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Chapter VII. 믿음(Faith)

예림의집 2013. 10. 21. 17:49

 

Chapter VII. 믿음(Faith)

 

중생의 교리에서 강조되었던 것은 중생의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성령만이 단동적 능력이 되심을 강조하였다. 그러면 구원의 일에 있어서 사람이 하는 일은 없나? 성경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주 예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다(행 16:31). 이때 믿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다. 나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믿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것이다. 믿음은 사람이 하는 동작이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이다(엡 2:8).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나? 많은 오해의 소지가 보인다. 본 장에서는 바로 이 믿음에 대해서 설명할 것이다.

믿음에 대한 오해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른 정의가 필요하다. 믿음이 어떤 것인지, 특히 개혁신학 전통에 입각하여, 믿음의 특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믿음이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그래서 다른 구원서정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믿음은 왜 행위를 배제하는지, 마지막으로 흔히 믿음과 혼돈되는 구원의 확신과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다.

 

I. 믿음에 대한 오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믿음만큼 널리 사용되면서도 오해에 시달리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기독교 2000년의 역사를 어떻게 보면 믿음에 대한 정의와 실천의 현장에서 빚어진 부단한 시도와 실패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시도는 어거스틴, 아퀴나스, 칼뱅 같은 신학의 거장들에게만 국한되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모든 기독교인과 떨어질 수 없는 문제였고 그래서 늘 오해에 노출되어 왔다. 그 오해는 예수님을 직접 대하고 있었던 제자들이나 당대의 사람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끔씩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꾸짖으셨던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역사적으로 실천적으로 어떤 문제들이 믿음과 얽혀있는가?

기독교 역사 속에서 믿음과 얽혀있는 문제들을 일일이 짚어보는 것은 매우 방대한 일이고, 비록 가치 있는 일일지라도, 우리의 논의 범위를 벗어나는 주제이다. 그러나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는 오랜 세월동안 믿음을 통일된 정의 없이 사용해 왔다. 시대에 따리 신학자에 따라 믿음이라는 단어를 통해 의도되는 바가 나름 있었어도 어느 것 하나가 범기독교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믿음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교회는 각기 다른 전통으로 나뉘었고, 시간이 갈수록 각 전통은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신자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는 신앙생활의 규범이 되는 WCF가 분명히 있지만,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믿음에 대한 이해가 같지 않은 경우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더 시급한 문제는 한 사람이 믿는다고 고백할 때,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교회적인 확인과 지도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회중들 앞에서 믿음의 외적 증거들을 확인하던 청교도 전통에 대해 모르는 바는 아니나, 그것은 오늘날 교회와는 현실적으로 거리가 먼 과거의 일일뿐이다. 여기에 설교자들로 인해 문제가 더 커진다. 적절치 않은 대목에서, 때로는 자신의 말에 대한 호응을 얻어내기 위해, 인위적으로 “아멘”을 합창하게 한다. 아멘이 기독교식 추임새가 되어 버렸다. 교인의 입장에서 볼 때, 혼란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내용에 동의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복음과 무관한 내용에도 아멘을 한다. 예를 들어, 설교자가 “제가 몸무게를 10Kg을 감량했습니다. 믿으십니까?” 하자 많은 사람들이 “아멘”한다. 그 믿음은 내용에 동의 또는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의지적 결단을 믿음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이제부터 교회에 나가겠다는 뜻으로 “믿겠습니다.”라고 한다. 교인으로 등록을 하겠다는 의지적 결단이 믿음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감정적 느낌이 있어야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믿는다는 고백이 늘 뜨거운 감성적 체험을 수반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은 믿음을 통해서 더 냉철해 질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더 차분해 질 수도 있다. 감정적 느낌의 유무의 여부가 믿음을 결정짓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간절한 염원이나 소원을 믿음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믿습니다!”를 수없이 외치며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 주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쉽게 말해, 세게 믿어야 하나님이 들어 주신다는 발상이다. 믿음은 나의 염원의 정도와 상관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신비적인 체험과 연결시킨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셨다든지, 직접 계시하셨다든지, 꿈을 보여주셨다든지 등의 일들을 믿음의 근거로 삼는 경우들이 있다. 모두 성경을 벗어나는 일들이다. 때로는 믿음이 단순히 개인의 의견에 대한 주장일 경우가 있다. “나는 홍길동이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절대적 단정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지지를 담아 믿음을 표현한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예를 들어 기하학에서 평행선은 만나지 않는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명백한 공리(axion)인 것처럼, 너무도 자명하여 증명이 필요 없이 다른 명제를 증명하는데 전제(premise)로 사용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전제(presupposition)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자체가 믿음은 아니다. 그 외에도, 얼마든지 많은 예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지적할 필요가 있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같은 신앙고백을 하지만, 사실상 교인들의 삶에 들어가 보면, 믿음의 이해가 각양각색이라는 점이다. 더 나아가 그 차이가 어떤 교인들에게는 적지 않은 혼란이 되고 있으며, 분위기에 휩싸여 자신도 모르게 그런 것들이 바른 믿음인 줄로 잘못 받아들일 수 있는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믿음에 대한 오해는 기독교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문제이다. 기독교의 진리는 믿음을 구원과 직결시키고 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구원이 중요한 만큼, 믿음도 중요해 진다. 믿음을 바르게 정립하는 만큼, 구원의 삶을 바르게 세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II. 믿음의 정의

믿음에 대한 오해가 많은 것은 믿음에 대한 개념 정리가 의외로 쉽지 않기 때문이다. 쉽지 않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쉽지 않다기보다 신약이 증거하는 믿음의 삶은 매우 풍요로운 것이기에 그것을 대변하는 인간의 작업이 때로는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 차이가 현실적으로 신앙의 전통의 차이를 결정짓는 요인이 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결코 가볍게 여길 문제는 아니다. 다행이 우리에게는 WCF가 있어서 표준이 되어주고 있다.

WCF는 제 14장에서 믿음(Saving Faith)에 대해 다루고 있다. 다루는 특징을 살펴보면, 제 1항에서 믿음이 어떻게 생성되느냐의 관점에서 성령의 일임을 밝히되 말씀의 사역도 불가분적 관계에서 함께 강조하고 있다. 더불어 믿음이 말씀과 성례와 기도를 통해 강화되어야 할 것을 함께 말하고 있다. 제 2항이 믿음의 정의라고 할 수 있는데, 믿음이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고로 성경에 계시된 모든 것이 참되다고 믿는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매우 독특한 것은 이어서 믿음을 그리스도와 연관 짓고 있는 점이다. 믿음을 그리스도를 영접하고(accepting), 수납하고(receiving),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쉬는 것(resting upon) 등 동작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특징을 볼 수 있다. 제 3항은 믿음의 실천적 측면으로 믿음의 정도, 즉 약한 믿음과 강한 믿음이 잇을 수 있으나, 결국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할 것이라는 위로로 말을 마친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싶은 것은 제 2항에서 믿음을 정적, 추상적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닌, 동작(act)의 개념으로 정의 하되 그 동작이 모두 그리스도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대상으로 하는 이 동작들을 한 마디로 하면, 그리스도와 연합(uniting)하는 동작이다. 다시 말해 WCF는 믿음을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동작 자체로 정의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껴안고, 그리스도로 기울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믿음을 정의하는 것은 구원서정의 논의(10장에서 18장까지)에 앞서 7장과 8장에서 연합의 개념을 설정한 것과 연계하여 생각할 때, 매우 일관된 방법이다.

또 한 가지 관찰하게 되는 것은 WCF는 믿음을 정의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참됨을 믿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WCF가 가장 중요한 권위로 삼고 있는 성경관이 믿음을 정의하는데 반영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이 참됨을 믿는 것은 성경이 계시하는 그리스도를 참된 것으로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성경을 믿는 것이 본질상 갈라질 수 없는 것이다. WCF는 비록 긴 설명은 하지 않아도, 계시관이 지배하는 구원서정의 논의를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WCF의 전통과 방법론을 따라 우리도 믿음을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점으로 믿음을 설명하는 것이 우리의 방법이다. 그러나 여전히 믿음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앞서 말했지만, 믿음은 우리의 동작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많은 경우에 믿는다고 할 때 각자 무엇을 의도하는지 차이가 있고, 그 차이가 앞서 말했던 문제들로 이어지곤 한다. 비록 신학자들도 믿음을 정이하는데 표현과 강조의 차이는 있지만, 개혁신학은 흔히 믿음을 다음 세 가지 요소를 통해 설명을 해 왔다. 그렇게 분류하는 것 자체가 사변적이며, 17세기 개신교-스콜라적(Protestant Scholatic) 신학의 잔재라는 지적을 받는다. 그러나 그 분류가 깊은 이해를 주는데 유익하다고 판단되는 것이 사실이기에 우리도 같은 분류를 따른다. 차이점은 그 세 요소를 각기 독립적인 것으로 다루기보다는 좀 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이해하려 한다는 것이다.

첫째 요소로 믿음에는 지식(notitia)의 요소가 있다. 이것은 알다(to know) 그 자체와 연관이 있다. 여기서 “알다”의 대상은 그리스도다. 그래서 믿음은 그 대상인 그리스도에 대해 알아야 하는 지식(knowledge)이라는 요소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 지식은, 믿음의 대상인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성경에 계시되어 있으므로, 성경관과 연관이 있다. 성경이 특별계시-곧 구원을 가져다주는 구원 지식-인 것은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기 때문이다. 이 내용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복음으로 제시되는 그 사실적 진리를 아는 지식을 포함한다. 예수께서 2000년 전 베들레헴에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고, 3년간 하나님 나라에 대해 전파하시고, 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으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 째 되는 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지식을 포함한다. 죄인을 살리는 구원 지식이 이 역사적 사실을 모르는 지식이 절대 아니다. 이것을 어떤 이들은 “역사적 믿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내용적 측면으로 본다면, 믿음의 지식의 요소가 역사적 믿음을 포함하는 관계이다. 그러나 역사적 믿음이란 분류로 인해 나머지 믿음의 두 요소(동의와 신뢰)와 분리되어 논의된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논의 방법이다. 소위 “역사적 믿음”은 믿음의 대상(그리스도)을 아는 지식이 될 때,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연합할 대상을 사실적으로 아는 지식이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의 한 요소인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아는 지식을 포함하는 믿음은 분명히 이성의 활동을 포함한다. 즉 믿음 안에는 이성이 담당하는 역할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개혁신학에서 매우 중요하게 강조되는 부분인데, 이성에 대한 막연한 부정적 시각 때문에 종종 믿음이 허상의 것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 인간론은 우리에게 계시를 접수하는 기관이 이성임을 분명히 해 왔다. 앞서도 말했지만, 계시는 구원지식이다. 즉 계시를 접수 한다는 것은 그 구원지식을 접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을 접수하는 일을 하는 기관은 우리 안에 이성이라는 기관이 하게 되므로, 믿음에는 지식의 요소를 담당하는 이성의 활동이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성령의 구원 은총이 없이 이성이 자율적으로 구원계시를 알아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이성이 계시를 접수하게 될 때, 성령의 구원은총을 통해 이 지식은 나를 구원하는 효과가 있는 구원지식이 된다. 그러나 반대로 구원 은총 없이도 계시가 전하는 내용을 이해할 수는 있다. 이때 계시를 접수하는 것 역시 이성이다. 성경을 읽고 내용을 이해했다고 다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안다. 정리하면, 구원 여부와 상관없이 계시를 접수하는 기간이 이성이다. 느낌으로 계시를 접수하는 것이 아니고, 한 순간의 신비적 체험을 통해서 계시를 접수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을 들을 때, 그 내용(계시)이 나의 믿음의 근거가 된다. 그래서 로마서 10:14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 말은 복음의 내용이 이성을 통해 접수된다는 것이다. 계시의 내용(지식)이 내게 접수되지 않고는 구원이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지식을 전하는 발이 복되다고 하신 것이다.

이성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계시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성을 억제하는 것이 좋은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계시를 무시하고 이탈한 즉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믿음, 즉 거짓 믿음이 된다. 그러므로 왜 개혁신학이 계시의 권위와 함께 이성의 역할을 중요시 여기는지 이해하게 된다.

믿음의 둘째 요소로 동의(assensus)가 있다. 이것은 이성을 통해 접수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계시)에 대해 동의(agree)하고 수납(accept)하는 것을 말한다. 옛날 구약성도들이 “아멘” 했던 의미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 아멘은 설교자나 설교자의 말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때 동의는 제시된 지식이 참되다는 것과 그 내용이 내게 필요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 동의(믿음)를 복음의 구체적 내용에 따라 단계적으로 구분지어 생각할 때, 믿는다는 것은 첫째, 나는 죄인이라는 사실에 동의이고 둘째, 스스로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동의이고 셋째, 나를 구원해 줄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동의이고 넷째, 예수가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세주시라는 사실에 동의이고 다섯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한다는 복음의 내용에 구체적으로 동의하고 수납하는 의미가 있다. 물론 이 다섯 가지는 논의의 편의상 열거한 것이나, 복음을 제시할 때 확인할 필요가 있는 내용이다. 흔히 사람들이 처음에는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한 마디 말밖에 할 줄 모르지만, 그 고백이 참된 믿음의 고백이라면 그 말은 적어도 위의 열거한 복음의 핵심에 대해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동의의 고백인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에 대한 구체적인 동의가 없이 고백을 위한 고백으로 말로만 믿는다고 하는 것은 삶에 열매와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점에서 참 믿음과 거짓 고백의 차이로 들어나게 된다.

믿음에 있어서 지식이 지적 활동에 속하는 것, 그래서 이성이 역할이 있다는 점은 이제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동의(assent)는 어느 기관이 담당하는가? 이 질문 자체가 사변적 경향이 많은 질문이다. 더욱이 그 질문이 지정의(知精意)의 구분을 전제하고 있어서, 지식을 지(intellect)에 해당되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동의가 어디에 속하느냐고 묻는 것이라면 그 질문 자체가 다분히 사변적일 뿐만 아니라, 정(emotion)이 답으로 유도될 여지는 자명하다. 여기에서 우리가 경계해야 될 것이 있다. 지정의 분류는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철학적 사고에서 온 것이다. 인간의 마음을 지정의라는 기관(faculty)으로 나누고 각 기관들이 고유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는 인간론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동안 우리는 비판 없이 이 관점을 가져다가 성경을 읽어온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지식을 지로 분류했기 때문에 동의를 정으로 분류하는 것은 매우 인위적일 뿐만 아니라 성경의 의도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좀 더 성경의 의도를 반영할 수 있는 통전적 관점으로 생각할 필요가 앞서 믿음의 요소로서 지식과 동의를 구분하였지만, 그 둘은 불연속적인 별개의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하나의 동일한 믿음을 이루는 요소들임을 간과하면 안 되겠다. 지식이 없는 동의는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를 통한 영생의 지식을 들어야 동의도 가능하다. 동의 자체가 지식을 전제하는 유기적 관계에 있기에, 동의는 지식에 대한 확신과 매우 밀접한 함수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히브리서 11:1이 믿음을 소망하는 것에 대한 확신(또는 시랑)이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확신(또는 증거)이라고 표현하는데서 어떻게 동의가 확신과 상관관계에 있는지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소망하고, 보고자 하는 그 대상이 바로 믿음의 대상이며, 앞서 논했던 지식에 해당되며, 그 지식에 대한 확신이 동의가 된다. 그럼 본문은 그 믿음의 대상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11장 전체를 통해서 볼 때, 선진들은 그 “약속된 것”을 끝내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을 믿는 삶을 살았다고 칭찬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선진들이 39절에서 믿었던 “약속”의 실체(reality)가 1절에서 “바라는 것들”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이었으며, 우리가 찾는 그 대상이다. 이 “약속”은 결국 히브리서 11장 전체의 주제인 “믿음”의 대상이요,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는 액속이다. 그러므로 선진들의 믿음은 본질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다르지 않았다. 1절은 선진들이 그 “약속”이 실체를 아직 받지 못했고 보지 못했지만, 이미 받았고 보고 있는 것처럼 확신하였던 것을 믿음이라고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1절이 수동태로 되어 있지만, 문맥을 통해 볼 때, 바라고 보는 동작의 주체는 선진들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선진들이 그 “확신”이 어떤 성격의 확신인가? 정(emotion)의 차원에 속하는 확신인가? 그렇다면 선진들이 칭찬받았던 믿음은 감정의 정도에 의해 평가받은 믿음이 된다. 그것이 성경의 의도가 아님은 자명하다. 선진들이 “약속”을 믿었다는 의미에서 확신(1절)은 “약속”의 실체에 대한 지식에이 동의이다. 선진들은 “약속”이 담보하는 실체가 있음을 믿고 그 실체에 대한 지식을 붙잡은 것이 확신이다. 그 확신은 구체적이며, 적극적이고, 의지가 담긴 동의인 것이다.

1절이 믿음을 확신(실상과 증거)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확신에서 -단순한 감정의 반은 보다는- 의지적 결단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확신은 앞서 지식에 대한 확신이라고 말했다. 11장 전체가 칭찬하는 믿음은 대상의 실체에 대한 지식을 의지를 실어 동의하는 믿음이다. 약속에 대해 의지가 담긴 동의가 있었기에 그들은 여러 가지 환란과 고문을(33-38절) 기꺼이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이고 “세상도 능히 감당하지 못했다”고 높이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감정의 힘만으로 그런 환란과 고문을 이겨내리라 기대하는 것은 복음과 맞지 않다. 지식에 대해 확신을 갖고 동의하는 믿음이 그런 환란과 고문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도 하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믿음에는 의지적 결단과 함께 감정의 반응이 수반될 수 있다는 점이다. 선진들이 약속(지식)에 대해 확신에 찬 동의를 하였을 때, 그래서 그들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환란과 고문을 감내했을 때, 그 동의가 감정과 무관한 것이었다고 보기 힘들다. 이미 그들이 약속에 동의하였을 때는 환란과 고문을 능가하는 기쁨과 평화가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고로 감정은 의지의 움직임에 따라 유기적으로 함께 반응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대상을 향하여 마음이 확신으로 동의하고 있는데, 잠시 지정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여, 감정이 이 마음의 의지적인 움직임을 알아채지 못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마음이 유기체임을 간과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좀 길게 설명이 되긴 하였지만, 동의에 의지의 측면이 있고 동시에 감정이 수반될 수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것은 믿음과 관련하여 자주 야기되는 문제를 답할 수 있는 중요한 이론적 근거가 된다. 예를 들어, 보기에는 예수를 영접한 자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다. 믿는다는 확고한 의지의 결단을 보였고 그에 따른 감정적 반응도 있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믿음을 잃어버리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것은 아직 믿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시험과 유혹이 오자 믿음이 없는 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게 행동하게 된다. 믿는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믿음 없는 자들과 같은 행동을 할 수 있는지 놀라게 된다. 문제는 그 믿음은 지식과 동의의 요소는 갖추었지만, 믿음의 궁극적 요소인 그리스도와 하나를 이루는 신뢰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의지와 감정이 움직였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그것은 믿음이 아닌 것이다.

믿음의 셋째 요소인 신뢰는 믿음의 요소 가운데 결정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지시고가 동의가 선행해도 신뢰가 없다면 결과적으로 구원하는 믿음이 되지 못한다. 신뢰가 따를 때 비로소 믿음이 참 믿음이 된다. 신뢰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은 자신을 그리스도께 맡긴다는 의미이다. 그에 대해 다양한 용어와 개념이 사용된다. 그리스도께 자신을 항복하고, 포기하고, 위탁하고, 연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에게로 쓰러지며, 밀착하고, 붙어있고, 그 안에 머물고, 쉬는 것이다. 보다시피, 신뢰의 중요한 특징은 정적 개념이 아니라 매우 적극적인 동작의 의미가 부각된다는 점이다. 믿음의 대상에 대한 지식과 의지적 동의를 거쳐 그 대상에 자신을 맡기고 그와 하나가 되는 연합에 믿음의 동작의 완성이 있다.

신뢰의 동작이 그 대상과 연관성이 있음은 신약성경에 믿는다는 동사가 사용되는 형태로도 확인할 수 있다. 믿는다는 동사가 목적어를 취할 때 목적어 앞에 여격 전치사나 목적격 전치사가 함께 오거나, 아니면 여격의 목적어를 취함으로써 동사의 동작이 대상(목적어)에 매우 집중되는 의미를 보인다. 즉 믿는다는 것은 대상에 대하여 믿음을 갖는 의미이다. 대상을 알고(지식), 그 대상을 아는 지식을 받아들이고(동의), 그 대상에 나를 맡기며 하나가 되는 것(신뢰)이 신약의 믿음이다.

믿음의 결정적 동작인 신뢰가 오해가 되는 경우가 있다. 국어사전적 의미의 신뢰는 다분히 자신이 얼마나 강한 의지로 굳게 믿고 의지하느냐의 문제로 정의도어 있다. 즉 신뢰의 정도와 근거가 자신에게 있다. 그러나 믿음의 한 요소가 되는 신뢰는 신뢰의 정도와 근거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져다주시는 성령에게 있다. 성령을 통해서 믿음의 대상인 그리스도에게 나를 맡기며 신뢰하게 된다. 나의 의지와 집념에 근거한 신뢰가 아니라 성령이 결속의 힘이 되어 주시는 신뢰이다. 앞서 믿는 것은 우리의 동작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도 성령이 믿음을 가져다주실 때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도 성령이 하시는 일, 즉 구원서정에 속하는 일이다.

 

III. 믿음의 특성

구원서정 가운데 유일하게 믿음만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면서 동시에 사람이 하는 일이다. 이 점이 믿음의 특성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관건이며 어려운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이다. 믿음의 수동성이 믿음을 이해하는데 가장 우선되어야 할 부분이다. 수동성을 믿음이 유효한 부르심의 결과라는 관점으로 이해해도 가능하다. 믿음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흔히 일상에서 믿는다고 하는 말과는 크게 다르다. 오직 성령이 가져다주시는 믿음만이 그리스도를 붙잡는 믿음이고,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는 믿음이다. 이 점에 대해 에베소 2:8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물론 “이것이”가 무엇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앞의 문장 전체로 볼 수도 있고, 바로 앞의 단어인 믿음으로 볼 수도 있다. 앞의 문장에서 굳이 “믿음으로 말미암아”를 가장 뒤에 두고 있고, 바로이어 접속사 “카이”와 함께 “이것이”가 나오기 때문에 순차적으로 내려가면서 읽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며, 그렇다면 “이것이”는 가장 가까이 있는 믿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는 생각이다. 그럼 8절의 사상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은혜라는 논리이다. 믿음을 선물로 보는 것은 빌립보서 1:29에서도 확인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원문을 직역하면, “너희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을 거저(은혜로) 주셨나니, 즉 그를 믿는 것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고난 받는 것도니라.” 즉 “그를 믿는 것”을 주셔서 믿게 된 것이라는 사상이다. 믿음의 수동성, 즉 믿음이 선물임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믿음이 선물이라고 해서 믿음을 은사, 특히 특별은사의 개념으로 오해해서는 안 되겠다. 논의에서 벗어나긴 하지만 간략하게만 언급한다면, 특별은사는 방언, 신유, 예언 등과 같은 은사를 말한다. 이런 은사들을 특별은사라고 부르는 것은 구원과 상관이 없는 예외적인 은사, 즉 구원의 효과나 결과가 아닌 은사라는 점에서 특별은사라고 부른다. 특별은사가 있다는 말은 일반은사가 있다는 의미도 성립한다. 그렇다. 일반은사는 특별하지 않은, 예외적이지 않은, 즉 보편적인, 가장 일반적인, 그리스도에 속한 모든 사람이 받는 은사를 말한다. 가장 대표적인 일반은사가 구원이다. 또는 구원과 함께 불가분적인 효과나 결과도 포함된다. 오늘날 특별은사에 대한 관심이 높은 까닭에 일반은사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할 수 있을 뿐이지 은사라는 과점에서 구분한다면 구원이 일반은사에 해당된다. 구원이 선물이라는 의미에서 은사라고 할 수 있고, 예수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주어진다는 의미에서 일반이다. 유효하게 부르신 자들에게 믿음을 주셔서 비로소 우리가 믿음의 반응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던 어떤 능력이나, 외부에서 주입된 성향 등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믿음의 수동성의 의미는 인격적 성령의 내재만이 믿음의 근거이며, 그 외의 것에 특히 인간에게 그 기원이 있지 않음을 강조한다. 주입의 개념은 성령의 내재의 인격적 교통을 비인격적인 것으로 전락시키는 문제가 있다. 또한 믿음이 절대자에 대한 몰입을 통해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도 아니다.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믿는 것은 “나”이다. “나”라는 주체가 망각되는 믿음은 잘못된 믿음이다.

둘째로, 믿음은 능동적 성질도 함께 갖고 있다. 이 능동성은 믿음의 수동성을 전제한 능동성이다. 즉 믿음을 선물로 받은 다음에는 믿음을 행사하는 것은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능동성이다. 믿음은 우리의 능동적 동작이다. 결코 강요되거나, 우리의 의사를 초월한 동작이 아니다. 믿음은 반드시 사람의 인격적 결단과 의지가 담긴 동작이라는 점에서 능동적이다. 자신을 부인하고 믿음의 대상(그리스도)만을 붙잡는다는 의미에서 적극적이다. 능동성의 뜻이 결코 우리가 자발적으로 믿음을 생성하거나 행사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믿음이 능동적인 것이고, 적극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능동성은 아무런 기여와 공로가 없다. 믿음으로 우리는 유효한 부르심에 대해 반응을 하게 된다. 믿음으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관여 한다. 내가 관여하지 않은 구원, 즉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고, 동의하지 않았고, 신뢰하지 않았던 대상으로 말미암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구원을 받는 일은 없다. 내가 믿었기에 내가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믿음의 관여가 구원의 일에 아무런 기여나 공로를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길에서 구걸을 하는 한 거지가 있다. 지나가던 사람이 불쌍히 여겨 그에게 동전 몇 개를 주려고 손을 뻗자, 이 거지는 자신의 손을 내밀어 그 돈을 받았다. 이 때 이 거지가 손을 내밀어 받았다고 해서 그가 이 돈을 벌은 것은 아니다. 손을 내민 것에 공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거지가 손을 내밀어 받지 않고서는 그 동냥을 받을 수 없다. 거지는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받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아무런 값(value)이 없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할 때, 믿음의 가치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믿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붙잡는 그 대상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이다. 믿음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 구원받는다. 그래서 신약성경에는 구원받는 일에 대하여 “믿음으로”나 “믿음 안에”라는 표현은 있어도 “믿음 때문에”라는 표현은 없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 외에 하는 일이 없다. 하나님은 믿음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는 일을 하게 하셨다. 믿음 외에 어느 다른 것으로도 그리스도를 붙잡을 수 없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사랑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사랑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그리스도를 붙잡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순종한다. 그러나 순종으로 구원받지 않는다. 순종이 그리스도를 붙잡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선행으로 구원받지 않는다. 선행이 그리스도를 붙잡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구원은총도 그리스도를 붙잡지 않는다. 오직 믿음만이 그리스도를 붙잡는 일을 한다. 그래서 “오직 믿음(sola fide)”이라는 말은 “오직 그리스도(sola Christi)”로 이어진다. 즉 믿음은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붙잡는 일만을 한다. 동시에 “오직 믿음”은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닌 것은 모두 부인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믿음에 어떤 다른 공로 개념이 들어간다면 그것은 그만큼 그리스도의 공로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 “오직 믿음”은 긍정적 부정적 의미 모두에 있어서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붙잡는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붙잡는 일에 있어서 매우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다. 강요나 억지가 아닌 나의 인격적 고백을 통해서 내가 그리스도를 붙잡는다. 그러므로 능동적이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공로가 있을 수 없기에 그만을 붙잡고 그에게만 나를 전적으로 맡긴다는 의미에서 적극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이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죄인이 자신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일이라고 하겠다. 믿음의 수동성은 잘 알고 있지만, 믿음의 능동성이 상실되는 경우가 있다. 개혁주의 믿음은 수동성과 능동성을 모두 유지하는데 있다. 어느 한 쪽만 강조하였다고 해서 잘한 믿음이 아니다. 그 치우침이 흔히 교파 및 전통의 차이로 들어나곤 한다.

자신을 부인하고, 포기하기까지 하는 믿음을 좋은 믿음으로 여기는 전통이 있다. 우리 장로교 전통 안에서도 그리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경우이다. 그리스도만 드러낸다는 뜻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역할까지도 믿음을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자신이 한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의를 삭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경향의 사람들은 한사코 “나는 할 수 없으니, 주님이 맡아주세요.” 한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다. 훌륭한 믿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자녀는 하나님이 부모에게 맡기신 성도이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잘 키워 하나님 앞에 세우는 사명이 부모에게 있다. 부모보고 키우라고 주셨다. 물론 부모는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을 의지하여 말씀으로 자녀를 양육해야 한다. 그런데 부모는 하나님에게 다시 자녀를 돌려드리며 하나님이 맡아 키워달라고 한다. 따지고 보니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믿음의 수동적 의미만 붙잡고 것이 좋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이 자녀를 주셨으니 언젠가는 이 자녀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성도로 설 수 있으리라 믿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인내하며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믿음이 마침내 승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반대로 지나치게 능동성으로 치우쳐 있는 믿음도 있다. 믿음은 내가 믿는 것이다라는 능동성이 지나쳐, 내가 운전석에 앉아 모든 일을 몰아가고 하나님은 내 일을 도우시는 분이 된다. 열심히 기도도 한다. 도와 달라는 기도이다. 자신이 매사를 계획하고 진행하고 결과를 얻으려다보니 부딪히는 일도 많고 점점 힘들어 진다. 보기에는 기도도 열심히 하고, 살기도 열심히 사는 것 같으나, 정작 자신은 공허하고 외롭고 지쳐 쓰러지게 된다. 건강한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은 전적으로 주신 거세 의존하여 사는 것이다. 대신 승리의 결과를 믿고 그 주신 것에 자신을 던질 때, 믿음은 놀라운 기적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셋째로 고려할 것은 믿음의 정도(degree)이다. 성경은 종종 마치 큰 믿음과 작은 믿음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WCF도 강한 믿음과 약한 믿음이 있는 것을 인정한다. 신약성경 중, 마태복음 6:20, 8:26, 14:31, 16:8, 17:20과 누가복음 12:28 등에 작은 또는 적은 믿음에 대한 언급이 있다. 모두 형용사형 “올리고피스토스”가 사용되고 마태복음 17:20에서만 명사형 “올리고피스티아”가 사용되고 있다. “올리고피스토스”는 두 단어가 합성된 단어이다. “올리고스”와 “피스토스”가 합성된 단어이다. “올리고스”는 수와 양에 있어서 “많은”이나 “큰”의 반대 뜻으로 “작은/적은”이나 또는 시간과 거리에 있어서 “짧은”의 뜻으로 사용된다. “올리고스”와 “피스토스”가 합쳐 “믿음이 작은”이란 뜻이 된다. 마태복음 17장 7절과 20절을 보면, 17절에서 “믿음이 없고”라는 표현과 20절에서 “믿음이 작은”은 명확한 의도의 차이를 반영하고 있어 보인다. 17절에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는 일반 대중을 향해 하신 말씀이 반면, 20절은 제자들을 향해 하신 말씀이다. 일반 대중이 믿음이 전혀 없었던 것에 비해, 제자들은 믿음이 없지는 않으나 작다는 지적이다.

같은 사건이 마가복음에 기록되면서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이 보이나. 마가복음 9:24에 보면, “내가 믿는다.”라는 말과 함께 “나의 믿음이 없는 것”을 도와달라는 상충되는 표현이 나온다. 아들을 구하고 싶은 아버지의 절박한 마음에서 믿는다고는 하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믿음이 없음을 고백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해석이 갈린다. 현실적으로 우리의 믿음은 늘 온전치 못한 불신을 포함하고 있어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불신이 섞여 있는 작은 믿음이라도 기적을 이루기에 충분한 믿음이라는 해석도 있다. 공통적인 것은 귀신들린 아들을 고쳐주지 못한 제자들의 믿음이나 아들을 살리기에 급급한 아버지의 믿음이 다르지 않은 작은 믿음의 범주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보이는 것이 마가복음의 구체적인 의도라고 하겠다.

그러면 제자들은 왜 작은 믿음으로 인해 책망을 받은 것인가? 제자들이 예수를 알고 천국에 대해 들은 바가 있다는 점으로 보아, 대중이 믿음이 없었던 것과는 다르게 제자들은 믿음이 있었음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있다고 하는 믿음도 예수님이 겨자씨 비유를 드시며 하시는 말씀을 보면 역사를 할 만한 믿음이 못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의 믿음이 못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의 믿음이 최소 크기의 기준으로 제시된 겨자씨만큼만 되었어도 귀신을 쫓아내고 아이를 고칠 수 있었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주님은 꾸지람을 하시고 계시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작은 믿음은 믿음으로서 실패한 믿음이다. 그들이 대중과는 다르게 믿음이 없지는 않지만, 아이의 아버지도 마찬가지로, 실패한 믿음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았다. 즉 그들의 믿음은 믿음의 대상에 대해 실패한 믿음이었다. 이성의 판단으로는 믿음이 필요한 것은 알았지만, 그래서 믿는다고도 말했지만, 그 믿음이 그리스도를 절대 신뢰하고 자신을 의탁하는 믿음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말하시는 겨자씨만한 믿음은 아무리 작아도 대상을 붙잡는 일에 실패하지 않는 믿음을 말한다. 아무리 작아도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믿음은 역사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믿음의 크고 작음에 따라 역사하는 힘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작고 약해보이는 믿음이라도 대상을 붙잡는 믿음이 참 믿음이고, 믿음의 대상(그리스도)이 능력으로 역사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가복음 9장에서 아이를 고치신 것도, 아버지의 믿음을 보시고 고치셨다고 하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긍휼하심과 당신이 메시야 되심을 스스로 보이시기 위한 목적으로 행하셨다고 보여진다. 25절에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은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심이 아이의 아버지의 믿음의 여부와 거리가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를 반영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넷째로 믿음과 확신의 관계이다. 믿음의 정도 문제는 확신의 문제와 연관이 있다. 성경은 확신에 관해 한 쪽으로만 단정짓고 있지 않다. 때로는 믿음이 확신을 내포하는 것으로 말씀하기도 한다(히 11:1, 요일 5:13). 역사적으로 대체로 종교개혁가들은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애초부터 믿음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나 한때 믿음의 확신이 있었어도 확신이 약해지는 경우도 발생하고, 더 심한 경우에는 참 믿음이 아닌 것으로 들어나기도 했다. 앞서 믿음의 정의 문제를 다루며 지적했던 본문들이 확신이 때로는 약해 질 수 있음을 드러내는 본문들이다(마 6:30, 8:26, 14:31, 16:8, 막9:24, 눅 12:28, 히 3:12). WCF는 제 14장(믿음) 3항과 제 18장(확신) 3항과 4항에서 이 점을 반영하고 있다. 약한 믿음과 강한 믿음이 있을 수 있고, 확신이 약해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상시될 수도 있음을 지적하되, 참 신자는 믿음을 완전히 상실할 수 없기에 은혜의 방편을 적절히 사용하여 믿음의 조성자이시고 완성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한 확신에 도달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즉 확신을 믿음의 본질로 단정지었던 앞 세대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오늘날 장로교와 개혁신학 전통도 참 믿음도 정도의 차이를 보일 수 있으며, 고로 확신이 크고 작은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얼마큼 강하게 믿느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만 근거한다는 사실이 확신의 근거일 뿐이다.

 

IV. 믿음과 행위의 관계

믿음을 논할 때마다 함께 대두되는 주제가 행위(Works)의 문제이다. 종교개혁 이후 믿음과 행위의 간계는 늘 예민한 사안으로 늘 격렬한 논의를 가져왔다. 압축하면, 믿음은 일체의 행위를 배제한다는 입장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믿음과 선한 행위를 통시에 강조하는 입장으로 대립된다. 많은 교파와 전통이 이 문제를 쟁점으로 갈라져 있고 대립 중에 있다. 어려운 점은 성경이 믿음과 행위의 문제에 대해 양면적 입장을 취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있다. 로마서 1:17은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며, 갈라디아서 2:16도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말하는 반면, 같은 갈라디아서 5:6은 사랑으로 일하는 믿음을, 야고보서 2:22은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고 말씀한다. 마치 상충되는 듯한 믿음과 행위의 문제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 것인가?

사실 믿음과 행위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사고 자체에 이미 신학적 모순이 있음을 지적한다. 신약성경은 믿음과 행위를 결코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고 있지 않다. 종교개혁 전통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점에 대해서, 적어도 표면적으로라도,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종종 우리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행위도 중요하다며 믿음과 행위를 나란히 놓으려는 시도를 보게 된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행위가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해 비판하며, 예수를 믿는다면 행함도 따라야 한다고 강조한다. 매우 타당하고 옳은 지적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과 믿음과 행위를 동일선상에 놓고 대비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믿음”과 “행위”를 놓고 단순비교하는 방법론 자체가 성경의 의도와 맞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믿음에 행위를 희석시키는 결과가 되며, 종교개혁을 무효화하고 중세로 돌아가는 것이고, 결국 복음을 상실하게 된다. 신약성경이 어떤 구도와 틀을 전제로 믿음과 행위를 다루는지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신약성경이 행위를 언급할 때는 -물론 행위만이 아니지만- 중요한 전제가 깔려있고 그 전제가 판단의 기준이 된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그리스도 안과 밖의 대조로 갈린다. 그리스도에 접 붙어 있는 것, 안에 있는 것이 구원이고, 떨어져 있거나 안에 있지 않은 것은 구원이 아니다.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안과 밖의 대조는 선명하다.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 안과 밖이 아닌 다른 데에 존재하는 일이 절대 가능하지 않으므로, 사람의 모든 행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는 행위와 밖에서 하는 행위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스도 밖에서의 행위는 구원받지 않은 상태의 행위이고 안에서의 행위는 구원받은 자로서 하는 행위이다. 단순하고 당연한 구분이지만, 우리의 사고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간과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원리이다. 사람이 하는 모든 행위는 그리스도와 무관하게(구원 받기 전에) 하는 행위이든지, 아니면 그리스도를 통해(구원 받은 후) 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그리스도 밖이든 안이든 행위는 일체 구원에 기여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행위는 어느 시점에서도 구원에 대한 공로가 되지 않는다.

행위가 우리의 구원에 어떤 모양으로도 기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경륜에 의해서이다. 한때 행위가 영생의 결정적 근거가 되던 때가 있었다.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 즉 개혁정통주의의 구분에 따라, 행위언약이 작용하던 시대이다. 그 때 아담은 행위언약의 머리로서 우리는 그와 연합되어 있었다. 그의 순종 속에 우리의 순종이, 그의 불순종 속에 우리의 불순종이 있었다. 그러나 범죄로 말미암아 행위가 언약의 조건으로 작용하는 아담의 체제는 무너지고, 하나님은 대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새로운 체제 즉 은혜언약을 설정하셨다. 은혜언약이 새로운 언약인 것은 언약을 성취하는 조건이 달라졌다는 점에서 새로운 것이다. 이전에는 행위가 조건이었던 반면, 새 언약은 뭔가를 해야 하는 조건이 없다는 점에서 은혜언약이다. 언약의 머리였던 아담이 성취하지 못한 모든 행위의 조건을 그리스도가 대신 다 성취하고 완성함으로써 우리가 더 해야 할 조건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언약이 머리인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면 그 언약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되고 그 언약이 약속한 모든 것을 누리게 된다. 여기에서 그와 하나가 되는 방편이 믿음이다. 믿음이 하나님이 정하신 길이다. 믿음만이 하나님이 정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방법이다. 하나님은 믿음을 주시며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게 하셨고, 그 들어오는 동작은 일(행위)에 해당되지 않는다. 결국 하나도 일하는 것 없이 단지 믿음으로 언약이 약속한 것(영생)을 받아 누리게 되었기에(롬 4:5) 은혜이고, 은혜언약이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은혜언약과 관련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믿음뿐이다.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게 한 것이 은혜언약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다.

오직 믿음으로 우리가 언약 안으로 들어온다. 뿐만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우리가 어약 안에 머문다. 사실 언약 안에 들어오는 것과 언약 안에 머무르는 것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은혜언약의 관점에서 볼 때 어울리지 않는다. 믿음만이 은혜언약 하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점에서도 어떤 의미로도 믿음 외에 다른 것(행위)이 방편 또는 조건으로 작용한다면 그것은 은혜가 안고 은혜언약이 아니다. 그 말은 우리가 구원을 누리는 삶에 있어서 믿음이 아닌 다른 조건이나 방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다른 것을 행함으로써 구원의 진보가 있거나 기여하지 않는다. 은혜언약을 사는 유일한 길은 오직 믿음뿐이다. 행위는 은혜언약에 들어오거나 안에 머물기 위해 전혀 관계가 없다. 고로 지금 은혜언약 하의 시점에서 은혜언약을 사는 방편이나 조건으로 믿음과 함께 행위가 강조될 이유도 없고 강조되어서도 안 된다. 그 자체가 은혜언약과 맞지 않다.

그러면, 갈라디아서 5:6, 야고보서 2:22 등은 어떻게 할 것인가? 참 믿음이라면 행함이 없을 수 없다고 분명히 신약성경은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 7:20, 요한복음 15:5 등도 같은 정신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위에서 말했던 중요한 전제를 잊어서는 안 된다. 신약성경이 행함을 강조할 때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태를 전제한다. 즉 구원 받은 자에게서 행함을 기대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믿음의 열매 즉 선한 행위가 따른다는 논리이다. 신약성경은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면 행위의 열매를 맺는 것이 정상이며 자연스런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면 이 행위는 믿음과 어떻게 구분되는가? 지금 우리의 논리가 믿음과 함께 행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거듭 강조한다. 우리의 논리는 그리스도를 붙잡는 믿음이기에 그 믿음은 행함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기에 그 삶은 행위의 열매를 맺는다는 논리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행함을 강조하였던 성경구절들의 논리가 믿음도 중요하지만 행함도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각인할 필요가 있다. 믿음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룰 뿐이고, 연합이 행함의 열매를 가져오는 것이다.

연합을 통해 행함의 열매가 따라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편의상 연합의 동작을 그리스도와 최초로 연합하는 초기 동작과 연합된 상태를 지속하는 동작으로 구분하여 생각하려 한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초기 동작에서 구원받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초기 동작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지속적 상태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연합하는 동작을 반영하는 구원과 함께 연합된 상태를 반영하는 구원이 분리될 수 없다. 우리는 전자의 구원을 칭의, 후자의 구원을 성화라고 부른다. (칭의와 성화에 대해서는 뒷장에서 자세하게 다루게 되며 여기에서는 논의의 목적상 용어만 가져다 사용한다.) 칭의와 성화 모두 연합의 결과이다. 그리고 연합은 믿음으로 되어진다. 그렇다면 칭의만 믿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화도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칭의만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성화도 말씀하고 있다. 믿음의 초기 동작, 즉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최초 동작으로 의인이 되고(칭의), 의인은 이제 믿음의 지속적 동작, 즉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 머무름으로 살아간다(성화). 신약성경은 성도가 되는 것도, 성도로 살아가는 것도 오직 믿음뿐이라고 말씀한다. 의인이 되는 것(칭의)도, 의인이 살아가는 것(성화)도, 다른 두 개의 믿음이 아닌 한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야고보식의 논리를 대입하면, 성화가 안 따르는 칭의는 죽은 칭의이고 거시 칭의이다. 연합하였다면, 칭의와 함께 성화가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 신약의 논리이다. 즉 믿음이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고 칭의를 가져왔다면, 그 믿음이 성화(행위)를 가져오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이다. 우리의 논리는 믿음과 행위를 직접 대비하지 않고, 연합을 통해서 행위를 이해하고 있다. 이것이 신약이 취하는 논리방식이라는 주장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일 외에는 하는 일이 없다. 그리스도만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그 믿음은 성화(행위)라는 열매를 맺는 것이다.

V. 신약에서 믿음의 다른 표현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구원을 사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뿐이다. 죄인이 할 수 있는 전부이자 유일한 일이 그리스도를 붙잡는 일 뿐이다. 그렇다면 목회가 할 수 있는 전부도 성도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으로만 살 수 있도록 독려하는 일뿐이다.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메시지도 결국 성도가 믿음으로 살라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 여러 말로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행 15:32). 믿음으로 사는 것은 같지만 신약은 여러 표현을 통해 같은 권면을 하고 있다.

먼저, 에베소서 5:18의 성령 충만의 삶이 믿음으로 사는 삶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한글 성경은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고 번역하고 있다. 직역을 한다면, “성령 안에서 충만케 되라”이다. 즉 성령으로 충만케 되라는 뜻이다. “받다”가 동사가 되어 “충만”이란 목적어를 받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충만을 받다”는 번역이 어떤 오해를 불러 올 수 있는지 잠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충만”이 목적어가 되어서 “받다”라는 동사의 수식어가 될 때, “충만” 그 자체가 어떤 실재(substance) 또는 상태(state)가 되어 교인들은 마치 그것을 받는 것이 소위 성령충만으로 생각할 수 있다. 만약 그런 기대감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주기적으로 성령충만을 받으러 교회에 가는 식이 될 것이다. 마치 성령충맘을 받아서 살다보니 그 충만의 기운이 다 떨어져 다시 성령충만을 재충전하는 식이 된다. 이와 같은 오해가 신학을 잘 모르는 교인들이 순진한 오해라고 간단히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양상이 존재 개념의 근간을 두고 있는 중세 신학에서 말하는 피조적 은혜(created grace)와 너무나 흡사해지기 때문이다. 인격적 성령의 내주와 사역을 상실하고 성령충만을 마치 어떤 물체, 기운, 힘, 정신, 등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타 종교에서 말하는 종교심이나 영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본문을 자세히 보자.

“충만을 받으라”로 번역된 부분이 사실은 “충만케 되라” 또는 “충만하라”라는 하나의 동사이다. 이 동사는 수동태 명령형 현재시제이다. 먼저 수동태 명령형의 의미는 내가 나를 충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나를 충만하게 할 때, 자신을 맡기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명령형의 의미가 있는 것은 성령이 강압적으로 우리의 인격을 지배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어 지배하시려 할 때, 나를 복종시켜 드리는 것은 나의 동작에 해당한다. 특히 동사의 현재시제는 이 동작이 란 번에 완료되는 동작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계속되는 동작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성령이 우리 안에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실 때, 나는 지속적으로 성령의 사역에 나를 복종시키는 것이 “성령으로 충만케 하라”의 뜻이다. 이것은 결국 믿음은 성령이 가져다주시는 것이며, 그 주시는 믿음으로 내가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붙잡은 것이 믿음임을 다시 떠올린다면, 성령충만은 결국 믿음과 다른 것이 아니며, 믿음의 다른 표현일 뿐인 것이다. 즉 믿음의 삶을 산다는 것은 성령충만으로만 가능한 것이고 그 자체가 성령충만의 삶이며 생명의 삶이다. 믿음으로 사는 삶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은 갈라디아서 5:16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한글 성경은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원문은 성령이 목적격이 아니라, 여격으로 되어 있으며, “좇다”와 “행하다”의 두 개의 동사가 아니라 “좇다”라는 현재시제 능동형 동사가 쓰이고 있다. 원문의 의미는 “성령으로 걸으라,” “성령과 더불어 걸으라.” 좀 더 의역을 하면 “성령과 동행하라”까지 가능하다. 이 때 “좇다” 동사가 현재시제를 취함으로써 성령을 좇고 성령과 함께 동행하는 동작이 끊임없이 지속적인 동작일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동작이 2인칭 복수의 명령형으로 갈라디아 교인을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고 있다. 즉 성령과 더불어 걷는 삶을 어느 한 순간이라도 멈춤이 없이 계속하는 것이 신약이 제시하는 구원받은 자의 정상적인 모습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면 예외 없이 성령과 더불어 걷는 것이 정상이고 그것을 멈추는 것이 비정상이고 죄를 좇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삶의 모습이고 에베소서 5:18에서 “성령으로 충만케 되라”와 같은 말이다. 즉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한 순간도 성령과 더불어 함께 걷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을 말한다.

믿음으로 사는 삶에 대해 데살로니가전서 5:17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표현하고 있다. 기도를 강조하는 사람들일수록 이 구절을 수사적 강조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현실적으로 사람이 쉬지 않고 기도만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구절은 문자적인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강조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도를 만이 할 것을 강조하고, 덕목처럼 생각한다. 그렇다면,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더라도 안 하는 시간만큼은 기도를 멈춘 책임이 발생한다. 그 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기도하라”는 현재시제 명령형 동사이다.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쉬지 말고”의 부사가 앞에 쓰이면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의미에 대한 이중의 강조가 되고 있다. 그런데 그 의도적이 강조를 거슬려 임으로 “많이” 기도하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본무의 의도와 맞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특히 “기도하다”는 동사의 의미는 종교적 형식의 기도뿐만이 아니라 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신을 의탁하는 의미를 근본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형식으로서의 기도가 아니라 보다 더 포괄적 차원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고 따르며 그와 끊임없이 대화하고 그의 소리를 들으려고 하고 늘 그의 뜻을 찾으라는 뜻이다. 즉 “쉬지 말고 성령과 대화하라”는 그 명령 자체가 신약성도가 살아가야 할 정상적인 모습이고 방편이며,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케 하라”나 “계속해서 성령과 동행하라”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는 삶이다. 이것이 곧 믿음으로 사는 삶이다.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믿음으로 살라고 하는 것은 명령인 동시에 그 자체가 신약이 제시하는 생명의 길이다. 신약이 제시하는 생명의 길은 믿음으로 사는 삶 오직 하나이다.

신약이 말하는 믿음으로 사는 삶에 대한 가장 압축적인 구절이 앞서 다루었던, 로마서 1:17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이다. 믿음으로 의인이 될 뿐만 아니라,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생명의 길은 오직 하나, 즉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이 말은 로마서 14:23의 “믿음을 좇아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는 말씀으로 확인된다. 어떻게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이 반드시 죄가 되어야 하는가에 부담이 있을 수 있다. 믿음으로 하지는 않지만 꼭 죄가 아닌 것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즉 믿음도 죄도 아닌 중립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존재하는 어느 것도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날 수 없으며, 타락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앞서 확인한 대로,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는 행동이든지 아니면 밖에서 하는 행동으로 나뉜다. 그렇다면 어느 것도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 즉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지 않은 것은 자기 의로 서는 것이고, 결국 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히브리서 11:6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성령과 더불어 하지 않는 것이고, 성령의 지배에 자신을 드리지 않는 것이며, 결국 그리스도가 아닌 나의 힘으로 하겠다는 말이기에, 믿음으로 하는 것만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제까지 살펴본바와 같이 신약성경은 믿음을 생명에 이르는 유일한 길로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신약성경은 믿음 외에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은 이 점에 대해 일관성 있게 말하고 있으나, 조금씩 다른 표현의 사용을 통해 강조하며 우리의 이해를 돕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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