼락치듯 강하게 꾸짖는다. 그들 자신과 다른 사람의 마음에서 성경에 대한 일체의 존경심을 몰아내는 것을 최대의 욕망으로 삼고 있는 저 모든 트집쟁이들을 대중(大众) 앞에 나오게 하자.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요한복음을 읽게 하자. 그리하면 그들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적어도 그들의 둔한 마음을 각성시켜 줄 무수한 말씀들, 아니 그들의 조롱을 억제하도록 그 양심에 무서운 낙인을 찍어 줄 무수한 말씀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바울과 베드로도 그와 같은 방법을 쓰고 있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저작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속에 내재하는 하늘의 위엄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매료하여 완전히 사로잡아 버린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그들의 교리를 이 세상 이상의 것으로 높이기에 충분하다.
 
(교회의 동의와 순교자들의 충성. 12-13)

12. 성경에 대한 교회의 불변적인 증거

  성경이 공포된 이후, 오랜 시대를 거쳐 사람들은 확고하게 또한 한결같이 성경에 순종하였다. 사탄은 온갖 교묘한 방법으로 전세계와 함께 성경을 억압, 전복하며, 혹은 인간의 기억에서 이를 전적으로 제거, 말살시키고자 노력하여 왔다. 그러나 성경은 종려나무와 같아서 점점 더 높이 자라며 공격할 수 없는 것으로 존속하여 온 것이다. 사실 탁월한 능력을 가진 궤변가나 웅변가 치고 성경을 반대하는 데 자신의 힘을 기울이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결코 사소한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의 모든 세력들이 성경을 파괴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여 스스로를 무장하였으나, 그러한 노력은 모두 연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만일 성경이 인간의 보호에만 의존했다고 하면 사방으로부터의 그 강력한 공격들을 어떻게 막을 수 있었겠는가? 오히려 이 사실로 말미암아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왜냐하면 인간이 모든 노력을 기울여 이에 반항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 자체의 힘으로 지금까지 널리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경을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데 일치하였던 것은 한 국가나 한 국민만이 아니었다. 다른 면에서는 전혀 공통점이 없던 지구상의 여러 민족들의 거룩한 일치에 의해서 성경은 그 권위를 인정받았던 것이다. 

13. 순교자들은 성경의 교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러면 그렇게 많은 성도들의 피로 확증되고 증언된 그 교리를 우리는 어떠한 확신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순교자들은 일단 그 교리를 받아들이면 용감하고 대담 무쌍하게, 심지어는 큰 정열을 가지고 죽음을 당하는 것까지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담보를 치르고 우리에게 물려주었는데 우리가 어떻게 이를 확고부동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지고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성경이 많은 증인들의 피로 인쳐졌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증명으로서는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다. 특히 그들이 죽기까지 그들의 신앙을 증거하되 잘못된 정신의 소유자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듯이 이를 지나친 광신(狂信)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한 확고하고 견고하며 건전한 열심을 가지고 그렇게 하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그것은 더욱 명백해진다.
이 밖에도 소수도 아니며 그렇다고 미약하지도 않은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서였다. 성경의 위엄과 권위가 경건한 자들의 마음에 확증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비방자의 간계에 대항해서도 훌륭하게 변호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성부께서 자신의 위엄을 성경에 나타내시며 성경의 존귀성을 모든 논쟁의 영역에서 지키시지 않는 한, 그들 스스로 견고한 신앙을 마련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확실성이 성령의 내적 확신 위에 세워질 때에만 비로소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하는 지식을 궁극적으로 일으킬 수 있게 된다. 실로 성경을 확증하려는 인간적인 증거는 그 주요하고 우선적인 증거에 대하여 부차적인 보호자의 역할만 한다면 결코 무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신자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거하려는 자들은 매우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이 아니고는 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경고한 바, 사람이 그렇게 큰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건과 마음의 평안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한 것은 올바른 것이다.

제 9 장
성경을 떠난 직접 계시로 비약하는 광신자들은 모든 신앙의 원리를 파괴한다

1. 광신자들의 성령에 대한 잘못된 호소

 성경을 떠나서도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어떤길이 달리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오류에 사로잡혀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광란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최근에 경솔한 사람들이 더러 출현하여 아주 거만하게 마치 성령의 가르침을 직접 받는 것처럼 자랑하면서 성경 읽는 것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한편, 그들의 표현대로 죽은 그리고 죽이는 문자를 아직도 따르는 사람들의 그 단순성을 비웃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교리를 감히 유치하고 천한 것이라고 멸시할 만큼 그들을 높은 자리에까지 오르게 한 그 영이란 도대체 어떤 영인가라고 나는 묻고 싶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그들이 대답한다면, 그 확신이야말로 참으로 웃음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다른 영으로 조명되지 않았음을 그들은 인정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더욱이 이들 중 한 사람도 그 영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도록 가르침을 받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의 저작에서 훌륭하게 증명된 대로 보다 높은 존경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미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예언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사 59 : 21). 이 말씀에서 이사야는 구약 시대의 사람들을 마치 글을 처음 배우는 어린이들처럼 외부적인 교리에만 묶어 두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도의 통치하에서 새 교회가 참되고 완전한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곧 성령에 의해서 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도 지배받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예언자들이 침범할 수 없도록 결속시켜 놓은 것들을 이 악한 자들은 가증하고 참람되게 분리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삼층천에 이끌려 다녀 온 후에도 계속하여 율법과 선지자들의 교리를 연구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후 12 : 2). 또한 그는 훌륭한 교사 디모데에게도 읽는 것에 착념(着念)하라고 권고하였다(딤전 4 : 13). 그리고 다음과 같은 성경에 대한 찬사는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 : 16-l7)고 말하였다. 성경의 효용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궁극적인 목적지에 인도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순간적인 것이라거나 일시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악마적인 광란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또한, 그들이 주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영과는 전혀 다른 영을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하는 데 대해 답변해 주기를 바란다. 그들이 완전히 정신 착란증에 걸려 있다 하더라도 이것을 자랑으로 여길 정도로 광신에 사로잡혀 있다고는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께서는 어떤 영을 약속하신다고 하셨는가? 실로 그 영은 "자의로 말하지 않는" 영으로서 예수님께서 친히 과거에 말씀하신 것들을 저들의 마음속에 넣어 주시며 암시해 주시는 영인 것이다(요 16 : 13). 그러므로 우리에게 약속된 성령의 임무는 아직 들어보지도 못한 새로운 계시를 만들어 내거나 어떤 새로운 교리 자체를 날조하여 이미 받은 복음의 교리에서 우리를 떠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복음이 말하는 바로 그 교리를 우리의 마음에 앉혀 주는 데 있는 것이다.

2. 성령은 성경에 의해 인정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무슨 유익이나 만족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으며 성경에 유의해야만 한다는 것을 여기서 쉽게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복음의 빛이 나타난 후에는 물러갔다고 생각되었던 예언자의 교훈을 열심히 경청하는 사람들을 베드로가 칭찬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벧후 1 : 19).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는 제쳐 두고 다른 교리를 우리에게 강요하는 영이 있다고 하면 이는 마땅히 허망하고 거짓된 것으로 의심을 받아야 한다(갈 1 : 6-9). 그것은 어떻게 해서 그런가?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고후 11 : 14)하기 때문에, 가장 확실한 특징에 의해 그가 식별되지 않는 한 성령이 우리에 대하여 어떻게 권위를 행사하실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성령은 하나님의 음성에 의해 가장 분명하게 우리에게 지시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성령을 하나님께로부터 구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들로부터 찾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파멸에 이르는 이 가련한 사람들은 예외이다. 더욱이 그들은 만물이 예속되어 있는 하나님의 영을 성경에 예속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마치 성령은 어디서나 동일하시고 자신과 일치하시며 만사에 시종일관 하시며 변함이 없으시다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로 생각된다는 말과도 같다. 만일 성령이 인간이나 천사, 혹은 어떤 다른 무엇의 규범에 따라 판단된다고 하면 틀림없이 성령은 그 지위에서 격하될 것이며, 또한 그렇게 말하기를 원한다면 그러한 성령은 노예 상태에까지 떨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그 자신과 비교되고 자신 안에서 고려된다고 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손상을 입었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일종의 검토(检讨)를 받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에 대하여 자신의 위엄을 확립하고자 하시는 검토인 것이다. 우리로서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셔서 임재하시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 그러나 사탄의 영이 성령의 이름으로 침투하지 않도록 성령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형상대로 인식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성령은 성경의 저자이시다. 그는 변하실 수도, 자신과 다를 수도 없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분명히 그는 성경 안에서 일단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그대로 영원히 존속하실 것이다. 

3. 말씀과 성령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그들은 우리가 죽이는 문자에 의존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 일 자체에서 그들은 성경을 무시한 데 대한 형벌을 치르고 있다. 왜냐하면 바울이 고린도후서 3장 6절에서 거짓 사도들을 대항해서 싸우고 있음이 아주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들 거짓 사도들은 그리스도가 없는 율법을 추천하며, 주께서 "그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렘 31 : 33)하기로 약속하신 계약의 축복들을 사람들로부터 탈취하였던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총과는 관계가 끊어져서 다만 귀에만 울릴 뿐, 마음에는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는 그런 문자는 죽은 글이며(고후 3 : 6), 따라서 주의 율법은 그것을 읽는 독자들을 죽인다. 그러나 그 문자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에 효과적으로 새겨지며 그리스도를 제시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영혼을 소생케 하고 우둔한 자도 지혜롭게 하는"(시 19 : 7) 생명의 말씀이 될 것이다(빌 2 : 16). 더욱이 사도는 같은 곳에서 자기의 설교를 "영의 직분"이라고 말하였다(고후 3 : 8). 의심의 여지없이 이 말의 의미는, 성령께서는 성경에서 보여 주신 자신의 진리와 아주 굳게 결속하여 계시므로 그 말씀이 당연한 존경과 위엄을 받을 때에만 비로소 성령이 자신의 권능을 발휘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말씀 자체가 성령의 증거로 말미암아 확증되지 않는 한, 우리에 대하여 큰 확실성을 가지지 못한다고 내가 앞서 주장한 것과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일종의 상호 결속 관계를 통하여 말씀의 확실성과 성령의 확실성을 결합시키셨으므로,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게 하시는 성령께서 빛을 비추어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에 말씀에 대한 완전한 신앙이 머물 수 있으며, 또한 우리가 그의 형상을 따라 곧 그 말씀을 따라 그를 인식할 때에 우리는 속는다는 두려움 없이 성령을 마음에 모실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로 이것은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이 임하면 즉시 말씀을 폐기할 생각으로 일시적인 전시(展示)를 위해 자신의 말씀을 인류에게 보이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동일한 성령을 보내셔서 그 권능으로 말씀을 나누어주신 것은 그 말씀에 대한 효과적인 확증으로 자신의 일을 완성하시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리스도는 두 제자의 마음을 열어 주셨는데(눅 24 : 27,45), 이는 그들이 성경을 거절하고 자신의 지혜를 믿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성경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이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 5 : 19-20)라고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권면할 때에도, 그는 말씀을 떠난 공허한 사색(思索)으로 그들을 이끌지 아니하고 오히려 예언이 멸시를 당해서는 안 된다고 즉시 덧붙여 말하였다. 이 사실을 통해서 그는 예언이 경시될 때에 성령의 빛이 소멸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암시하였다. 



제 10 장
성경은 모든 미신의 잘못됨을 바로 잡기 위해 참되신 하나님을 이교도의 모든 신들과 대조하고 있다

1.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 교리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우주를 어떻게 통치하신다. 실로 하나님의 부성적(父性的)인 자비하심과 은혜 주시기를 좋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엄격하신 분임. 곧 하나님께서 관용을 베풀어 주심에도 불구하고 사악한 자들이 계속해서 악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악한 행위에 대하여 공의로 징벌하시는 의로운 심판장이심이다.



2. 성경에 말하는 하나님의 속성은 피조물들에게서 알 수 있는 속성과 일치한다.

 성경의 어떤 구절들은 하나님의 특성을 더 명백하게 묘사하여 마치 하나님의 참된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모세가 하나님을 묘사할 때, 그는 분명히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간결하게 말하고자 하였다. 모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오라 여호라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子舆孙) 삼사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 : 6-7). 여기서 우리는 두 번 반복된 그 위대하신 이름에서 하나님의 영원성과 자존성(自存性)이 선언된 것을 보게 된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완전성이 언급되었는데, 이들 완전성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에 대하여 어떤 분이신가 보다는 우리에 대하여 어떤 분이신가 하는 형식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한 이와 같은 인식은 산 경험으로 되는 것이지 헛되고 막연한 과장된 공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더우기 우리가 이미 본 대로 하늘과 땅에서 빛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완전성이 여기서 열거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곧 그것은 인자하심, 선하심, 자비로우심, 공의, 심판, 그리고 진리와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권세와 능력은 엘로힘(Elohim)이라는 이름에 포함되어 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렘 9 : 24, 고전 1 : 31). 특히 이 세 가지는 꼭 알아야 할 것들이다. 첫째는 인애로서, 우리의 모든 구원은 전적으로 여기에만 달려 있다. 둘째는 공평 혹은 심판(Judgment)으로, 이것은 날마다 행악자들에게 시행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보다 가혹하게 저들을 영원한 멸망에 이르기까지 기다린다. 셋째는 정직 혹은 의(义, Justice)이다. 이것으로 신자는 보존되며 또한 가장 자애로운 양육을 받게 된다.

3. 하나님의 유일성은 이교도들에게도 계시되었으므로 우상숭배는 더욱 핑계할 수 없다.

 일반적인 교리를 요약,  첫째 우리를 참되신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성경은 이교도의 모든 신들을 명백히 배척하며 거부하고 있음을 독자는 우선적으로 주의하기 바란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시대를 통하여 종교는 일반적으로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실로 유일신 하나님의 존칭은 어디서나 알려졌으며 또한 존경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많은 신들을 숭배하는 자들까지도 본래의 진정한 감정으로 말할 때에는 마치 유일신으로 만족이나 하는 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단수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지혜롭게 알아차린 져스틴 마터(Justin Martyr)는 하나님의 왕국(God's Monarchy)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여러 가지 증거를 들어 하나님의 유일성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고 주장하였다.  터툴리안(Tertullian) 또한 그와 같은 것을 흔히 사용되는 구절로 입증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그들 자신의 허망한 생각에 의해 한결같이 거짓된 허구에 끌려들었거나 또는 빠져 들어감으로써 그 지각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천성적으로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지각하던 것은 다만 그들을 핑계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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