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구원론 질문과 답변

예림의집 2014. 4. 9. 18:56

구원론 질문과 답변

 

1. 구원서정 방법론적 측면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해 구속사와 구원서정 연결을 종합해 서 설명하라.구원서정을 다루는 문제점에 대한 대안(방법론적)

이 대안은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성경에서 구원서정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가?

눅 24:44~49

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선지자의 글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눅 24: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눅 24: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눅 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눅 24: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 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구원서정을 말함 약속의 성취, 약속의 결과라는 단어

혼자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약속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성령의 능력, 붙잡고 사는 것은 구약적 특징, 약속을 위해 사는 것은 신약적 특징이다.

당시의 기준으로 성경이 무엇을 기록하고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성경관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성경이 어떤 책인지를 말씀하시는가? 바로 자신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눅24:44)

오늘날 많은 학자들의 해석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이 없는 해석은 잘못된 해석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는 예수님의 시점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의 시점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말씀이다. 예수님이 마지막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당부하고 계시는지를 알 수 있다.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는 것은 46절과 47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다는 것이다. 46절은 구속사적인 성취를 말씀하고 있다. 구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다 이루어졌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충분히 공감이 되어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은 공감을 하고 있다.

그런데 47절의 내용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되는 일에 대해서도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구약성경에)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 일이 구원서정의 일이 앞으로 진행될 것을 보고 있다.

46절은 구속사의 일이 성취될 것을 말씀하셨고, 47절은 구원서정의 일이 앞으로 진행될 것을 성경은 이야기 하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해야 한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너희가 이제는 증인이 되어야 하는데, 46절과 47절에 대한 증인이 되어야 한다.

증인이 하는 증거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죽으시고 부활하심만이 아니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증언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 이것이 구약 성경에 기록하고 있다.

45절에서 예수님은 성경을 깨달아 알게 하셨는데, 그것은 46절과 47절의 말씀이다. 성경의의도와 계획을 아는 것이다.

무엇을 아는 것이 성경을 깨달아 아는 것인가?

마음을 열어 깨달아 알게 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신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꾸짖고 있다.

눅 24: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히브리서 모든 대언자들(전령들)을 함축해서 표현 / 성경이 말하고 있는 자체를 모르는것

눅 24: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눅 24: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선지자들이 말한 것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26절의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비하와 승귀,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왜 그것을 모르느냐고 말씀하고 있다. 누가는 이것을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해서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27절)

이것이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을 다루는 방법이다. 이것이 성경을 다루는 올바른 방법이다. 성경은 그리스도 중심에서 해석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연관성이 없이 해석하는 것은 중요한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눅 24: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성경을 풀어주는 것은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를 가르치는 것인데 이때에 마음이 뜨겁게 된다. 마음이 뜨겁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며, 냉철하게 하시는 분도 성령께서 하신다.

설교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제자들이 몰랐으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깨닫게 되었다.

눅 9:22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그런데 제자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했다.

눅 9:45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깨닫지 못했으나 24장에서 제자들이 깨달았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제자들이 깨닫지 못했던 것은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었기 때문에 이해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24장에 이르러서야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성령이 오시면 계속해서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이라는 말,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증거 할 때에 성령께서 오시면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고 있다.(49: 위로부터 능력)

행 1장에서는 성령이라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행 1: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4절의 말씀이 눅 24장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 성령 세례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성령세례는 개혁주의 입장이 아니다. 구원 받은 자들이 더 추구하는 것을 성령세례를 받는다고 하는데 이것은 틀린 말이다.

행 1:5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하는 것이 물로 세례를 주었다는 것과 대비가 된다. 요한의 물 세례를 받은 사람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받았다. 대비되는 것은 동등한 무게에서 기록한 것이다. 지금까지 물세례를 받은 것처럼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일이 있을 것임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물세례와 성령세례에 사이에 있는 말씀은 “몇 일이 있으면”이라고 한다. 이제까지 물세례를 받은 것처럼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성령이 임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구원론적으로 꼬집어 말한다면 중생이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바꿀 필요가 없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일이 있을 것임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행 2장에서 나타나고 있다.

행 2장을 볼 때에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의 그림을 그리게 된다. 불, 바람, 방언

행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방언은 “γλωσσα”(글로싸)이다. 이것은 말, 용어, 언어, 사투리의 뜻이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지방 말)로 말하기를 시작했다.

행 2: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이 소리”는 어떤 소리인가?

이 소리는 자신의 언어로 들렸음을 기록하고 있다.

행 2: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눅24:49절과 연관이 있다.

이것은 자신의 고향의 말로 들었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소리의 파장이 전달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 전달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언어의 소통을 말하고 있다.

행 2: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행 2: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행 2: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이들이 들은 것은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한 내용을 들었다. 방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사건에서 “하나님의 큰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행 2: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14절에 베드로 일어나 “이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할 것이다.”는 명령문이다.

이것은 이 일이 너희에게 선포 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큰 일”이다. 여기에서 계시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큰 일”이다. 성경은 하나의 계시 말씀 계시는 구속을 위한 드러내기 위하기 때문에 행위의 계시가 중심적으로 본다. 베드로는 17절에서 21절 “하나님의 큰 일”이 무엇인지 밝히기 위한 열쇠로 그는 여기에서 요엘의 이야기를 통해 시작한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이 후에”라는 말은 “훗 날”, 장차에 있을 것을 말하고 있다. “만민에게 부어줄 것”이라고 한 것은 구약 시대에 중요한 말이다. 충격적인 말이다. 구약에서는 성령이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을 베드로가 인용을 하고 있는데, “말세에”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이 끝이라고 말한다. 행 2장의 사건이 요엘이 말했던 것의 끝이라고 말한다. 요엘의 결론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데, 베드로의 말도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 일이 가능해 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큰 일”이다.

이제 듣는 사람들에게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구원서정의 문제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구속의 역사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성령의 강림은 구속사적인 사건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것이 가능하게 한 것이다. 그것은 단회적인 사건이다. 그 다음에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는 일이 계속해서 있는 것이다. 성령의 세례가 있는 것이다.

구약에도 성령은 활동하고 계셨다.

구원서정의 논의를 구속사적인 틀 위에서 다루어야 한다. 이것이 성경에서 요구하는 방법이다. 다음은 요한복음을 살피기로 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요 7: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요 7: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앞의 사건을 연관(십자가사건)

부활

예수님께서는 요7:37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곧 누구든지 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다.

행 2:21에서 누구든지 주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와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난다”고 하신다. 이것을 요한이 설명을 하고 있다. 이것도 행 1:5에 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몇 일이 지나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요한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믿는 자들마다 성령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의 신학적 해석이 누가의 해석과 동일한 것이다. 사도행전의 시작이 되는 것의 첫 번째 말씀이 행 1:5절이다.

요한복음 39절 자체는 요한의 해석이다. 그런데 자신이 한 말에 대해 다시 부연 설명을 괄호 안에 하고 있다. 더 깊은 의미를 알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광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말하고 있다. 아직은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아직은 구속사가 완전히 진행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이 임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예수를 믿으면 성령이 임할 것이라는 것은 앞으로의 일이다. 즉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구원 서정의 일이다. 구속사의 진행이 있은 후에 있을 것이다. 행 2장의 진행까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8절의 “성경에 이름 같이”라고 하는 것은 구원 서정의 일이 앞으로 있을 것임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성경은 구약 성경을 이르고 있다. 요한도 성경은 구속사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구속사의 진전 후에 구원 서정이 일어날 것임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믿다,” “성령이 임한다”는 모두 구원서정의 일,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일은 구속사에 속하는 일이다.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요 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4-16장까지는 성령이 누구신지를 밝히고 있다. 예수께서 친히, 존재론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사역적 측면, 기능적 측면에서 성령을 이해하도록 설명하고 있다. 성령이 누구이신지를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이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다.

요 14:16절에

성부가 보혜사를 보내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보혜사는 진리의 영이다. 보혜사는 영인데, 진리의 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은 왜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을까? 6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진리라고 했는데, 보혜사가 진리의 영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보혜사가 자신의 영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다.

26절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보혜사는 삼위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보혜사는 아버지께서 보내시는 성령인데, 예수의 이름으로 보내실 것이다. 성령은 예수를 대신해서 오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성령이 오시는 것은 예수의 일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예수의 계획과 목적을 위해 성령이 오시는 것이다.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친다.”는 말은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아는 것이다. 성령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셨던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일을 위해서 오시는 것이다. 성령은 예수를 가르치는 일과 연관이 있다.

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성령의 “증언”의 일은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구원을 적용하는 것이 성령의 구원서정의 일 “그가 내 이름으로 한다”.

요 15: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여기에서는 보혜사를 보내시는 주체가 나오고 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보낸다”고 하신 것은 예수께서 성령을 보내시는 주체가 된다.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겠다는 것은 구속사에 해당)보혜사는 영이다. 진리의 영이다. 성령이다. 그 성령은 진리의 성령이다. 진리와 성령이 만났다. 그 성령은 진리의 성령이다. 왜 예수께서는 진리라는 말을 성령과 연결할까? 그것은 예수께서 가르친 것을 가르칠 것이기 때문이다. 보혜사는 예수의 이름으로 보낼 것이기 때문이다.

27절에는 사도적 사명을 계승하는 모든 이들을 포함하고 있다. “너희도 증언한다.”는 것은 진리의 성령이 오면 성령이 예수를 증언할 것이며, 너희도 예수를 증언할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누가복음 24장에 “너희가 이 일에 증인”이라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여기에서 증인이라는 것은 예수의 죽으심과 죄 사함의 문제 모두를 말하고 있다. 누가는 너희가 기다리는 말을 먼저 하고 약속이 임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말하고 있으나 요한은 신학적인 의미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성령이 나를 증거 하실 때에 우리가 예수를 증거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내가 증언을 할 수 있는 것은 먼저 성령께서 먼저 일을 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서정이다. 요한복음15장 27절의 일은 구원서정의 일이다. 성령이 구원서정의 일을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 구원서정의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요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 16: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요 16: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요 16: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여기에서는 보혜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바로 진리의 성령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진리의 성령인데, 그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모든 진리는 예수를 말한다. 그런데 표현이 문맥을 벗어나 넓은 의미에서 읽혀질 수 있다. 당시 헬라 사상에 대하여 예수가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배경을 생각한다면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한다는 말은 헬라에서 말하는 모든 진리를 포함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가능하다.

인간이 알 수 있는 진리는 창조세계 안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지식이 바른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바른 진리가 된다. 창조의 이해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를 통한 구원이 있어야 창조를 인정하게 된다. 그 전제 하에 고대 헬라 철학이 발견한 진리가 바른 진리가 된다.

모든 진리는 헬라철학이 포함되는가? 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가 된다. 구원이 있어야 인식론적인 전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들은 대로 말한다.” 여기에서는 성령이 하시는 일을 제한적으로 명확하게 선을 그어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성령이 임의대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은 부여 받은 것만을 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종속적인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이것을 근거해서 오늘날 있을 수 있는 사적인 계시가 있을 수도 없고 틀린 말이 된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오직 들은 것”만을 말하기 때문이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예수님의 영광이다.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일하신다.

성령을 이해하는 데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이 성령에 대한 이해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성령을 완전히 열려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과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특히 사역적인 면에서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요 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요 20: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요 20: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여기에 ‘평강이 있을지어다’가 3번이나 기록하고 있다.

요한은 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의 시점에서 샬롬을 기록하고 있을까?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알리는 내용에 “땅에는 평화(샬롬)”을 선포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에게 평화가 있을 것임을 말하고 있다. 심판의 대상에서 평화의 대상이 된다. 그 평화가 예수님의 부활로 완성된 것이기 때문에 구속사적인 성취의 의미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평강을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숨을 내 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이다. 행 2장에서 있을 일을 염두에 두고 하신 동작이다. 이것을 학자들은 “요한의 오순절 사건”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구속사적인 진행이 있을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성령을 받으면 누구의 죄를 사하든지 그 죄가 사하여질 것임을 말씀한다. 이것은 제자들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시면 제자들이 죄 사함의 복음을 전하는 곳에는 죄 사함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구원 서정의 일이 진행될 것을 말씀하고 있다. 누가복음 24장에서 ‘너희가 이 일에 증인이다.’ 라고 하셨다. 예수를 전하는 곳에 죄 사함이 일어난다. 성령이 오심으로 구원서정이 진행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구속사와 구원서정을 밀접한 관계에서 다루고 있다. (Historia Salutis :기독론 - Oder Salutis:구원론) 그렇다면 이것을 끝나는 것인가? 이것을 연결하는 최종적인 연결이 빠져 있다. 구원서정의 논의가 별개의 논의가 되어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논의가 되었었다. 그러므로 인해 문제가 생겼다.(반 율법주의) 구원서정을 구속사의 진행과 밀접한 관계에서 다룰 때 생명력이 있다. 그렇다면 이 둘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기독론은 2000년 전에 있었고, 구원론은 지금 내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연결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2000년 전의 사건과 만나는 것이다.

존 머레이가 여러 가지 구원서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의 10 - 15장에 구원서정을 다루고 있다. 지금 우리의 방법과 웨스트민스트의 방법이 다른가? 7장은 언약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으신 언약, 8장은 그리스도가 중보 되심을 말하고 있다. 7장과 8장은 10-15장을 이해하기 위한 틀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조직신학의 책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번 말하지 않는다. 여기에서의 중심사상은 언약사상이다. 언약의 신학 속에서 논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렘 31: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새 언약은 우리의 심령에 새겨주는 언약,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언약이다. 그리고 그 새 언약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신약성경은 말하고 있다. 새 언약의 속에는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세를 통해서 주셨던 말씀이다. 이것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본질은 동일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방법적인 측면에서는 다를지라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언약의 중심개념은 연합이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신약에 와서 사라지지 않고 유지된다. 언약의 중심인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언약 안에 약속된 것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구원서정이 다루어져야 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1. 그리스도 중심적인 방법이다. - 구원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독론적인 접근 방법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의 초점이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구원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도의 구원의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구원이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칭의), 거룩(영화), 구원이 된다.

 

2. 종말론적 역동성을 갖는다. - 구원의 삶에 있어 긴장감과 역동성이 있다.(이미 - 아직) 구원서정을 잘못 말하게 되면 반율법주의가 나타난다. 신약성경은 구원이 항상 주님이 오시기까지 종말론적 구도에 있는 것으로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서도 그렇게 느껴져야 한다. 지금까지는 지나치게 이론적이고, 사변적이었기 때문에 삶 속에서 긴장감을 주지 못했다. 이미 구원이 있음에도 구원을 기다리는 기대감이 우리의 경건의 삶의 생명이 된다.

3. 구원의 영원의 의미를 살려준다. - 구원은 현재의 사건이다. 그러나 구원은 영원전 출발한다.

요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이미 영원전에 가졌던 근거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영광의 자리로 가는 것이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우리의 구원의 영원전 하나님의 계획에서 출발한다. (엡 1:3~14) 재림 후에는 영과 몸이 만나 주님과 함께 하늘나라로 들어간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누림을 말한다. 우리의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이 칼빈이 했던 방법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

칼빈은 구원서정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칼빈이 보는 바울신학이다. 바울신학의 핵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교회론은 연합개념의 확대이다. 한 사람의 구원은 구원론이며, 그들의 모임이 교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의 연합 개념으로 교회론을 설명하고 있다.

성찬의 특별한 열매로서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칼빈)

경건한 사람들은 성찬을 통해서 확신과 기쁨을 갖는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한 마음으로 자라나게 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Whatever is his may be called ours: 그의 것이면 무엇이든지 우리의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부활 속에 우리의 구원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 결과로 그가 상속자가 되신 영생이 우리의 것임을 우리는 확신 하게된다. 그가 이미 들어가신 하늘나라가 그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므로 우리가 더 이상 정죄될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당신의 것인냥 우리를 취하셨기 때문이다.(mirifica commutatio:놀라운 교통)

우리와 더불어 인자가 되심으로 우리를 그와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했다. 그가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길을 마련했다. 우리의 죽음을 취하시고 우리에게 죽지 않으심을 주셨다. 우리의 연약을 취하여 능력으로 강하게 하셨다. 우리의 가난을 받으시고 부를 주셨다. 우리의 무거운 죄를 지시고, 당신의 의로 입히셨다. 결국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의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놀라운 교통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을 하는 것은 그가 인성을 입으셨기 때문이다. (성육신적 연합, 기독론적 연합) 그러므로 같은 후사가 되었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육신하심으로 우리와 더불어 같은 후사가 되셨다. 이 사건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것을 성령론적 연합, 구원론적 연합이라 부른다. 예수를 믿어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다.

1. 영적 연합이다. - 성령으로 되어지는 연합이기 때문이다. 영적이라는 것은 성령과 연관성이 있다. 성령이 있는 사람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성령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신다. 예수를 믿으면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와 연합이다. 성령이 연합의 끈이다. (고전 12:13, 6:17, 롬 8:9-11, 요일 3:24, 4:13) 주와 연합한다는 것은 성령으로 그와 연합한다는 것을 말한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이다.

2. 신비적 연합이다. - 성령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목자와 양의 관계, 포도나무와 가지, 기초와 집의 관계, 남편과 아내의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의 연합은 신비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우리가 모두 알 수 없다.(칼빈)

신비스럽과 영적인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의 것이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성령이 어떤 방법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우리의 것이 되게 하는지 마지막 연결고리를 찾는 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바울 신학의 핵심개념, 신약성경의 핵심되는 개념, 성경에서 가장 핵심되는 개념이면서 신‧구약 성경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다.‫“이미-아직”의 종말론적 역동성과 긴장감을 반영하는 성질의 것이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영적인 연합이다. 구원 서정 논의에 앞서 제시하는 정신이 연합(언약개념)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으셨던 언약이 이제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통해 완성되었고 그리고 이제 나의 정황 속에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언약을 구현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애초에 원하셨던 당신과의 연합(communion) 구원서정을 교통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 우리에게 구원의 삶(효과, 혜택)이 되는 것이다. 구원서정 자체‧전체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인성을 입고 오셔서 구속의 모든 일을 하시고 아버지께서 부활의 본성을 가지고 오셨다. 즉 그의 것이면 무엇이든지 우리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가 구속사적으로— 구체적으로 성육신에서 부활까지 — 담당하시고 성취하신 모든 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할 때 비로소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구속사적 성취가 된 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2. 믿음에 대해서

기독교의 진리는 믿음을 구원과 직결시키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믿음을 그리스 연합하는 동작 자체로 정의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껴안고, 그리스도로 기우고, 그리스도와 연 합하는 것이 믿음이다. 달리 표현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점으로 믿음을 설명하는 것이 우리의 방법이다. 첫째 요소로 그리스도에 대해 알아야 하는 지식이라는 요소를 갖고 있다. 이성이 계시를 접수하게 될 때, 성령의 구원 은총을 통해 이 지식은 나를 구원하는 효과가 있는 구원지식이 된다. 복음을 들을 때, 그 내용(계시)이 나의 믿음의 근거가 된다. 그래서 로마서 10:17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씀하고 있다. 둘째 요소로 이성을 통해 접수된 그 리스도를 아는 지식(계시)에 대해 동의하고 수납하는 것을 말한다. 이 동의(믿음)를 복음의 구체적 내용에 따라 단계적으로 구분지어 생각할 때, 믿는다는 것은 첫째, 나는 죄인이라는 사실에 동의이고 둘째, 스스로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동의이고, 셋째, 나를 구원해 줄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동의이고, 넷째, 예수가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세 주시라는 사실에 동의이고, 다섯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한다는 복음의 내용에 구체 적으로 동의하고 수납하는 의미가 있다. 복음과 약속에 대해서 내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것이 다. 아무리 의지와 감정이 움직였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그 것은 믿음이 아닌 것이다. 믿음의 셋째 요소인 신뢰는 신뢰가 따를 때 비로소 믿음이 참 믿 음이 된다. 즉 믿는다는 것은 대상에 대하여 믿음(πίστις)을 갖는 의미이다. 대상의 알고(지 식), 그 대상을 아는 지식을 받아들이고(동의), 그 대상에 나를 맡기며 하나가 되는 것(신뢰). 이 신약의 믿음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 에베소서 2:8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 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 이라.”했다. 믿음의 수동성, 즉 믿음이 선물임 내가 안 된다는 자기 부인의 의미와 나를 포기 하고 그리스도만 높이는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 전적으로 행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 개혁

신학의 특징이면서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믿는 것은 “나”이다. 믿음은 수동적 의미가 대단히 중요하다 주시는 것이다. 전인적인 의탁과 신탁 출발은 성령이 내주 하시므로 말미암아 믿음 을 주심으로 인해서 믿게 된다. 믿음이 능동적인 것이고 믿는다는 그 자체가 나의 전인적인 동작이며, 아무런 값·기호·공로가 없다. 능동적 성질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 100% 믿음의 행사는 나의 동작이다 그러면서 능동적 동작이 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붙잡는 일에 있어서 매우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다. 믿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죄인이 자신을 위 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일이면서 신약성경에서 유일한 길 오직 믿음으로만 되는 것 이다.

3.칭의의 교리에 대해서 설명

구원론 문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죄인이 어떻게 의인이 되느냐에 종교개 혁이 일어났다. 칼빈은 모든 신앙과 교리, 루터는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면에서 칭의에 달려 있다고 했다. 1999년10월31일 종교개혁 기념일을 기해 이신칭의 오해를 풀고 의견차이 없이 루터란이 합의하면서 과거역사를 확인하는·일치하는 공동 확연 즉 종교개혁을 뒤집는 사건이 었다. 2000년 감리교 총회(금란교회)때 공동성명에 감리교도 참여한다고 조인했다. 종교개혁 을 뒤집는 일에 공식적으로 참여하였다. 웨슬레신학은 감리교, 성결교, 오순절, 구세군이다. 기독교의 상당히 많은 세력이 이신칭의의 교리를 뒤집은 것이다. 칭의는 복음과 직결되는 문 제이며, 오늘날 정황이 그렇게 가고 있다. 사실을 전제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 는 전제에서 나에게 이미 내려진 심판(판결)과도 같은 사건, 의인이라고 하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리라는 선포가 칭의가 복음이다. 역사적 사실 전제 속에서 심판사건이 사실 칭의가 복 음이며, 종말론적 이미 심판이 나에게 선언된 그리스도안에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개념은 반드시 법정적 개념 칭의는 법정적 개념이다. 종교개혁을 지켜낸 것이다. 칭 의와 범죄가 법정적 일(심판)이다. 잠17:15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느니라. 창2:17의 선악과를 먹지 말라 법→하나님의 의(도덕체계)

(하나님께 매우 가증히 여긴다) 긍정적요구: 먹지말라→생애(율법, 순종)

아담이순종을완수하여언약을 성취하였다면 부정적요구: 죽으리라→대속죽음

하나님은 아담을 의롭게 여기셨을 것이다.

창3:15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는 순간부터 은혜언약이 시작된 것이다. 은혜언약이 어떻게 이 루어질 것이다 의 구조이다. 신약성경은 아담을 기준으로 이야기 하면서 롬5장에서는 오실자 의 모양(표상)이다. 고전15장에서는 그리스도는 두 번째 아담 더 이상 다른 것이 오지 않는 마지막 아담이라고 하였다. 행위언약(순종)했을 때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고 여기시는 근거가 순종이다. 은혜언약은 그리스도가 한 대로 우리의 운명이 결정된다. 순종을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 아담의 가상의 칭의이다. 행위언약의 대표가 아담이다. 디모데전서3:16 주체가 그리스 도시이다(의롭다). 로마서1:3-4에서 구속사적 관점에서 기독론적 사역의 시대를 구분하는 것 으로도 이해가 가능 육으로는 성육신, 영으로는 부활의 기점에서 달라진 그 시대이다. 특히 구속사적틀에서 부활을 기해 부활 시에 영원하신 성자가 부활 사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선포되고 보다 더 드러나는 것이다. (천명이 되고 설명이 되는 것이다). 죄인 칭 의는 행함이 없는 경건치 않는 자들은 죄인이다. 종교개혁의 정신을 담고 있는 중심사상이 다. 롬4:5로서 종교개혁 사상을 한 마디로 하나님은 죄인을 칭의 하신다는 전제에서 있다고 했다. 신분상 의인이라고 불려지는것 뿐,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의로 간주, 전가된 의로 근 거,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불려지는 것이다. 칭의할 수 없는 근거를 만들지 않고 근거가 있을 때 그 근거에 의해서 칭의되는 것이 법정적 증거 이다. 잠17:15에서 하나님은 죄인을 의롭다고 하는 것을 증오하신다고 하신다. 칭의의 결과를 죄사함과 의인됨으로 나눌 수 있 다. 칭의의 근거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는 장점이 있 다. 언약신학에서 의의 전가란 믿음으로 연합되어진 결과로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의가 된 다. 전가로 나의 것이 된 의가 근거가 되어 내가 칭의 된다. 전가가 칭의의 사실적 근거가 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언약신학이다. 루터는 로마 카톨릭 신학에 대한 반발로 우리 가 칭의되는 근거가 우리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임을 분명히 해 주었으며, 칼빈은 우리 가 칭의되는 의가 끝까지 남의 의가 아니라, 언약신학 하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개념을 말 하며 연합 안에서 그리스도의 것이 실제로 우리의 것이됨을 밝혀 주었다. 아담의 칭의의 근 거는 순종 아담의 순종이 법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의를 세운 것으로 인정된다는 뜻이며, 법정적으로 의롭다고 선언할 뿐이다. 그리스도는 은헤언약의 머리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 하에서 죽으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윫법의 긍정적 요구도 다 충족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의 를 세우셨다. 율법이 행위언약을 담보하고 있다는 말은 행위언약의 긍정적 요구(순종)가 여전 히 유효하게 남아 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가 아담의 모형을 따라서 오셨다는 것이, 언약신 학의 구도에서 볼 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긍정적, 부정적 충족 모두를 그리스도가 다 대신 완성하셔야 할 역할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법의 요구(부정적)대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법의 원래의 요구(긍정적)에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세우셨다. 바로 그 의가 그리스도가 구속사역을 통해 완성하신 구속사적 의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보가 되시는 것은 바로 이 단번에-영원한 의가 되시는 데 근거한다. 그의 완성된 중보사역만이 우리에게 전가될 수 있 는 의가 되는 것이다.

4.칭의의 교리에 대해서 설명

“구속사적”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 의는 그리스도가 인성을 입고 오셔서 구속사역을 완수하심으로 받으신 의이기 때문이고 “구속사적”이란 말이 그 의는 우리를 위해, 우리와 같은 인성을 입고 오셔서 완수하신 구속사역의 결과로 획득하신 의이다. 루터란 신학자들은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라 한다. 그리스도의 순종 중 대속의 죽음이 순종의 절정을 이룸을 말한다. 순종만이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켰다는 것이 성경의 이해 즉 부활을 통해 획득한 하나님의 의 구속사적 의이다. 그리스도는 순종으로 하나님의 의를 세우셨다. 즉 그리스도의 생애는 긍정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켰고, 죽으심은 부정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켰다. 딤전3:16 그리스도의 의(구속사적 의)

시험 3번

구원론(강웅산교수님)_칭의 교리:칭의용어, 칭의 네경우,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칭 의

종교개혁의 교리라고도 불려진다. 교회의 개혁이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신학의 개혁에서 비롯되었다. 신학 중에 구원론이 개혁이었고 내용 중에서 칭의 교리의 개혁이었다.

그만큼 칭의 이론은 중요한 내용이다. 약5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뜨거운 논쟁이 계속되고 있고 여전히 복음을 위협하는 잘못된 가르침과 사상들이 주변에 나오고 있다.

구원의 내용가운데 칭의가 더 중요하다

모든 신학논의는 최종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 어떤 차이를 가져오느냐에 검증을 거쳐야 된다. 칭의론을 무너트리면 그것은 잘못된 신학이다. 칭의라는 것은 심판이 사실이기 때문에 칭의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심판이 사실이 아니면 칭의가 성립되지 않는다. 장차있을 심판이 오늘날 우리에게, 나에게 또는 주어진 심판의 의미를 우리에게 내려진 것이다. 행2:37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어떻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심판을 염두해 두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40절에 구원을 받으라고 하였다. 즉 심판을 염두해 둔 거기에 칭의 의미가 있다. 심판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라는 말이다.

롬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것이 칭의의 의미이다. 우리는 칭의된 백성이다. 칭의의 단어의 뜻을 포렌직 forensic 법정적 의미이다. 신25:1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재판장이 죄인은 죄인이라고 선언하고 의인은 의인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선언적이다. 법정적의미가 아닌 것은 무엇이냐 하면? make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회하는 것, 간주하는 것 고려하는 것이다.

잠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악인을 의인이라고 하는 것 싫어한다. 또 의인을 악인이라고 하는 것 싫어한다. 이것이 법정적 의미이다.

무엇과 대칭을 가지느냐고 하면? 정죄와 대칭이 된다. 정죄와 대칭을 이루는 본문이 여러 군데 있다. 롬5: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카타크리노 한 문장에 짝을 이루어 있다. 아담과 그리스도로 대비되는 관계이다. 대칭을 이루는 것이 정죄와 칭의의 대칭적 대비로 이루어진다.

롬8:33,34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대칭을 이루고 있다. 칭의와 정죄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

마12: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심판 때 정죄와 칭의를 받는다. 정확하게ㅡ대칭된다.

즉 칭의되다는 심판을 생각해야 되며 한 부류는 의인되고 한 부류는 심판된다. 유예는 없다.

정확하게 대비되는 관계에 있다.

칭의 디카이오스의 의미가 아니지만, 칭의의 의미를 가지는 단어가 있다.

롬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의로 간주하다, 이것도 칭의의 표현이다.

6절, 11절에도 나온다.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칭의는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죤 머리는 만들어지는 의미는 아니다고 못 받은 적이 있다.

이것이 결국 종교개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칭의를 만드는 것이 로마 카톨릭교리이기 때문이다. 칭의를 부르는 것이 종교개혁이었다.

고전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의롭다는 칭의의 개념의 단어이고 동작이다.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의롭다함을 내적인 변화처럼 설명하면 안 된다, 이것은 법정적 용어이다. 카톨릭은 라틴어성경이다. 라틴어로 칭의의 단어의 뜻은 칭의보다는 의화 즉 의로 화화다. 화화는 의미이다. 이것이 그들이 쓰고 있는 성경이기 때문에 칭의의 교리가 ‘만드는’ 의미의 교리로 가게 된 것이다. 칭의는 법정적 선언을 하는데, 그리고 칭의는 근거를 만드는 일을 안 한다,

예) 어린아이들이 놀고 있는데, 그중에 한 애가 착하게 군다, 너 참 착하다 했다. 착하다고 해서 이아이가 착해졌나? 아니다, 착하다고 한 근거는 행실을 보고 착하다고 했다. 착하다고 할 만한 근거가 있었다. 즉 칭의는 근거를 만드는 일을 안 한다. 칭의는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즉 어떤 근거를 통해서 칭의를 만들지 않는다. 근거가 있을 때, 그렇게 부를 때 칭의인데, 근거를 만들지 않는다. 악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죄이다. 이것이 바로 법정적 언어이다.

[ 칭의 4가지 경우 ]

칭의의 단어의 4가지의 경우가 있다.

1.가상의 경우로서 아담의 칭의이다. 생각할 수 있다.

순종을 끝까지 했다고 하면, 순종을 인정했다고 하면 아담을 의로 여겼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상의 칭의이다. 왜 아담을 인용하면은, 개혁주의에서 아담의 칭의를 얘기하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칭의로 인정되면서 요구된 것은 순종이었다. 아담이 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칭의된 것이 아니다. 아담의 근거가 아니라 순종에 있었다. 아담의 경우의 칭의의 근거는 행위의 근거를 가지고 의로 여겼다. 가상의 경우이다. 아담이 칭의된 것은 죄인이 칭의 된 것이 아니다. 순종을 근거로 칭의 된 개념이었다.

2. 하나님을 칭의 하는 경우이다.

욥32:2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짜다크 칭의라는 동사가 나온다.

질문 - 우리가 하나님을 의롭다 할 수 없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의롭다함으로써 하나님이 의롭게 되었습니까? 아니다,

부른다고 해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이것이 칭의이다. 법정적 언어이다.

눅7: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30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하나님을 의롭다고 부른 것이 칭의이다.

3. 그리스도의 칭의이다.

딤전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여기서 경건은 우리의 신앙 믿는바 믿는 바의 비밀이 크다는 의미이다.

그는 - 그리스도이다. 영은 성령을 말한다, 성령으로 칭의 됐다고 말한다, 이 단어가 디카이오오 단어이다.

죄인이었다가, 의인되었나요? 여기서 사건은 부활사건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칭의 되는 것이다.

◆ 이제까지 그리스도가 인성을 입고 오신 그 일을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말한다.

이제까지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말한다.

롬1:3,4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러면 예수님이 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나요?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을 부활을 통해서 아들이라고 부른 것이다. 부활이전에는 사람의 아들이었다. 인자였다. 그 인자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 확인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법정적 개념이다. 그렇게 부름으로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의롭다고 부름으로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의인이기 때문에 의인라고 부른 것이다.

근거에 의해서 의롭다고 부르는 것 뿐이다.

4. 죄인의 칭의

롬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행위가 없이도, 라는 말이다. 불의한자 곧 죄인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 당시 카톨릭과 크게 구분을 이루었던 근거구절이다.

로마카톨릭의 구원의 시작은 은혜가 주입이 되면서 시작된다고 하였다. 그것이 활용을 하면은 의롭다고 불러준다. 은혜를 열심히 활용하는 것은 사람이다, 개인이다. 은혜를 열심히 활용을 해서 의인이 되면은 하나님이 의인이라고 불러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칭의는 행의로 된 의인이다. 이것이 카톨릭의 신학이다.

그것이 아니라 종교개혁은 어떤 행위도 없었을 때, 의로운 근거가 없음에도 의롭다고 불러준 것이다. 이것이 죄인의 칭의이다. 종교개혁의 핵심사상이다. 죄인의 칭의이다.

[ 그리스도의 의가 성도의 칭의의 근거 ]

칭의는 법정적 용어이다.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내면적 변화, 속성적변화가 아니라 신분적 변화이다. 죄인의 신분이 의인의 신분으로 변화이다. 신분상의 변화이다. 종이 자유자가 된다. 이것도 신분상의 변화이다. 같은 사람이 피가 바끼는 것이 아니다.

롬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이 구절이 종교개혁의 사상이다. 종교개혁이 말하는 것은 죄인 칭의 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의롭다하셨다. 잠언에서 하나님은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것을 아주 싫어하신다.

어떻게 죄인을 의인으로 부를 수 있겠습니까? 답은 믿음으로이다. 믿음으로 죄인이 의인으로 칭해진다. 믿음하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다. 이것을 떠올려야 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가 일어나고 이것이 근거가 되어서 칭의가 된다.

믿음으로 근거가 만들어져서 그 하나님이 칭의 하실 때, 칭의가 전가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 됐다. 믿음을 말미암아 죄사함이 되었습니다. 신학은 이해하고 설명을 해야 한다.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의인이 되는지 신학적으로 설명이 되어야 한다.

죄 사함 성경에 많이 얘기한다. 성경의 주된 내용이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우리의 죄에 대해서 강조이다. 죄에 문제가 해결도 받지 않고 의인이 되려고 한다. 죄의 문제를 설교하는 비율과 은사 강조 비율과 복의 비율과 훨씬 많다. 복음은 죄 문제를 해결해 주는데 부터 출발한다. 그래서 성경은 죄 사함의 문제이다.

구약의 제사도 마찬가지이다. 죄 사함의 문제가 칭의 사건들이다. 그래서 성경의 중심사상이 칭의 개념이다. 이것을 알려면 언약사상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법을 주셨다. 어떤 방법을 지키게 하셨나? 순종의 방법이다. 법이라고 한 것은 법을 주신 하나님의 도덕을 담보로 하고 있다. 도덕을 드러내는 일을 한다. 그 법을 지켰다라고 하는 것을 담보로 한다. 그 순종을 인정했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담에게 의로 여기신다. 그것을 의라고 한다. 근데 법은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긍정적과 부정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요구를 한다.

1, 법조항 긍정적 요구.

2, 부정적 조항은 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 벌과 형벌이다.

아담에서 긍정적 요구사항은 먹지 말라 이것이 법의 내용이다. 법의 요구하는 사항이었다.

부정적 요구사항은 죽는다. 그런데 아담이 긍정적 요구사항을 어기게 된다. 어기기 전 까지는 부정적 요구는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표면에 보이는 것은 긍정적 요구만 보인다. 형벌이 죽는 것이다. 아담의 순종은 실패로 끝나버렸다. 그래서 다시 아담을 보내셨다. 두 번째 아담을 보내셨다. 그리스도시이다.

두 번째로 그리고 마지막을 보내셨다. 롬5장, 고전15장

마지막 아담인 것은 그리스도 다음에도 또 다른 중보자가 없다는 것이다.

아담을 그리스도의 표상이라고 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아담으로 온다 같은 의미로 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아담에 빗되어서 설명을 한다. 그리스도가 아담의 형식으로 온다, 이것이 언약사상이다.

아담이 순종했다면 우리에게 영생이 주어졌다. 이것이 행위언약이라고 부른다.

어쨌든 실패해서 그리스도가 오셨다.

와서 아담 때문에 롬5장에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이 왔다. 그와 대칭으로 한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의와 생명이 왔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무엇을 하셨는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주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만을 갚아 주셨다면, 마이나스 통장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오심은 죽을 때가지 해결하여주셨다.

하늘나라는 왜 용서함을 받은 사람이 가는 것이 아니라. 의인이 간다고 하는가?

주님의 하신 일은 죄만 해결해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도 해결해주신 것이다.

죽으신 것만 해결해주신 것은 알미니안 신학이 된다.

죄는 해결해 주었지만, 의의 문제는 개인이 행위로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담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다. 많은 사람이 십자가만 생각한다. 주님은 이 십자가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통해 법을 준수하셨다. 이것이 의를 이루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범죄 결과로 형벌을 받음으로 의가 세워집니까? 아니다. 법을 지켜야 긍정적 요구사항을 지켜야 하나님의 의가 지켜진다. 형벌은 탕감이 됐지만, 의는 이루지 안했다 그리스도는 전 생애를 통해서 법을 지키셨다. 그러므로 의를 획득하신 것이다. 이것을 전통적으로 능동적 순종이라 부르고 이것을 수동적 순종이라고 부른다.

십자가죽음은 수동적, 피동적순종이라고 부른다.

죠나단 에드워즈나 찰스 핫지는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라고 하였다. 17세기부터 써왔지만, 이것은 루터란에서 사용한 말이다. 포물라콩코드는 16세기 일치신조 루터란 신조에 나오는 말이다. 초창기에는 종교개혁을 같이하기 때문에, 개념들이 서로 공유된 적이 많았다. 루터란에서 개혁주의로 유입되어 습관적으로 써왔지만 이것은 사변적인 신학의 잔재이다.

구분하지 말고 이 자체가 순종이다. 즉, 빌2:8 그리스도가 죽기 까지 순종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전 생애와 죽음을 포함해서 순종이 클라이막스가 죽으심이다. 이제 인성을 입고 오셔서 순종을 이루었다. 죽은 것만 순종이 아니라 법을 다 지키셨다. 긍정수동의 개념을 다 지키셨다. 아담의 순종으로 의를 이루는 것을 누가 이루느냐? 그리스도가 순종의 방법으로 이루신다. 이 순종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의를 이루시는 것이다. 이 사건이 부활을 통해서 성취된다.

딤전3:16은 부활사건이 그리스도의 의가 확인되는 사건이다.

그리스도가 순종으로 말미암아 그 의가 전가되는데 언제? 부활 때이다. 부활을 통해서 확인된 의이다. 그 의가 근거가 되어서 칭의가 된다.

이때 이 의를 루터는 alien은 바깥에 나와 구분되는 밖의 것, ‘내 의가 아니라 타자의 의이다.’고 설명했다. 이유는 로마카톨릭은 의를 잘 활용하면은 의가 됩니다. 거기에 루터가 롬4:5절을 근거해서 아니다 라고 했기 때문에, 루터는 우리 안에 있는 의로 말하기 때문에 “타자의 의이다”는 것을 강조한 한 것이다. 이 말 때문에, 루터는 허구다 라는 비난을 받는다. 법적허구다 라는 말했다. 픽션이다. 추리소설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루터식의 설명의 한계이다.

칼빈은 어떻게 말하는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것이 우리의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가 내 것이 되어서 칭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허구가 아니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언약개념이다. 믿음으로 되는 것이 은혜언약이다. 우리의 칭의는 반드시 근거 있는 칭의로 되어진다. 삶의 사고의 개혁이 있어야 한다. 다하는 것이 경건인줄 안다. 못하는 것이 정상이다. 다하는 것이 경건인줄 안다. 일이 5,6가지가 터지는데 할 일은 한 가지이다.

그래서 나는 안 되는데 하나님의 은혜로밖에 할 수가 없다고 확인되는 것이 개혁주의이다.

이런 것이 다 전가의 개념이다.

 

 

 

제 4문. 성화의 교리에 대하여

성화의 의미는 거룩을 말하고, 칭의이 의미는 의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의와 거룩이 다르다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구약성경에서 거룩을 의미하는 단어인 “카도쉬”는 따로 때어 놓다, 즉 구별하다, 분리하다의 의미이다.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것으로. 구분된 그 자체가 거룩이다. 거룩의 초기적인 용례는 주로 제사와 관련해서 의미가 사용된다. 신약성경에서 거룩을 나타내는 “하기오스”의 의미는 죄의 삶에서부터 벗어나서(분리되어서) 하나님을 위한 분리 구분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의 특징을 단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성도의 칭의는 그리스도의 칭의 사건(구속사적)에서 온다. 그리스도의 의는 구속사적으로 획득하신 의다.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아버지께 받으신 것. 이것이 칭의의 근거가 된다. 마찬가지로 성화 또한 그리스도의 성화되심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는 죄에 대하여, 더 이상 죄로 인해서 죽으실 일이 없다. 죄로부터 그리스도가 분리되셨다. 이것이 우리의 성화의 근거, 모형, 패턴이 된다. 성도의 성화가 가능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적 의미에서 성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죄에 대하여 죽으시고 하나님께 대하여 사신 의미 속에 성도의 성화가 있다. 성화되신 그리스도와 연합을 하게 됨으로써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부활 자체가 거룩하게 구별되신 그리스도, 성화되신 그리스도와 연합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성화의 은총을 누리는 것이다. 성화는 그리스도의 연합으로 거룩에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성령이 내주하심에 가장 특징적인 것이 바로 거룩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는 것 자체가 이미 거룩이다.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내주하시는 것 자체가 거룩이다. 신약의 메시지는 점진적인 성화를 말하지만, 그에 앞서서 우선적인 강조, 전재를 가지고 있다.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졌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단정적 성화, 결정적 성화, 확정적 성화이다.

점진적인 성화에 대해 말하자면, 점진적 성화라는 말 자체가 오해를, 그릇된 기대감을 주는 경향이 있다. 마치 기계적으로 내가 점차 성화되어져 간다는 어떤 잘못된 기대감을 가져오게 할 수 있다. 성화의 삶에 대하여 오히려 안일해질 수 있는 작용을 한다. 성화는 언젠가 될 것이라는 희망은 좋지만 그 자체가 안일을 가져올 수 있다. 성화는 우리가 계속해서 이루어가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지속적 성화로 부르는 것이 좋겠다. 그렇다면 왜 지속적인 성화를 유지하라고 하는가? 우리 안에 죄성이라고 하는 것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칭의는 죄에 대하여 신분적인 측면이 해결된 법정적 칭의이지만, 성화는 우리 속에 있는 죄성을 다루고 있다. 우리를 실제로 지배, 장악, 실족케 하는 죄성은 존재한다. 중생으로 말미암아 죄성의 지배가 노예에서 자유인이 되어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중생한 다음에 성화의 삶을 살며 남은 죄성에 대하여 나를 어떻게 지속적으로 지켜나가느냐의 싸움이다. 이는 보다 더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의미이다.

그렇다면 지속적 성화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첫째, 진리의 말씀인 성경으로 이룰 수 있다. 둘째, 믿음으로 이룰 수 있다. 지금 나의 삶의 방식을 믿음으로 사는 것으로 말한다. 믿음은 어떠한 확신이나 고백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을 믿는 것이다. 칭의 된 다음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를 믿어야 한다. 믿음은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 안으로 들어가고, 계속 예수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칭의도, 성화도 믿음으로 된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이다. 믿음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믿음은 내가 만들 수 없고,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가져다 주시는 것이다. 또한 내가 전인격적인 믿음의 동작을 하는 것이다. 내가 믿어 구원을 받는 것이지 성령이 대신 믿어 주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성화는 늘 믿음으로 사는 것. 내가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성령이 가능하게 해서 내가 거룩하게 사는 것이다. 나의 일과 성령의 일이 분리되어져서는 안 된다. 성화의 삶 자체가 구원의 삶, 구원 받은 자의 삶인 것이다. 성화의 삶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성화는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의도가 바로 선한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거룩하게 사는 것은 부담스러운 요구가 아니라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이고, 하나님이 들어난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을 보여주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을 볼 수가 없다. 또한, 성화는 우선적으로 개인적 성화이겠지만, 교회적 차원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개인의 거룩이 교회의 거룩으로 이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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