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조직신학 정리

예림의집 2014. 4. 3. 17:37

제1장 신학?

1. 신학의 3 측면 : 하나님을 아는 지식, 나를 아는 지식, 계시(하. 나. 계)

Peter Abelard - 신학용어 최초 사용

F. Turretin - 존재자인 하나님, 그의 말씀인 앎(지식)을 포함(one of being, which is

God; the other of knowing, which is His Word"-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θεολογια (theologia) = θεός(being, esse) + λόγος(knowing, cognitio)

어원상: “the speaking of God, as well as the speaking about God" (Kuyper)

동방교부 : 그리스도의 신성(divinitas)을 다루는 기독교 학문의 한 부분.

갑파도기아 교부 : 그리스도의 신성을 다루는 theologia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다루는

oikonomia로 구분

라틴신학자 :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와 관련된 계시에 관한 지식

대부분의 신학자: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에 관한 교리의 총합화, 체계화하는 작업

C. Hodge : “만약 자연과학이 자연적 사실과 법칙에 관한 것이라면, 신학은 성경적 사

실들과 원리에 관한 것이다” 함.

 

 

지식 : cognitio, notitia(내재적,인식적지식), scientia(과학적지식), sensus(감각적 지식)

->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4가지로 구분할 수 없음.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의 자기 계시(revelatio Dei ipsius)에 의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마 11:27; 고전 2:10)

-하나님의 지식 -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지식-계시임

(de ~부터, ~에 관한 : 대상과 기원을 동시에 표현)

 

모든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임. 그러므로 대상과 지식은 수렴하고 일치함.

이유: 계시의 정점(culmen)이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 Chrisiti), 육신에 나타나신

하나님(Deus manifestatus in carne), 우리속에 계신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이

그의 영이시기 때문(요14:16-17, 26; 롬 8:9, 14~16, 갈 2:20; 4:6)

 

* 신학의 대상하나님의 인격사역이며, 하나님을 궁구함으로써 이르고자 하는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마 11:27; 고전 2:10)

신학함은 대상을 대상으로부터 흘러나온 지식으로 연구하는 것임.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

내시는 한도에서 신학함(doing theology).

 

신학함의 예

부활 후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던지 세 번째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에 대하여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베드로가 근심 했다’는 것은 그가 이성적 판단에서 신앙적 판단으로 돌이켰다는 것을 보여 준다. 신앙적 논리는 하나님께는 개방되어 있으나 자기 자신에게는 폐쇄되어 있다. 그러므로 신앙에는 순종이 있으며, 이성에는 방종이 따른다. 신앙의 세계는 지식의 주체가 지식의 객체에 무릎을 꿇고 의지하는 것이다. 나의 지식 자체를 지식의 대상인 하나님께서만이 아신다는 고백이 신앙의 고백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띠 띠고 살게 된다.(요 21:17~19). 하나님의 섭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수납된다.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 하나이다”(욥 42:3~6). 귀로 들음은 이성적인 것이며, 눈으로 봄은 신앙적인 것이다. 이성은 지각과 판단을 통하여 그를 아는 것이나, 신앙은 그를 봄으로써 그를 알고 이로써 그에 관한 지각에 이르는 것이다.

 

타락 후에도 그의 형상(imago Dei)을 남겨 놓으시고 그들 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

(sensus divinitatis)과 종교의 씨앗(semen religionis)과 양심(conscientia)의 불씨들(scintillae)을 두셨다.

 

하나님의 자기계시 : 성령의 영감(inspiratio)된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조명(illuminatio)으로 감화(persuasio)된 심령으로 믿음으로써 受納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notitia vera Dei)은 모두 성령에 의해서 감화된 지식(notitia persuasa Spiritu Sanctu)이며 은밀한 성령의 내적 조명으로 감화된 심령가운데 믿음으로만 받는다. 신학은 믿음으로 이해에 이르는 것이지 이해로 믿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faith seeking understanding, fides quaerens intellectum).

*성령의 영감(inspiratio)-유기적 영감...기록

성령의 조명(illuminatio)---받는다

감화(persuasio)---들인다(수납)

==> 성령의 역사로 됨. => 순종 - 겸손의 신학 => 예배하게 됨

*구원(성령)을 받았는데 지식이 없어라는 말은 타당하지 않음. 이성적인 표현임

 

오직 신학은 믿음으로 하며 믿음으로 중생된 이성(ratio conversa)에 의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종합화하고 체계화 하는 것임. 우리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ligam)

신학의 대상하나님이자 하나님의 계시이며, 신학의 방법은 믿음으로 신학함이며, 신학의 목표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온전함에 이름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신학의 대상이 하나님이자 하나님의 계시임은 신학의 중심로고스이며 그 절정이 로고스의 성육신-Deus manifestatus in carne-임을 말함.

신학은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하신 지식에 국한됨. 하나님은 마치 유모가 아이에게 옹알이를 하듯이 인류에게 자신을 맞추심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Calvin, inst. 1.13.1).

 

하나님의 맞추심(accommodatio Dei) : 아버지, 의사, 교사, 이방의 적(시 35:1) 등으로 나타남. 최고의 맞추심(accommodation par excellence)은 예수 그리스도의 비하와 승귀(부활, 승천, 재림) 임. -> 하나님은 타락한 그 백성의 자리에 까지 내려 오셔서 그들을 은혜로 높이심. 그리고 그 높이신 자리까지 자신을 낮추셔서 맞추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도 중보자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의의 전가를 통하여서 자신을 낮추시고 맞추셔서 받아 주신다. 이것이 은혜중의 은혜이다. 맞추시는 이유 :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시의 기록인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다.(be)

그러므로 실존적인 의미 있는 말씀만이 계시가 된다(becoming)는 주장이나(바르트), 더 나아가서 말씀을 받는 자가 신화(deificatio)됨으로써 하나님의 계시가 계시답게 된다(becoming)고 보는 견해(라이너)는 극복된다.

 

 

Herman Bavinck

Principium이라는 이성에 비롯된 관념주의, 경험주의에서 비롯된 경험주의로부터 비롯된 물질주의를 실재론의 입장에서 비판하면서 실재의 원인과 기반에 대한 지식과 그 자체의 근본원리를 의미하는 철학적 개념을 신학에 적용해서 학문적 기초를 세움.

* 성경은 단지 근거자료가 아니라 기초 또는 원리이다. 전자는 성경을 교회의 해석을 자료로 보는 카톨릭

신자들의 관점. 후자는 정통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성경의 완전축자 영감과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은 믿음의

수납을 Sola Scriptura원리로서 전개하는 관점.

-카이퍼, 바빙크, 워필드 등은 principia theologiae로 체계화 함.

* 바빙크는 실재론의 입장을 지지함에 있어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지주의를 거론하고 종교의 기반을 다룸에

있어서 경건과 예배를 강조하며 이를 슐라이마허의 신앙계념과 연결하는 태도를 취함.

 

Principium(원리)

계시=하나님의 자기 계시-스스로 있으면서 우리에게 알려 주심(있는 것이 드러남)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재하는 원리 pricipium

1. 존재의 원리(pricipium essendi) =하나님의 자기 계시(스스로 존재함)

2. 인식의 원리(pricipium cognoscendi)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인식의 원리

-externom=성경(말씀) -외적 인식의 원리=모형 계시

-신학은 모형계시로 함(원형계시를 인정, 알지는 못함)

-internum=성령(믿음)-믿음으로 수납 말씀 & 성령

-> 성경가운데 기록된 것을 믿음으로 수납하므로 지식이 됨

=> 이 모든 것을 믿음이 개혁신앙의 믿음임

cf) 순복음 : 성경은 말씀의 준비, 말씀되어져야 진리가 됨. 성경은 진리가 아니고 말씀되어져야 진리임

 

3위 하나님의 자기 지식 = 원형계시(revelatio archetypa). 맞추기 전의 지식

 

Tres principia: 자기계시는 그에 관한 우리의 지식의 근거임.

신학의 원리는 자기계시 또는 자기 창조물들 간의 자기교통

(Self-communication)이고 신학의 목적은 피조물이 하나님을 알고, 아는 것,

하나님께 영화롭게 하는 것

 

데카르트 cogito ergo sum 내 안에 신의 관념이 있으므로 나를 가능케 하는 자도 생각하는 존재여야 함. 내 안의 신의 관념이 있으므로 나의 존재를 가능케하고 지탱해 주는 것도 신의 관념 안에 있는 모든 완전성을 가지고 있어야 함. 그런데 신적인 완전성을 소유한 것은 신 밖에 없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함.

이는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오직 이성을 통해서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나의 존재와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려고 했기 때문에 ‘죄인으로서의 나’와 ‘구속주로서의 하나님’의 인식에는 이를 수 없다.

헤겔 생각이 존재. 절대이성으로 나아감.(역사 철학). 하나님은 되어가는 과정에 있음.(과정철학). 되어가는 것(변증법)

지식, 존재, 생각, 그들자체의 일들은 모두 생각으로부터 나옴. 즉, 생각과 존재는 하나임.

로크 기독교와 같은 계시종교는 그것의 증거와 개연성이 그렇게 높지 않기 때문에 서로 배타적인 믿음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봄. 중요한 것은 성경의 가르침 대로 사랑과 용서, 관용과 평화의 덕목을 실천하는 것으로 봄.

칸트 하나님은 시간, 공간을 초월하여 있음(이성의 영역이 아님). 하나님은 해야 할 것을 인식하는 존재(sollen). 자기 가운데 가둠. 예지계에 속한 것은 알 수 없기 때문에 단지 믿는 것에 만족한다.

슐라이마허 교의학은 신학자의 종교적 주관성의 표현. 교리적 진술의 시금성은 오직 믿음의 의식이며 이것의 하표현이 교리임. 믿음의 성향과 신학적인 지식을 구분하지 않고 비중생자의 신학 이라 함.

*비 중생적 신학: 내 속에 나온 것을 갖고 하나님께 간다. 노력하면 하나님께 갈 수 있다는 신학

교의학을 성경에서 나온 것으로 보지 않고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봄. 모든 사람은 의존 감정을 갖고 있다.

우리의 영으로부터 전체(the whole)인 하나님이 인식되고 이로써 우주를 묘사한다. (범신론적임).

<비평>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만 있고 하나님의 본질은 없다. 우리는 은혜가운데 산다.

기적은 내가 하나님을 느끼는 것.

계시는 진행되고 있다.

<비평> 계시는 완성됨.

리츨 슐라이마허의 계승자, 비평함

모든 기독교 교리의 부분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된 백성들의 공동체의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말함. 죄사함을 어떻게 알 수 있나? 공동체

<비평> 공동체의 합의는 주관적 합의 임. 진리는 아님. 진리는 내려오는 것임.

신학은 ‘신앙의 학문’이라함. -> 신앙으로부터 세워가는 바벨의 학문, 아래로부터의 학문<비평> 신학은 계시의 학문임. 세워가는 학문이 아님.

바르트 ‘신앙의 행위를 전제로’ 하나님과 그의 말씀의 실제가 믿음에 선행하며 처음부터 교리를 위해서 확정되었다는 가정을 함. 말씀은 믿음에 선행함. 말씀은 믿음의 행위를 전제함. “교의학은 신학적 훈련이다. 그러나 신학은 교회의 한 기능이다. 교회는 하나님에 관해서 이야기함으로써 하나님을 고백한다. 주관적 신앙의 교리를 말함

<비판> 신앙은 주어지는 영, 성령에 의해 믿어지는 것.

선물-> 주시는 자에게서 받을 수 있음

 

신학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의존한다. 이성으로 지각으로 , 감정으로 신학의 이론에 이르지 못함.

 

 

칼빈 진실하고 건전한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으로 이루어짐.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고 ’있기 때문에(행17:28) 우리 사상을 버리고 즉시 하나님을 묵상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자신을 올바르게 관조할 수 없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에 선행하나 아무도 자신의 모습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진정하게 추구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는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선행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든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하게끔 이끄는 것은 하나님의 손(섭리)이다. 참고. 보이는 손 -사람

1. 거룩한 절망

“하나님의 ‘무한하신 선하심(infinitas bonorum)'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우리자신의 가난함(vero ex nostra tenuitate)'이다. ‘자신의 무지, 무익, 가난, 연약, 타락과 부패를 느끼지 않고는 아무도 참다운 지혜의 빛, 구원의 능력, 모든 일에 부요한 자비, 순결한 의가 주님께만 속하다는 것을 알 수가 없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을 진지하게 갈망하지 않는다.” Inst. 1.1.1(CO 2.31)

2. 그의 존재를 앎

3. 그에게 영광을 돌릴 것을 아는 것

4. 우리에게 어떤 것이 유익이 될 것을 아는 것(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기쁘게 하심)

*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마음을 품는 믿음에 참으로 순수하고 진정한 종교가

있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뜻을 다하여 그를 경배함이며 율법에 기록된 바대로

합당한 예배를 드림이다” Inst. 1.2.2(CO 2.35)

결론: 칼빈에 있어서의 참 신학(theologia vera)은 위로부터의 신학이며, (자기)계시의 신학이며 믿음의 신학이며, 로고스의 신학임. 하나님께 붙잡힌 바 되어서 날마다 거듭나는 심령을 가진 사람만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과정 가운데서 믿음으로 신학하는 것임. 그러므로 개혁 신학은 개혁되어가는 신학이다.(theologia reformata est semper reformanda).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 분”이시다(딤전 6:16).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 우리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 죄의 신발, 내 의로 가득한 교만의 신발, 내 이성대로 살기에 바쁜 아집의 신발을 벗어버리고 두 손을 들고, 겸손히 나아가야 한다.(출 3:5)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길은 그를 경외하는 길 밖에 없다. 경외함은 여호와 하나님을 심중에 깊이 인정하고 그를 예배하는 것이다(잠 3:6).

우리의 경건은 하나님과의 존재의 통보(칼 바르트)나, 신화(신과 같이 되는 것, 칼 라느)를 통한 자질의 변화에 주안점을 주기 보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예수그리스도의 의의 전가(imputatio)를 강조함. 그러므로 영성(spiritualitas)이라는 개념보다 경건이라는 말(pietas)가 더 합당함. 경건은 계시를 믿음으로 받음과 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그의 뜻과 사역을 알자 구원 받으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와 교제(communio)하며 그의 의를 전거 받아서 교통(communicatio)하면서 날마다 거룩함에 이르는 견인의 삶을 살고 구별되어서 드러지는 거룩함으로 위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2. 신학:

 

영성, 경건 어떻게 키울 것인가? 받아 들이면 됨. 경건 그의 의를 전가 받는 것.

은사-> 전가 해서 받음

거룩함-> 하나님께 기대는 자질, 기대고 있으면 성화되고 있다. 예) 다윗과 가룟유다

의의 전가

-교제-칭의->칭의의 전가

-교통-성화->성화의 전가

=> 예수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가능함.

 

기독교-> 기댐 -> 노예신학?

=> 거룩함!!-> Exellent Action!!!

 

칼빈

율법의 2중적 사역

-정죄적 율법 -죄를 깨닫게 하려(루터의 이해)

-규범적 율법 -경건하고(1~4), 올바르게 사는 것(5~10) (칼빈)* 율법의 본질

 

율법의 3중적 용법

1. 정치적 용법 -형벌 때문에 죄를 억제(율법) 루터

2. 신학적 용법 - 죄를 깨달아 그리스도를 찾는 것-칭의

*루터는 신학적 용법을 중요하게 생각함

3. 규범적 용법(성도를 위한 용법)-성도들에게 율법이 작용하는데 규범적 용법으로 작용

 

개혁주의

죄의 삶에는 언제나 의의 전가가 있다.(죄사함+의의 전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통하심으로 지킬 수 있다.

 

칼빈 : 율법은 하나님의 계시로서 삶의 규범(regula vivendi)으로 파악하고, 본래 이 율법은 선했으나 인간의 우연한(accidentale) 타락으로 신학적 기능(usus theologicus)을 하게 된 것.

 

1. 정치적 용법 -형벌 때문에 죄를 억제(율법) cf)루터

2. 신학적 용법 - 죄를 깨달아 그리스도를 찾는 것-칭의

3. 규범적 용법(성화, 성도를 위한 용법) * 칼빈 중요시함.

-성도들에게 율법이 작용하는데 규범적 용법으로 작용

예수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로 말미암아 율법은 삶의 길을 가르쳐 주고 선으로

나아가게 한다(성화)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자유임.

 

칼빈

율법: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을 가르쳐 줌.

1. quid possint homine (사람)-할 수 있는 것

2. quid debent 해야하는 것(명령, 약속) 예수가 함께함.

가르쳐 주시는 분이 이루심.

하나님은 내가 깨닫게 하신대로 사용하신다.

 

주님은 네가 진정 원하느냐고 물어보신다.

“주님이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합니다.”라는 것이 기도다. 원하는 것을 주님이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 extranos 초월적 하나님

● in nobis 내재적 하나님

 

개혁 -하나님은 초월적이고 내재적 하나님임. 하나님을 내안에 가두는 것도 신비.

 

기독교 신학은 계시된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써 성경을 믿음으로 수납하는 지식을 기초로 하며 이를 지향함.

 

 

 

 

 

 

 

 

 

 

 

 

 

 

 

 

 

 

 

 

P24

 

3. 방법론 :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지식의 체계화

 

1) 사색적 방법

사고법칙이나 내재적 사유원리로서 존재와 당위에 대한 진리를 추론하고 결정하는 선험적

(a priori)방법론임. 3가지로 나눔

-이신론적 합리주의(deistical rationalism): 초자연계시(특별계시)를 철학적 혹은 도덕적

이유로 거부한다.하나님은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그들의 속성과 특질을 그의 본성에 맞게

정하셨다. 만약 하나님께서 피조물의 활동에 여전히 간섭하신다면 이는 피조물들이 불완

전하다는 것을 의미하녀, 이로써 하나님이 불안전하다는 것을 의미하게 됨.

-교리적 합리주의(카톨릭)

초자연적인 신적 계시를 믿고 이것이 성경에 포함되어 있다고 보나 모든 성경적인 교리들

을 철학적인 구조로 축소시키는 방법론이다.

-독단주의(Dogmatism) 또는 초월론(transcendentalism)

이성과 역사에 기반 하지 않는 어떤 계시도 인정하지 않는 방법론임. 모든 진리는 이성적

사고과정의 산물임. 혹시 성경이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면 그 것은 철학적 가르침과 우연

히 일치함에 있어서이다. 삼위일체, 성육신, 구속, 영혼불멸, 미래의 심판등에 관한 관념들

을 성경과는 독립적으로 추구하고자 함.

 

2) 신비적 방법

감정에 의존하는 신학방법으로서 둘로 나눔.

-초자연주의적 방법론: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영혼과 교통하며 성경의 가르침과는 무관하게

감정(feeling)과 직관(intuition)을 통하여 진리를 계시한다고 봄. 그러므로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성경이 아니라 내적인 빛임.

-자연주의적 방법론 : 하나님이 아니라 자연적인 인간의 의식이 종교적인 지식의 원천이라

봄.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개념을 인정하지 않음.

신비주의자들은 성경 무오와 권위, 계시성, 영감성을 믿지 않음. 교리체계를 인정하지 않음.

 

슈라이마허

신학자의 의무는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자신의 기독교 의식을 해석하는 것이다. 사람 안에 계신 하나님으로 보는 신플라톤주의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신학의 경향을 가짐. 종교를 절대의존 감정으로 보고 성경이 신앙의 준칙이라는 것을 부인하고 성경은 다만 저자들의 종교의식의 기록으로서 독자들을 경성시킨다고 말함. 예수에 대한 기사도 예수의 신의식의 기록이라 봄.

스피노자

신을 절대적 무한한존재, 즉 모든 것이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속성으로 이루어진 실체(substantia)로 이해함. 그는 존재하는 것은 모두 신안에 있으며 신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고 함. 실체로서의 신의 본성으로부터 만물이 유출된다고 봄

신은 나를 떠나서 존재하거나 알려 지지 않는다고 봄. 그의 신이해는 철학적이며 동시에 윤리적임.

신플라톤 주의

아무 속성도 없고, 알려지지도 않고, 기술되지도 않는 Simple Being(후대 철학자들 absolute being)을 신으로 봄. 이 존재로부터 만물이 유출된다.

신비주의자들

-신지론자들(新知論者, theosophists): 이성을 통한 하나님과의 직접적 교통을 추구하는 자

-신비주의자: 감정을 교통의 통로로 보는 자 (좁은 의미)

 

3) 귀납적 방법(the inductive method)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계시하는 모든 사실이 성경에 있다. 신학함은 성경의 사실들로부터 진리이 체계를 세우는 것임. 성경속의 모든 진리는 서로 모순되지 아니하며 우리의 본성의 구조와 경험을 통하여 인식되고 확증됨. 자명한(self-evdent) 진리는 성경가운데서 그렇게 증거 된다.

성령의 내적인 가르침은 우리에게 성경의 진리뿐만 아니라 그 영향까지도 조명한다. 믿음으로 신학함은 계시에 의존함.

=>성령의 가르침은 성경의 진리뿐만 아니라 그 방법까지 가르쳐 줌.

 

 

2. 신학의 대상

신학의 대상이 되는 지식 - 직접적으로 탐구해서 발견된 지식(sapientia inventa)이 아니라 성령의 내적조명으로 말미암아 감화로 믿음으로 수납하게 되는 매개된 지식(acquisitio mediata)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계시된 지식(sapientia revelata)이며 하나님의 지식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우리에게 맞추셔서(accommodare)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자기계시(revelatio Dei ipsius)를 통해서만 알려짐.

 

1) 하나님의 존재

칼빈 : Deus Infinitus, Deus Spiritus, Deus Trinitas

(1) Deus Creator(창조주 하나님)

존재의 유비는 합당하지 않음. 하나님은 창조하셨고, 창조를 계시하셨고, 창조주로 자신의 신분을 성경과 자연에서 확정(identification)하셨다.

* 신앙의 유비 : 계시를 받고 그대로 행함.

* 존재의 유비 : 나의 소질에 따라 하나님을 앎. 나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유추함.

(2) Deus Redempt or in Christo(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구속주로 계시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deitas)이 피조물을 취하시고 육신으로 나타나셔서 인성(humanitas)과 신성(divinitas)을 지닌 중보자(mediator)가 되심으로서 창조주가 구속주이시며, 또한 구속주가 창조주이심이 계시임. 삼위하나님의 구원의 협약(pactum salutis)에 의해서 예수그리스도가 구주로서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선택된 백성의 구속이 작정됨.

* 구원의 협약

구원자-예수 그리스도

구원방식(비하, 승귀)-대속-> 성육신->죽으심-> 부활

예정-선택, 유기

중보자로서의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은 구약시대에서도 계시되는데 그의 현재(顯在, praesentia personae, 창18:1~33; 28:12; 출3:2; 13:21~22;23:20;32:34, 구름기둥과 불기둥-여호와의 사자의 임재; 수5:13~15; 호12:3~5)와 환상(겔 1:26~28; 단 7:13)에서 현저함.

* 율법도 예수님에 대해 바라보며 진행됨. JX의 인격이 그림자로 현재(계시)하시고, 신약은 몸(실체)로 현재하심. 인격이 계시다. 구약-그림자, 신약-실체

(3) Trinitas Dei in Christo(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로 계시하신 하나님)

그리스도가 육신가운데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분명히 밝혀진 하나님의 존재(subsistentia Dei)임. 그리스도안에서 삼위하나님의 계시는 정점(culmen)에 이름.

하나님의 사정은 하나님의 성령만이 아심. 하나님의 자기지식(revelatio archetypa)은 우리에게 계시되지 않음(원형계시).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에 관한 지식을 말씀으로 우리에게 계시하는데, 오직 성령의 은밀한 역사로만 이를 알 수 있다(고전 2:10~16). 이러한 지식은 처음에는 말씀으로, 육신가운데, 그리고 이제는 보혜사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된다.

(4) 무한한 영(spiritus infinitus) 곧 절대적 인격(persona absoluta)이신 하나님.

스스로 계신 절대적 인격이시며, 계시주, 창조주, 섭리주, 구속주이다. 하나님은 자증력(self-authentication)이 있는 말씀으로 말씀하시고, 천지를 지으시고 운행하신다. 오직 스스로 기뻐하심으로 자신의 필연성(necessitas)에 따라서-자발적(voluntarie)-계시하시고 歷史

속에서 役事하신다. 그리고 지으신 것을 지키시고, 선택하신 백성을 구속하신다. 하나님은 절대 생명(vita absoluta)으로서 생명의 창조주(Creator)시며 이를 주시는 분(Largitor, 욥 10:12)이시며 이를 다시회복시키시는 구주(Redemptor)가 되심.

 

2) opera Dei(하나님의 사역)

(1) creatio Dei(하나님의 창조)

창조는 영원하신 창조의 작정(decretum)에 따라 그 뜻(voluntas)대로 경륜(consilium)을 이루심임(주권적 사역). 만물은 단번에 성부로부터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안에서 창조됨. 시간도 창조되어 피조물의 존재방식이 되었으며 영의 세계(천사들)도 함께 창조됨. 하나님은 시간내에 (in tempore)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cum tempore) 만물을 창조함.

창조의 최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임. 우주는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임(theatrum gloriae Dei).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imago Dei)으로 인류를 창조하시고 백성으로 삼으사 하나님 나라의 왕국(regnum Dei)을 조성하고자 함. 창조는 이 백성의 거소(domicilium poluli)가 됨.

(2) providentia Dei(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를 보존하심(conservatio, sustentatio)과 다스리심(gubernatio)을 의미함. 하나님은 섭리로 창조를 완성함. 곧 창조의 목적인 하나님 나라를 이루심(계 11:15; 미 4:1~4). 피조물의 근본 특성은 창조주에의 의존성(dependentia)임.

그의 임재는 초월(extranos)과 내재(innobis)를 아우른다. 하나님은 “만유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가운데 계신 분”이다(엡 4:6)

*초월(extranos)과 내재(innobis) -예수의 중보-> 의의 전가

하나님은 초월하시면서 내재적인 하나님-신비 참고.스피노자-초월하심만 말함.

하나님은 오직 스스로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 모든 것을 행하신다. 하나님은 뜻하신 즉 이루시고, 이룬신 즉 모든 것이 의롭다.

“하나님이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우주를 다스리는 법을 스스로 취하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지는우리에게 유일한 의의 규범이 되며 진실로 모든 만물의 정당한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법을 최상의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법에 맞추도록 하자. 하나님에게는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의지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만물이 정한대로 되고 움직이는 원리이며, 이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은 비록 그 원인원 알 수 없으나 모두가 옳은 것이다(Inst.1.17.2)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손(manus invisibilis)으로 섭리하신다.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보존하시고 운행하신다.

(3)salus Dei(하나님의 구원)=restitutio creationis(창조의 회복)

생령으로 지으신 인류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셔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만세전에 작정하시고 때가 차매 그 경륜을 이루심. 창조주의 사랑이 구속주의 사랑으로 계시되었으며 성취되었다. 그리고 구속중보자가 창조 중보자이심이 확증됨.

육신가운데 계신 하나님이(Deus<manifestatus> in carne, Deus incarnatus)구원 사역을 이루심으로써 성도와의 연합의 길을 열어 놓으심.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는 계속적으로 중보하심. 구원의 적용(adpropatio)이 구원자의 손에 있음. 구원의 전과정이 전적 은혜의 선물(donum gratuitum)(엡 2:8~9)임. 성육신을 통하여서 무한하신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에 놓여셨을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부정(否定)인 죄의 형벌을 받는 생소한 사역(opus alienum)을 통하여서 만유의 주재로서 본래적 사역(opus proprium)을 아루심. 이러한 구원의 길(via salutis)이 창조를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이었다. 구원사(historia salvifica)와 구원서정(ordo salutis)이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로 말미암아 역동적으로 연관됨으로써 우리의 구원은 과거-현재-미래성을 가지게 됨.

(4) consummatio creationis(하나님의 창조의 완성)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자셨다는(erat) 것 뿐 아니라 창조자라는(est)것을 가르침.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자시라.”(롬 4:17b).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다.(계21:1)

하이델베르그 신앙교육서 “무로부터 천지를 지으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아버지...는 .....나의 하나님이며 아버지시다”(문 26).

다시 때가 차면 주님께서 다시강림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이 완성되고 창조가 오나성된다. 창조의 완성은 구원이 완성된 백성에게 현시되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의 현시이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예수그리스도의 영-보혜사 성령-의 통치가 완성됨으로 새 인류 곧 구원받은 백성에게 하나님이 충만이 임하셔서 하나님을 마주보게 된다. 이와 더불어 하나님은 만유안에 만유가 되셔서 충만히 임재하심으로 창조를 완성하신다. 따라서 더 이상 자연의 순환의 법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빛(lumen gloriae)으로 살고 자연적 생명(vita naturalis)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 곧 영(spiritus)으로 산다. 이로써 자신을 영광을 선포하기 위해서 우주(κόσμος, mundus)와 하나님의 형상을 한 소우주(μικρόκοσμος)로서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로부터 더 이상의 것을 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으며 완성할 수도 없는 온전한 찬양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신다.

 

* 생소한 사역(opus alienum) : 하나님이 시간, 공간에 갇히게 됨. 성육신 -비하

시간 공간에 갇힌 존재인 우리가 감옥에 갇히는 것도 힘든데 시간 공간을 초월한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하여

시간 공간에 갇히시고, 피조물인 인간에게 채찍에 맞으시고 그 질고를 당함이라니!!! (칼빈 - 거룩한 십자가 신학)

*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옴.

 

3. 신학의 근본원리

 

신학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이다. 즉 하나님의 계시가 신학의 대상임. *모든 계시는 자기계시. 하나님이 원하셔서 알려주신 계시임.

* 신학의 대상 : 하나님의 존재 와 사역

나로부터 나온 내재적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식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서 완전하나 부분적으로만 계시된다(고전 13:8-1).

하나님을 아는 지식(theologa stadii)과 본향에서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theologia patrae)의 차이를 인식하며, 계시 위에서(above)가 아니라 계시 아래서(below), 즉 계사에 의존(dependentia)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신학 (theologia humana)이 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서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지식을 추구함. 즉 원형신학 흑은 계시(theologia seu revelatio archetypa)가 아니라 모형신학 흑은 계시(theologia seu revelatio ectypa)가 신학의 대상이 된다 (Kuyer, Princples of Sacred Teolog, 244, 248).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로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유추할 수 없다(250). 신학적 고찰의 대상이 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에 관해서 계시하신 지식이다.

 

모형계시(theologia ectypa)의 특징

1) 모든 계시는 자발적 계시이다. 하나님의 뜻(voluntas)-기뻐하심-에 따라서 계시된 만큼 하나님을 알게 된다.

2) 하나님의 계시의 모형적 성격으로 우리는 그를 부분적으로 안다. 그러나 theologia ectypa는 theologia archetya(원형계시)에서 나온 것으로서 진리(vertas)이다. 즉 부분적이나 진리이다.

3) 하나님의 모형 계시 (theologia ectypa)는 하나님의 지식의 의인화(anthopomorhism)가 아닌 하나님의 맞추심(accommodatio)이다.하나님의 자신에 관한 지식(self-knowledge, theologia archetypa)를 분여하신 것(impart)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관한 지식을 우리에게 맞추어 계시하신 것임.

 

[1]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를 계시하신다.

[2] 하나님은 계시를 통하여서 우리가 그를 아는 주관적 지식(the subject knowledge of God)에 이르기를 원한다.

[3]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따라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계시라는 극장(theatrm re、reations)의 관객(spectator)이자 배우(histro)이다.

[4] 위에 언급한 세가지 요소一revelation,faith,the logical action-는 타락 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본래적으로 인간에게 동정적 (sypathetic)이었던 계시가 적대적 (antipathetic)이되었다. 여전히 믿음이존재하나 그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에게 동정적(sypathetic)인 다른 어떤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논리적인행위 역시 여전히 남아 있으나 이제 이로써 하나님의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

 

(1) revelation.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시지 않으면 타락한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진정한 의미의 신학도 없다.

(2) faith. 한편 타락한 죄인으로서 원래 영혼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바라는 믿음(πίστις)이 하나님의 와의 것을 믿는 다른 믿음(άπιστία)으로 전향 되였으나, 이제 유체 가운데 하나님의 나타나심(the maifestation of God in the flesh)를믿는 믿음을 추구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faithin Christ)에 이른다. 하나님 외의 것을 찾는 일시적인 믿음이 아니라 이제는 영원한 믿음을 갖게 된다.

(3) the logical action. 그리고 the logcal action of the ectypal theology는 이제 하나님의 지식은 구원론적인 해석을 통해서 주관적 지식이 된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요 10:30)라는 말씀에 기초해서 예수 그리스도의-특히 선지자로서-하나님의 지식을 Theologia Unionis라고 부른다.

(1) 하나님의 자기지식(theologia archetypa, an adequate divine self-knowledge)이 아니라 “ a human knowledge of God"임. 즉 인간의 능력으로 측량할 수 있을 만큼의 완전한 지식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와의 연합의 열매인데 변증적분석(dialectical analysis)으로 지식에 이르는 지식이 아닌 직관적 지식임.

지혜자, 지식인에게는 거치는 것이나 젖먹이도 받는 말씀임. 이 지식은 우리의 지혜나 이해가 아닌 지혜임. “예수는 논쟁하지 않고 선포하시고, 증명하지 않고 보여주시고, 진리를 밝힘, 즉 the logical action은 중생한 사람이 계시를 믿음으로 수납하여서 하나님에 관한 인격적인 지식을 얻고 이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에 관한 완전한 지식에 비추어서 변증적으로 의식하는 가운데서 이해함에 있음.

(3) 이와 같은 the local action에 있어서 믿음으로 수납된 계시는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이루어지므로 실제적인 지식이 됨. 성령은 개개인에게 적용할 뿐 아니라 “교회의 교사”로서 작용하고, 하나님의 지식에 우리가 믿음으로 수납한 하나님의 계시를 비춤으로써 교회의 교리(doctrine)이 되게 함.

 

칼빈-구속주 하나님을 통하여서 창조주 하나님의 지식에 이른다.

 

로고스로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기 객관화이시며 하나님의 자기 계시(reveatio ipsius Dei) 이다. 그런데 원형계시를 모형계시로 계시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기지식의 일부를 맞추셔서 주셨다. 이 맞추심(accommodatio)의 절정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결론

로고스가 하나님의 자기계시임. 그 계시의 절정은 로고스가 육신을 취하심임. 그 계시의 언약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지며 그 권은이 부활로 선포되고 승천하셔서 재위하심으로 통치하심으로써 이 땅에 이루어짐. 그러므로 구원의 완성이 창조의 회복임.

 

 

4. 그리스도의 계시(revelatio Chrstiana)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sensus divinitasis(하나님을 알만한 지식), semen religionis(종교의 씨앗), conscientia(양심)을 주셨다.

 

● sensus divinitasis(하나님을 알만한 지식), semen religionis(종교의 씨앗)

-> 창조주 하나님(Deus Creator),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지식과 관련

● conscientia(양심)

-> 심판하시는 하나님(Deux Vindex), 하나님의 어떠하심 즉 선악간에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에 관련이 있음. 피조물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관련됨.

하나님(속성)은

Deus infinitus(무한하시고),

Deus Spiritus(영이심) -> 제한되지 아니하시며, 형상으로 표현되지 않음.

Deus Trinitas(삼위일체), 살아계시며, 창조주, 구속주이심

 

말씀(Sermo,Logos)으로 말씀(Verbum)하신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육신으로 보내셨으며 그 육신 가운데서 구원의 협약(pactum salutis)을 이루셨다. 그 육신 가운데서 계시의 정점(예수의 성육신)을 보이셨고, 구원을 다 이루셨다. 로고스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는데 이제 그림자(umbra)로서 계시던 하나님의 인격(persona)이 육신을 입으셨다.

중보자의 직무(officium Mediatoris)를 수행하시고 이루심.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보좌우편에서 그 백성을 위하여 중보하심.

구약시대는 그리스도는 인격으로 계셨다. 다만 아직 몸을 입지 않으시고 그림자로 계셨다. 그러므로 그 그림자가 인격적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격이 그림자로 계셨다. 구약 백성들도 비록 그림자였지만 제2위 하나님(hypostasis)이 인격(persona)으로 존재함을 믿었다. 율법은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표상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현재(顯在)를 계시 했다. 이 표상과 현재가 만나는 것이 성육신임. 표상의 실재(subsistentia)와 현재의 실체(substantia)가 육체가운데 드러났다. 그리스도를 증거한 계시가 그리스도로부터 유래한 계시였음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참 신학(theologa vera)은 그리스도의 계시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계시에 따라서 모든 부분이 해석되고 조명되는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에 따라서 신학의 정오(正誤)가 판단되어야 한다.

 

*중세스콜라 철학-자연신학사상을 수납해서 피조물로부터 존재의 동참을 통해 신에 이른다.

토마스 아퀴나스-신은 ‘사고를 사고하는 사고“로 보고 최고의 순수유(actus purissimus)창조주나 구속주는 될 수 없고 섭리하지 않는 한가한 신으로 봄.

카톨릭 신학 -> 자신들의 공로로 신 존재에 동참하는 신화(deificatio)를 구원의 목표

->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에 기원을 둠

5. 계시(revelatio)에 의존해서 신학 함

 

● 계시= 신지식의 길(via ad cognitionem Dei)

 

자연과학의 인식 원리(prncipiumcognoscendi)는-객체(object)로부터 지식을 이끌어 내는 것은 주체의 이성(ratio)이라는 사실에 기초함. 자연과학은 사고의 주체로 지식을 취함.

 

신학에 있어 지식을 주는 것은 객체 자체이다(Kuyper)

 

하나님은 그의 영광의 극장으로서 일반 은총과 일반계시를 주심으로 자신의 무지를 변명할 수 없게 함(inexcusabilis).

-> 원죄의 유전(遺傳)으로 인류가 멸망에 이르는 것은 마땅한 형벌 (poenadebita)임.

 

* 일반 은총 : 피조물,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구조, 그리고 사회(societas)

구조와 질서에 특징적으로 나타남

* 일반계시 : semen religionis, sensus divinitatis, conscientia로 대표되는 일반계시를

타락한 인류에게 베푸심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해서 그들이 자신의 무지를 변명

할 수 없게(inexcusabilis)함.

구원에 관한 지식을 말씀 가운데 특별 계시로서 주셨다.

계시가 중생된 사람에게만 특별히 계시되며 예수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는 믿음으로만 수납된다. 그러므로 구원지식은 창조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재창조(recreation)로부터 나옴.구원 지식은 말씀이 영감되고, 영감된 말씀이 조명되어 개인적으로 획득됨. 죄인들 각자이 마음에 자기자신의 지식을 영감하식 조명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다. principium entis(실유의 원리)(kuyper)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구원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말씀이 구속계시가 됨을 보여 주었다. 이로써 말씀이 영원하신 중보자 되심을 나타낸다.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Finitum est non capax infiniti).하나님은 무한하시며, 영이시며, 절대적인 인격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형상을 한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즉피조물이 창조주를 아는 것은) 이성에 의함이 아니라 성령의 감화(persuasio)로 말미암는 믿음과 경건에 의한다 즉, 무한한영으로서 절대적인격이신 하나님은 자기의 존재( existensia)와 경륜( consilum)과 사역(opera), 그라고 자기의 인격(persona)과 직(ofcium, munus)을 스스로 계시하시는 데(se reve are), 이 하나님의 자기계시만이 피조물이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길이다(위로부터의 신학).

성령의 구속(“the brdle of the Holy Spirt")

 

 

1) 계시의 가능성

 

● 계시: 정체를 드러냄(unveilng)을 의미하는 라틴어 revelatio 에서 유래한다.

 

“신학에서 이 말은 결코 무의식적 생성적(becoming) 현현(범신론적)을 가르카지 않고

하나님께서 신적 진리를 전달하시는 의식적, 자원적, 고의적 행위”를 의미한다.

구약의 말은 ח󰗚󰔿(벗어지다), 신약 ἀποκλυψις, φανέρωσις(벗어지는 것, 열어보이는 것).

보통 특별계시 ἀποκλυψις, 일반계시 φανέρωσις

 

 

I) 계시 개념은 실유(스스로 있다)의 원리를 기초로 성립된다.

하나님은 절대인격(persona non genita)이시며 절대적으로 자의식적(自意識的, 매개없이 모든 것을 아심)이고 스스로를 계시하신다.

ii) 계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만 계시된다.

 

2) 계시의 내용

하나님의 자기 계시 (reveatio ipsius Dei):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의 존재와사역을 계시하심으로써 인간에게 자신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여 이것으로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며 하나님과 교통하며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계시의 내용은 하나님의 존재(영광, 권능)와 사역(창조, 섭리, 구원)과 경륜(언약, 하나님 나라)을 포함한다. 이들 모두는 로고스를 통해서 계시되며 로고스는 또한 계시의 내용이 된다.그리고 로고스는 삼워일체 가운데 내재적이며 경륜적으로 이해되며, 삼위일체는 또한 계시의 내용이 된다.

 

3) 계시=신지식의 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하여서 우리가 이해하는 것: (1) 유일하신 하나님이 계선 것과 그가 어떤 분이신가(“what sor hε is") (2) 그의 영광을 위해서 무엇이 우리에게 합당한가-무엇이 그의 본성과 일치하는 가(“what is consistent with hs nate") (3) 그를 아는 유익 이 어디 있는가: “Ou kowledge should sere frst to teach us fear and reverence; secondly, with it as our gide and teacher, we should lea to seek ever good fom him, ad,having received it, to credit it to his account" (nst. 12.1-2).

 

 

 

6. 성경(Scriptra)에 근거해서 신학함: 성경=신학의 형식적 원리

 

특별계시 :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 비구속적 특별계시: 창조 후에 말씀으로 온 계시로서 타락전의 하나님과 사람과의 언약관계

● 구속적 특별계시: 타락후의 하나님과 인류와의 관계 회복을 다룸

칼빈은 말씀을 세 가지 비유로 특징적으로 표현한다.

● 안경 (spectacles) : 하나님의 지식을 성경의 안경을 통하여 명확히 보게 됨(nst. 16.1).

● 실 (the thead of the Word): 가까이 갈 수 없는 하나님(딤전 6:16)에 이르게 되는 길을 인도하는 실(nst. 16.3).

● 학교(the ver school of God’s children) (Int. 1.6.) 시편 19:7-8 참조.

 

1) 성경=신지식의 원천

최종 계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의 완성이고 절정이다. 오순절 부흥운동자들이 방언 등을 통한 새 계시의 발생과 그 연속성을 말하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기록된 말씀(로고스)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의 완성이고 절정이다. 그리스도가 마지막 계시이다(요 3:16). 더 이상 새 계시나 추가 계시가 있지 않다. 다만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마지막 때에는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다(고전 13:12; 고후 3:18; 요일 3:2).

(1) 이성에 의해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2) 종교 경험/체험은 하나님의 지식의 원천이 될 수 없다.

(3) 하나님의 말씀외에 계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님.

 

칼 바르트는 말하되 ‘내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경험한 것이 진리라 하였고,

브룬너는 ‘성경의 어느 부분들이 하나님의 참 말씀인지를 나는 어떻게 아는냐? 그것들에게

서 그가 내게 말씀하시는 때에다’고하였다"

 

성경은 나에게 말씀하시는 책이기 전에 스스로 말씀하시는 자기계시의 책이며 교회의 승인 이나 해석에 의해서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으로서 스스로 계시한다(Inst. 17.1-3). 즉 성경이 원규범(nora norans 규범하는 규범)이며 교리는 이차적 규범 즉 규범된 규범(norma normata)이다.

 

 

 

 

 

 

 

 

 

2) 성경 = 신 지식의 외적 원리 (principium cognoscendi externum)

I) 신적 권위( auctortas divina):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기록으로서

ii) 자기 가신성 :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이 말씀 가운데 인격으로 말씀하신다는 사실에 기반함으로써 자기 가신성을 갖는다.

하나님

성경(말씀)

독자

원저자

인간 저자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저자

inspiratio (영감)

autopistia(자기 가신성)*

illumatio (조명) - 수

persuasio(감화) - 납 **

실유의 원리

외적 인식의 원리

내적 인식의 원리

* autopistia(자기 가신성):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 믿을 만하다

** 역사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Self-authentication. 자증성)

 

 

 

 

 

 

 

 

 

 

 

 

 

 

 

 

 

 

 

 

 

 

 

 

 

 

 

 

 

p65

2. 이신칭의 교리

 

중세의 원리 'facientibus quod in se et Deus non denegat gratian'

내가 자질에 맞게 행하면 그에 맞게 공로를 주신다. 공로주의, 공로가 가장 큰 사람 교황,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권도 없다. 믿음에 따라 기뻐하시는 대로 주신다.

 

8장. 믿음으로 신학함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 'Finitum est non capax infiniti'

케톨릭적 믿음의 나눔 - 정형적 신앙 과 불명확한 신앙(지식이 없는 신앙)

그러나 지식없이 믿음은 없다.

 

이해할 수 있기 위하여 믿는다. -안셀무스-

 

예수그리스도를 화해의 주요 계시의 주요 그가 중보자로서 역사함으로 참 지식에 이른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를 아는 지식이 동시에 들어 온다. 그러므로 회개하게 된다. 하나님을 봄으로 명확한 눈으로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게 된다. 영은 영으로 분별하며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믿음으로 수납되고 그러므로 나를 알게 된다. 곧 믿음으로 나를 알게 된다. 회개하고 믿음에 이르는 것은 오순절이다. 믿음과 회개와 중생과 칭의가 동시에 일어 난다. 그때 성화가 출발하여 영화까지 이르고 멈추지 않으신다.

-아브람 카이프- 신앙의 수위(首位)

 

믿음의 실상은 증거이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 믿음은 성령의 역사이다. 끊임없이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바라는 것 자체가 믿음. 믿음의 증거로 성령을 주신다. 믿음이 실상이고 증거이다. 이성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자제하라. 이성으로 믿음이 보여주면 더 올라 갈것 같아도 그때부터 믿음은 더 하향한다. 역사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믿음은 인치는 것이다.

 

3.믿음의 발생

회개는 계속적으로 믿음을 따르고 믿음으로부터 나온다. 시간적으로 생각하면 믿고 회개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회개는 이성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율법적 회개, 복음적 회개. 믿음 없이도 율법만 가지고 회개에 이른다 -루터-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복음도 죄를 깨닫게 하나 회개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옛 사람 죽고 -> mortification

새 사람 살고 -> vivification

죄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죄 가운데 죽은 자이다. 이것이 회개이고 믿음이고 중생이다. 믿음과 회개는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차적 회개는 없다.

오직 믿음으로만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해 계시된 하나님 계시를 성령의 조명으로 감화된 심령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 구원의 계시로 수납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구원적 믿음이다.

 

4. 믿음의 요소

믿음의 대상은 계시이다. 믿음으로 성경을 본다.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믿음은 주관적 요소와 객관적 말씀이 있다.

 

주관적 요소 - 지식,

1) 지식 : 믿음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믿음은 무지한 경건이 아니다.

'teachableness' - 하나님의 지식에 대해서 수납할 만한 상태, 가르칠 만한 상태가 된 것.

2)승인 : 성령에 의해서 감화된 대로 신앙의 대상으로 전적으로 승인 하는 것

3)확신 :

 

5.믿음의 인식

 

9장. 중생 이성의 역할

중생이성 ↔ 자연이성

하나님은 자연이성으로 한단계 한단계 깨닫게 하신 것이 아니라. 중생이성으로 깨닫게 하신다. 하나님 말씀을 중생이성으로 이해하게 한다.

 

원형상 인간 posse non peccare (able not to sin ; 죄를 짖지 않을 수 있는 상태)

타락상 인간 non posse non peccare (not able not to sin ; 죄를 짖지 않을 수 없는 상태)

회복한 상태 non posse peccaro (not able to sin ;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

그러나 본질상 변화된 상태이지만 남아있는 죄성으로 인해 곤고하다.

본질상 죄에 대해서 자유하나 의에 대해 매인다.

 

믿음과 순종은 동시에 일어 난다. 믿음은 주시고 순종은 나의 열심으로 아는 것은 잘못이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인격

 

제 10장 신학의 분류

1.신학의 분류

1)주경신학

계시된 말씀자체를 다룬다. 성경적 사실을 다룬다. 역사적 문자적 해석에 중점을 둔다.

2)역사 신학

교회의 신앙과 교회의 생활을 중심으로 다른다.

공시적 통시적 관점으로 본다.

3)교의신학(조직신학)

성경계시를 종합화 체계화함에 있어서 전포괄적이며 스스로 조리가 있어

4)실천신학

말씀의 가치 규범성을 다룬다.

 

2. 조직신학의 분류

1)변증학

비기독교 체계의 철학에 대항하여 기독교 철학을 변호하는 이론

계시의 타당성과 신 존재 증명을 하는 것

슐라이엘마허는 신의식

2)교의 신학

신학은 교훈적, 변증적, 고백적 가르침이다. 목회자의 의무이다.

3)신조학(symbolics)

고백된 교리체계를 연구하는 학문, 신경은 신앙 고백(symbolum)이다.

4)교리사

5)윤리학

아이와 아버지와의 서로의 바램이 율법이다.

제11장 교의 신학

1.교의신학의 자리

떼올로기아는 하나님께 속한 것,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뜻하는 말로서 기독논 쟁을 통하여서 그리스도의 신격을 나타내는 말로서 사용되었으며 후에 삼위 일체 논쟁을 거치면서 삼위일체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a)ecclesia catholica fidei

b)ecclesia docens

c)ecclesia praedicens

 

2.학으로서의 교의 신학

자연과학은 이성의 한Pso에서 추구되고 이성의 법칙에 따르게 되나 신학은 이성을 계시에 종속시킨다. 자연이성의 법에 타당한 것만이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진정한 합리성은 하나님의 섭리, 비밀(경건의 비밀, 성령의 비밀등)

진정한 합리성은 하나님의 신적인 규범과 질서에 인간의 이성을 종속시키고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믿고 순종하는데서 찾아지는 것이다. 깊은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질서를 깨닫고 그 확신가운데 성도들에게 전해야 한다.

3.교의의 정의

어디서나 모든 사람에게 가운데 지켜져야 할것.

폴라누스 “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반드시 믿고 순종해야 할 문장들”

4.교의의 발생

세례선포문, 성찬식 제정문안과 가장중요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다.

초대교회의 초창기 고백 “나는 주 예수를 믿는다”(행16:31) 그가 나를 가졌기 때문에 내가 그에게 속하고 그가 나에게 속하는 것이다. 큐리우스 예수스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

은밀한 훈육, 그당시 공개적으로 가르칠수 없었기에 나타난 표현.

초대교회에서 보아야 할것은 신조(신경)과 신앙의 규율(regula fidei)이다. 이런것이 은밀하게 가르쳐 졌다.

내 양들의 영적 스케줄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은밀하게 가르쳐야 한다. 너무 집중이 되면 어려워진다. Disciplina arcacani(은밀한 훈육)가 부족해진다. 이것이 성경이 기록될때의 정신이다. catechumens

 

터툴리안

조직신학적 개념을 세운사람이 터툴리안이다.

첫 번째 형태 (first form)

레귤라 피데이 (신앙의 규범) 바로 참으로 하나님 유일하시고 부동하시고 변하지시지 않는 하나님을 명백하게 믿는다.

셋째줄 한분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세상을 지으신 한분하나님을 믿고 그아들을 믿는다.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십자가에달려 돌아가시고

죽은 자들가운데서 3일만에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리시고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계시고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육체의 부활을 통하여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두 번째 형태

둘째줄, 보혜사 성령 모든 진리를 이끄시는 보혜사 성령

모든 진리는 명백하게 끌어내시는 분이 성령이다.

6째줄 하나님의 말씀 sermo 그자신의 말씀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지어졌고

그가없이 아무것도 있지 않고

그를 낳으신 동정녀 가운데 나셨다.

이분이 죽으시고

이 분이 무덤에 장사되시고(지옥 강하가 없다.초대교회의 지옥강하는 보편적 교의가 아니었다.)

아버지에 의해서 그의 약속을 따라 보내심을 받았다. (그의 약속은 아들의 약속을 말한다.)

그가 바로 보혜사 성령이다.

믿음으로 거룩하게 하시는자

(초대교회에서 성령은 두가지고 강조된다. 첫째는 진리의영이고 둘째는 중생의 영이다. 진리를 주시는 영 생명을 주시는 영. 성령의 역사라는 것은 아주 역동적이다. 알계하시는 분이 이루시는 분이고 말씀하시는 분이 이루시는 분이시다. 살리는 영 진리의 영)

 

세 번째 형태

무로부터의 창조

verbum과 sermo를 함께 쓰고 있다.

misisse 예수 그리스도의 대비자로서의 성령

원보혜사는 예수이고, 또다른 보혜사가 성령이다. 곧 성령은 아들로 부터도 나온다.

 

c)

교리는 정통신앙의 조항이다. articuli

교리는 참신학이다.

교리는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교리이다.

 

 

5,교의 신학의 역할

1)2)교리들의 근거와 유레를 밝힌다.

3)교의 신학을 통하여서 교의를 성립하고 보완한다.

4)원규범(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규범을 규범시키는 규범이다.

 

아디아포라 : 구원의 무한한 것들

구원에 이르는 근본 진리에 대해서 타협하거나 굴종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 자체로 구원과 관계없는 일들에 대해서는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남에게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거나 하지 않아야 한다. 다만 우리의 자유함이 약한 자들을 거치게 해서는 안된다. 연약한 사람에게는 연약한 사람에게 맞추어 가르치는 것이 아디아포라의 정신이다.

이것이 건덕이다. 덕을 세우는 것이다. aedific`atio, edification

우리는 법의 원리를 좇아사는 것이 아니라 덕을 좇아 사는 삶이다.

하나님의 법은 한사람이 99명과 같거나 크다. 내 양중에서 가장 약한 사람이 누구인가?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6.교의 신학의 방법론

찰스 하지의 귀납적 방법론

 

7. 개혁신학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을 규범과 근본으로 삼음. 개혁교회는 칼빈과 그의 후계자들의 신학을 기초로 삼는 교회를 말한다.

-루터 교회가 가졌던 중생 혹은 이신칭의를 실질적인 원리로 삼고, 교회의 일어서고 넘어짐의 조항으로 삼음.

-칼빈 신학의 요체는 이중 예정론과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칭하는 칼빈의 칼비니즘에 의해서 대변됨.

- 칼빈신학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책임을 동시에 강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 관점에서 신약과 구약의 일치성과 연속성, 미래를 묵상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으라는 그리스도의 삶의 교리, 스스로의 의의 종이 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교리, 그리스도의 연합의 시작과 계속으로의 성례, 하나님의 뜻이 선포되고 성취되는 장으로서의 시민국가의 삶 등을 망라한다.

sola scriptura 성경중심

1)성경을 신지식의 원천으로 신학함의 근거와 원리를 삼는다.

2)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 겸손의 신학, 낮추시어 맞추시는 신학,

3)하나님과 피조물의 구분을 강조하고 그 한계를 분명히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을 가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것이다. 유출설이 아니다. 우리는 신화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신인합력설을 반대한다.

4)하나님의 모든 사역의 목표는 하나님의 자기 영화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감가운데 기뻐

하는 것이다 .

5)최잭(사망)과 오염(전적 부패와 전적 무능)

6)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개인 구원의 기초이고 교회의 기초이다.

7)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기초하여 칭의와성화를 강조하고, 이를 전체적으로 중생으로 은혜로 파악함으로써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거룩한 생활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자유가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다루어 진다.

8)율법은 단순히 죄를 깨닫게 하며 생활의 규범이다.

9)교회는 말씀의 창조물이라할 것이고 교회는 말씀에 근거한 신앙 고백 위에 세워진다. 말씀에 의해서..

10)모든 생활 영역에서의 그리스도의 왕국의 실현을 강조한다. 왕국의 실현, 전도, 영의 임재의 확산,

 

제 12장. 신학의 완성 (우리는 길위에 있는 신학이다 나아가는 신학)

신지식의 완성은 우리가 하나님을 볼 때 이루어진다. 우리의 최고의 영화는 지어진 자가 만든자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카톨릭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을 명령한다. 내 자질에 맞게 행동하라. 그래서 자신의 공로가 된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행할 수 없는 것을 명하신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어떠하신 것을 좇아가는 것이다.

타락한 형상은 죄의 형상으로 해야 할것을 보면서 할 수 없는 자신속에서 갈등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제 13장 신학의 목적

하나님을 앎으로써 변화되어서 그를 믿고, 섬기고, 영화롭게 하며, 영생에 이르는 것이다. 특별한 내적 조명으로 역사한다. 하나님은 지식은 받는 자의 존재가 함께 결정되는 지식이다.

2편 계시론

제1장 계시

1.1. 정의

감추어진것이 드러나는 것이 계시가 아니라. 인격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계시다.

 

1.2. 계시의 유래, 그 과정과 내용

1.2.1. 게시는 성부 하나님에서 유래한다. 계시는 계시자이신 하나님이 계시의 주체자이시고 계시하는 작용을 통하여 계시의 내용르 전달한다. 계시는 계시자의 자

 

 

 

4.계시는 존재의 통보가 아니다.

 

케톨릭은 계시를 존재의 통보 혹은 분여로 본다.

 

karl rahner 는 은혜 강누데 언어적 게시를 통해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지식에 이르고자 했다고 지적한다.

 

칼바르트는 성경그자체는 계시가 아니고 나에게 말씀하실 때 계시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작정이다. 그러나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고 제2의 하나님이다. 진리가 아니라 실존적 사건으로 본다.

제 2장 계시의 가능성과 필요성, 그 유래처

1. 계시의 필요성

비필연적 계시, 비필연적 창조, 계시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계시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2. .비필연적 계시

기독교내에서 자질을 이야기하는 것은 범신론적 요소이다.

하나님이 원하시기에 계시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만 계시하신다.

3. 내신적 계시의 필요성(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필요성)

내 이성으로 하나님을 가두면 안된다. ‘그리아니하실지라도’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스스로의 필연성으로 종속되신다.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를 알게 하여 하나님을 계시하신다. 이것 역시 신비이다. 아들은 자기 계시이다. 아버지만이 선하다는 것은 자기가 선하다는 것도 계시하는 것이다. 아들은 삼위하나님 아버지를 드러냄으로 자연스레 자신을 드러내고 성령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객관화는 아버지의 객관화와 같은 것이다.

4. 계시의 유래처

계시는 진리자체를 드러냄이지 진리를 이루어감이 아니다.

 

제3장 계시의 분류와 일반계시

1.계시의 분류

자연계시, 초자연 계시 (카톨릭적 이해)

초자연 계시는 자연계시에 덧붙여 진것이다. 즉 자연계시에서 계속적으로 초자연 계시가 덧붙여 져서 하나님을 보는것이다. 즉 신화이다. 견신이 신화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덧붙이는 사선적 개념이 아니다.

우리는 타락한 이성과 거듭난 이성이 있는 것이다. 자연의 반대 말은 초자연이 아닌 은혜이다 이것은 중간에 타락이 있기 때문이다.

 

2.일반계시

칼빈의 제네바 신앙 교육서

우리자신이 하나님에 대햐어 무어을 따라야 하는 가.

마물의 우주 가운데

이큰 우주를 만드시고 이것을 보조하시닌 하나의 능력

 

시편 42편 고라 자손의 시... 제사권이 없던 고라 자손 끊어질만큼 벌을 받고.. 문을 지키는 고라자손 하나님께서 끊어지지 않게 하심. 그들의 시는 일할 때

 

20070601

제4장 일반계시의 직임

모든 종교 문화의 기초가 된다. 유일한 종교는 기독교 이다. 다른 종교도 일반계시로 신이 있다고 하나 그것은 그림자 이다.

복음의 에비가 된다. 언어 사상 종교생활 모두 일반계시가 기초가 된다. 일반계시가 있었기에 언어가 있고 라틴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다. 모든 것들이 복음의 계시이다.

일반계시는 이세상에서 질서있게 사는 데는 족하지만 구원을 이루는 데 부족하다.

아담이 타락하지 않더라면 종교의 씨앗과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을 통하여서 그를 알수 있었다.

타락후 일반계시로 하나님께 나아 갈수 없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본래 진리를 알 수 없다고 철학자는 말하나 이것은 맞지 않다. 타락후에 생긴 현상일 뿐이다.

일반계시로 영생에 이를 수 없다.

 

영생을 위한 첫 언약이 아담과 맺으신 원시 언약이다.

이계시는 특별한 임재가운데서 특별한 말씀으로 주신다. 죄로 말미암아 일반 감수성이 어둡게 되었다. 성경을 통하서여 나를 알게 된다 내가 거듭날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영생은 하나님의 백성됨이기에 어느 누구도 모르다.

성경은 창조적 지식으로 다가 온다. 새로운 지식으로 다가온다 내가 아는 것을 확인 시키는 것이 아니다.

펠라기우스 자력구원설. 구원을 얻을 조건을 주신다.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것

기독교는 구원을 주신다. 은혜로 선물로 주신다.

 

자연신학 일반계시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 구원을 설명한다.

고급이성과 저급이성이 있다. 하나님도 이성이 있고 우리도 이성이 있다. 그것은 계급적 차이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우리는 통한다. 이성으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토대가 틀린것이다.

 

자연은 은혜에 이르는 서론이다. -아퀴나스-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은혜 donum superaidittum 자연에서 계속 은혜가 주어져서 신화가된다. 이것은 공로의 값으로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케톨릭 사상이다. 영성은 공로의 값으로 은혜를 주는 신앙의 표현이다.

자연신학은 일반은총을 기초로해서 특별은혜가 덧붙여 지는 것이다. 덧붙여지는 은사

 

칼빈은 아리스텔레스가 강조하는 자연을 억제한다. 영혼은 육체에 봉사하는 것을 억제한다.

 

일반계시의 효능

하나님을 핑계할 수 없게 한다.

일반계시와 일반 은총, 일반은총은 타락후에도 계속된다. 타락후에도 스파크 섬광을 유지시켜주시는 것이다. 죽었던 사람들에게도 어떤 가능성을 두신것이 일반 은총이다.

일반은총은 죄를 억제하지만 죄를 사하지는 못한다. 니느웨가 폐역한 성이 었지만 일반 은총은 있었다. 죄를 억제했기에 니느웨는 있을 수 있었다.

하나님의 함구적인 측면과 점진적인 측면이 있다.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거나 사용하지 않고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 억제하는 것 -아브람 카이퍼-

 

CRC 화란계혁주의 견해

일류 일반에 대한 일반적인 입장.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어떻게 호의를 배푸시는가

죄의 억제

시민의 의

나라

 

헤르만 바빙크 , 반틸

일반은총에 대한 책을 샀다.

저급한 은총이라 보다. 먼저주신 은총이다 그것의 일반성은 그것이 먼저 있었다는 것이다. -반틸

모든 백성에게 주신 은혜

제5장 특별계시

특별계시는 구원을 위해서 필요하다. 필연적 계시는 아니였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으로 주신것이다. 바빙크

“일반계시가 특별게시의 필연성과 가능성에 대해서 계시하지 만은 일반계시는 거저주시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특별계시 거저주시는 하나님의 계시

특별계시는 말씀으로 오신다.

아들을 통한 말씀이 특별계시

 

특별계시

1.영원전부터 계시는 말씀

2.육신으로 오시는 말씀

3.보혜사 성령

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다. 원 보혜사이시다.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신다. 그런데 왜 언어로 말씀하셨는가? 언어는 그자체가 본질을 표현한다. ‘신이라는 말이 있기에 신이 있다.’하나님은 언어로 표현하기를 원하셨다. 유일하고 고유한 말씀 이것은 세상의 언어가 아니다. 로고스는 세상에 존재가 없다. 로고스는 로고스다. 이것을 계시할 때는 세상의 언어 열방의 방언로 계시하셨다. 언어로 받게 하셨다.

 

특별계시의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말씀이고 육신가운데 오시고 우리의 구원사역을 이루신다.

구원사역외에는 자신을 드러내시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드러내시기에 달리 드러내시지 않는다.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냄. 하나님을 드러냄. 하나님을 드러냄으로 자신을 드러내신것이다. 아들이 아니고서야 하나님을 알길이 없다. 성자가 하나님의 형상이고 말씀이시다.

제2의 하나님이 말씀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말씀이심이 하나님의 계시이다.

특별계시는 특별은총이다. 특별 은총을 좁게 생각하면 비구속계시와 구속계시로 나눈다.

특별계시다 하면 말씀으로 창조한것 까지 들어간다. 그것을 좁게 나누면 타락전 계시는 비구속적 특별계시이고 타락후는 구속적특별계시이다.

 

타락전의 이성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 하나님은 말씀으로 계시하셨다. 특별 계시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만 표현한 것이아니다. ‘심히 보기좋았다.’도 특별 게시이다. 이는 하나님의 심정을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만 말씀이 아니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율법을 주면서 지킬것이냐 안 지킬 것이냐 하지 마라.

율법은 홍해를 건넌 사람에게 주신 것이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한다. 약속과 성취

율법에는 규범이 있고 약속이 있다. 믿음의 눈으로 봐야 약속이 보인다. 약속의 성취(초림, 성육신)가 복음이다. 복음에도 규범이 있고 약속이 있다.

 

이제 주의 법을 성취하여야 한다 서로 짐을 지라.

예수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다. 재림으로 구원이 완성되고. ...

이것이 모두 구원계시이다

 

특별계시의 효용

타락한 일류를 회복하기위해

치유하기 위해 필요하다.

 

죄인중에 괴수다. 이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가는 것이다.

 

"Lament for a son" 계혁주의 선구자의 저서 수필집.

어려움이 힘듦이 많을 수록 .. .그것이 특별 계시이다. 힘들수록 주님이 가까이 계시고 주님의 치료 광선이 가까이 계신 것이다.

 

특별계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의 역사이다. 하나님 말씀 자체가 진리이다.

그 자체로 스스로 진리이다. 하나님이 내속에 들어와서 어떠한 가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가치를 지니신다. 이것이 존재의 원리이고, 이것이 믿음으로 말씀으로 오신다. 이것이 내적 인식의 원리 외적 인식의 원리이다.

 

영적 창조 인류와 천사가 영적 창조이다.

타락과 심판 노아 홍수 이스라엘 역사 모두 말씀으로 계시 되었다. 신의 족보에 라합 모압자손 룻이 왜 나오느냐. 하나님의 족보 자체가 겸손이다. 부끄러움을 다 보이신다.

예수그리스도를 낳게 하기 위해 우여곡절이 많다 .하나님의 노력과 능력

 

나는 여호와라 엘샤다이. 스스로 계시한 것. 창 17 하나님이 처음으로 자신을 계시 하신 것. 예언의 방식도 취하셨다. 이상가운데도 나타나셨다. 주의 사자로 나타나셨다. 성육신 전의 중보도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 전에도 중보하셨다.

대체로 언약 주실 때 말씀으로 나타나 보이신다.

육체 가운데 오신 하나님

이제는 그리스도 성령이다. 말씀 보혜사 성령 이것이 특별 계시이다.

이적으로 어떠한 사건으로 나타나신다.

헤르만 바빙크

드러나심과 감화시키는 영감

말씀자체로 오실 때 뜻을 드러내실 때 드러나시고

사람을 움직이시고 감화시키시는 것으로 드러내신다.

 

특별계시는 구속계시이다.

특별계시는 역사적 계시이다. 여기서 역사는 구속사 구원사이다.

칼바르트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한다.

말씀은 말씀일 뿐이다.

 

판네 베르크

“부활은 역사다”부활이 기록되어 있고 믿는 사람이 있고 빈무덤이 있었다. 명량해전을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부활은 역사다.

판네는 역사적 의미가 있기에 역사지 역사 자체가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부활의 역사적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하다. 부활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

“미래의 부활이 있을 것을 믿기 때문에 역사의 부활을 믿는다. ”이의미는 무엇인가? 미래의 확신을 지금 된것 같이 느끼고 산다. 역사는 미래에 되어 질 일을 리포트해준다. 미래성이 역사성의 핵a심이다. 미래는 현재와 과거를 만든다. 사람들의 가치관만 남아 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부인한다. 계시 대신에 미래 되어질것에 대한 지금의 리포트가 대신한다.

이것은 결국 인본주의적 아래로부터 신학, 상승신학, 철저한 아래로부터 신학이다.

헤겔의 입장을 따라간다.

 

제6장 율법과 복음

율법은 하나님의 뜻의 표현이고 명령이고 직설적이다. 사랑하라는 사랑하시겠다는 뜻도 포함이다. 율법은 완전한 의와 갈 길을 알려준다.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이다.

율법은 원래 선한 것이었다. 저주 하시려고 주신 것이 아니다. 율법에는 항상 명령과 약속이 포함되어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율법이 죄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면 이것은 믿음의 역사이다. 믿음의 역사없이 율법을 통해 죄라고 깨닫고 두러움을 느끼지 못한다. )하나님께 도망간다.

율법은 할 수 있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것을 계시한다. 세상윤리는 우리의 능력에 맞춘 명령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온전함에 맞추어 명령하신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할수 없음에 저주를 느낀다. 그러므로 율법의 약속을 보게 한다. 그리스도 안에 법을 추구한다.

해야 할 것을 명령하신 것은 즉시 아멘하라. 그 구조 안에서 명령하시고 그 안에서 기독교 윤리가 시작된다. 결국 율법을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자유이다. 그래야 율법이 자유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성도들의 특권이고 이것을 사모해야 한다.

 

칼빈은 그의 작품을 통해서 종종 정죄적 사역규범적 사역을 말한다. 이 두가지는 함께 역사한다. 정죄하고 규범이 있다. 그러나 율법의 핵심은 규범으로 본다.

삶의 규범으로 작용한다. 정죄적 사역을 할때도 규범적 사역을 멈추지 않는다.

율법은 중생한 사람들에게 더욱 본질 적으로 작용한다. 율법의 폐기가 아니다. 본질적으로 삶의 규범을 드러낸다.

 

 

 

 

계시의 기록

1. 하나님의 호흡(성령의 역사)

2.저자 : 실제적 저자는 성령임.

3. 영감의 성질

1) 유기적 영감

성경의 저자는 필기자로서 기록만한 대서자가 아님. 성경 저자의 교육과 지식, 인격,

문화적 배경을 다 활용하심. 저자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음.

2) 전체적 영감

성경의 일정한 부분만 영감된 것이 아니라, 성경전체에 영감이 이루어 졌다.

3) 축자 영감

문장과 단어에 이르기까지 영감되어 무오하다.

4. 성경의 무오

5. 성경무오 이유

1)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류가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음.

2) 예언과 약속의 책인 구약성경이 역사적 과학적 사실에 오류를 가지면 예수그리스도의 인격과 구원이 신약이 말한대로 인정할 수 없다.

 

성경의 독특성, 곧 신성성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갖는 권위와 그 특성을 가리켜 신성성이라 함.

-성경은 하나님을 원저자로 가지므로 그 특성으로 권위, 충족성 혹은 완전성, 필요성, 명료성을 지님.

1. 성경의 권위

1) 성경자체에만 의존 -하나님 말씀으로 자기 가신성/ 그리스도인들이 알게 하는 유일한

증거인 성령의 증거

2) 하나님의 권위와 일치함으로 절대적 권위

3) 내용에 따라 역사적, 규범적 권위를 가진다.

2, 성경의 충족성: 본질적 완전성, 보존의 완전성

3. 성경의 필요성 : 세상 구원을 위해 필수적임

4. 성경의 명료성

 

성경의 해석

1. 자명성. 성경은 성경에 의해 해석되어야 함.

2. 중심은 예수그리스도 이므로 이 중심에 의해 해석되어야 함.

3. 발생된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음.

4. 역사에 계시된 구체적 진리를 전함. 시대제약적인 부분은 본래 청취자들에게 국한됨.

 

 

 

 

 

 

 

조직신학 서론(문병호 교수)-2007.3.9 (am08:00-09:30)

고후 4장 6절

그 사랑의 빛을 우리에게 주심. 왕으로서 예수님의 얼굴을 나타내는 빛 그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었다.

거룩함이란? 분리하여 드려지는 것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 것으로 올려드리는 것을 의미함.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드릴 수 있다. 하나님은 선한 것을 받으심(아벨의 제사의 원리)

받은 것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헌신하는 것. 이 거룩함을 드러내기를 원하는 것

신학적 원리를 알고 기도하는 것 이것을 바로 가르쳐야 한다.

-성경 신학-성경이 말하는 것을 조명 해낸다.

-교리 신학-성경적 진리를 고백하는 것. 고백-경험,(거룩함) 진리를 확정하며 나가는 고백

다 포함 한 것이 조직신학의 개념이다

기도하면서 주제마다 기도의 주제를 삼아 붙잡아라.

신학적 주제가 있는 기도가 필요하다.

진정하나님의 뜻을 찾아내는 과목이 조직신학이다.

익힌 대로 기도하고 기도한 데로 설교하고 말씀 붙잡고 살아야 한다.

내 속에 체계가 있어야한다. 설교는 분량대로 준비를 해야 한다. 나의 관심사를 기도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탐색하며 계시적인 말씀을 전하는 것이 필요하다.

설교 들을 때도 그러한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진리로 붙들어라. 은밀하게 배워야 한다.

사람이 모인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의미가 문화가 되어 버렸다.

시대의 변화

신유→문화→-말씀의 시대

이55장 8절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면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설교집에 나와 있는 설교는 그 저자 들이 말씀 붙잡고 씨름한 결과이지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고 베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연구하고 그것을 참고하고 나서 그 생각의 차이를 비교하고 바른 것을 따라 사는 것이 필요하다.

외어서 시험 치는 것이 아닌 내 마음속에 답을 쓰는 것을 원함.

받지 않는 것을 드려서는 안됨(가인의 제사처럼)-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조직신학 서론(문병호 교수)-2007.3.16 (am08:00-09:30)

신학이라는 말은 피트 아베라드(1079-1142)가 처음 사용함.

신학이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다루는 학문이다.

하나님의 존재(어떠하심을 포함)-하나님이 계심 하나님이 존재하심과 하나님 자신으로써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당위성은 없다. 스스로 기뻐하시는 바로 하심 인간은 인과관계가 있지만 하나님은 스스로 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과관계에 지배당하지 아니 하신다. 인과 관계는 인간의 관점이지 이것에 매달리지는 않는다.

인간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지 말라.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 말씀

하나님 말씀 계시는 지식이지만 우리안에 형성 되기 전 하나님 스스로 가지고 계신 지식을 의미 한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이다.

예-이것에 관한 지식 음료수-나의 지식-깡통

하나님의 지식이 나에게 전하여 지는 것이 계시-스스로의 지식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

하나님은 스스로의 지식이 아들이며 로그스이다. 독생 하신 하나님의 로그스 아들은 자기의 계시이다. 하나님 자신의 지식을 우리가 알고 수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한 지식의 출발점이 중요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만 합의 되어지는 지시만 알고 있다 .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하고 성령으로 감화 되고 그것이 우리에게 형성되어지는 것이다.

신학이 이러한 것을 갖추어서 체계 되어 지는 것이다.

둘레틴-하나님 자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존재는 하나님에서 구별되지 않는다. (존재와 지식)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우리에게 어떻게 알려 지는가? 지식

존재로써의 하나님 지식으로써 말씀 데우스+로그스=에세-존재(being)-

둘레틴은 존재로서 하나님 지식으로써 그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관한 말씀이다.-데올리기아

사물에 관한 지식인지 인간이 정의 하는 지식과 하나님의 지식은 다르다. 그것은 일정한 규칙에 위한 것이고 하나님의 지식이고 하나님의 관한 지식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드러냄. 주님을 아는 지식은 주님 낯을 향하여 주옵소서. 주의 낯을 향하여 얼굴을 들어서 우리를 권고 감찰하시고 이러한 살펴보시고 이러한 단어들이 그분이 주시는 지식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나를 가두어서 설명하지 말라.

하나님에 대한 정의는: 나는 나다 나는 스스로 있다. 시간 공간으로 정의 되지 않는 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것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보다 정의 된다 유한되고 협소하기 때문에 인간은 정의 된다.

하나님이 말씀하심. 내 지식으로 하는 지식은 하나님을 작게 보는 자연 신학 자기 신학과 공간에 하나님을 가두는 것.

사물의 형용사적인 것 맛있다 아름답다라는 것을 말하지 말고 표현 되는 것만 표현한다는 것은 지식을 가두는 것이다.

우리 보다 뛰어난 예수님 우리가 볼 수 있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으로 하나님을 표현 한다면 이것이 바로 자유 신학이다.

사과의 핵심은 맛인데 맛을 설명 할 수 없는 것. 핵심을 빼놓고 말하는 것

교회에서도 교회의 핵심인 복음을 전하지 않고 다른 것을 가르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을 가르치는 것이고 교회의 맛을 가르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교회의 의미를 상실했다 교회는 사람이 줄 수 없는 것 하나님의 말하는 것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종은 말하는 신앙이 아니라 듣는 신앙으로 바뀌어야 한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지 않으면 멈추어야 하고 이것을 알기 위해 기도하고 몸부림 쳐야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의 계시

어떠하심-하나님의 요구 하나님의 관심과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곳이다.

신학-우리가 하나님의 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가지고 계신 말씀(하나님 자신의 지식-로그스)

하나님의 말씀이 신학이다.

어거스틴-“하나님의 관한 ratio-reason,rule 하나님의 관한 법칙 serm0,verbun(말씀)

레마 로그스 구분해서는 안 된다.

로고스 자체가 진리이다. 하지만 말씀되어져야지만 진리이다. 누군가 풀어 주는 사람으로 진리가 나타나는 것이다.

로그스와 레마는성경에서 같이 사용 된다. 이유는 영감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쓰여졌고 성령으로 증거 되어지는 것이다. 다만 선지자는 이것을 받아먹어서 이것을 증거하는 것이다.(증거자)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객관적 말씀으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객관적 말씀이 우리에게 수납 되어 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수납되어지는 것에 이것이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관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칼바르트의 신앙

우리는 이다의 신앙이다.

칼바르트 사상은 말씀이 나에게 실존적의 계시 사건으로 나에게 비로서 의미가 있다는

이다의 신앙을 우리가 수납하고 듣고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미 기록된 말씀을 우리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은 하나님의 의해서 가르쳐 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가르치는 것이고 하나님으로 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인데 이것이 동시에 이루어 져야 한다.

하나님은 나를 가르치는 데 이것을 알아서 이 가르침을 내가 가르친다는 것은 잘못 된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배운 순간 배운 것을 가르치는 것뿐이고 그 가운데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이다. 말씀은 진리의 영이고 말씀이 있으면 성령이 있다. 성령이 임하는 곳에 진리가 있고 진리는 곧 성령의 임함이다. 진리는 글로 쓸 수 없다 지정의로 파악되지는 않는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은혜에 대한 말을 할 필요 없다. 정한 시간 예배 목회자가 예배를 드리는 데 왜 은혜를 받지 못 하냐는 것은 잘 못 된 것이다. 이미 우리의 심령은 이미 은혜를 받았다

예배에 몸만 왔다가 간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은혜를 받았다 안받았다라는 말을 하지 말라. 정한 예배 때 우리는 은혜를 받는다 .그런데 우리의 감정에서 그것을 생각 할 때 왜 나는 은혜를 받지 않 았나 스스로 생각하고 죄를 고백하고 바로 돌아오는 것이 필요하다.

말씀이 임하면

1.존재의 변화가 일어남. 존재의 변화로 죽었다 살았고 거룩해 지는 것이다. 육체는 모르지만 영은 변해 간다는 것이다. 죄는 밝은 곳에서는 행해지는 것이 아닌 어두운 곳에 행해지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면전에 부끄러운 것이 죄이다. 우리의 육체는 기뻐 지만 내 심령이 근심한다면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것을 깨달아 바로 회계해야 한다.

우리의 영이 죄를 지어며 환란과 곤고를 겪고 탄식한다. 우리는 성령의 지배 아래 있다.

우리는 영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제어 한다. 죄는 절망 탄식 모든 것을 하게 한다 . 그리고좌절 하게 한다. 내 속에 있는 영이 근심하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육체의 말을 듣지 말고 내 속에 들이는 영의 소리를 들어라.

2. 성령이 임한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성경과 같은 책은 없다. 그냥 책으로 불릴 뿐이지 성경은 그 자체로 성경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다. 더 북 바이블

항상 신학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가르쳐 주면 가르치는 것이고 닮아 가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의 변화가 일어난다, 아퀴나스 처럼 분리 하지 말라.

가시적 비가시적 교회

하나님의 종으로 가르치면 된다. 지정의는 거부하지만 성경을 믿고 이것이 바로 고백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의 어떤 감정 지정의로 표현 되어지는 것으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끌어내려는 이러한 현실. 하나님을 받아서 내가 변화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것으로 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의 가름침은 고백신앙을 가르쳐야 한다. 신앙의 가르침은 이성으로 빠지기 싶다. 이성적으로 가르치려 하지 마라.

삼위 일체를 어떻게 가르치냐 이것을 고백하게 만들어라 . 믿습니다 믿음으로 이해해 믿음으로 이른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백하게 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다.

신학이라는 것 믿고 명확한 것을 성도로 하여금 신앙의 고백을 하게 만들어라

나도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나의 고백 오늘도 나와함께 하심과 나를 인도하시고 나의 삶속에서 주는 그리스도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고, 육체와 성령의 소욕의 싸움 속에 성령의 싸움이 이기고 이것으로 성령의 보호 아래 살게 하옵소서.라고 우리의 고백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관점대로 내 뜻대로 되어야만 하나님의 뜻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려라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뜻과 무관하게 우리를 아시는 하나님이다.

신학 헬-로기아(시)- 변증 말 철학적 해석 아리토스 텔레스 신학은 제1의 신학

동방 교구-니케아 콘스타니

동방 교구는 신앙을 좁게 신학은 거룩한 존재의 신학 거룩한 하나님의 신학을 죄인의 우리가 배울 수 없다는 것

갑바도기아 교구-경륜적 삼위 일치(진리-성령-존재 아는 것)

말씀이 임하는 곳에 성령이 임하고 진리의 영 삼위(위격적 존제)

나를 아는 자는 나를 사랑 하는 것 즉 존재를 아는 것이 바로 사랑 하는 것이다.

사랑을 받았기에 사랑의 십자가를 질수 있다 말씀은 곧 사랑이다.

우리의 가르침 속에 들어 있어야 한다.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의 고백이 있어야 한다.

성자-계시고(존재 제 2 하나님 구원을 이루심) 성령 하나님 구원을

성부 존재하시고 시초임

경륜적 내제적 삼위 일체론

아들을 자신과 같이 되게 함. 그는 첫 열매 히브리어로 구원을 이루신분(예수님)거룩하게 하신 자와 한 곳에서 난지라.

아들이 나를 변화 시키고 너희의 구원의 완성이 바로 아들의 영이다.

예루살렘에서 영을 받아라. 아바아버지의 영 사랑의 영을 받는 것으로 시작되어 져야 한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올라감이 유익하다. 보헤사성령을 보내니 나를 기억하며 나를 기억 하며 나와 같이 살게 하는 것. 아들의 영을 받는 것.

경륜적 삼위일체

존 제론적 삼위일체 하나님은 존재가운데 일하심

성자 성령의 각 일 내 속사람이 나 내 속사람(주어) 중심은

오이 코미아-오임코스(집) 노모스(질서)-경륜 구분하는 경향

경륜과 존재-이것을 구분 하였는데

이것을 하나로 잘 설명하는 것이 바로 칼빈의 신학이다.

그이 일부를 주셨다. 우리는 표적을 구하고 지혜를 구함

하나님은 존재를 주러오셨는데.. 그와 함께 자녀 된 자 후사로 온 그 와 함께 우리도 고난을 받아라

라틴 신학(삼위 일체) 오늘 신학의 맥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지식

성부 성자성령이 삼위 일체로 계신 신학은 성경의 가르침이지 어느 교부이 신학이 아니다.,

존재 경륜적 삼위 일체가 하나되는 것

동방 -갑바도기아- 칼빈

 

인식 과학적 감각적 지시-모두가 지식의 의미이다.

찰스 하치- 신학은 성경에 사실이다.fact 성경의 사실과 원리이다.

사실적 원리이다-귀납법 성경의 조목조목을 가지고 신학을 해야 한다.

성경적 사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사실.

찰스 하치의 귀납법-성경의 귀납법 신학적 귀납법)

귀납법의 오류-다수결 의 오류

다 받아 주지만 성경 말씀 진리의 흐름을 항상 파악해야 한다.

일반 과학적 방법으로 쓰면 안됨 이성이 개입 되면 안됨

진리안에서 귀납법이지 이성은 안됨.

명증한 진리는 있다. 하나님의 객관적 수납까지는 목회자 리더

이 지식의 경험(체험) 나누 하나로 받은 진리를 나눈다.

객관적 진리는 설명 필요.

워필드-신학을 3가지로 설명하면,

1.하나님관한 지식(존재 어떤 하나님(피조물을 사랑하는 것)-대상 하나님 존재 하시지만 피조물과 관계를 가지고 싶은 하나님 어떠하심 사랑 누구를 우리를

2.인간의 지식- 우리가 하나님의 지식을 알고 있지만 1번의 내용의 바탕에서 관계를 맺는 우리 역동성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먼저 그가 우리를 사랑했다는 것을 아는 것. 안다(아는 자는 계명을 지키는 자)-사랑-그가 먼저 사랑한 것을 아는 것-인류를 사랑

말씀 자체가 계시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기독교 강요)-신학

나뿐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것 요일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사랑의

3.계시가 있는 지식 교통의 수단으로서의 계시, 하나님은 자기 계시(스스로계신 말씀)

하나님의 자기 계시 인간의 계시는 남이 판단해 줘야 하는 것이 진리지만

하나님은 자기 자신이 바로 진리 이다

대상(하나님)을 대상으로부터 지식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으로 일치하는 과정

이성 경험적인 지식을 지향 하는데 계시된 계시가 (라벨라 투스 -ratav

하나님의 존재의 실제와 그를 이해하는 우리의 능력 객관적 실제

발견 발명은 인간으로부터 나옴.

하나님의 지식은 주어진다.

de 전치사 의 뜻--로부터 -에 관한.

자신을 드러내심과 이루심 계시이다. 일치신학은 계시에 의존하는 학문이다.

계시 의존 신학 의존 사상.

헤르만 바빙크

계시를 믿음으로 수납하는 것(계시는 객관적인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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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자체가 지식이다. 믿음 요소가 지식.

성령-진리 믿으면 믿는 조항이 생긴다. 믿음의 대상 믿는 바 이것이 바로 계시다.

믿음은 바로 지식 자체이다. 구원자로 믿는 것은 하나님은 구원자라는 것을 믿는 것

신앙의 기초는 신앙의 조목(믿는 바과 진리이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 내가 갇혀 지는 것

기도는 근심이 있다. 열심히 준비 한 것을 그만 두라고 할 때 우리는 믿음으로 순종해야 한다. 베드로의 근심-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가는 것 이제 예수님의 일에 들어가는 것, 내가 하나님께 갇혀 지는 것 신앙의 고백-욥의 고백

귀로 들었지만 눈으로 주님을 본 눈 (믿음)

내 속에 하나님을 가두어서는 안 됨.

욥에 가르쳐 주신 하나님 너에게 준 고난의 이유? 신앙의 시험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 산 모든 동물을 지은 목적은? 욥이 깨닫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다 알지만 사랑하는 것

신학 귀로 듣는 것이 아닌 것 이성에서 믿음의 세계(하나님의 중심)

하나님은 이성으로 쓰는 것이 아닌 고백 하게 하심.

 

조직신학 서론(문병호 교수)-2007.3.23 (am08:00-09:30)

계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지식 자체가(객관적 지식)

객관적 지식이란 존재 한다 라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새로운 지식이 없다. 계시를 받았다 라는 의미에서 계시를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성경은 단순히 누구라도 구원에 이르기에 충분하다는 것. 우리는 말씀의 지식과 계시를 수납한다.

계시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객관적 자기 계시)

모든 지식은 사람이 만든다.

베드로가 근심 했다라는 말의 뜻? 내가 하나님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나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가두었다가 즉 주여 주여 자기를 판단하는 것에서 주님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 안기는 것이 필요하다.

욥의 고백 내가 귀로 들었지만 이제 눈으로 본다는 의미는? 마음으로 알아서 영혼의 눈과 미래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

일반 계시: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계시-일반 은총(말씀)과 연결(은혜의 측면에서 계시(common grace)

하나님을 아는 도구: 양심 질서 문학 양심 일반 은총은 폭이 넓다.

농부가 씨를 뿌리는 표현 씨를 뿌리는 것

특별 계시: 택하신 백성에게 알려주는 지식(특별 은총이란: 구원-구원계시=특별계시

그러나 씨를 뿌리는 것 롬 1:2절

부족한 지식(하나님을 알되(일반은총) 영화롭게도 예비하지도 않는 것. 일반 은총을 받았음에도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

우리는 본질상 은혜의 자녀이다.

특별 계시(말씀=성경(성경의 영감으로 기록)

성경의 영감(유기적 영감)-기록(inspiraation)

성경의 조명(비춘다)-받는다(illmination)

성경의 감화-들인다(persnation)

하나님의 지식을 받아들이는 과정 이것은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다. 수납이란 말은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겸손의 신학)

성령의 역사에는 항상 진리(지식)가 따른다.

말씀은 쓰는 것만으로 이해하지 말고 어떠하심이 말씀이다.

지식은 성령이다. 성령의 진리의 영이다.

존재의 변화(구원 칭의- 칭의 진리를 수납하면 의로워지고 성령의 진리를 수납하면 거룩해진다.)가 있다는 사실

존재의 변화는 순종에서 일어난다. 순종의 타이밍을 기다려라. 고백이 있지만 한탄이 있는 우리 하나님이 나를 바꾸시면 된다. 고상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수납하고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에 아는 것 이있다.

순종 겸손 그다음 단계가 예배이다. 알면 예배를 드린다. 롬 알되(바로 아는 것이 아는 것이고 이성적인 것이다.)

예배 개혁신학의 핵심(에센스)-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며 알면 그를 인정하고 충만하기를 기도하고 그를 예배케 한다.

질서가 흐르는 것이 신학. 순종이 예배다

예배가 무엇이냐? 순종이다.

롬 1:2절 예배란 여호와를 알면 그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먼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듣는 것이다. 영감 된 말씀을 성령의 조명된 감화된 심령으로 받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은(베라)- 참 지식 參(참)-감화된 지식이다.

감화된 심령-감화라는 것 우리의 속을 비추는 것을 의미 우리 속을 변화 시키는 것.

와보라 데려다 놓으면 된다.

주님이 이곳까지 데리고 왔다 이것은 초대이다. 은혜를 받는다 하나님의 전에서 왜 은혜를 못 받는냐 받느냐라는 말을 해서는 안됨

예배는 나의 중심으로 보지 말라. 신학은 믿음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 반대는 안됨

믿음으로 중생된 이성(거듭난 이성)

거듭난 이서의 반대가 자연적 이성이다.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

믿음은 내가 믿는 것이 아닌 감화된 심령으로 믿믿는 것이 믿음이다.

내가 해야지 결과가 나와야지... 하는 것 지향해야 하는 것

후련하고 시원하면 넘어 진다.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믿는 것에 나를 사랑하는 것.(신비의 섭리)

거룩히 되는 백성으로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미리 예배 해 놓으셨다. 이런 것을 신비라고 하고 깨닫고 지식을 추구해야 한다.

믿음은 내가 안하는 것이 아니라 100프로 하나님의 일이고고 100로 나의 일이다.

결론 100로 하나의 일이다. 하나님은 모세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를 사용한다. 모세의 일 모세일 속에서 (즉 훈련시키는 것)

세상에서 미련한 것이 신비이다. 신학은 결과가 없다

믿다가 떨어진다는 질문- 하나님은 한 번 택한 백성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로 부르십니다. 100가지 질문 중에 95가지의 질문은 이성의 질문이고 진리다.

러셋 유명한 무신론자로 하나님은 없다고 했다.

상대주의(1+1을 부정하는 것)

하나님 신학의 방법은 믿음으로 시작된다. 대상은 하나님의 존재이자 하나님의 말씀이다.

방법- 믿음으로 한다. 믿음-성령 말씀 수납

믿음으로 신학 한다 라는 것은 하나님이 믿게 하시고 수납하게 하심에서 내가 신학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목표-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신학의 중심은 로그스이다. 성육신-절정

계시의 절정-성육심. (들어내심이 이루심 복음-그가 오셔서 살아서 호흡 말씀 않고 일어섬 드러내는 것 복음(모든 전도의 삶 주님의 공로-율법에 순종하는 것. 율법의 의를 이루는 것 유혹을 다 참은 것이 복음이다.

귀하게 받느냐-우리가 받음(들어내심이 이루심의 은혜를 받았다.-주의 법을 가르치고 행할 능력을 줌, 성경은 능력을 주라고 한다.

가인의 생각은 다르다 불순종. 아벨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사실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는 것을 받지 않는다.

지식이 예배다. 받은 지식대로 올려 드리는 것이 경건이다.

받지 않는 것을 올릴 수 없다. 올려 드리기 위해 우리의 몸부림-기도

받아야 올려 드리는 것. 로고스 성육신이 계시의 절정이며 이것이 은혜에 들어가서 우리의 공부 이 모든 것 속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알게 하신즉 이루신다는 믿음을 알게 하신다.

하나님의 맞추심.

1.수사학적 맞추심- 우리에게 들어내기 위해 의사 교사 아버지로 오시는 것 맞추기 위해(알게 하기 위해서)

칼빈-유모가 옹알이를 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이와 같이 생각해서 유모로 오심.

유모가 아이에게 맞추는 것 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맞추는 것(삼위일체의 신학)

2.신학적 맞추심-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우리의 구원도 맞추심

우리는 전적 타락--------------낮추어서 맞추어 주신다.

죄인에 자리에서 우리를 끌어 주셨다. 구원 받지 않았다고 부정하는 성도들 쓸 데 없이 겸손 한 사람들이다.

전능자의 손에 붙들린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다. 세상에 붙들린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 아니다. 끌어올려서 맞추어 주신 다는 것. 우리가 사역을 하는 것 우리가 불안전하지만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행위와 인격을 의롭다함 뿐 아니라 행위를 의롭다 함 우리의 행위도 의롭다 함.

하나님의 맞추심

위필드- 자신을 낮추어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냄-하나님의 맞추심(어커모네이션)

알려 주신다는 것이 계시. 애기에게 아빠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

대표적 맞추심이 의사 아버지 이다.

 

최고의 맞추심은 예수그리스도의 낮아지심(성육심)

왜 낮추시는 가?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principivm(원리)

-계시는 스스로 있었고 우리에게 알게 하는 것

원리-전체 계시의 원리 정리

1.존재의 원리(에센드)-말씀이 스스로 계시는 것.(하나님의 자기계시)

하나님의 지식(로고스) 계시는 스스로 존재 한다.-수납의 개념이 이룸

2.인식의 원리(프리키프)-하나님의 지식이 우리를 향한 지식이다.

외적 인식의 원리-말씀(성경)

내적 인식의 원리-성령(믿음으로 수납)

하나님은 삼위 스스로 지식이 있다. 발출한다는 것(나오신다는 뜻) 삼위 하나님의 자기 지식- 이 지식은 모름 맞추어 주시기까지 모른 것.(원형 지식(계시)

원형계시(revelato archetypa)-하나님이 자기 지식-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지 만드는 것은 이단

모형 계시 revelato ectypa)-우리에게 알려 주심

신학은 모형 계시를 한다라고 할 수 있다. 모형 계시의 모체가 원형 계시다.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이다. 모형 계시가 있다는 것은 원형 계시가 있었는데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없다. 다만 이것을 믿을 뿐이다. 이것이 애기가 옹알이를 하므로 부모에 대한사랑의 표시를 하는것과 같은 의미이다. 맞추어 주시는 표현이다.

원형 모형 계시를 즉 하나님의 맞추심이라 이야기 한다.

지식으로 부요하게 하기 위해 가르쳐라. 목회자가 이러한 개념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내가 아는 것 만 믿는 신학(칼 바르트)

성경은 계시의 준비이고 이것이 나에게 비추어 지는 것 이것이 계시가 있다 라는 것이다.

-이다라는 것이지 지식을 받는 것 되는 것을 받는 것이 아니다.

타 교단의 잘못 진리가 말씀되어지는 것 이단. 깊음(원리라는 단어)

헤르만 바빙크-자기 지식은 그 자신의 지식(있는 지식)

지식은 지식이다 존재를 인정함 존재의 원리.

원형 계시가 없는 모형 계시는 없다. 하나님의 맞추심이란 뜻이다. 개혁 신학을 한마디 오직 성령 말씀(world and spirit)이다.

이성 강요 데카르타

경험 강요 로크

경험을 어떻게 아는 가?

이성 비판-칸트

물건에 종속되었지만 이것을 인식하는 존재가 먼저 객관이 내 주관에 존속 되는 것 코페르니쿠스적 전의

천동설이 지동설이 되는 것이다.

슐라이 마흐는 인식의 대상이 중요하다고 생각 했다.

 

 

칼바르트 실존적 해석

데카르트 나는 생각 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보다 더 고생한 존재를 인식해서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이것을 우주론적 논증이라 한다.

내가 신의 관념을 가진 자체로 신이 존재해야 한다 단어의 개념이다. 신은 존재해야 한다.

죄를 설명 할 때-죄 구원은 설명 불가하다.

데카르트는 하나님의 지식을 이성으로 끌어냄 생각으로 끌어낸 하나님이 존재한 하나님이 나를 구원 한다라는 것을 강조했다.

지식 이성 존재 하나님의 지식은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에 위배된다..

결론 사람이 불안해서 신을 만듬 불교의 해탈사상과 같다. 깨달아서 존재가 나를 끄집어내는 것.

헤겔은 생각이 곧 존재라고 했고 생각이 되다 라고 했다.

지식 뿐 아니라 존재도 생각으로부터 나온다. 생각(아이디어 관념)-비컴이 되는 과정 이다.절대 이성이 신이다.

절대이상은 역사가운데 존재한다. 점차적으로 절대이성으로 존재한다.

절대 이상은 절대 생각으로 되어가는 과정이고 완성되면 생각이 완성되면 신이 된다. 이것이 바로 독일 관념론의 절정이다.

하나님은 되어가는 과정에 있다. 과정 철학(과정 신학) 되어가는 과정을 변증법으로 생각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 잘못이다. 대륙이야기는 생각하다가 끝남

 

로크-경험론 경험 되지 않는 것은 없다 . 경험은 감각의 표상이다. 신은 생각하는 것은 없고 감각적일 뿐 이다.

개연성-그럴 뜻 하다 정확하게 모르는 것 감각적이다.

일치 불일치의 취한다. 개연성의 높낮이로 평과

개연성 계시를 강조하는 것 그래서 기독교가 계시를 강조하니까 기독교는 계시 종교로 개연성이 높지 않다 라고 말한다.

알아야 무엇을 하지? 사랑을 하던지 설교를 하던지 전도를 하지.

로크의 이성주의

로크 영향-소 키누스학파(socinus)

흄-로크의 개연성 알 수 없다. 자아조차도 주관에 불과하다. 회의론에 빠짐.

순수한 것조차 없다.

극단적 회의론.

알고자 하는 것조차 회의의 과정이라 생각이라 한다.

1.대륙 칸트-순수 이성 실천 판단력 비판이다.

순수-직관(시간 공간) 오성(인식 체계)

직관은 감각 오성(아는 방법)-하나님은 이성(직관 오성)에 속하지 않다.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신다.

2.실천 이성 비찬-도덕

3.판단력 비판

목 해야 할 것과 원하는 것이 일치하면 가장 고상한 것이다. 해야 할 당위성의 존재 도덕성 입법자로써의 존재이다. 이것은 칸트 자신이 하나님을 자기 자신에 가두는 것이다.

내 도덕의 기준 슈드의 가치 판단에 존재에만 의미이다. 대상이 도리어 우리에게 종속 되었다는 생각- 보는 관점이 틀리다. 각자가 이것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데 칸트는 자기의 맘속에 가두는 것이라 생각했다.

슐라이 마허는 하나님은 내가 감정하는 것에 계신다.-주관주의의 모체를 주장.

 

조직신학 서론(문병호 교수)-2007.3.30 (am08:00-09:30)

슐라허 마허-주관적으로 봄(냉소주의자들)

신앙의 의식 믿음 의식이라는 말을 함. 믿음 자체는 객관적이지만 믿음의 의식 믿음을 깨닫아야 한다.

믿음의 성향(habitus-자리---점차 gualitas자질과 내속으로 나온 것을 가지고 나간다. 하나님 앞으로 나간다.

비중생자의 변증학을 강조함.

변증학은 성경의 말씀인데 그가 말하는 변증학은 신의존 감정이 옭은지 아닌지 이것이 미신인지 아닌지 신의존 감정을 1차적 걸러 낸 다라는 것.

모리비안 교도들 경건주의 찰스 웨슬러의 주장은 우리안에 움직이는 감정은 하나다

무한한 감정 누구에 영원자 무한자 전채자(부분의 합-범신론적)-whole에 대한

본질은 즉 신성인데 우리에게는 신성이 없다.

중보자의 개념이 틀리다. 복수 중보자 그리스도는 한분의 중보자 만 된다.

immedate feelg 중보자 없이 즉 신비자라는 뜻. 모든 사람이 각각의 중보자가 된다.

부분의 전체를 의존하는 감정.

기적-내가 하나님을 느끼는 것이다. 기적관

계시는-전체가 나에게 다가오는 새롭고 본래적인 교통 계시는 완결된 것이 아닌 계시의

진화성을 말하는 데 우리는 계시가 완결되었다.

우리는 계시를 받았다 라는 것이 아닌 계시를 깨닫았다 라는 말을 해야 한다.

순간 순간의 일들이 계시이다.

기원-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서 온 것을 아는 것이다.

교리는 하나님의 관한 진리가 아니라 내 감정에 관한 진리이다.

주관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그는 모든 것을 이야기 했다.

상승 신앙-나로부터 끌어 올리는 것

(그러므로 온갖 생각들이 개입되는 것 감정에 관한 신학)

신학-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

신의 개념-완전한 (절대적) 의존 감정이 있는 것.

신의식을 가진 개념으로 생각 했다. 나보다 뛰어나다고 해서가 아니다.

 

니쯜-공동체 의식

공동체 신학-죄사함 받았다는 개념(공동체 기준으로 알수 있다.)

19-20c 모든 신학을 지배 했다.

비판 -그가 말하는 공동체는 주관의 합(절대적 객관적이 아니다)

진리는 객관적이다.

우리의 진리는 좁은 길인데 그는 넓은 길

그의 주관주의는 슐라이 마허의 주관주의를 벗어나지 못함.

신앙의 학문이라는 말-신앙은 계시의 학문인데 계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인데

신앙은 학문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학문은 우리의 신앙의 공동체이다.

반틸 신앙으로 신학을 세우는 것이 아닌 수렴하는 것이다. 계시를 신앙으로 수납해서 그 신앙으로 신학을 세우는 다라는 말이 맞다.

내 신앙으로 신학한다 라는 것은 잘못. 주관에 맡기면 사람이 지배 당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객관적인데 이것을 배제 하면 하나님과 멀어진다.

 

칼바르트

신학-신앙의 전재로써 성경이 있다고 주장.

성경은 계시의 객관적 준비다. 신앙(계시적 주관적 진리) 성령은 계시를 위한 주관적 준비이다. 성경 자체는 계시가 아니다. 이것을 통해(재료)서 계시가 이루어진다.

만남을 통해서 성경이 계시가 된다. 성경자체는 진리이다 진리가 나에게 수납된다.

신앙의 행위

느낌을 신존적 체험으로 바꾸어놓음.

나로부터 시작 되었다는 것. 상승 하강 신학

그는 상승 신학이다. 신학은 신학적 훈련이다. 교회(주관적 공동체)는 하나님이 말하는 대로 세우지는 것이다. 교회 교의학 앞부분.. 그가 말하는 교회는 잘못됨.

교의학은 신학적 훈련 기독교 교의학에 속함, 기독교교회에가 말하는 이다와 되다의 차이는 그들은 되다고 우리는 이다이다

실존적 인 것이 되어 지고 이루어 져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 계시이지 되어 지는 것이 아니다. 내적 외적 원리 계시

성경과성경대로 성경의 문체를 고급스럽게 설명한 사람은 칼빈이다.

칼빈을 이야기 할 때 그의 근본을 이야기 한다.

칼빈

계시는 스스로 이루어 진다. 인식의 원리는 믿음으로 이루어짐.

이성 대륙주의 지각 경험주의 감정주의 슐라허 마허

fontes(우물)- 이성 감정 경험으로 하나님의 어떠함을 단편적으로도 모른다.

신앙이 있어야 일부와 전체를 알 수가 있다.

칼빈이 말하는 지식

1.하나님을 아는 지식

2.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

행 17:28절 인용- 하나님의 지식이 선행하나 무슨 지식이 앞서는 지 알 수 없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지식과 우리를 아는 지식의 선행되는 것은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섭리)이다 하나님의 보이는 손(사람)으로 우리를 인도 하신다.

가난함-

철학자는 나를 보니 하나님이 보인다 라는 생각 나와 하나님의 존재 유비(비교해서 )

내가 어떠해서 내가 가난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 수 있다. 나의 죄를 보니 하나님의 거룩함을 본다. 나의 부족 하나님의 부요

하나님 앞에서 나의 자신이 보이니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감정의 극단이 예수라고 생각하는 슐라이 마허는 의 생각은 아님

무한하심 선하심 자신의 무지 가난연약 타락 부패를 이러한 것을 느끼지 못하면 하나님의 순결하심을 알 수 없다.(보충)

기독교의 신학-

존재의 유비( )-우리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신앙의 유비( )-구원적 그렇게 믿는다. 나의 구원자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

상승신앙은 존재의 유비가 있다 이유 나로부터 시작되기 때문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하나님의 갈망의 시작이기에. 삶에 이르러 절망..

절대성에는 은혜가 있다라고 생각해서는 안됨. 상대성이 있다. 상대성에는 판단이 있다.

비교를 초월해야지 판단으로부터 자유롭다. 실망의 시간이 필요하다. 절대성을 놓치면 기쁨이 사라진다. 우리의 소망 주의 일 우리에게는 기쁨이 없다. 늘 실망 하고 다시금 하나님이 나를 세워줄 때 다시금 힘을 얻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볼 수 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손을 드는 것은 우리는 죄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주여 이로써 주님과 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관계회복은 주님과 하나님이 아는 지식이 선행되어 지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개혁신학의 바탕이다.

1.그의 존재(계시는 것)를 아는 것.

2.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을 아는 것.

3.우리에게 어떠한 유익(즐거움)이 있음을 아는 것.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의 한 단어는 기쁨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는 것은 기뻐하는 것이고 이것으로 감사와 기도가 있다.

신앙은 맹목적 기쁨이다. 자기계시 믿음 로그스의 신학이다.

개혁신학은 개혁되어가는 신학이다. 그 원천은 하나님이다 주님 안에서 새로워 져야 한다.

theologia refotmata

est semper erformanda

개혁신학은 항상 개혁되어지고 있는 신학이다. 가까이 갈 수없는 빛 출 3:5절 어떻게 나가는 것 나의 고집의 신발을 벗는 것 즉 겸손함으로 나아갈 수 있다.

존재의 통보(교통-칼바르트 신학이다. 신화 -칼 라나 ) 우리는 의와 교통 할 수 있다.

통보-우리와 하나님의 자질과 교통하는 것.

의의 전과-

교제-칭의-칭의의 의의 전가-

예수의 중보로 된다.

교통-성화-성화의 의의 전가-

경건은 자질이 아니다. 자질은 증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입(삼가하라)이다.

우리는 주입이 아니라 증가다. 경건이라는 개념의 단어가 중요하다.

영성은 공로를 의미한다. 영성이라는 단어를 쓰지 말라. 가르친다는 말을 해야 한다.

은사를 개발하라는 단어는 삼가라. 성령의 열매는 하나고 색이 9개다 9개가 아니다.

이것을 하나씩 떼어서 설명하지 말라. 누구는 이걸 받았고 안 받았고 라고 하지 말라.

 

나는 신학을 배우면 배울 수로 말씀의 오묘함과 말씀을 말씀으로 가르쳐야 되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신학=계시-연합-예배(받지 않은 것을 올려 드릴 수 없지만 우리는 다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것을 올려 드려야 한다.

메체 -증인의 삶을 강조한다.

처음부터 기독교는 증인되기 운동 증거 하는 운동이다. 신학은 삶과 분리 되지 않는다.

나의 삶이 변화되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

1.계시와 신론

일반 계시 특별계시

2.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율법)

3.성령론 구원 서정

4,교회 성례 (국가)

조직 신학에서 가르침의 순서

성경을 가르침-신론-인간론(인죄론)-구원론-기독론-성령론(구원론)-교회론(창조)-성례(2)

-국가 이순서가 오늘날 신학자들이 이 순서에 영향을 받음

서론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것 그때 당시는 신론을 먼저 가르치지만 율법을 기독론에서 가르친다. 이유는 율법의 본체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문바르도-성육신 기독론

virtus(능력)-하나님의 능력 즉 성령론이다.(덕이라 번역하면 안됨)

어거스틴- 설교와 교의와 교리 말씀을 객관적 설명되어 진다.

교리는 성경의 진리다. 교의는 교회의 선포(진리)이다.

교의학은 교의를 가르치는 학문.

신학 백과 신학 전체를 의미 카이퍼 용어 사용

변증학-워필드=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는 방법이다.

계시 믿음으로 수납하는 것이다. 각 부분 주경 신학 각각의 신학을 알아내는 신학이다.

역사 신학 교리를 삶에 어떻게 적용하는 가의 신학진리는 누가 받고 하는 것이 아니다.

실천 신학-진리를 어떻게 확산 시키는 가(상담

조직 신학-유기적인 전체다

존재를 가지고 신을 변증은-철학적 변증으로 인간의 구조를 바탕은-심리학적 변증으로

초자연적 변증은-초자연적인 것을 가지고 역사적 변증-당대에서 성경적 변증-성경의 맞고 그름을 변증하는 것 이것을 보니 진리다.

슐라이 마허 엑티스는 주관적 나에게 흘러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식 감정 행위가 복합적인 것이 경건이다. 내가 아는 것이 겉으로 나오는 것이 자아의 수용성(슐라이마허)

바르트 -실존(윤리적으로 실존하는 것)

하나님의 행위는 인간의 행위를 기다리고 이것이 마주쳐야 의미 있는 행위가 되는 것.

은유적인 유기(존재론적 유기)

하나님이 명령(계시)하니까 우리가 행하는 것(따르는 것)이다.

윤리는 율법(개혁 주의 측면)

칼 빈

율법의 이중적 사역

1.정죄적 율법-루터의 이해

2.규범적 율법-칼빈은 율법의 본질(경건하고 올바르게 사는 법)-율법은 규범이라 한다.

1-4계명-경건 율법은 본질은 선한 것이다. 사람은 죄로 악하다. 율법은 사람에게 악으로 좌우 한다.(저주) 관계 회복을 위해서 사람이 바뀌면 율법은 선하게 된다.

구원-본질을 회복(율법) 선하게 되는 것. 저주-거듭난 사람은 율법으로 죄로부터 율법을 자유로 적극적으로 율법을 사용 하는 것이 율법의 본질에 맞는 것이다.

조직신학 서론(문병호 교수)-2007.4.13 (am08:00-09:30)

p.29

2장 신학의 대상

하나님의 존재-무한 영이시고 삼위 일체(존재 자체)- 자기 필연성(하나님이 기뻐하심),

하나님은 스스로의 필연성에 매여 계시고 우리의 필연성에 매여 계시는 분이 아님.

존재의 유비로는 신앙을 할 수 없다

존재 유비-나의 닮은 만큼 하나님을 안다는 지식 나의 모습으로 보아서 하나님을 유추하는 것.

하나님의 선하심을 말할 때-법- 인간의 잣대로 보지 말라.

하나님은 원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하심 하나님 중심으로 의와 거룩이 선포된다.

모든 신앙은 은혜를 기초로 한다.

존재 유비의 반대 말 신아의 유비

신앙의 유비란? 계시를 받고 믿고 그대로 하는 것

창조주 하나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주로 계시하신 하나님 그리스도로 들어나신 삼위 하나님

성부의 형상이요 자신을 구속주로 나타낸다.

예수 안에서 삼위 하나님 우리를 지으신 분 구원을 이루심으로 그분이 창조이심이 들어남. 구속 중보자로 창조 중보자를 알 수 있다. 그분이 창조 중보자란 사실 구속 중보자를 먼저 알 때 창조 중보자를 알 수 있다.

만세 전에 삼위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구원 협약

1)구원자를 정함(예수)

2)구원 방식-대속(성육신 장사 죽으심-(비하 승귀 낮아짐과 높이심)

3)예정-만세 전에 선택과 유비를 정함(엡)

구속의 역사가 마치 타락으로 시작 되었다는 것 전체 큰 역사로 볼 때 이미 만세 전 시작 됨

타락전 예정설-타락전 예정하셨다는 것

요 5:39-성경이 곧 나에 대한 증거 구약 율법 선지서 나의 대한 애기

5:46절 모세의 기록 또한 예수에 관한 기록

율법의 실천은 예수님 예수를 바라보는 율법

예수를 바라보는 모든 것-제사 등(도축 행위에 불가하다-칼빈)

구원자 보호자 되심.

현재란 말-예수님은 인격이 계신다는 뜻 나타날 현(구약 그림자 신약 몸-그림자 실채 유비)

그림자던 실체든 인격이 있다는 것을 현재라고 함.

예수님은 인격인 몸으로 현재 하셨다.

중보자의 모습

창 18장 사닥다리 아브라함에 나타난 사자

고린도 10장 1-4 세례 광야에서 인도한 분 예수 여 5:13-14 군대 장관 호 12:3-5 벧엘 사건

뜨인 돌 이 모든 것을 예수그리스도의 현재를 의미함.

셀베투스-예수 하나님의아들을 부정한 사람 (유니 테리안-삼위 일체 부정)-그림자가 인격적으로 있다.

인격이 없다는 말.

우리는 인격-이 그림자로 계시된다. 비로소 현재라는 말을 함(praesentia)

그가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남 (정점-클라이 막스)-culmen

계시는 성취 아는 것에 이룸에 권능을 받는 것 이 보혜사 성령

그의 육신 가운데서 나타나심은 하나님을 드러내시고 이루심.

십자가도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 죽으심도 가르침으로 구원을 이루심

그 자신이 가르침이고 계시다.(예) 거느린 것도 함께 있는 것. 먹고 마시는 것

계시는 이루심이다. 성육신으로부터 우리에게 목도 되는 것 밝히 내는 것이 이루심이다. 모든 것이 이러한 영역으로 즉 기도로 알려 주심이 이루심의 출발이다.

하나님의 큰일 책-바빙크

하나님은 우리에게 맞추어서 주심

모형 계시는 처음에는 말씀으로 육신 가운데 보혜사 성령으로 나타남-가르침

말씀이 성령의 보혜사로 오는 것.

시공간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님 바로 하나님이 영 피조물의 속성 구속되지 않는 것

시공간을 만드신 분이지 시공간에 재약을 받는 분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무한성

무한하심 하나님-갇히지 않고

영이심 하나님-피조물의 속성에 갇히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무한 영 계시주 창조주 구속주이심 섭리주, 성경의 자증성

스스로의 필연성에 따라 계시하시고 역사하신다.

히스토리 워킹

 

칼빈 워필드 도 하나님을 표현함.

하나님의 사역-

1)하나님의 창조

창조는 유출이 아님(떼어 주는 것이 아니다. 존재의 유비 (상승 -나로 올라가는 신학(유출-내 속에 하나님의 본질이 있다는 잘 못된 것)-하나님의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이다.

창조라는 것은 무로 지으신 것 없는 것을 만드신 것 일부를 떼어 주었다고 생각하지 말라.(이오니자연철학)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만듬. 하나님의 본질은 없고 하나님의 형상만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애기 할 때- 의와 진리 거룩 온유 타락성이 있고 신학적 질문은 진지하게 하라.

재창조-말의 유례 창조 중보자-서철원 창조의 회복=재창조와 같은 의미.

재창조라는 단어를 쓸까- 유출 창조 불완전하고 완성이라는 것에 대한 반박

창조의 완성이라는 말은 우리는 좋은 의미 상승의미에서 진화론적으로 사용한다.

불완전하게 창조하셨다고 완성한다는 것 즉 재림... 상승 신학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신천 신지 새 하늘과 새땅-창조 부활체로써의 우리는 우리의 동질성을 인정하지만 연약했던 것이 완전한 것이 아닌 재림 창조를 오나성하는 역사 하나님이 중보사역을 완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에 대한 말씀.용어 질문에 대한 답볍

재 창조라는 단어에 대한 생각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앞에 창조와 연결성이 없다. 지금의 창조와 재창조는 연결 그러면서 이것은 완성이 아니다. 신비의 영역이다. 새 창조의 말을 씀. 깊은 연결성을 보기에 부족한 단어. 신학의 부분을 변증적으로 들어라 .

상승 신학이 이렇게 주장 하니까 이러 한 부부에서 재창조라 함 언어의 한계 그리고 개념 부여로 언어를 만든 것. 재창조를 해 놓고 이것에 대한 규정을 함.

의지가 강한 단어인가 뜻이 강한 단어인가?

원 창조에 대해서 재창조라고 불림이 합당하다. 창조론이 창조 중보자에 관심 삼위 하나님은 창조 때 무엇을 했나?

창조 중보자 중보자의 중보론 -상승 신학만 다름.

행함에 와 닿는 것이 마음이고 하나님은 시간과 함께 창조하셨고 시간도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 창조의 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의 호흡으로 지으신 목적-찬송을 받기 위함(시150편 호흡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 할 찌어다.)

창조의 영광의 현현 자유의지를 주신 이유는? 영생은 길이로 이해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의 온전 한 백성이 되는 것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

창조를 보호하심과 다스림이심(통치라는 뜻)

통치는 무조건 성령 영의 임재의 확장이다. 믿는 사람들이 영적인 임재가 나타남 즉 백성이 늘어나는 것 즉 선교이다.

섭리는 보존이고 샬롬은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의존한 존재가 샬롬할 수 있다.

의존의 존재 의존 받아야 할 존재가 이탈하는 것이 죄이다.

본질적 임재 그의 임재 초월과 내재를

초월-의의 전가(밖으로) 내재-그리스도와의 연합

the so-called extra calvinistism) 주님은 이땅을 밝고 계심에도 하늘에 계신다.

기독론에서 소위 초 칼빈주의 중보자 그의 영을 받은 사람을 계속적으로 중보 한다.

초월하시면서 내재적인 것. 내재만 이야기 함-스피노자 무관한자(인격자가 없다)

옙4:6 만유 가운데 계신 분

내향적인 사역 즉 삼위일체 그러니까 그러해야 한다. 하나님이란 이름을 부쳐줌 3중 하나라도 빠지면 안된다. 존재론적으로 함께 하신다. 그러나 나머지 모든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심 뜻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대로 하시는 분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 하나님은 구원자를 구원하신다. 그리고 기뻐하심이 구원이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구원으로 포도원 비유로 나타낸다. 이성으로 이것을 이해 할 수 없다. 윤리학에서 이것을 이해(한 만큼 주는 것)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기뻐하심으로 모든 것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 뜻 가운데 이루어 내신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이란? 지으신 피조물을 사랑하는 것이다.

진리는 진리대로 전하라 하나님의 뜻으로 타협하지 말라. 원리를 이용해라

하나님은 우리가 어떠한 환경에서든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섭리는 기강인용-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 하신 하나님 택한 백성의 고백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은 -고난 지상의 복으로 이것으로 판단 할 수 없고 우리를 이해하시는 분이시다. 즉 하나님의 진실하시고 신실 하신 분이다

향하여 주시는 복의 뜻? 성경 순교자, 오래 사는 것이 복이라는 생각 그들에게 향하신 복 고난 순교의 복 이 모든 것 . 향하심의 복에 대한 설명 은 우리를 이해하신 다는 고백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즉 성도의 고백 하나님의 보이 지 않는 손이 바로 섭리다. 직접적으로 섭리 하시는 부분과 사람의 손을 사용함.(보이는 손) 직접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는 데 목회를 통해서 보여주신다.

하나님의 구원 창조의 회복

왜 지었을까? 구속주가 창조를 완성할 때

구속의 개념-완성하는 관점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 선하심. (타락과 회복) 주님의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고 성도의 연합을 원하신다. 그 연합은 교통과 교제하심이다. 구원의 적용이 구원의 손에 있다. 구원의 전 과정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100%은혜고 100%로 구원이다. 보이는 손을 2차적인 손이고 궁극적으로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승화 도

하나님의 손으로 이루심.

모든 구원의 과정이

생소한 사역을 했다.(opus alienum)

opus proprium 사랑

생소한 일 시공간에 갇혀지지 않는 하나님

육신에 나타난 것이 바로 시공간에 갇혀 졌다는 것 낮아짐. 적극적인 작정하시며 낮아짐

하지만 죄는 자유의지로 나타난 결과이고 사망에 까지 속한 이유 시공간에 갖 혀진 것만으로 수치함.

예수님은 시공간의 갇혀진 것 갇혀 진 것에 죽음에 까지 이것이 생소한 사역 그의 고유한 사역에 의하여 이것이 바로 사랑 이다. 고유한 사역은 사랑이다.

고유한 사역의 일을 위해 생소한 일을 감당해야 한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

하나님의 고귀한 사역 즉 사랑을 위해서는 생소한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우리의 구원 본래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생소한 사역 그것이 미련하다고 한다. 그들은 연약 없는 외로운 강함 있는 영광의 길이다. 외로운 곳에서 임마누엘을 이루심. 다 이루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창조의 완성 재창조의 단어 원 창조에 대한 창조를 하셨고 창조자라고 가르치신다. 우리 영혼을 지으심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심. 창조는 이성적이고 인간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을 전재로 대속을 말 할 수 없다.‘ 태초의 하나님이 나의 태초의 하나님이다.

하이텔베르고 신앙 교육서 -개혁주의 신악 교육서

문 26번 나의 하나님이며 아버지시다.

창조의 완성은 바로 불완전의 완성이 아닌 완전한 임재와 완전한 초월이 마지막의 모습이다.

더 이상 자연의 순환으로 살지 않음 하나님의 빛으로 삶 하나님의 생명 즉 우리는 산영이라고 한다. 부활체로써의 영 그것을 그려낼 수 없다. 부활체로써의 영 바로 하나님을 마주 보는 영 전혀 없어지지 않는 영이다.

천국에 부부가 없다 라는 것.

형사취수제도 누가 천국에 아내인가 부부는 없지만 부부이상의 정과 그리움이 있다. 그래서 만나는 것이다

 

제 3 장 신학의 근본원리

세상의 지식은 나로부터 나온 지식일 뿐 그래서 인간의 지식은 불완전하며 하나님의 지식만이 완전하나 부분적으로 계시 된다. 극히 일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본향의 신학이라고 시상의 신학 이 땅의 신학은 지상의 신학은 큰 가치는 지상의 신학의 한계성을 깨닫는 것이다.

흉하다 겸손하다는 것. 인간의 신학은 겸손한 표현이다.

원형 신학 모형 계시로 받는 다. 무엇을? 존재의 유비는 안 된다.

신학의 고찰은 계시하신 것.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형

1) 자발적 계시-하나님이 원하시는 계시 원하셔서 계시함.

2)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것이 바로 진리이다.

모형은 원형 신학에서 나옴.

비진리 세상의 통합 이론. 하나님의 지식은 부분적이지만 진리이다. 충분한 지식이다.

3) 지식의 의인화 인간의 모습에 맞추는 각색

의인화란 맞추심이라는 것이다. 즉 옹아리 좋아한다는 말 진리는 하나 표현 은 다양함 이것이 맞추심

계시는 맞추심으로 오신다. 인간적으로 바꾸는 것이 의인화다.

 

조직신학 서론(문병호 교수)-2007.4.20 (am08:00-09:30)

p 35

신학의 근본원리는 하나님은 맞추어서 계시 하신다. 스스로 지식과 진리이다. 이것을 그대로 받을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하시는 분 나를 위해 사랑하셔야 한다. 그러므로 사랑이시다가 아니다 사랑이시므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고백이 진실하신 하나님을 우리의 필연성에 매지 말라.

슐라이 마허 내재적 신학 -지식 감정 이것이 표현 되어지는 것이다.

자연 신학 나로부터 쌓아 져서 이루는 신학이다.

범신론- 우리는 신성을 알 수 없다 알려 주시기 때문에 알 수 있다.

주관적 지식은 주관화가 아니다.(내 관점으로 보는 것)

객관적 지식을 받는 다는 전제에서 극장에 관계이자 배우인 사람.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영광을 드러내는 극장. 사시사철 밤과 밤낮과 밤 서로 계절이 대립하고 최고의 배우는 사람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최고로 높임.

관객은 계시를 알 수 있는 것. 우리가 그를 더러 내게 하는 것 최고급이 하나님의 형상이며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남 인간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버지라 부름 이유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만이 아버지라 말 할 수 있다. 개혁주의에는 인식론이 없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 있을 뿐이다.

카이프 워필드 바빙크 당시 개혁신학 선두자

어떻게 지식을 갖느냐

계시 - 믿고(수납) 계시가 수납 되는 것을 믿음이다. 계시는 존재 존재의 원리다.

지식은 존재한다. 존재하는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을 인식의 원리이다.

외적(성경) 내적(믿음 성령) 계시를 수납한다. 존재는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수납이라는 것은 인식의 개념과 다르다. 말씀을 수납해서 구원 받았다. 칭의 말씀 내속에서 수납 했다 . 이성 지식으로 알 수 없다 그것을 고백한다. 우리의 마음이 움직여서가 아니라 내속에 들어 왔기 때문에 날마다 새롭다 이것을 이해하는 측면- 논리적 과정이라 함. 논리적 행위-내 속에 수납된 하나님의 지식이 어떻게 알 아서 깨닫는 측면에서 이성에 관계되는 이 이성은 거듭난 이성이다.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 일반 은총조차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죄 때문이다.

믿음은 이 계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수납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수납한다. 중보 예수께서 알려 주셨다. 요:14,16장 거듭난 이성이 바탕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해주셔야 한다. 거듭난 이성으로 신학을 할 수 있고 전할 수 있다.

고전 1:30절 하나님께로 난 자롤 그에게 있고 계시가 있다.

수납된 지식이 예수 안에서 주관적 지식이 됨.(주관화)

하나된 지식- 우리에게 알려진 지식 이러한 지식은 지혜로 받는다 .

소피아-지혜란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다.

카이퍼-논쟁하지 않고 선포하신 예수님, 설교자는 선포적 이어야 한다. 진리를 선포하는 자리에 서야 한다.

데모스레이트-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고 있는 그대로 보여 비추어 주는 것이다.

분석하는 사람이 아니고 진리를 들춰 내주는 사람이다. 진리는 이미 존재하는 데 그것을 벗겨내어서 보여 주는 것이다 진리의 조명이 로지컬 액션에서 나타난다.

진리의 명제는 이 땅에 나타난다. 로그스의 예수는 자기 객관화이며 자기계시다.

영원전 하나님은 아버지의 말씀이고 어떠하심의 계시고 그대로 오지 않고 아버지는 어떠하심으로 아들과 아버지의 본체의 형상이기에 예수가 우리에게 오는 것을 모형 계시 즉 맞추심 변형이 아니고 맞추심의 절정이 성육신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 만한 지식 종교의 시야 양심-일반 계시--- 타락---내버려둠(멸망)---

죄 짖기 전에는 알 수 있었으나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빛이 드러내지 못함. 우상을 만드는데 바빴다.

나는 하나님 없이 산다는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을 모르면 우상으로 달려간다. 최후에는 자기 자신을 우상화 한다. 곧 황제 숭배이다. 무신론 한계상황을 드러내는 사람. 자기 자신의 의지에 빠지는 사람은 모든 행사가 악하다. 유기란 그들을 내어 버려두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잔인한 하나님의 개념이 아니라 공평한 보응이시기 때문이다. 공평한 보응이란 마땅한 보응이 멸망이다.

알려 주지 않고 우리를 벌하십니까 ? 변명에 답하기 위해서 일반 계시를 주셨다. 죄로 타락함으로 하나님을 모르는 가운데 빠져있다. 우준하여 우상을 섬기고 벌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마땅한 보응이란 마땅한 형벌이라는 것이다.

형벌(포헤나) 데비트(빛지다)(-내가 쌓아 놓은 만큼 형벌을 받는다.

변명 할 수 없음. (poena debita)-예정과 조화

인간 구원론은 선택은 특별한 은혜기 때문에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은 바로 공로 없는 은혜다.(gratia immerita-공로 없는 은혜) 그라티아 이 메리타(마땅한 보응 공로의 은혜)

왜 아벨은 하나님을 사랑 하셨고 가인은 그냥 두셨나. 우리는 선택에 붙들려 있어야 한다. 어떻게 피조물이 창조물에게 대항 할 수 있는가? 포도원 품꾼 비유 이것으로 하나님이 불공평하다는 것을 말 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일반 계시를 이야기 함. 변명 할 수 없다.

특별 계시가 없으면 일반 계시를 알 수 없다

구원의 협약 기도론에서 다름

1. 무한하심 2> 영이심 3> 삼위 일체 하나님 대표적인 하나님의 특징

 

무한 -갇히지 않음 영- 만들어 지지 않은 것(초대 하나님의 속성 지어지지 않은 분 피조물이 아니다.) 성경과 진리로 예배드리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예배드리지 말라. 이러한 속성이 가장 명백히 드러난 것이 예수님의 성육신 그림자로 계시 그분이 -어떠하심의 정점이다.

그리고 주님의 일이 계시로 인격은 영원히 계시는 데 구약에서는 그림자로 나타났고 신약에서는 몸 육체 실체로 나타나다. 아들의 영원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오셨다.

에라 데우스 그는 하나님이시다. 태초 영원 창 태초와 다름 (시간의 시작) 영원 전 계시는 하나님이 육체로 오셨다. 이분이 우리를 위해 영원히 중보 지식을 새롭게 하고 예수를 통한 즉각적 지식은 없다. 중보자를 통한 기도 지식 신적 체험과 오직 예수님을 통하여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육신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나타낸 것은 명백히 드러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살아 있고 가장 명료한 것이다.

이마고 디바(살아 있고) 비바 익스프레서(명확한 드러냄)

주님은 우리의 소망 그 분을 봄으로 우리가 소망을 가지는 것 그들이 기다리는 것 보혜사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와 연합 그것을 내 속에 받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 하나님의 지식과 우리의 지식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가 오셨고 그분의 이루심과 드러남이 이루심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계시가 이루심이다. 이 말을 권세 있다 라는 의미이다. 설교자의 권세는 전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선포를 해야 한다. 설교는 성령의 역사로 권세가 있다. 그런 권위의 말씀에 예수 그리스도는 신학 시대에 계셨는데 그분이 오심으로 실체를 이루셨다.

구약의 관점 예수는 그가 계시는 것과 표상을 함께 드러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도 계셨다. 아직은 그림자로 계심 인격도 계셨다.(현재) 구약 시대의 제사장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심을 믿고 계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는 제사는 도살이다-칼빈이 말함.

바라본다는 것은 지금 계시다는 것 이고 육신으로 오셔서 표상은 오실 것만 바라보는 것이다.

성경의 표상은 예수가 계시다는 것을 포함한다.

바라 볼 뿐 아니라 지금 계시는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다.

지금 계시는 예수님이 육신가운데 오심(약속과 성취 지금의 계시의 만나는 점이 성육신이다.)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이 계셨다 삼위 하나님 구약 전체 기록 자체가 삼위일체를 보여주기 때문.

성육신은 구약시대의 바라봄 기다림 (안나) 그 기다림이 오셨지만 배척함.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항상 표상을 바라보지만 지금 계시는 주님께서 나에게 구체적으로 드러내어 일을 내어 주신다. 지금 계신 분을 바라보는 것, 지금 계시는 분을 앙망 하며 내속에 계시는 초월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지금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이 아니고 이분이 나를 구원하셨다. 이것이 성육신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 바라는 것이 있고 현재 그림자로 본 실체가 드러남. 표상의 실체와 현재가 육신에 드러나다. 그리스도의 관한 말씀이 그리스도에게 나온다는 것이다. 예수가 신학의 출발이고 그로부터 나옴을 보여준다. 만물이 그로부터 나옴 하지만 몰랐다. 그래서 우리에게 드러내 주신다.

은혜는 구원 진리는 창조 구속중보자와 창조 중보자가 계시됐다.

카리스(은혜) 구원 중보자를 보여줌이다.

그리스도 계시에서 출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시작해야 한다.

신학의 유비에 따라 이것은 신학을 아는 것이다. 유비지식이란 견주어 서 아는 것이고 유비는 유비로 남는다. 즉 신앙으로 안다. 존재는 일반의 동참한다.

모든 것이 신의 본질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을 존재의 유비라고 함 상승 신학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구원까지 얻는 이다..철학에는 안다 하지만 구원이 없다.

p43

신지식의 길

이성 객체란 지식을 주는 신학에서 객체 그 자체라는 말이다. 신학을 한다는 것 대상은 하나님 즉 대상이 지식 알려준다.

 

변명할 수 없음 모든 지식을 주었기 때문에 없다 여기서 나오는 것 마땅한 보응 이것이 유기로 나타남.

일반 계시

특별 계시 내용상 구원 계시 형식 이성으로 되지 않고 오직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수납된다.

아브라함 카이퍼- 창조 재 창조 변증적으로 쓰어짐. 성령의 크레이션 리 크레이션

아브라함 카이퍼의 성령론 참고

용어 사용..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구원과 구속 말씀이 영원한 중보자가 된다.

구속자로 그분이 말씀을 드러난다. 하나님은 구원자 예수를 먼저계시하고 그분으로 창조의 중보자라는 것을 안다.

p44 유한은 무한을 파악 할 수없다.(맞추심)- 기본적 인식론

존록스-

지으진 것이 지은 것을 넘을 수 없다. 사람이 지은 것에 사람이 지배당한다. 이모든 것조차 지은 사람손에 있다.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무한이 유한에게 열어 주시는 것이다.(성령의 감화)

성령께서 역사하셔야함 알 수 있다. 경륜 사역 직분 스스로 계심 자기 계시 알려 주시는 계시만이 유일한 길이다.

자기 계시- 말씀 성령의 구속 (메는 것)- 성령의 붙들림으로 알 수 있다.

드러남 있는 것이 드러남

계시

1>계시자-하나님을 어떻게 드러내느냐

2>계시 행위-하나님의 말씀 하심

3>계시 물-일발 특별계시

 

칼바르트는 이것을 성부 성자 성령으로 바꾸어서 이것을 지식으로 인식론으로 바꾸는 것은 잘 못이라고 주장한다. 계시는 있다것 이지 된다는 것은 아니다.(비컴)

알포칼리시스 카노리시스-계시는 실효의 원리 (진리는 스스로있다라는 것)로 우리에게 들어온다.

나무에 관한 지식은 인간 하나님은 스스로 가진 지식을 우리에게 주신다. 내재 없이 스스로 계시하다는 것이 스스로 계시가 대상이 스스로 지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삼위 일체 하나님은 스스로의 지식 사람에게 해당이 안 됨. 그 지식을 받는 것이다. 인간 계시는 계시 된다. 계신 분은 계시 행위로 나타 난다 라는 말이다.

첼램-형상

데무트-모양

형성과 모양이 두 개냐 다르냐 아니다 다르지 않다. 창세기에서는 형상을 모양이라고 함.

이것으로 우리를 지었다.

죄가 우리와 하나님의 지식을 가두어 원래 사람은 모양으로 지었다 .하나님께서 형상으로 완전한 상태로 나타낸다.

형상으로 덧붙혀진 은사

 

카톨릭

모양(자연인-카톨리) 자연인은 모양인데 여기에 형상을 덧붙여 주었는데 타락함으로 형상이 제하여 져 모양으로 되돌아감 모양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 하나님과 함께(신인 항력성 =자질)

모양은 여전히 가지고 있다. 전적 타락 교리는 카톨릭은 없다- 전적 은혜의 교리가 없다 이신 칭의 없다 예정론이 없다 언약 사상이 없다. 하나님을 알 만한 지식은 여전히 가지고 있다고 함.

다만 공로를 쌓아서 알기에 마지막 온전히 아는 것은 내 자질로서 됨으로 신화가 됨 신과 같이 됨

아는 것이 카톨릭의 사상. 자질 사상

 

카톨릭의 지식과- 열심히 훈련함으로 알 수 있다는 것.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알 수 없다는 것

다른 길은 없다.

우리는 수직적이다

p47

계시의 내용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 경륜( 인격과 사역)

구속 계시

타락전 계시-비구속적 특별 계시

타락후 계시-구속적 특별 계시

성경 전체가 구원 계시다.

기독교 강요

1>안경-현미경(스페킬리우)-현미경을 가지지 않는 내 눈 현미경을 볼 수 있는 눈이었지만 현미경을 봄으로 내가 세포를 보는 눈이 생겨서가 아니라 이미 세포를 보는 눈이 있었다. 존재 자체가 성경으로 나타남

성경이 있으므로 구원이 있다.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것 선택. 오순절의 방언으로는 없음

성경 계시안의 계시지 계시를 바꾸고 완성되어지는 계시는 없다 계시는 종결 되었다 계시의 적용 계시의 펼쳐지는 것 그리스도가 계시의 마지막이다. 곧 기록된 로그스이기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식을 알 수 있다. 신지식은 이성을 통해 알 수 없다. 이성은 눈과 같다. 보는 눈만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성으로 내 것으로 다가가서는 안 된다. 존재의 유비 종교 경험 없다.

칸트 불가지론 이성 비판-알 수 없다

순수 판단력 비판 우리의 지침에 있지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내 마음에는 도덕의 준칙이 있고 간트에는 하나님이 없다.

신비주의 자유주의자는 보편체험 누구나 체험 이성이 인식하는 체험을 강조한다. 말씀 계시를 분리하는 것 칼바르트 계시가 되는 것. 부그노 칼바르트의 실존주의 적 신학 공통점 신전통주의

객관적 진리 존재의 원리 게신 진리가 나에게 들어옴 계시가 나에게 주는 것이다.

바울이 구약 신약을 통해 하나님 말씀으로 이미 진리이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로 말함

전통의 견해 성령의 감화와 영감의 지식 신앙과 지식 종교 경험(칼빈) 종교 경건 경건의 경험 즉 확실한 믿음의 경험 으로 이러한 것을 주었을 때 우리는 경험이라는 단어를 씀.(케리아 익스페리아스)

규범 -규범하는 규범

교리 -규범되는 규법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

하나님 성경 독자

하나님은 성경의 원 저자요 인간저자와 상반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었을 때 이것이 영감이다. 영감의 말씀이 조명 (나에게 떨어진다.)-

나에게 감화된다. 조명 감화-받아들인다. 수납의 의미로 실유의 원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스스로 있다

성경-외적 인식의 원리

독자-내적 인식의 원리

기록된 것이 성경으로 역사되어 성령으로 말미암아 능력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말씀이 스스로 올바르게 기록되었다 자기 가실성.(스스로 믿을 만하다.)

성경의 자증성(말씀을 스스로 증거 한다 )

 

조직신학 서론(문병호 교수)-2007.4.27 (am08:00-09:30)

하나님께서 이야기 하시는 것을 듣는다. 말하는 신학보다 듣는 신학을 하신 서철원 교수- 그리고 겸손의 신학을 함.

병렬-점점히 세워라.

아들이 아버지에 대한 꾸임 없는 고백(추억)들이 있어야 한다.

고백을 심는다면 그 열매가 맺어짐

 

제 7 장 교리의 지도를 따라 신학한다.

교리 진리 의미가 나에게 그대로 보인다. 크게 구별해서 보지 않음. 교의란 선원적인 것이며 교리 교리란? 하나님의 구원 진리의 표현(구원의 파노라마)이다. 생명의 방식이다.(생명/삶) 비타 조엘- 삶 생명 삶의 방식. 생명 자체가 삶과 구분 되지 않는다. 영생이라는 삶은 지금의 삶의 모습 까지 포함 한다.

1. 구원진리는 교리인 동시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포함한다. 요 17:4 영생의 지식이 교리의 표현이다. 모든 교리는 생명과 연관 되어 있다.

요 3:16장

전체 신학의 표어 핵심

믿음으로 구원(이신칭의) 독생자를 주시고 그(인격과 사역) 하나님이 이처럼 독생자(삼위일체교리) 멸망치 않고 영생(구원 영생 교리)

2. 신적 권위에 근거

교리는 말씀의 근거하며 말씀의 권위와 지은이(하나님)로 나옴. 성경의 원 저자는 하나님이며 성경을 사도들이 기록하였다. 교리는 성경에 기초하며 성경의 사도적 성격과 같다.

사도적 성격이란? 성경의 정경성 (하나님이 주신 책)성경의 영감성이다.

하나님은 오해 잘 못 아는 것 조차 아신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나셨다 라는 표현을 안 쓰는 것이

좋으냐라는 질문에?이것은 성경의 권위에 기초

성경의 권위? 교리의 성경적 적합성이라고 함. 합 당하냐 변증하고 지킬 려고 교리사가 있다.

교리사는 성경을 변호하기 위한 변증. 교리가 성경을 대처한다는 생각 보다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 삼위일체론이 있다.

요한 복음과 요한 일서는 영지주의에 대한 변증들이 많다.

가장 정교 심오하게 표현 한 것은 초대교회 신자들이-교리를 나타나는 것. 삼위 일체 교리가 형성된 때. 교리의 발단은 그곳 믿는바 조화는 미리 형성된 것이다.

삼위 일체의 진리는 1세기에 예수 사도에 의해 가르쳐 졌다. 사도-속사도 시대-변증가의 시대(저스틴),헬라철학 도임-교부시대(기도교 신학 체계)=초대 교회사의 흐름이다.

어거스틴은교리가 성경에 적합한가를 변증하고 성경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노력 했다.

3. 교리는 교회의 신앙고백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모인 곳이다. 진리와 성도의 터이다.

교리는 신앙의 형식으로 고백되어 질 뿐 교리는 신앙 고백의 형식 이며 성경의 진리를 믿는바(나는 믿는 다 고로 믿는다)

믿음의 고백 초대교회

1. 신조(symbolum)

2. 신앙의 규범 regula fidei(role of fath)

가르치는 고백이 신앙의 규범이고 이것을 지키는 것이 신조와 조직 신앙의 태도이다.

이 모든 것은 성경에서 나온다. 마음 판에 새기는 의미가 이것이다. 성경을 기억하는 것

무엇을 기억 초대 교회 전도의 모토 행 16:31절

주 예수가 무엇이길래 믿으라 하나? 주는 그리스도 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잘)

여기서 사도 신경 신조가 발전 칼빈은 칼페도 사도신경을 주로 다룸.

5. 교리 교회의 신앙을 표현한 명제

말씀의 고백(믿음은 들은 말씀이다.)

표현한 명제가 교리이다. 말씀의 가르침이 교리

6. 교리는 교회의 서고 넘어 짐의 근본원리이다

얼마나 교회가 교리를 잘 지켜 나가는 교리는 전체 회의에서(공의회) 나올 수 있고 특정 교회에서 나올 수 있다. 교회에서 신학자들에게 신실하게 집중하게 해서 나 올수 있다.

1) 정통 삼위일체(신론) 교리와 기독론의 형성

이신칭의 교리(구원론의 전부)

사도신경은 2세기 형성. 교육과 예배에 목적. 계시의 순서대로 표현 성부 성자 성령(삼위일체)

거룩한 공회 성도의 교제에 대한 그 당시는 깨어 있지 못하였다. 사도신경은 그러한 것을 강조함.

니케아 신조 (동바신조의 상징)

마 16:16절 사도 신경의 기원

니케아 신경(315)-

지옥 강화- 사도신경 루피누스가 만든 사도신경의 본문 사도신경은 교회 안에서 형성되어 왔다

저자를 말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시고 베드로의 고백이고 사도의 기록이다. 7-8세기 까지 연결

=니케아 신조에는 예수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것을 부정(아리우스)-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 본질이 아니다.( 동일 본질이 아니다) 초대교회 최초의 신학적 이단.

325년 동방 니케아에서 모여 니케아 신경을 만듬.= 내용( 성부 성자 성령 집중 하나님의 아들 되심)

정력(에네르기아) 로고스는 하나님의 능력일 뿐 예수님은 그 때부터 존재함.

예수 그리스도는 시작(아르케)예수님은 시작이 없다 안 계신 곳이 없다.

이후에 아리우스 후예

가이사랴에 유세비우스

유사본직을 하나님의 아들 성자이지만 유사 본질이다.

예수는 시작 아버지가 낳았다. 성령이 부족하다.

마케도니우스-성령이 하나님이 아니다. 성령의 신격 부인 (성령 기계론자)

성령이 기계이다 (메카니즘) 능력에 부과하지 위격이 아니다. 성령의 신격에 대한 논쟁 성령의 확립.

니케아 콘스난티노플 신경 381년

한 가지 문제? 성령은 하나님인데 성령이 어디서 나오나

아버지에게로 만이냐 - 오직 아버지로(서방교리)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냐 (요14:16)-동방교리

아버지와 아들에게서부터 나온다라는 논쟁

결국-동방 서방을 나누는 교리이다.

아버지와 아들(589년 톨레도 회의) 아버지와아들로부터 성령이 나온다.

필레오 커 필레오게 이론이란 아들로 부터도 성령이 나온다. 발출 한다 라는 이론이다.

우리의 신앙 정통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성령이 나옴.(필레오커)

아파트레 에 필레오(에 필레오커)

 

초대교회

삼위 일체 논쟁-기독론 논쟁( 한 인격의 양성)- 구원론 논쟁(어거스틴 헬라기우스(신인 합력설)-교회론 논쟁-교황

 

 

성자와 성부의 동일 논쟁(니케아) 만세전에 나심(잉태) 참 하나님의 참 하나님 하나님의 하나님 빛 가운데 빛이 나셨으며 창조 되지 않았다.

게네 데이스 우 포에이어(메이커) 기노마이(나다)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부드럽게 부를 수 있는 노래라고 폄화 함.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조 니케아 콘스탄틴노플 신경을 비교

하나님을 부를 거룩하신 하나님 자비로우심 사랑의 하나님

나의 맞추어서 부르지 말라

사도신경

니케아

초대 교회

나의 고백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심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가-점차 나로 바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만듬

예수에 대해

그는 아버지에게 나셨다.(아버지와 동일 본질) 빛 가운데 빛 참하나님의 하나님 나셨고 만들어지신 분이 아님 초대교회 영과 통함) 영이라는 개념은 만들어 지지 않았다라는 것

하나님과 동일 본질

 

그가 나셨다 우리 자신과 구원을 의미

워즈 메드(되셨다)

지옥 강화(그가 죽으셔서 지옥까지 내려 간것이 아님. 옥중에 영들에게 전하심 예수님의 고통을 의미)

루터-승리의 행진을 했다

높아지심 -지옥강화로부터

후기본에서 나옴 배어 버린 이유

지옥에 내려간다는 것?

1.초대교회 신경에서 조차 지옥에 내려가심이 공평하지 않음

2.예수그리스도의 고통을 극심히 표현 한것이지 예수님은 죽기 까지 복종하신 분 아버지에게 복종하신 것이 죽음에 복종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에게 공로를 내어 드렸다. 우리는 하나님께 빛진자.

 

문자적 뜻이 아님(지옥까지 내려갔다라는 말)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성경에 따라서

말씀에 따라서 사흘 만에 부활 하시고

 

그가 하늘에 오르시고 보좌 우편에 않아 계심(재위)

재위 두가지 뜻

1. 특정한 곳에 계신다는 것 모든 곳에 계심 장소라는 계심 하나님 우편(특정) 그곳으로부터 다시 오심 꼭 우편에 계시는 것은 아님.

2. 통치라는 계념.

하늘에 올라 가셨다.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심

그의 왕국은 끝이 없다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함.

 

성령을 믿사오며

생명을 주시는 분

성령은 성도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

칼빈 성령을 중생의 저자라고 함.

성령론에 대한 구체적 설명

생명을 주시는 영

생명을 살리는 영(spirtus rivificans lifegiving sprit)

발출 프로시드

나오신다 아버지로 그리고 아들로부터

톨레도 회의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예배받으시고 영광 받으신다.

삼위 하나님이 받으심.

 

성도의 교통

 

원(교회의 단일성)

홀리(교회의 거룩성)

케톨리(교회의 보편성

사도성 교회를 믿는 것

교회의 4가지 특성

한교회 교호

죄사함 받기를 고백

세례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 표

 

 

몸이 다시 사는 것 죽은 자들의 부활을 바라고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저주문-니케아 신경에 있음

저주문이란 이렇게 믿지 않으면 화가 있으리라는 것.

예수가 없었을 때가 있었다(아리우스)

나시기 전에 없었다

그는 무로부터 만들어 졌다.(아우오브 낫싱- 창조)

동일 본질 반대

창조 변화 대체 될수 있다

성경은 인간 언어로 표현됨 제 2의 하나님

변화 대체될수 없다(바꿀 수 없다.) 변한다는 것.

 

 

하나님의 영원성이 전제되어 진다.

아다나시우스 신경- 니케아 신경이 된다.

존경 받는 사람은 아다나시우스일 수 있다. 초대 교회 삼위 일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추방당하고 했다 4세기를 아다나시우스를 빼놓고 말 할 수 없다.

스스로 신경을 쓴 경우는 없고 후손이 아다니시우스 이름으로 7-8세기로 내려감.

심볼로 히컹커(아다나시우스 신경 앞절)

위 나 본체라는 단어 확립

28 전반부 삼위 일체

1.케톨릭(보편적 신앙)

2.저부문구

3. 보편적 신앙(삼위 일체 일체 가운데 삼위

트리니트

하나인 가운데

4. 본질은 썩히지 않음(일체)

5. 아버지의 인격 아들 성령의 인격(삼위를 말함)

8. 지어지지 않음(인 크리아 타스)-하나님은 영이시다.

9. 무한하시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무한하시다고 삼위 일체다 개혁신앙 고백

13. 하나님의 전능성

17. 아버지 아들 성령도 주 주라는 개념 아들이라는 개념이다.

주인의 개념은 나의 생명을 사는 것.

본래 주라는 개념 여호와 아도니아라는 개념

18. 한 주가 계심

19. 기독교 진리

20. 보편적 종교(신앙)

21. 아무것으로 나오지 창조 나시지 않음 만들어 지지 않음 지어지지 않음.

22. 창조 만들어 진 것이 아닌 성자 나오심 성령 발출 하셨다. 아버지는 아무 것으로 나오지 않음

아들은 오직 아버지로부터 나셨다. 성령은 필레오케(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출 출래 나오신다)

삼위 일체 교리

23. sec d-c

25.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의 표현 위아래가 없다 전후나 상하가 없다.

26. 함께 영원

27. 셋인 가운데 하나 인 하나인 가운데 셋인(트리니티의 말)

 

29 후반부 기독론 교리

 

 

조직신학 서론(문병호 교수)-2007.5.4 (am08:00-09:30)

삼위일체 교리 정리

-아다리우스는 사표의 신학자 교리를 위한 목숨을 바친 자 수차례 추방에도 교리를 정리.

-오랜 시간 속에 신경이 정리되었다.

-신경 전반부 삼위일체 후반부 기독론으로 기록 되어져 있다.

-칼케토 신조 이전에 기독론을 잘 살펴 볼 수 있다.

-29조 우리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외 필요하난 영원한 구원을 위한 필요와 성육신은 죽었던 사람을 살리는 것이 구원이다.

-자연의 부족한 것을 이루는 자연 신학에서는 예정 교리가 없고 구원 교리가 없다. 구원을 위하여 성육신 하셨다. 기독론의 핵심. 타락하지 않아도 성육신 했다는 것은 이단. 하나님의 아들이요 사람이시오

31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다.

호모 오시우시오소 토 파트레이

세계가 지어지기 전에 나셨고 세상의 어머니로 나셨다.

32. 완전한 사람이시다. 영원/육체

이분설 =영혼은 구분 불가 육체와 영혼은 구분되지만 영혼은 항상 있음

33. 아버지는 동일하시고 (신격에서는) 가태-신격 아버지와 동등함. 동일하신 하나님 인성으로 하면 아버지 보다 열성이다. 인성 가운데서는 낮아 짐 본체 낮아 지고 종의 형상

34. 둘이 아니고 한 그리스도이시다 한 인격의 양성 인격이 둘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

둘 이다 라고 주장한 사람은-레시

35. 인성을 입으셨다.

36조 본질이 혼합 된 것은 아니다

삼위 일체 본질 본체는 성부성자 성령이다.

예수님은 위격의 형상이라는 말은 된다. 성령은 아들로 발출함.

38조 그는 지옥에 내려간다라는 것. 아다니우시스의 주장이 아니라 5-6세기에 추가 가능을 봄.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은 죽음의 극심함을 표현 한 것이다.

 

44조 보편적 신앙

보편적 신앙

근본교리- 최소한 이것을 믿음 구원자 삼위일체 교회의 몸이 되심을 믿어야 한다.

 

삼위 일체 교리 정리

하나님은 실체와 본질에서는 한 분 위격에서는 아버지에 대해 아들이지만 실체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으로 한 삼위 위격으로 계심- 한 분 하나님께서 세 위격으로 계신다.

하나님의 본체의 존재는 위격적 존재이다.

본질과 본체는 일체와 관계된다.

삼위에 관한 단어-인격 위격 위격적 존재

한 분이시고 세 존재라는 의미는 세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세 위격적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한 하나님이시고 세 위격적 존재로 계신다. 계신다는 것은 하나를 의미한다.

세 위격적 계시 삼위 계신다는 것은 세 분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 위격적 존재로 계신다는 말과

동일 본질 본체는 같다 호모 우시야라 말이다.

인격 페로소나 위격 위격적 존재는 셋이다. 실체가 없으므로 위격도 없다.

성자는 제 2 하나님이로서 하나님이시다. 본질로 보면 하나님이시다.

예수를 표현 할 때 하나님시자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앞의 하나님은 하나임의 표현 위격적 존제다(아들)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심 은 위격적 존재이신 성부로 태초에 말씀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라는 것은 삼위를 말하는 것이다. 본질일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사역에 있어 삼위 일체하나님은 하나이다. 아버지는 행동의 시작이다. 아버지는 시작이다

아들은 지혜(잠 8장)이다. 아버지는 시작이고 성령은 능력과 작용이다.

p60

아버지의 (성자) 말씀의(성자) 능력(성령)

지혜는 2 지혜의 작용은 삼위이다. 성자는 이루심 성부는 시작 성령은 적용이다.

성부를 다루는 신론 성자 일하심 성령론은 구원론이다. 삼위는 항상 함께 한다.

우리는 성경을 삼위로 읽어야 한다. 신학적 질문 신학적 가르침은 두렵고 떨림으로 해야 한다.

삼위라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존재 하지 못한다. 예배를 위해 영광을 받으시는 삼위 하나님

앞과 뒤 과 없다 동등하고 영원하다.

독특한 용어 아들 성령도 아들 관계적인 관계인 호칭

본질적인 호칭은 일체적 호칭

아버지는 아무 것으로 나타나지 않음 아들은 아버지에게 나셨고

필리오께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추/출례하신다.

본질상 무한하시고 절대적인-정리

 

칼케토 신조

니케아 회의 콘스탄니 회의 톨리도 회의(필레오케 589년 )

그전 451년 기독론 논쟁이란 예수가 하나님이시다(니케아에서 정함)

그러면 하나님이시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육신을 입고 오신 참 하나님 양성 한 인격의 양성이 있다고 바뀜. 양성의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는 것입니다.신 성과 인성이 있는 양성과 신성과 인성의 관계는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물리적(콩팥이 석이는 듯 각 자리가 있는 것 분류가 되는 것) 화학적 결합(수소와 산소가 모이면 물이 되는 것 원소가 각각 모이면 다른 물질을 만드는 것)

신성과 인성의 결합은 위격적 연합 오직 우리 하나님의 계시에만 있는 연합

신성가 인성은 물리 화학적 관계가 아닌 위격적 관계이다.

인간의 말로 존재 하지 않고 성경의 진리로 말할 수 있다

위격적 존재- 한 인격의 양성이 계시는 데 한 인격 한 위격적 존재 삼위 가운데 한 인격 한 위격 한 위격적 존재 존재는 하나이고 그 안에 성의 라는 계심(레추 라/라츄라)신성과 인성 그 자체는 존재는 아니다. 신성과 인성은 성질이다 신성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존재는 위격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성 인성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항상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 그안 에 신성과 인성이 연합 되어 있다.

서로 독립 적으로 교류 할 수 없다. 무엇을 통한 교통이나 위격을 통한 교통은 인성과 신성이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배고프다 라는 것-베고프신 예수님 안에 신성 예수님이 계신다. 인성에 속 한다 배고픈신 분은 주체 존재 예수님이시다 . 인성이 아니다. 인성으로 배고프시고 슬픈 슬프 하시는 것은 예수

신성과 인성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교수님이 무릅이 아픈 것을 느끼는 것은 아픈 성질이 있고 통증이 아픈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금식 할 때 우리와 같은 배고픔이 같은 것이 아닌 신성으로 배고픔으로 인성으로 나타남.

신성이 함께한 가운데 인성이 배고픈 것이다.

예수님의 극심한 십자가 고통을 볼 때... 그 중 좌 우 강도도 같이 죽었지만 그 십자가의 고통이 좌우 강도와 같냐는 것은 십자가의 달린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 그 신성을 사용하지 않고 인성이 극심한 고통을 당하심의 표현이고 신성과 인성이 함께 하는 것 위격적 연합이라고 정의 한다. 예수님의 고난과 우리의 고난은 비교 불가 하다.우리는 부족하고 철저하다는 것 슐라이 마허의 생각

본래의 하나님이시다.

위격적 연합이다. 신성과 인성은 위격을 통한 교통을 함

루터의 생각은신성과 인성이 자기끼리 교통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님 이신 채로 고통 받는 고통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 위격적 교통이 아닌 성이 자기끼리 교통은 아니다.

칼케토 회의 로고스의 관한 것.

-다음과 한분 동일하신 아들이며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신앙 고백해야 한다.

-신성과 인성에서 완전하시며 참 하나님이시며 영혼과 육체 인성 영혼을 신성으로 연결시키지 마라

-신성에서는 아버지와 동일하시다. 인성은 동일 본지 신모 하나님의 어머니(데오 토코스)신성과 인성을 분리함.

-마리아는 육신 사람의 어머니는 되어도 사람의 하나님이 나누 어심 잉태 하실 때 참 하나님이시고 참 아들이시다 연합 없이 변화 분열분리 없이 혼합은 썩이는 것.(둥근 원) 신성 인성이 구별 없이 썩이는 것이다. 인성과 신성은 구분 된다

분열-방을 나눔

분리는 나누어서 떨어진다는 것. 혼합 변화-물리적

분열 분리-한 인격에서 두 인격으로 분리 되지 않는 다.

조직신학 서론(문병호 교수)-2007.6.1 (am08:00-09:30)

 

일반 계시의 지지

고라의 자손은 성전 문지기를 시킴, 시편 142편 고라 자손의 시편- 문지기

일반 계시는모든 종교 문화 활동의 기초가 된다. 종교학적 관점, 참 종교는 기독교다 유일한 종교는 기독교 뿐 이다. 일반 계시 안 에서 타 종교는 그림자만 섬길 뿐이다. 복음의 예비가 된다(언어 사상 도덕을 포함) 일반은총인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 진다. 질서 의식 가운데서 하나님의 고상한 규례와 법도를 알게 한다.

일반 계시는 구원을 위해서는 불충분 하다. 이 세상에서는 족하지만,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이런 전제는 없다 즉 원형상속에서 종교의 씨앗과 하나님을 알 만한 지식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었다. 타락 후 일반은총(계시)으로 하나님께 나아 갈 수 없다.

플라톤의 동굴 비유- 철학적 비유

신학적 진리는 하나님께서 일반 계시를 바라 볼 수 있게끔 하셨다. 본래는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을 볼 수 있었지만 이것을 잃어 버 릴 뿐이지 본래는 이미 지어졌다.

일반 계시로 영생을 얻지 못한다. 영생을 위한 특별 계시가 원시 언약을 통해서 인류 영생을 약속하고 특별 말씀으로 만 나타난다.. 영생을 관한 길은 특별 계시뿐이다.

성경이라는 안경으로 나를 보게 된다. 성경으로 내가 거듭날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생은 하나님으로 백성의 완전한 삶. 성경은 지식을 준다. 없는 것을 주신다. 내 속에서 주신다. 기독교 기초로는 일반 계시가 불충분하다.

펠라기우스 구원을 얻은 조건을 주시는 것 내가 조건가운데 구원을 이루는 것이고 우리의 입장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은혜와 선물로 주신다. 일반계시로 구원에 이룰 수 있다 라는 것이 자연 신학이다.

자연 신학 기초를 확립한 신학 대전 토마스 아퀴나스- 고급스러운 이성과 저급한 이성 계급적 차이뿐, 많이 가지고 계시고 우리는 부족하다는 것이라고 했다.

신앙으로 우리가 계시를 수납하고 우리의 감각에 기록된 특별한 사건으로 보편적이고 지식적으로 아는 지식이다.

로크가 말한 경험(sensasison)-

자연은 은혜에 이르는 서론이다. 덧 붙혀 지는 은사이다. 카톨릭의 구원 개념이다.

은혜는 나의 공로에 값으로 주시는 것 - 미사 구제 성지순례 금욕 묵언 등 이것을 영성이라고 한다.

영성은 공로의 값으로 주시는 은혜의 값.

일반 은총도 귀하지만, 이것으로 기반하여 구원을 얻지 못한다. 자연 계시는 이것에 덧붙혀 지는 은사가 은혜이다.

영혼은 육체에 봉사하는 것이다.

일반 계시의 효능- 인정하지만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절충적이며 핑계할 수 없다라는 말.(우리에게 알려 주지 않았나 죄 전의 계시)

타락후에도 섬광을 이어가게 함.

카이퍼- 인류시초의 분리 과정이다. 죽은 자에게도 일반 은총은 죄를 억제하지만 죄를 말살 하지는 않다.

항구적 측면- 사람에 개입 없이 역사하는 일반 은총- 사람이 도무지 할 수 없는 것(계절,자연 질서)

점진적 측면-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일반 은총을 이루는 것(문화 사회 형성)

일반 은총은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거나 않거나 역사한다. 억제하는 능력

crc 화란 개혁 주의 견해

1. 인류 일반적인 호의

2. 사회의 개입 죄의 억제

3. 시민의 의,선,나라

바빙크

반틸- 일반 은총 견해- 먼저 주시는 은총 그것의 일반 성은 먼저 선제 해 있다. 특별한 은총 이전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가 일반 은총이다.

특별 계시-성경

특별 계시는 구원을 위해서 필요하지만 필연적 계시가 아니라 기뻐하심으로 주시는 것이다. 특별 계시 없이 구원을 이룰 수 없다.

바빙크- 일반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설명 할 수 없다.

창조 말씀으로 온 계시

1. 구약 선지자들로 온 계시 로고스 말씀 자체에 계시고 지금은 말씀으로 계심. 로고스- 육신으로 오신 말씀- 보혜사 성령-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이 땅에 오신 보혜사는 원 보혜사이다.

영원전-말씀, 이전-육신으로, 이제 보혜사로 계심 이 모든 것이 특별 계시이다.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심. 언어는 그 자체에 본질을 포함하고 있다. 신이라는 언어가 있어 신이 있다 라는 말도 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언어이다. 로고스는 그 자체로 로그스다. 이것이 계시 할 때에는 언어로 계시된다. 열방의 언어로 계시된다. 언어로 받게 하셨다.

특별 계시의 중심은 말씀이 그리스도이시다 라는 것. 그분이 구원 사역을 이루심이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나타나시고.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나아 갈 수 없고 하나님은 아들이 아버지를 들어내심이 하나님을 드러내시는 것- 삼위의 역사이다. 아버지만 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아들도 포함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들은 자신의 선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경륜적 삼위 일체를 나타남.

아들이 아니고서는 하나님과 대화 할 수 없다. 아들이 아버지의 말씀이 하나님의 계시이다. 구속 은총을 계시함. 사람이 스스로 발견하게 하지만 특별 은총 계시를 구원 은총이라고 한다.

구속계시-타락 후 비 구속계시- 타락 전 , 크게 보면 창조 타락 구속 이것이 구원 계시이다.

특별 계시는 창조 까지 포함 한다. 또한 문화 명령 경험을 포함 함. 그리고 이것은 말씀으로 계시함. 특별 계시로 말씀을 본다. 구원계시를 치유 언약의 계시라 함

원 복음 율법을 주셨다. 원복이 있고 그들을 끌어내서 율법을 주시고 이곳에서 나를 섬겨라. 어떻게 섬길 것인가? 율법 제사 삶의 절기와 법을 주심 삶의 방식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보게 함 율법이 예수를 바라보게 하고 약속을 성취하게 함

율법에는 규범이 있고 약속이 있고 성취가 있다. 믿음으로 예배를 드림. 말씀의 성취가 곧 복음이다. 복음에도 규범약속이 있는데 이것이 재림이다. 율법-약속- 복음-재림

은혜의 백성은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 구원은 죄를 내어 놓고 예수님을 알고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알아야 한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법을 알고 성취해야 한다. 갈 6:2절 서로 짐을 지라.

교회와 천사의 머리가 교회이다. 만유 안의 만유가 된다. 이것이 구원 계시이다.

특별 계시의 필요성은 타락한 백성 치유하기 위한 것. 치유하는 언약이다.

사도 바울의 죄인 된 괴수라는 고백은 주님과 관계됨을 의미하며 복음은 치료하는 의약입니다.

lament for a son 읽어라. 월드 스토프

특별 계시 나는 치유 받을 사람이고 내가 바로 치료가 시급한 사람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말씀 계시로만 된다. 영생도 말씀으로 주시고 특별 계시는 하나님 말씀이시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수납 된다. 삼위 하나님의 역사이다. 특별 계시는 계시의 내용이다.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 하나님 말씀 자체가 진리이다.

존재 의 원리의 정의를 내려라.

인식의 원리..

내가 나무를 이해하기 위해 나무에 대한 지식을 얻어야 하지만 하나님은 스스로의 진리이고 스스로이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창조가 계시되고 설명 된다. 인류 천사는 영적 창조이다. 노아 아브라함 이스라엘 민족 구원 율법 제사 이스라엘 역사를 포함한다.

 

특별 계시 방식은-직접 말씀하는 방식. 전능자( 엘 샤다)- 계시한 것이 언제 창 17장 그에게 이르시데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직접적 말씀이다. 예언의 방식을 취함. 예언을 주시고 직접 현현(주의 사자)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성육신 이전 중보자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고 중보자 성육신 전의 중보자를 말함. 영원전 부터 했다. 개혁주의 신앙과 여호와 엘로힘의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창조주 하나님을 말 할 수 있지만 예수를 말하는 경우가 많다. 언약을 주실 때 말씀으로 현현으로 자주 나타난다. 나타남의 절정이 성육신이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 원 보혜사 성령이다. 육신 말씀 보혜사 오신 말씀이 곧 계시이다. 이적 사건의 해석으로 나타남. (보기 에 좋았더라)

바빙크-특별계시를 정의

1. 드러남 -말씀으로

2. 감화 (영감)

특별 계시는 구속 계시이다 타락 전후를 다 포함 함. 자질은 신화로 빠진다. 공로로 인함

칼바르트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한다.

판네 베르그 조직신학

역사로써의 계시- 중신 신학

기독교교회사나 일반사 나 다를 게 없다. 일반 역사에도 그 역사를 본 사람도 없고 그 정황을 보고 역사로 인정한다.

부활 기록 되었고 사람들이 믿었고 빈 무덤이 있다는 것이다. 분명이 역사는 일어났기에 부활을 역사라고 이해한다. 부활의 권능을 설명하면, 어떤 자체도 역사가 아니라 역사적 의미가 있기에 역사라고 이야기 한다. 역사적 의미가 있으니 역사 이다라고 하는 것은 부활의 역사를 부인한다.

볼터만,-묵시적 소망을 부활이라는 케리그마로 나의 신념으로 나타내는 것은 잘못

부활 지저스 갓 맨- 기독론 역사를 부인한다.

1. 그는 역사를 주장 하지 않음

2. 미래의 부활 한다는 확신 미래에 부활 할 것이므로 지금 부활을 믿는다. 이것이 역사성이다.

그의 장점- 미래의 확신을 현재의 끌어내리는 것(예비적 현존) 지금 그것을 느끼고 산다는 것

계시는 역사는 미리 되어 질 일을 미리 리포트 해주는 것이다.

미래성이 역사성이라고 했다. 미래는 과거와 현재를 만든다고 이야기 함. 하나님은 자기 계시를 부인함. 계시 대신에 현재 리포트를 함. 나도 부활에 동참하기에 기쁘함.

예수 다시 사셨네. 네 부활만 강조하는 것이 인본 상승신학이다.

철처한 아래로 부터의 신학이고 계시이다. 비판 때도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하고 나중에 비판하라.

계시와 역사 계시성의 문제를 나타난 사람이 판넨 베르그

 

율법과 복음--

칼빈의 그리스도의 율법 율법과 말씀..

율법은 하나님의 뜻의 표현이고 명령이고 직설적이다. 사랑하라는 말은 사랑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사랑 하게끔 약속이 있는 것. 완전하게 지키게끔 인도한다.

경건하고(첫째 돌판) 올바른(둘째 돌판) 삶의 규범인 율법에는 명령과 규범이 포함 되어 있고, 믿음의 역사-율법이 동반되는 역사가 포함 되어 있다. 개혁 신앙은 믿음 아니고서야 구약을 이해하고 은혜를 받을 수 없다.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해야 할 것을 계시한다. 세상 윤리 타락한 현상에 맞추어서 나타나는 윤리 능력의 범위 안에서 나타내는 것이 아닌 온전한 형상으로 나타나게 함. 그래서 이것이 나타나면 저주를 느끼며 나에 대한 부정을 느낀다. 율법은 약속을 바라보게 한다. 그리스도 안의 법을 추구 또한 율법은 그리스도와 함께 역사한다. 하나님이 명령 할 때 해야 할 것을 명령함 즉시 순종하면 된다. 그 구조 안에서 애쓰게 만든다. 그 가운데 우리를 인도하신다. 첫째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율법을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은혜라는 것을 깨달을 때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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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죄적 사역 과 규범적 사역 율법의 2중적 사역 함께 사역 한다.

칼빈은 삶의 규범을 본질로 본다. 잘 못된 길을 가는 사람에게 올바른 길을 보여 주니 그것이 죄이고 저주이다. 규범적 사역가운데 정죄한다. 율법은 중생한 사람을 위한 용법으로 본질적으로 신학적 작용을 한다. 율법은 본질적 율법 삶의 규범으로 계속적 회계 본질적으로 삶의 규범으로 나타나다.

 

 

조직신학 서론(문병호 교수)-2007.6.8 (am08:00-09:30)

 

 

p24쪽

찰스 핫지- 그리스도는 율법의 중보자, 그리스도 없이 중보 할 수 없다.

칼빈 출생 500년 2009년

율법의 완성자

중보자- 율법의 완성자(구속사), 이 권능으로 우리는 신학한다.

신학적 전치적 기능.

그리스도 삼중직- 살아 계신 그리스도(왕직 제사장직) 삶의 기본이 되어서 율법 자체로 규범을 삼지 말라.

우리의 삶의 그리스도이며 그분이 율법을 완성 하신 분이다. 다 이루시고 완성하여 율법의 마침이다. 그리스도의 율법의 전가 삶의 규범이자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는 규범이다.

율법은 선한 것이고 삶의 규범이다. 율법의 자유함의 작용에도 율법의 자유함이 나타나다. 율법 자체가 부자유함을 포함 한다.

찰스 핫지- 구원론에서 율법을 다룸,

인간 의무의 완전한 규범

존롤리 교수- 하나님의 뜻의(어떠하심) 계시.

율법을 세상의 법과 연관 하지 말고 율법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고 질서이고 어떠하심으로 나타내심. 상과 징계모두 하나님의 어떠하심이다.

이 모든 어떠하심의 지식이 살아계심과 그 분 자체는 숨겨져 있지만, (큐리어스). 불의 혀 바람 비둘기 빛 세미한 혀 성령의 모습 다양하다. 이유는 하나님의 형체가 없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복종에 이르도록 구원 받았다. 하나님의 뜻은 거룩함이다.

노모스와 로그스로 이해하지 않으면 혼동하기 싶다.

뻘콤- 오래 평범한 책 기독교 강요 등 읽어라

율법의 세가지 용법.

남 장로교 -뎀리

하나님의 어떠하심.

카스펠 로 가스펠- 칼바르트

계시적 측면 구원사적 측면에서 율법이 우선 되므로 구속사적인 계념을 생각하지 않고 복음을 먼저 받아들이고 율법을 받아들임으로 구속사 계념으로 해석한다- 칼 바르트 생각

오트베버 조직 신학 자유 신학이다.

변증 신학- 말씀이 부딪히므로 그러하다. 칼 바르크 생각

복음은 그리스도가 중보자 역을 수행 전체 구원의 합이 복음이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인격과 사역 포함 구원론 까지(이신칭 이준 정과의 원리)도 복음이 포함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구원의 선포가 복음이다.

가스펠 유안 겔리온-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거져 준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복음은-그리스도의 계시된 은혜의 거룩한 선포.. 구약 시대의 약속된 증거 예수가 오셨다,. 중보자가 이루시고 행하심(공로로 우리에게 이루심.),

복음의 계념을 정리하라

율법과 복음

예표- 바라만 보는 것 그때 계신 예수님도 보는 것(제사)

현제 지금 계심이 드러나심과 그리스도의 성취를 보라 . 율법의 의는 우리를 절망케 한다. 우리를 바라보게 하고 율법의 약속의 성취가 바로 복음이다(초림). 복음의 계시된 약속의 성취가 바로 종말이다(재림).

복음은 그림자 실체 유비와 약속과 실체성취의 유비가 있다.

그림자와 실체가 함께 한다.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실체가 있다는 것이다. 동시대 구약에 제사도 그림자의 모습. 지금이라는 것.

약속과 성취의 유비- 계속 바라보는 것이 이루어지고 지금도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역동성이다.

카톨릭 신인 합력설- 선행을 강조함. 자질 만큼 은혜를 주신다는 주장이 카톨릭이다..

합력적 은혜-신학적 의미가 있다

로마 카톨릭에서 칭의 받을 때는 의미가 있다는 것 나와 하나님과 힘을 나눈다는 합당한 은혜는 성화와 관계가 있다. 구원 받은 백성은 자기 행위가 자기 공로가 되고 칭의 단계는 하나님의 도움이고 성화는 자기 공로를 쌓아간다. 카톨릭의 구원의 계념이다. 하나님은 성화의 개념에서 뒤에서 서포트 해주는 역할을 해준다. 간접적인 도움만 준다는 주장한다.

루터- 율법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눔

루터는 엄밀히 구분한다. 고유 십자기 신학.

율법이 성도들에게 작용하는 것이고 이것을 아는 것이다.

윱법의 기능 신학적 기능 정치적 기능 규범적 기능-칼빈은 중요하다고 주장

구속사적 이해는 다 이루시고 지금도 증거 하시는 것이다.

결국 구약의 율법 신학의 율법은 기독교 자유의 모습으로 삶 구속의 모습이 아니라 자유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죄의 종은 노예 의의 종은 자유자의 삶이다.

자유의 멍에-그리스도의 자유-칼빈 율법의 속박으로 자유

순종하는 자유 율법의 계시로 순종하는 자유와 칼빈의 자유는 향하는 베푸는 십자가를 지는 자유 행하는 자유를 강조한다. 이런 개혁 신학의 정신이 세계를 이끌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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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자연과 은혜

은혜는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주셨다. 사선적 은혜 낮게 지었다가 계속적으로 끌어 올림

기초는 자연이다. 은혜는 덧붙혀 지는 것이다. 덧붙혀진 은사라고 한다. 결국 하나님의 아는 지식도 자연적 지식이 더 해저 마지막 하나님의 직관(견식) 하나님을 보는 것 이 생각은 자연가운데 덧붙혀 진 은혜가 공동으로 이루어지고 자질이 계속 끌어 올려지는 것이고 앙양(점점 높아 지는 것) 마지막 하나님을 보는 직접보는 (직관) 이 상태가 신화 상태 이고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이 된다는 카톨릭 신화 사상이다.

자연에 대한 잘 못된 이해이다. 아퀴나스 은혜는 더 높은 상태로 끌어 올린다(인양)고 주장함. 끊긴 상태에서 끌어 올려 지는 것이 은혜이다.

아퀴나스- 우리와 같은 인성이 되시고 인간이 되시고 사람으로 하나님이 되었다 라는 관점.

예수님도 인성이 점점 신화가 된다는 주장이 자연사상의 주장.

1. 초자연 은혜

2. 계시의 통보(교통) 하나님의 존재의 통보가 잘 못됐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와 교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는 지식도 겸손한 지식으로 나타나다..

지복 직관이란 마주 보는 것이 신이 된다는 것-카톨릭 신학.

칼 바르트- 계시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만나서 이루어진다는 주장.

계시는 자질을 쫓아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질로 나타난다. 보편 구원론을 제시한 칼 바르트 양의 차이의 구원이다.

객관적 준비-성경

계시의 준비 아직 계시가 아니다. 성령이 임했다.(말씀을 받을 준비) 이 둘이 부딪힐 때 아는 것 그래서 자질 만큼 보는 것 이것이 실존적 의미이다.

실존적이란 의미 주관의 상화의 상태로 쫓아감. 그때그때 진리가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재의 원리는 말씀은 진리이다는 것을 부정한다.

계시를 부정하는 것은 계시주로 신을 부정하는 사람 자연 신학자들의 주장이다. 계시물을 부정하는 사람 존재원리를 부정하는 사람이다. 자연 계시를 주장 하는 사람은 특별 계시를 부정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지각만 인식한다.

 

성경론

십이경 웨스트민스트 고백.

1. 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기뻐하심으로-비필연적 개시)은 하나님이 저자이고 영감으로 감동으로 된 것

2. 성경과 계시는 차이가 없다.

3. 하나님 말씀을 담고 있다(칼바르트)여기서 말씀은 계시 자체이다.,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 역사적 변증 말씀과 성령의 역사(개혁주의 주장)와 성경 자체이다. 성경 자체의 말씀에서 성령이 말씀하심이고 철학이 보조 학문은 되지만 철학이 성경의 부족함을 채울 수 없다. 보조적 학문이 되는 철학은 철학으로 철학이 성경에 의해 보충 된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논증을 할 때 성경을 말할 때 세상 지식으로 말하지 말라.

특별 계시는

직접적 특별 계시- 하나님이 기록하기 전에 주신 진리( 내양을 먹이라. 그 말씀 자체)

언어로 기록 되지 않는 것을 의미함.

경으로 특별 계시- 그라마타(기록되다) 로그스 레마로 번역 된다

동격 말씀이고 살아 계신 능력 진리를 창조하심 계시로 나타나심의 말씀이다. 성경은 어떠하다는 것이 없다. 충만한 영감 기록도 계시의 기록이다. 나에게 온 느낌 진리 직접적 계시도 영감이고 기록된 것도 영감이다.

기록하는 이유? 변조와 파괴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성경 무오의 핵심이 영감설이다. 문자까지 연결 되었다는 주장이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모든 성경은 데오 포니 마스

1.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모든 성경은 란 해석은 감동으로 되지 않은 것도 있다는 전제가 있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 옭은 해석이다.

일부 영감설을 주장 하는 자와 전체 영감설을 주장하는 자 1

워필드- 생기를 불어 넣었다는 것 저자의 영감과 성경의 영감까지 포함했다고 주장한다.

작품 자체에 하나님의 영감이다. 사물을 보고 느끼는 것과 저술 할 때로 영감이 있다.

워필드의 이론.

영감은 성경의 저자만 알았지만, 무엇을 받은 것을 그것을 어떻게 기록했음을 주장함.

성경의 심적 기능을 강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기록함.

칼빈의 딤 3:16절 해석-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그의 입술로 말씀 하셨다.

계시 자체에 영감 친히 말씀하심이다.

워필드

칼빈과 워필드의 성경 영감론을 공부해보라.

추론적 증명? 계시가 주어지는 것이 다르다

성경적 증명? 하나님이 말씀하심. 임하고 보이시는 것 이말 (3800개)

계시 기록도 영감 됨. 기록자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이것을 선포한다.

역사는 아니고 규범만 영감 되었다는 주장은 역사론적인 주장이다.

출자 영감- 말씀 영감

성경저자는 하나님이고 원저자 인간 저자 유기적 영감 성경 상황과 형편에 맞게 기록함.

문체 스타일 환경까지 주장하심. 요한이 가장 상세하게 표현( 비자 베드로 모습 변화 기술)

환경까지 주장 하시고 기록하게 하신 것이 유기적 영감이라 함(달란트 그의 모든 것을 포함)

출자 영감의 반대 기계적 영감

전체적인 영감이다.

영감은 규법(교리)적 영감-가르침

역사적 영감 이 둘 다 진리이다. 역사 비평가들은 역사적 성경을 부인함. 가르침만 주장함.

3. 출자 영감 사상은 영감 되었으나 언어는 영감 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성경의 무오로 영감은 저자로부터 오류를 범하지 않게 함으로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한다.

핫지 증거를 주장함 성경적 귀납적 방버- 성경 사실에 중점하여 성경의 경험으로 주장하게 됨.

워필드 성경 자체를 강조함. 성경을 내쉬었다(호흡했다)

문장의 오류가 없다 역사적 도덕적 오류가 없다 무오의 양상들 원본의 오류가 없고 성경 무오의 이유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무오하다.

정경(캐논-갈대 자)

딱 맞는 것. 사도적 전통, 영감성이 정확한 책

갈 6:16절 규례가 카논이다. 분량 등

신약 시대 사용 신앙의 규범 진리의 규범(카논) 초대 교회 때 사용

아다니우스 성경의 목록으로 대신사용.

위경- 저자가 참인지 거짓인지 모른다.

외경- 정경적 권위의 주장. 내용이 잘 못된 것.

웨스트 민스트에서는 외경을 성령의 영감에 의하지 않은 것이라 주장.

성경의 일부분이 아니다. 벨지 신앙 고백

정경에 일치하는 한 외경을 읽어라.

일부만 옳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감이 아니다. 시대인의 중요한 규리가 그리스도의 삶의 교리를 포함 하라. 카톨릭 주장. 외경 규정

이차적 정경이 나중의 정경이다. 정경 속의 정경이 최고가 아닌 부정적 정경 속의 일부만 인정하는 것이다.

말시온 초대 교회

구약 모든 다른 사도를 부정하고

말시온 계시를 축호함 몬타니우스 신비주의 계시를 확대했다.

정경속의 정경 말시온

롬 1:17절 주장한 루터의 주장의 오류- 예수를 설교하고 끌어내는 것이 정경 이다라고 주장한다. 예수를 얼마나 끌어내느냐.. 약 지푸라기 서신이라 주장한다.

칼빈은 66권을 다 인정함.

종교 개혁자 킴히는성경의 독특성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권위를 나타남. 돈네 뎀니(남장로교회) 북장로(찰스 핫지)

사람의 음성으로 들음. 성경의 엄밀한 내적 원리로 나타남.

순종으로부터 나옴. 성경 성령 순종 존재의 변화 같이 생각하라. 말씀 성령도 같이 생각하라.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고 역사와 규범을 같이 포함 하고 완전성 충족성을 포함 하고 계시가 충족 되어서 새로운 계시가 없다. 계시가 불충분 하다라고 주장 하는 사람은 성경이 불충분하다고 주장 한다. 이유는 성경의 무지 때문이다. 성경을 축소하는 사람은 내가 계시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전통은 사람의 말이라는 것이고 유전이라는 말이 전통이다. 말씀을 기초로 한 삶을 의미하지만 유전이 말씀을 대신하여 유전이 말씀보다 위에 있다.

성경이 교회를 필요 한다. 교회 중심- 카톨릭 주장

우리는 반대- 성경은 예매한 것이 아니다. 성경의 명료성 믿음 생활에 필요하다. 교회가 지도해주어야 성경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잘 못이다. 성경은 성경의 영감에 기초로 하여 성경 가운데 성경을 읽어라.

 

6장

성경 해석- 성경의 조명으로 해라.

성경이 성경의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 성경 해석의 오류- 필로 오리겐 신화적 해석이다.

볼트만

바람직한 해석- 믿는바 행할 조항 소망할 조항을 함께 파악하라.

기독론 적으로 해석하라. 종말

종말론은 기독론의 연장이다. 마지막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본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 하나님 자신의 말씀. 정언으로 봄.

하나님의 말씀이 베르뎀.(된다)

사실 영감이 되고 출자 영감은 인정하지 않는다.

바르트 계시의 진리성을 인정하지 않고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은 잘 못이다..

8장 로마 카톨릭 교회

주교의 계승- 교황의 자리를 이어가는 것이고 유전들을 계승하며 교회의 승인 교회의 해석 중요한 교리다. 로마 교회 공의회 무오를 주장함. 교황은 무오 할 수 없다.

펠라니우스 -하나님은 교회의 필요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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