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Chapter VI. 중생(Regeneration)

예림의집 2013. 10. 14. 20:35

 

Chapter VI. 중생(Regeneration) 2012222080 2학년 8반 김정민

 

유효한 부르심의 논의에서 논의의 초점은 신적 기원과 작용에 있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어 그 아들과 연합케 하시므로 우리에게 구원의 삶이 시작되었다. 즉 우리의 존재 외적인 데에 -즉 하나님께- 논의의 초점이 있었다. 이제 그 초점을 우리 쪽으로 옮기려 한다. 유효한 부르심의 결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다. 그 변화는 이 전에 비해 너무도 엄청난 차이를 가져왔다. 영적으로 죽었던 자들이었고(엡 2:1), 하나님께 대해 원수였던 우리가(롬 5:10) 아들과 교제하는 대상이 된 것이다(고전 1:9). 우리 쪽에서 일어나는 그 변화에 대해 앞으로 논의를 하게 될 것이고, 그 첫 번째 논의 주체가 중생이다.

본 장에서 우리는 먼저 중생의 교리가 어떤 전제와 대비를 이루는지 살핌으로써 중생의 필요성에 대해 논할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흩어져 있는 중생의 개념을 살펴본 후 요한문헌에 나와 있는 중생의 개념을 집중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중생이 다른 구원 은총들과 어떤 유기적 관계를 갖고 있는지, 마지막으로 중생의 교리가 주는 실천적 의미를 다루도록 하겠다.

 

I. 중생의 전제

성경에서 두드러지게 전제되는 사상 중의 하나가 인간의 타락이다. 중생의 필요성은 바로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은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 관점이 개혁신학의 중요한 특징이다. 전적 타락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아담의 범죄에서 비롯된다. 중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사상과 함께 칼빈주의 양대 교리 중의 하나로 불리는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의 교리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전적 타락을 흔히 완전 타락(absolute depravity)로 오해하는 경우들이 있다. 완전 타락이란 사탄이나 지옥에 떨어져 있는 죄인들의 상태처럼 더 이상 회복의 가능성과 여지가 없는 타락을 말한다. 완전한 타락이 정도(degree)의 개념인데 반해, 전적 타락이란 범위(extent)의 개념이다. 즉 우리의 존재 영역에 있어서 타락의 결과가 미치지 않은 영역이 없다는 의미에서 전적(total) 타락이다. 그렇다면, 로마 가톨릭(Roman Catholic)에서 타락을 영적인 것으로만 보아 인간의 이성은 타락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개혁신학이 말하는 타락은 영적 영역뿐만 아니라 이성, 의지, 감정, 심지어 육체적 영역을 포함한 우리의 존재 영역 전체에 끼친 영향이다.

전적 타락은 전통적으로 개혁주의 인간론에서 오염(pollution)과 죄책(guilt)의 결과를 가져왔다고 설명한다. 오염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죄에 오염된 상태 즉 죄성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을 말하며, 죄책은 죄에 대한 형벌로 모든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는 것, 즉 죽음을 말한다. 비록 우리의 전통이 구분하여 설명하는데 익숙하며 그 구분이 분명 유익을 주는 것이 사실이나 주의할 것은 죄성과 죄책이 모두 타락의 한 결과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이 죄의 결과는 한마디로 죽는 것이라고 했을 때(창 2:17), 죄성과 죄책을 구분하지 않는, 즉 죄성과 죄책이 모두 죽음으로 대변된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자 죽음은 현실 속에서 여러 모양으로 나타났다. 자기들이 벗은 줄 알게 되었고(창 3:7),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고(8절), 하와에게는 해산의 고통이(16절), 아담에게는 노동의 수고가 가해졌고(17절), 선과 함께 악도 알게 되었고(22절),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23절), 결국 흙으로 돌아갔다(창 5:5). 이 모든 것이 창세기 2:17의 “죽음”이 경고했던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그 모든 달라진 결과가 그들 후손 모두에게까지 미친 것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이해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pollution) 죽게 되었다고(guilt) 압축하고 있다(롬 5:12). 여기에서 개혁신학의 죄성과 죄책의 구분이 성립된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인간이 날 때부터 죄성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에 대해 “죄에게 종노릇 한다”고 표현한다(6절). 죄의 종 또는 노예가 되었다는 말은, “죄가 너희 몸을 지배하는 것(12절)”, “몸의 사욕에 순종하는 것(12절)”,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게 되는 것(13절)”, “죄가 너희를 주관하게 하는 것(14절)”,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는 것(19절)”, “의에 대하여 자유로운 것(20절)”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모든 표현이 얼마나 전적(total)으로 최가 미치지 않은 영역이 없고, 그래서 우리의 몸 전체가 얼마나 죄의 세력과 지배에 매여 있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성향(inclination)의 관점에서 보면, 죄인은 즉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은, 전적으로 죄의 성향이 지배하고 있어서 그 성향에서 나오는 모든 마음과 의지와 행동은 죄뿐일 수밖에 없다. 흔히 쓰는 마음이 바탕이라는 말로 표현하면, 마음의 바탕이 죄에 매여 있어서 죄가 원하는 대로 의지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으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지 않으려 할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다. 신적이고 영적인 일을 알지도, 보지도 못하므로, 좋아하거나 추구할 수도 없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함께 기뻐하지도 않는다. 죄성이 거스릴 수 없는 근본적 성향이 되기 때문에 그 죄성에서 나오는 모든 행동은 죄뿐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태가 우리가 흔히 신앙생활 속에서 말하는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이다(엡 2:1). 육으로는 살아서 호흡하나, 하나님께 대해서는 죽어있는 상태이다. 이는 정영 죽으리라 한 결과로 죄성이 지배하는 현실이 된 것이다. (죄책의 결과는 칭의와 연관이 있는데, 칭의의 단원에서 다룰 것이다.)

개혁신학이 말하는 중생이란 전적 타락의 결과인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과 연관이 있다.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특히 복음으로의 초대에 대해, 반응을 할 수가 없다.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죄의 성향과 권세를 인간 스스로가 절대 극복할 수 없기에, 전적으로 누군가가 그를 노예처럼 잡고 있는 죄의 권세와 성향으로부터 풀어주어야만 한다. 그 일을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 곧 그리스도이 영이시다. 부르심이 우리의 존재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중생은 우리의 존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성령의 내주로 말미암아 죄의 사슬이 끊어지고, 죄의 지배를 물리치고, 죄에 종 되었던 우리를 해방시키셨다(롬 6:18, 22, 8:2, 계 1:5). 이것이 전적 타락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중생이며 전통적으로 설명해 온 방식이다.

개혁신학 전통에서 중생을 영적으로 죽어있던 우리가 성령의 내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설명하는 방식의 논의는 그 초점이 다분히 성령이 하시는 일과 타락이라는 인간의 현실이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효과가 있다. 앞서 지적한 대로 중생을 전적 타락과 대비시켜 설명하는 개혁신학의 특징이 잘 반영된 방법이다. 그러나 중생의 은혜를 가져다주는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므로, 같은 내용이겠지만, 중생의 의미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역과 연결 되는지에 대해 조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앞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유효한 결과를 낳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연합의 실제적 효과는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중생, 의식의 차원에서는 믿음의 결과로 나타난다고 했다. 조금 전에 말했던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다. 즉 유효한 부르심의 논의에 이어서 덧붙인다면, 그리스도의 영의 내주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고, 그 연합의 효과가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중생으로, 의식의 차원에서는 믿음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혁신학의 논의의 전통을 계승하되 중생의 은총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누리는 구원 은총 중의 하나님을 간과하지 말 것을 강조하며 우리의 논의에 임하려 한다.

 

II. 그리스도의 중생 사건

신약성경은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실 것에 대해서(마 27:63, 막 8:31, 눅 24:7, 요 2:19, 20:9) 그리고 다시 살아난 것에 대해서(행 10:40, 17:3, 31, 26:8, 롬 6:9, 13, 8:34, 14:9, 고전 6:14, 15:4, 12, 20, 엡 1:20, 살전 1:10, 4:14, 딤후 2:8) 풍부하게 증거하고 있다. 또한 “다시 산다”는 의미가 종종 그리스도와 그가 하시는 일로 돌려진다(눅 9:8, 요 6:40, 44, 54, 고전 6:14, 15:42-44, 52, 고후 4:14, 골 3:1). 성도가 다시 사는 문제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함이 신약의 일관된 강조이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의 마지막 부활의 근거일 뿐만 아니라, 성도의 중생도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중생의 관저에서 생각해 볼 때, 그리스도의 중생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중생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중생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가능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적 표현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속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리스도의 중생 사건이라 할 때, 우리의 경우처럼 영적으로 죽었다가 그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의미가 아니라, 구속사적 사역에서 그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관점에서의 시도이다. 그의 기독론적 사역에 있어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사심이야말로 성령이 우리에게 가져다주실 구원론적 중생의 은총의 근거가 되신다.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중생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과장이 아니라, 성도의 중생이 비로소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있는 것이 확인되는 것이다.

로마서 1:4은 성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아들을 살리셨다고 명시해 주고 있다. 디모데전서 3:16에서 (나중에 칭의를 다루는 장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겠지만)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의돕다하심을 받으심”은 성령에 의해 부활되심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의미가 가장 잘 부각되는 본문은 로마서 6장이다. 4절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셨고”, 9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 10절에서는 “그가 살아나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나심”이라고 말씀하신다. 같은 문맥에서, 그리스도의 살아나심과 함께 우리도 살아났다고 한다(4, 5, 8, 11절). 그리스도의 중생 사건 안에 우리의 중생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스도의 중생 사건 안에 우리의 중생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스도의 중생 사건과 우리의 중생에 있어 공통적인 것은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성령의 능력이 역시 우리를 다시 살리신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다름 아닌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던 동일한 능력임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을 위로하고 있다(엡 1:8020).

바울이 성도의 중생을 그리스도의 중생 사건, 즉 부활에서 찾는 것이 베드로의 증거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베드로전서 1:3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고 말씀하신다. 베드로는 성도의 중생의 가능성이 정확하게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데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피력한다고 하겠다.

성령의 내주로 말미암아 중생이 있게 된다고 설명하는 것이 전통적인 방법이지만, 이 자체가 가능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성도의 중생이 있기 때문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통해 성취하신 중생이기에(historia salutis)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심으로 구이 각자에게 중생의 은총을 적용하시는 일(ordo salutis)을 하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속에 성도의 중생이 있음을 논할 수 있는 것이다.

 

III. 중생에 대한 성경의 증거

그리스도의 부활이 성도의 중생을 완성한 것이라면, 결국 그것은 성경이 갖는 중요한 관심사임이 틀림없다. 즉 성경은 그 사실에 대해 처음부터, 비록 희미하게나마,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 관점에서 성경이 중생에 대해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지 살펴보려한다.

구약에서 중생의 개념을 논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게 보일 수 있다. 구약의 강조가 창조(creation)에 -천지 창조, 아브라함을 부르심, 다윗의 왕국 건설 등에- 있듯이, 재창조(re-creation)의 의미인 중생을 구약에서 찾는 것이 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특별히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점에서 중생을 생각하려 할 때, 구약백성에게서 그리스도와이 연합의 체험을 논하는 것이 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신약에서의 성취인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구약에 그대로 대입하여 찾으려는 시도는 구속계시의 역사성과 의도에 부합하지 않는 일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바라보는 전조가 구약에 전무한 것은 아니다.

구약백성이 언약 공동체였다는 사실이 우선 연합 개념을 전개하고 있다. 그들이 언약의 조항(율법)들을 지킬 때, 연합이 유지되고 같은 공동체임이 확인되었다. 연합(언약)은 축복과 번영을 약속했고, 연합(언약)이 깨지는 것은 추방과 죽음을 의미했다. 언약에 대한 순종이 연합을 누리는 구약적 방편이었다. 그래서 구약에서의 연합은 최종적인 것이 못 되었다. 구약 백성은 단지 보다 더 큰 연합을 바라 볼 뿐이었다(렙 31:31-33, 32:38-41, 겔 11:19-20, 36:25-27).

비로소 신약에 와서야 언약이 담고 있던 연하이 완성되었다.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주신다는(욜 2:28) 약속이 성취됨으로서(행 2장) 누구든지 예수를 믿어 그와 연합할 수 있게 되었다(행 2:21). 중생의 관점으로 보면, 누구든지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무로 거듭날 수 있게 된 것이다(고후 5:17).

구약에서 찾을 수 있는 중생 개념은 신약과 비교할 때 아직 미숙하다. 예를 들어, 각기 의견의 차이가 있겠지만,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거넌 사건(출 14-15장), 불뱀에 물린 자들이 놋뱀을 바라보고 살아난 사건(민 21:9),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린 사건(왕상 17장), 문둥병에 걸린 나아만의 피부가 고침을 받고 어린 아이 살같이 회복된 사건(왕하 5장), 느헤미야를 통해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일(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의 귀환(사 11:11, 렘 29:10, 겔 39:28) 등에서 중생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다분히 부분적이고, 이 땅에 소간 방법이다. 그러나 그 방법 자체가 구약 계시가 지니고 있는 특징인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각기 중생적 의미를 지닌 사건들이 모두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과 재창조로 성취되는데 그 초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스라엘)과 피조물(창조)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는 데에(롬 8:19) 구약의 기대가 있는 것이다.

신약에서 중생의 의미는 구속사적-종말론적 새 시대의 도래의 특성과 함께 간다. 즉 구약이 기다렸던 새 시대의 의미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의 완성에 의해 결정된다. 이 점은 신약의 각 저자에 따라 그 강조점의 차이가 있다.

복음서 중 마태복음에서 중생과 관련한 증거를 찾기란 쉽지 않지만 19:28에 “세상이 새롭게 되어”라는 표현을 들을 수 있다. 중생 또는 새롭게 태어남 등의 의미인 팔링게네티아(헬라어)는 신약 전체에 단 2회만 등장하는 단어이다. 아쉽게도 원문에는 “세상”이라는 단어는 없고 단지 새롭게 됨, 또는 새롭게 될 때 등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문맥 상 새롭게 됨의 의미가 종말론적 사건과 연관이 있다고 판단이 되므로, 이 구절에서 말하는 중생의 의미는 개인 구원의 차원보다는 범 우주적 차원의 회복을 의식하고 한 말씀이라고 판단 할 수 있겠다. 그 외에 복음서에서는 요하문헌을 제외하곤(요한문헌은 아래서 별도로 다룰 것임), 달리 중생적 의미를 찾기가 어렵다.

바울서신에 있어서 중생의 의미로 쓰이는 대표적인 단어가 “새롭게 함, 새롭게 하심(롬 12:2, 딛 3:5)”과 “중생(딛 3:5)”이다. 비슷한 의미로 “새 생명 가운데(롬 6:4)”에서 새로움, 새 것의 의미가 있다. 공통적으로 옛 사람, 옛 삶, 옛 모습, 옛 풍습에 대한 단절적 대비가 강하다. 이것은 바울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시작된 새 삶의 특징은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미(중생)와 새로움 가운데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는 부분(성화)으로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다. 이 때 새롭게 태어남이 새로움의 성장을 위한 기반이 된다. 참고로, 칼빈의 경우 중생의 의미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중생의 의미보다 훨씬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새롭게 태어남뿐만 아니라 날로 새로워지는 성장의 전 과정 즉 구원의 전 과정을 중생의 관점으로 이해하고 있다.

베드로도 중생의 의미를 의식했음이 분명하다. 베드로전서 1:3에서 “거듭나게 하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23절에서 “거듭난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되어 있다. 먼저 앞서 보았듯이, 베드로가 성도의 중생을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생각하였음을 지적할 수 있다.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의 중생의 대비를 더 잘 살릴 수 있다고 생각된다. “죽은 자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풍성하신 긍휼을 따라 우리를 산 소망을 갖도록 중생시키셨다.”그리스도의 부활이 구속사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중생 사건이 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을 위한 중생의 근거가 된다. 다음으로 강조할 수 있는 것은 베드로가 중생과 말씀 사역을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성도의 중생이 말씀과 무관하지 않았음을 집고 넘어가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특히 “썩을 씨”와 “썩지 아니할 씨”의 대비에서 “썩지 아니할”의 의미는 바로 이어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항상 있는”을 통해 결정된다. 특별히 1장의 문맥 속에서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을 썩지 아니할 것으로 부각시키는 것은 그리스도가 썩지 않으시고 부활하신(3절, 21절) 데에 성도의 중생이 근거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이상과 같이, 성경은 분명히 중생에 대한 의식이 있었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을 통해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에 기대를 모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중생에 대해 가장 구체적으로 증거하는 것은 요한을 통해서라고 할 수 있겠다.

 

IV. 중생의 중요성

“새로워짐(regeneration)”은 요한신학의 특징적인 주제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우리가 이제 이 땅에서 하늘나라의 삶을 삼다는 강조가 요한문헌에 나타나는 중요한 사상 중의 하나이다. 요한은 그 종말론적 삶의 시작인 중생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다. 소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와 중생이 요한에게는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을 중심으로 중생의 교리를 논하는 것이 치우친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성경 가운데 중생의 주제를 가장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본문이 거의 이견의 여지없이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와 나누는 대화이다.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소개되는 니고데모가 아마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밤에 예수를 찾아왔다. 예수가 남다르다고 생각한 것은 그가 행한 표적들이 하나님이 보내시지 않았으면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예수께 대해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이라며 나름대로 예의를 표했다(3절). 비교적 정중하게 나오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그를 충분히 당황케 하는 말씀이었다. 스스로의 말처럼 나이 많은 자신에게 다시 태어나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 예수님의 말씀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거듭나야(born-again) 할 필요성을 언급하셨다. 이때 중생의 필요성을 설명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이중부정의 방법을 취하셨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3절)”, “들어갈 수 없다(5절).” 그리고 그 강조의 세기는 즉 거듭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가 “육”과 “영”의 대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의해 달려있는 것으로 말씀하셨다(6절).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육”과 “영”의 대비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데, 여기에서 요한이 사용하는 “육”은 흔히 바울신학에서 볼 수 있는 죄성을 가진 “육”으로 보아야 하느냐, 아니면 단지 피조된 인간의 연약과 한계로 보아야 하느냐의 문제가 생긴다.

잠깐 “육”의 의미를 규명하기에 앞서 “영”이 무엇인지부터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 5절과 6절 사이에 한글번역이 혼란을 줄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5절에서 “성령으로”, 6절에서 “영으로”, 그리고 8절에서 “성령으로”는 모두 같은 대상을 일컫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5절의 “성령”과 6절의 “영”은 동일한 것, 즉 성령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 5절과 6절을 이어서 읽으면,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데, 육으로 육의 일을 하고 성령으로 영의 일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6절의 “영”이 무엇인지는 해결되었다. 즉 중생의 필요성의 근거로 육이 할 수 있는 능력의 범주와 성령의 능력의 범주가 대비가 되면서, 중요한 결론은 육은 이 일을 할 수 없지만 육이 못하는 것을 성령이 하신다는 것이 핵심의 내용이다.

다시 “육”의 문제로 돌아와서, 원래 재기되었던 질문은 성령과 대비되는 “육”에 죄성이 전제되느냐 아니면 죄를 고려하기 이전의 피조물로서의 육이냐의 문제이다. 둘 다 가능하겠으나 강조의 차이가 있다.

먼저, 창조된 상태의 피조물로서의 “육”으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다. 6절에서 8절로 진행하는 내용의 초점은 성령에 있다. 특히 어떻게 사람이 거듭나는지의 문제가 성령의 신비스러운 능력과 방법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그 성령의 신비스러운 능력과 방법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그 성령의 능력이 육의 능력의 한계를 뛰어 넘는 방식으로 대비되고 있다. “바람이 불고 싶은 데로 불지만, 너희는 그 소리를 들어도 그 바람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사람이 거듭나는 일은 육의 능력의 한계로는 어떻게 가능한지 알 수도 없는 일인데, 성령이 하시는 일이 그렇다는 뜻이다. 육은 육의 일만을 이루는 것이 육의 능력의 한계이기에 성령이 하시는 일을 알 수 없다는 강조가 부각되고 있다. 직접적 근거는 아니지만 31절에서 “위로부터”와 “땅에서”의 대조를 보면, 굳이 죄로 물든 땅이 아닌 창조된 그대로의 땅으로서 하늘과 대조가 되면서, 땅에서 나온 것이 하늘의 것을 이룰 수 없는 한계를 분명히 하는 수사적 도구가 됨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6절에서 “육”의 의미는, 죄로 인해 더 망가진 육이 아니더라도, 피조된 상태로서의 “육”의 한계를 반영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죄성을 지닌 “육”의 의미로 생각하는 경우이다. 5절에서 거듭남의 방편으로 “물과 성령으로”라는 표현이 있는데, 성령과 짝을 이루는 “물”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5절의 “물”을 흔히 물세례로 이해하는 경우들이 있다. 죄 씻음의 상징인 세례요한의 물세례로 보는 경우이다. 신약성경도 세례요한의 세례를 “회개의 세례”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도 그렇게 보는 것이 힘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막 1:4, 눅 3:3, 행 13:24, 19:4). 그러나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예수님이 성찬(The Lord's Supper)을 제정(institute)하신 것처럼, 요한의 물세례를 교회의 공식적인 성례로 세우신 적은 없다. 오히려 예수님이 여기서 물세례를 의미하셨다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적이 있는 예수님이 “세례”라는 말을 굳이 안 쓰시고 “물”이라는 단어로 대신하실 이유를 찾는 것도 어렵다. 또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달리 세례를 “물”로 칭하셨던 적도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얘기하셨을 때,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니고데모와 예수 사이에 “물”이라는 단어를 통해 형성되는 공감대가 존재 했다는 점이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지도자”로 소개되고 있다. 니고데모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잘 몰라도, 적어도 “물”로 거듭나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할 때, 그에게 “물”은 정결의 의미로 받아들이기 쉬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물은 구약에서, 특히 출애굽기와 레위기에서, 물로 씻는 정결의 예식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출 29:4, fp 8:6, 겔 36:25). 물로 씻는 정결예식이 필요한 이유는 더러운 것으로 오염되어 부정해졌기 때문이다. 즉 물은 구약의 정황에서 거룩의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한 한 방편임을 유대인이면 쉽게 알 것이라는 공감대를 예수님은 고려하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문맥에서 예수께서 “물”과 “성령”을 대비시키신 것은 단순한 수사적 기교가 아니다. “물”과 “성령”이 정결, 즉 죄를 씻는 의미로 연결이 되고 있는 것이 분명한 만큼 우리는 여기서 “물”이 하던 기능이 “성령”으로 옮아가는 진행을 보게 된다. 구약의 율법 하에서는 물이 정결의 의미 즉 죄를 제거하는 의미를 나타낸 반면, 신약에 와서 이제는 성령에 의해 죄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예언적 선포가 함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구속사적 성취와 완성에 근거한 대비요, 구약과 신약의 대비요, 구약적 집행(administration)과 신약적 집행의 대비요, 율법적 방편과 복음적 방편의 대비요, 잠정적인 것과 완성의 대비요, 한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대비이다. 결국 예수님이 “물”을 언급하셨다는 사실을 통해서 죄의 문제가 고려된 것이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5절에서 죄의 문제를 염두에 두시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시고, 이어서 6절에서 육은 육의 일을 하고 성령이 영적 일을 한다는 의미로 말씀을 하셨을 때, 6절의 “육”을 죄의 문제가 배제된 피조된 육으로만 생각하긴 좀 어려워진다. 다시 말해 5절에서 죄의 문제를 상기시키신 만큼 -즉 죄로부터 회복이 필요함이 부각된 만큼)- 6절의 “육”은 니고데모의 인식 속에 이미 죄로 오염된 육으로 설정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죄성을 지닌 육은 죄악된 육의 일만을 도모하고, 거듭나는 영적인 일은 성령으로만 가능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즉 죄로 인한 인간의 무능(inability)이 “육”에 담겨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쪽으로 결론을 내려야 할까? 두 가지를 모두, 대신 강조의 차이를 유지하면서, 종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우선 피조적 한계와 언약을 반영한 육(6-8절)과 죄성으로 오염된 육(5-6절) 가운데 어느 해석을 취하든지 다른 하나를 배타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둘을 종합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중생은 원래 창조된 상태의 능력으로도 이룰 수 없다는 -타락 이전에 중생이 필요했다는 뜻이 아니라- 강조를 통해 이미 육의 한계가 부각되었다. 그 위에 타락의 결과로 인한 육의 무능은 전적 무능의 현실이 되어 버렸다. 본문의 논점이 중생의 관점에서, 인간의 무능이 부각이 되는 상화인 만큼 창조의 육과 타락한 육 중 굳이 어느 한 쪽으로만 치우쳐 생각해야 할 논리적 당위성이 없어진다. 오히려 양쪽을 같이 수용하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같이 취할 때 비로소 인간의 현실을 정당하게(justly) 반영한 것이 된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중생의 논의가 인간의 무능을 중요한 전제로 삼고 있는 개혁신학과도 잘 조화를 이룸을 확인하게 된다. 중생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이 취하셨던 부정의 방법을 통한 논증의 힘은 성령이 하시는 중생의 일은 분명히, 타락 전후와 상관없이, 육의 모든 능력으로도 안 된다는 대비를 통해 그 효과를 달성했다고 평할 수 있겠다.

예수님은 이제 중생의 필요성의 문제를 하나님 나라의 관점과 연관 짓고 계시다.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예수님은 3절에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다. 뒤집어 말하면, 하나님 나라를 보기 위해 예수님은 중생의 절대적 필요성에 대해 역설하시고 계시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보다”라는 표현은 직설적이기 보다는 은유적인 표현이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문자적으로 하늘나라를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문제로 삼으신 것은 아니다. 또는 중생을 하면 눈으로 하늘나라를 볼 수 있을 것을 암시하시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보다”는 시각적 또는 물리적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인식과 체험에 있어서 어떤 총체적 변화를 의미하느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3:36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지만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14:17에서는 세상은 보혜사 진리의 영을 “보지 못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보다”가 분명히 시각적 의미보다는 훨씬 큰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들이다. 다분히 요한적인 표현이라고 해도 가능하다. 니고데모에게 그 말씀을 적용한다면, 비록 니고데모가 배움이 출중한 유대교 지도자라 하더라도, 역설적으로 그도 볼 수 없는, 즉 그의 무능함이 부각되는 상황이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문제는 자기 앞에 계신 예수를 보고도 그가 그리스도인지 보지 못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문단 끝의 15절에서 예수를 믿는 자라야 영생이 있고, 즉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3장 끝 36절에서는 “영생을 볼 수 있다”고 결론을 짓고 있는 것이다.

사시 3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여러 면에서 직설적이지 못하다. 그런 점에서 5절 말씀은 3절에 대한 주석이라고 할 수 있다. 3절에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 표현이 5절에서 “들어갈 수 없다”의 의미인 것으로 확인이 된다. 그러나 “들어가다”의 의미도 “보다” 보다는 좀 더 직설적이게 들리나 그리 썩 직설적이진 못한 것 같다. “들어가다”의 의미가 단순히 물리적으로 입장(enter)하는 것이라ㅗ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약 중생을 통해 우리가 당장 물리적으로 또는 위치상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상당히 많은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5절에서 “들어가다”도 문자적 의미 이상의 수사적 표현이다. 즉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사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 복음서가 소개하는 하나님 나라의 의미는 들어가는(enter) 그 순간도 중요하겠지만, 그 안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누리느냐도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다. 본문은 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중생이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로 강조되고 있다. 이 이해(insight)는 흔히 중생을 너무 빠르게 구원 여부에 대한 판단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음을 생각할 때 특별히 중요하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중생을, 단순히 구원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보고) 못 들어가고(보고)의 문제로 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중생의 결과 즉 실천적 차원에 대한 기대를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단초가 된다. (중생의 실천적 의미에 논의는 아래서 하게 된다.)

V. 중생의 이론

3절에서 예수께서 “거듭나야”할 필요성을 강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니고데모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4절과 9절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겠냐며 불신의 말로 반응하는 것을 볼 때, 니고데모에게 중생이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예수께서 하신 “거듭나다”는 어떤 의도였고, 니고데모는 이 말을 어떻게 들은 것인가? 본문을 통해서 중생의 특성을 찾아보자.

“거듭나다”는 헬라어로 겐네데 아노덴(헬라어)이다. 여기에서 해석상 어려운 부분이 흔히 “거듭” 또는 “다시”로 번역되는 아노덴(헬라어)이다. 이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다시(요 33:3, 7, 갈 4:9)”의 뜻과 함께, “처음부터(눅 1:3)”나 “위로부터(막 15:38, 요 3:31, 19:23, 약 3:15)”의 뜻도 있다. 특히 아노덴이 같은 장 31절과 19:11에서 다시 쓰일 때는 대부분의 번역본이 “위로부터”로 옮기고 있다. 예수님게서 니고데모에게 “아노덴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였을 때, 니고데모는 과연 이 단어를 가능한 해석 중에 어떤 뜻으로 받을지 호기심이 생긴다. 역시 니고데모는 아노덴을 “다시”의 의미로 들었다. 그래서 4절에서 “두 번째” 모태에서 나올 수 있느냐고 했고, 9절에서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며 불신의 뜻을 비쳤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니고데모가 아노덴 단어를 “위로부터” 보다는 “다시”의 의미로 주해한 것이다. “위로부터”는 이성과 경험을 벗어나기에 가능한 주해가 아니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6절의 “육”의 방식으로 해석을 한 것이다. 그는 위로부터의 방법, 즉 하늘의 방법, 성령의 방법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기에, 육의 방법, 즉 땅의 방법으로 아노덴을 주해한 것이었다. 그의 주해대로 육의 질서로 볼 때, 다시 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의도는 전혀 전달되지 못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위로부터”의 뜻으로 말씀하시고 계셨다는 의미로 5절에서 아노덴으로 난다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라고 니고데모의 주해를 정정해 주셨다.

그러나 여전히 니고데모의 입장에서는 크게 해결된 것이 없다. 예수님의 의도가 “다시”보다는 “위로부터”, 곧 “성령으로”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해도, 그것이 어떻게 나는 것인지, 비록 니고데모가 이스라엘의 성생이라 해도(10절) 여전히 알 수가 없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8절에서 성령이 하시는 일을 바람(토 프뉴마. 헬)이 부는 것에 비유하시며, 우리가 바람이 부는 것은 알아도 그것이 정확히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듯이, 즉 성령으로 나는 것(중생)도 우리가 알 수 없다고 선을 그셨다. 그렇다면 이제까지의 논의를 종합하면, 아노덴은 “다시”의 뜻과 함께 “위로부터”의 의미가 있고, 예수님은 5절에서 “위로부터”의 뜻이 “성령으로”라고 말씀하시고, 8절에 와서 “성령으로”로 대변되는 중생의 모든 이론적 특성은 우리의 인지(cognition)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생의 주제와 관련한 몇 가지 조직신학적 특성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중생의 기원은 영적이고(spiritual) 신비적(mysterious)이다. “위로부터”는 중생의 기원이 영적이고 신비한 데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중생을 모르는 사람이기에, 예수님의 “위로부터 나다”의 의미를 두 번째 나는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또한 “성령으로”나 바람의 비유는 성령의 신비롭고 주권적인 능력과 방법이 인간의 인지의 한계를 초월하는 특징을 드러낸다. 이미 에스겔에게 보여준 바람(생기)이 불어 마른 뼈가 살아나 큰 군대를 이룬 환상을 통해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일이 얼마든지 성령의 능력과 방법을 통해 가능한지 본 적 있다(겔 37장). 정확히 어떻게 성령이 마른 뼈를 살리시는지(중생) 알 수 없다. 오직 성령만이 하신다. 이 의미는 상대적으로 인간의 참여나 기여, 또는 반응의 동작도 배제한다는 뜻이다. “육”의 능력과 방법은 일체 배제된 가운데 “성령으로”만 진행된다. 영적으로 죽은 자가, 즉 영적으로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자가, 성령이 하시는 일에 반응을 하거나 도울 수 없다. 흙으로 사람을 빚어 생기를 불어 넣어 살게 하실 때 흙이 자신의 창조를 도울 수 없었던 것처럼, 죄 가운데 죽어 있는 영혼을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다시 살리실 때도 죽은 영혼이 자신을 도울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성령이 능력으로 창조에 관여하셨듯이, 성령의 살리시는 능력만이 재창조의 동력이 되신다. 사람이 언제 어떻게 중생했는지는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중생의 사실여부는,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신자의 삶 전체를 봄으로써 알 수 있을 뿐이다.

둘째, 중생의 영향은 총체적(comprehensive)인 범위에 미친다. 이미 앞서 하나님 나라를 누린다는 것은 인식과 체험의 총체적인 변화를 의미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이 때 총체적이라 함은 내면적 변화에 좀 더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것에 대해 에스겔서에는 “마음과 영을 새롭게”하는 일이고(겔 18:31), “새 영”과 “새 마음”을 우리 속에 주어 “곧은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시는 일(겔 36:26)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타락의 영향이 끼친 결과가 전적인(total) 것과 대칭을 이루는 것임을 생각할 때, 타당하게 들린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모든 기관(faculty)과 기능(function)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중생은 이 모든 기관과 기능을 타락의 영향으로부터 회복하여 하나님께 대해 살아나게 한다. 영적 도덕적 회복만이 아니라, 이성과 심지어는 육에 임했던 저주로부터 회복하는 것까지 포함되는 것이 중생이다. 이것은 타락이 사람의 전(total) 영역에 걸쳐 그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중생의 회복도 전(total) 영역에 걸쳐, 즉 생각과 마음과 이성을 포함하는 총체적 범위에서 되어져야 하는 것이 맞다.

셋째, 중생은 죄를 씻는 의미를 갖는다. 이 말은 앞의 두 번째 특성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중생은 디도서 3:5이 밝히듯이 죄를 씻음이 그 핵심적 의미이다. 오해가 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씻음은 타락의 결과로 인한 죄의 지배를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죄의 존재를 또는 죄성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중생한 사람에게 여전히 죄성은 존재한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이 죄성으로 인해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롬 7:24). 그러나 중생으로 인해 크게 달라진 것은 죄가 전과 같이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차이이다. 전에는 나의 전부(total)가 죄에 매여 있었다. 달리 표현하면, 마음의 바탕이 죄 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그 상태에서 나오는 모든 생각과 의지와 행동은 죄의 지배를 따르는 것들일 수밖에 없다. 죄에 매어 있는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중생 이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죄뿐이었다. 그러나 중생은 이러한 죄의 지배를 걷어내었다. 죄의 지배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다. 그러므로 죄의 욕구를 꼭 따라야하는 논리적 당위가 더 이상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의 논의에서 본 것처럼, 중생이 신비한 방법으로 무의식의 차원에서 일어나고 우리에게 전적으로 수동적인 일이지만, 결과만큼은 비미스럽지 않다.

 

VI. 중생의 실천적 중요성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서 중생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으나, 결과를 통해서 중생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음을 시사해 주셨다. 중생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의 문제는 곧 우리의 삶에 어떤 실천적 차이를 가져다주는지의 문제이다.

첫째, 중생이 이전에는 하지 못하던 일들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능력(new ability)을 가져온다. 중생하기 전에는 신적이고 영적인 일들에 대해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중생 이후에는 그것들을 인지하게 되고, 좋아하게 되고, 추구하게까지 되었다. 새로운 능력이란 중생 시(時)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이 우리에게 새로운 능력이 되심을 말한다. 이 특징은 개혁주의 중생론의 드러내는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능력이 되시는 것을 개혁신학은 새로운 본성(new nature), 새로운 원리(new principle), 새로운 습관(new habit), 새로운 성향(new disposition) 등으로 불렀다. 다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을 법한 표현들이지만, 과거 17세기 이후의 개혁신학 전통은 그렇게 표현해 왔다. 그렇다면 오해의 소지를 막기 위한 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우선 아닌 것은 “새로운”이라는 수식어가 붙음으로써 우리 안에 새로운 것이 만들어 지거나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전에 없던 다른 능력, 이전에 없던 다른 본성, 이전에 없던 다른 원리, 습관, 성향이 우리 안에 추가적으로 생기거나 주어진 것이 아니다. 즉 중생을 통해서 우리에게 없던 새로운 것이 더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하다. 성령의 내주는 우리에게 전에 없던 어떤 것을 새로 주는 일이 아니라, 이미 있는 기능을 도와 전에 못하던 일을 -신적이고 영적인 일-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언급한 능력, 원리, 습관, 성향, 본성 등은 모두 원래 우리에게 있던 것들이다. 성령의 내주로 달라진 것은, 이전까지는 타락의 영향으로 이 모든 것들이 죄의 지배 하에서 죄성이 다스리는 대로 따라했지만, 이제는 성령이 죄의 지배를 제거하시고 이것들의 기능을 도우시어 신적이고 영적인 일들을 알 수 있게 하신 것을 개혁신학은 “새로운” 것으로 불렀던 것이다. 성령의 사역은 영적인 일이다. 그러나 영적인 일이라고 해서 성령의 사역이 육의 차원 즉 우리의 육의 기능이나 능력과 무관하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이 하시기 때문에 그 일은 영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 영적인 일은 성령이 우리의 육 안에 들어오셔서(내주) 육의 기능을 살리시고, 죄의 영향을 억누르고, 도우셔서 새로운 일들을 하게 하시는 것이다. 동일한 기관이지만 전에 하지 못했던 일을 한다는 뜻에서 “새로운” 기관이 된 것이다. 결국 “새로운”의 의미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났다는 것이다. 성령이 우리 육에 들어오셔서 없던 능력과 기능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망가졌던 육의 기능과 능력을 회복하시어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나게 하는 것이 중생이다.

둘째, 중생은 죄와 세상에 대해 변화를 가져온다. 성령이 내주하시어 새로운 능력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외적인 관계의 변화가 생겼다. 첫째, 우리는 죄와 세상에 대해 변화되었다. 요한복음에서 “위로부터”가 요한일서로 가면 “하나님으로부터”가 된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중생한 자이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한다. “하나님께로 난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하며(3:9)”,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고(5:4)”, “하나님께로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않는다(5:18).” 좋은 말씀이긴 하나, 중생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씀이 많은 사람에게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대체로 이 구절들을 종말론적으로 해석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아직”의 구도에서 “아직”에 강조를 두어 앞으로 죄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때가 오는 종말론적 완성을 바라보게 한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면 더 이상 죄가 없고 더 이상 죄의 유혹이 없을 것을 소망하게 하는 것이다. 이 해석도 유익하겠으나, “이미”의 의미가 좀 더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이미 중생이 우리를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했으므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본문이 갖고 있는 전제이다. 흔히 잘 못 생각하는 것이, 우리 안에는 죄성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된다고들 한다. 이미 계속해서 강조하였듯이, 중생은 우리를 죄성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우리 안에 새로운 힘과 능력과 원리와 본성으로 내주하신다. 이 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일으키셨던 힘이다. 그리고 그 성령의 힘으로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를 유혹하는 죄성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 요한일서에서 강조하는 바이다. 이것은 오늘날 나약하게 죄에 무너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경종이 되는 교훈이다. 하나님께로 난 자는 마지막 대에 가서만이 아니라 지금 죄와 세상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한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셋째로, 좀 전에 말한 관계 변화의 둘째 측면으로서, 중생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관계 변화를 의미한다. 죄로부터 변화가 부정적 측면이었다면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긍정적 측면의 변화이다. 요한일서는 중생의 결과로 부정적 변화와 함께 긍정적 변화에 대해서도 열거하고 있다. “의를 행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난 자이며(2:29)”,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났다(4:7).”우리는 중생을 통해 죄로부터 멀어질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몸인 교회에 더 가까워진다. 중생은 우리를 죄로부터 떼어내어 중립에 두는 것이 아니라, 거룩으로 다가가게 하고 거룩에 속하게 한다. 이 긍정적 변화는 중생하기 전에 없었던 일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를 행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중생의 변화, 즉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심으로 가능해진 변화이다. 따지고 보면 하나님과 그가 사랑하시는 백성들을 위해 살아났다는 데에 비로소 중생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VII. 그리스도와의 연합과의 관계(논이 방식에 대한 평가)

이제까지 중생의 특성에 대한 설명에 있어 성령의 내주가 중심적 관점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전통적으로 개혁신학에서 중생론 논의가 성령의 단동적(單動的, monergistic) 권능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크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의 논의 방식이 개혁신학 전통 안에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중생의 논의를 마치려 하는 즈음에 와서 다시금 그리스도의 사역과 중생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바이다. 이미 성도의 중생에 앞서 그리스도의 중생 사건이 있었다고 발한 바 있다.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사건이 그리스도에 속한 자들의 중생의 근거가 되는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중생의 동인(動因) 역할을 한 성령도 그리스도의 영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중생(ordo salutis)을 그리스도의 사역(historia salutis)에 근거를 두는 방식이 되겠다. 그리스도가 이루신 중생(부활)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에게 적용된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의미를 고려하지 않을 때는, 유효한 부르심의 결과가 중생이 되고, 중생의 결과로 믿음이 오고, 믿음으로 칭의되고, 성화되는 식으로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각 구원 은총(ordo salutis)이 있는 것으로 보면, 유효한 부르심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지고 그리스도 안에 중생을 비롯 각 구원 은총이 있어서 각기의 관점을 통해서 구원서정을 생각하는 방식이 된다. 중요한 차이는 각 은총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전제가 반영된 논의 방식이 된다는 특징이다. 모든 구원서정의 사역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나 그 성령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적용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심을 다시 상기하는 것이 좋겠다.

대체로 전통적 방식에서는 중생의 효과나 실천적 중요성(implications)에 대해서는 논의를 하지 않는 경향이 많다. 그 역시 성령의 신비로운 사역에 초점을 두는 경향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다보니 논의가 자연히 중생 하나에 집중하게 되고 중생 자체에 대한 이론적인 -그래서 다분히 사변적인- 정교성에 치우치는 경향이 많아진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점이 주는 유익은 중생을 마치 다른 구원서정들과 분리되어 있는 별개의 것처럼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생의 사전적 의미를 밝히는 것 그 하나가 논의의 전부가 아니라 중생의 결과 달라진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런 발상 자체가 그리스도 안이라는 유기적 관계를 전제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리스도 안에 중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은 다른 구원서정들과 떨어질 수 없는 유기적 관계에 있다는 의식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중생의 실천적 중요성에 대한 논의 그 자체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점과 방법론을 따른 효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집고 넘어갈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CF)가 강조하였던 중생과 말씀의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이다. 중생과 말씀의 관계는 이미 유효한 부르심을 논할 때부터 충분히 설명되었다(요 15:2, 약 1:18, 벧전 1:23). 단지 여기에서 문제로 제시하는 것은 성령의 단동적(monergistic) 사역에 대한 강조와 말씀 사역의 필요성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느냐하는 것이다. 혹 WCF가 의도는 좋으나 말씀 사역을 강조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의 단동성을 희석시키는 것은 아닌가? 말씀 사역은 결국 인간의 반응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두 가지 측면으로 답할 수 있다. 먼저 중생의 논의에 전제였던 전적 타락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전적 타락은 소위 인지영역에 까친 죄의 영향(noetic effect of sin)을 포함한다. 영적 무능뿐만 아니라 이성을 비롯한 모든 인지영역의 무능을 전제로 할 때, 역시 말씀의 강조만으로는 성령의 단동성이나 하나님의 주권을 훼손한다고 보기 어렵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두 번째 단초가 나온다. 말씀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sovereign) 신적(divine) 방법으로 사용된 도구(instrument)라는 점이다. 말씀이 중생 사역에 불가분적 도구의 역할을 한다는 것 또한 하나님의 신적이고 주권적인 방법이다. 말씀 자체가 성령과 별도로 유효한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씀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방법 자체가 성령의 단동성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생에 있어서 말씀의 도구적 강조에 대해 한 가지 더 첨언한다면,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중생이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와 불가분적 관계에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말씀이 중생을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생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므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말씀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은 타당하다. 부르심이 유효한 것은 유효하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적 신비적 방법으로써 말씀을 통해 유효한 부르심과 중생을 위한 친(親) 그리스도적 환경을 만드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친 그리스도적이라 함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없는 구원은 없다는 전제 하에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제공하는 말씀의 도구적 기능을 묘사한 말이다. 분명한 것은 WCF가 중생에 있어서 말씀을 강조한 것 역시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연관성을 유지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하겠다.

'서울신학·총신신대원 > 교의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Chapter VII. 믿음(Faith)   (0) 2013.10.21
제 7강 10월 15일   (0) 2013.10.15
제 2장 성령선물  (0) 2013.10.10
1. 오순절과 그리스도(기독론 차원)  (0) 2013.10.09
제 1장 약속과 부탁  (0) 2013.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