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Chapter II. 구속사와 구원서정의 관계(Historia Salutis and Ordo Salutis)-①

예림의집 2013. 9. 4. 16:27

 

Chapter II. 구속사와 구원서정의 관계(Historia Salutis and Ordo Salutis)

 

보다 성경이 지배하는 구원서정 논의를 위해 어떻게 방법론을 설정해야 할지가 본 장의 주된 관심사다. 게어할더스 보스는 그의 『성경신학』에서 성경은 계시이며 이 계시의 내용은 구속사라는 전제를 견지하며 그의 논의를 개진하고 있다. 변증학자 코넬리우스 벤틸을 따르면, 성경이라는 텍스트(계시)는 인간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분이 중요하다. 보스와 벤틸의 논지를 종합하면, 우리가 방법론적으로 깊이 고려해야 할 중요한 결론을 얻게 된다. 계시는 신의 계시이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므로 임으로 인간이 설정하는 방법으로 계시에 접근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계시를 다룰 때에는 계시가 제시하는 방법을 따를 수밖에 없다. 이때 계시가 제시하는 방법이란 계시가 구속의 역사로 되어 있다는 성질을 충분히 반영하는 방법론을 말한다. 정리하면, 성경이란 하나님이 -다른 목적이 아닌- 인간의 구원을 위해 주신 계시, 즉 구속 계시라는 점이 가장 우선적으로 인식되어야 하며, 그 계시의 특성인 역사성-즉 그리스도에 초점을 두고 점진적으로 드러나는 계시의 역사성(구속사)-을 반영하는 방법론이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방법론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바로 성경이 그런 방법론으로 구원서정 논의를 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성경계시 가운데 구속의 역사성을 반영하는 구원서정에 대한 기대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으며 또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 살핌으로써 우리의 방법론을 찾고자 한다.

 

1. 누가복음 24장 44절-49절

본문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이다.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헤어지기 직전에 하신 말씀이니 만큼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으리라 짐작이 간다. 우리는 이 시점이 부활 후의 정황이라는 점을 기억하면서 본문으로 들어가면 좋겠다.

 

“(44절)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절)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절)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절)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절)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 (49절)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4:44-49)

 

44절을 보면, 예수님은 당신이 제자들과 함께 공생애 사역을 하면서 늘 당부하셨던 -그래서 지금쯤이면 제자들이 익히 기억하고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는- 말씀을 상기시키고 계시다. 그것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이라는 표현은 구약 전체를 지칭하는 말로 이해된다 “모세의 율법”, 즉 토라, “선지자의 글”, 즉 네비임, “시편”, 즉 케투빔은 유대인들에게 명확하게 자신들의 성경-즉 우리의 구약성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44절을 통해 볼 때, 예수님은 당신께서 제자들과 함께 사역을 하시면서 성경이 단신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할 것을 기록하고 있다고 자주 말씀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재미있는 표현이긴 하지만 소위 예수님의 성경관을 보게 된다. 예수님은 당신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도 성경의 권위에 근거하여 말씀하시는 습관을 보이셨을 뿐만 아니라, 더 구체적으로, 구약성경 자체가 당신에게 초점을 두고 기록하고 있는 책으로 알고 계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구약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진행하고 있는 역사성, 즉 종말론적 특성을 가진 책으로 예수님은 아셨던 것이다.

그러면 성경이 예수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고 할 때, 무엇을 가리켜 하는 말인지 다음 질문이 따라온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성경이 자신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그 내용을 46-47절로 압축해 주셨다. 그것은 결국 두 가지이다. 하나는 46절의 내용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고, 다른 하나는 47절에서 말씀하는 것으로 압축하면 구원의 전파이다. 46절에 기록된 내용은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내용이며 충분히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그것은 기독론적 사건이며, 구속사에 속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을 끄는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이 기독론적-구속사적 기록만이 아니라 47절의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47절의 내용은 한마디로 구원이 전파되는, 또는 전파해야하는, 일이 남아 있음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으며, 그 일도 예수에 관한 기록에 포함될 뿐 아니라 앞으로 계속해서 성취되어야 한다는 점이 우리에게 놀라운 사실로 다가온다.

여기서 질문이 생길 수 있다. 구원론적 관점에서 47절은 회개로 구원을 받는 것처럼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나중에 믿음과 회개의 부분에서 설명이 되겟지만-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는 “예수를 믿는 믿음”의 다른 표현임을 알 수 있다. 누가복음 3:3과 사도행전 2:37, 3:19, 5:31에서도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는다는 표현이 나온다.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이 회개에 의한 구원의 공식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한 구원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특히 죄의 관점에서 보면, 믿음으로 예수께 다가간다는 말은 죄로부터 멀어지는 것 즉 회개가 된다. 믿음과 회개가 동전의 이면과 같은 관계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강조되는 의미는 구원받은 자로서 죄로부터 돌아선 삶에 대한 강조라고 하겠다. 즉 이 본문 상에서 회개라는 표현은 조직신학적(구원론적) 의미의 회개라기보다는 성경신학적 회개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47절을 통해 우리가 놀랍게 여기게 되는 사실은 계속해서 구원의 일이 이루어질 것에 대해서도 기록할 뿐만 아니라, 그 일 또한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이라는 점이다. 47절이 말하는 내용은 구원의 일이고, 성령의 사역이고, 구원을 전파하는 사도들의 사역까지도 포함한다. 결국 이 모든 일이 구원서정의 일이다. 그리고 이 모든 구원서정의 일도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에 포함된다고 말하고 있다. 48절은 47절이 전제되기 때문에 가능케 되는 관계이다. 즉 47절이 그리스도의 일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사도로서 사역(48절)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도들이 그리고 사도들의 전통위에 있는 교회가 각 족속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모든 설교 사역이 구원서정의 작업이다.

정리하면 구약성경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 잇고,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 내용은 두 가지를 포함하고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가 죽고 부활하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셨다는 구속사의 선포이고, 다른 하나는 이제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구원의 적용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복음서는 구속사적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즉 46절의 내용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복음서 이후의 신약성경은 구원서정적 측면에서 성령이 사도들과 교회들을 통해서 어떻게 구원의 일을 이루시는지, 즉 47절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구약성경은 이 내용(구원서정의 사역)을 알고 있었으며, 고대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구약성경은 그리스도에 초점을 두고 역사적 -또는 종말론적- 진행을 하되, 그 성취로 구속사적 측면과 함께 구원서정의 진행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신구약 관계가 대두된다. 우리에게 구약성경이 어떤 책인지를 구약성경만 놓고 -즉 신약성경과 분리된 별개의 책-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이 본문은 신약성경을 통해서 구약이 신약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관심을 갖고자 하는 방법론이다. 신구약 성경의 통일성이 전제될 때, 성경은 구속사(구원의 완성)의 일과 구원서정(구원의 적용)의 일이 서로 뗄 수 없는 유기적 관계 속에서 하나의 일로써 -그리스도의 일로써-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 성경의 의도임이 본문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는 것도 쉬운 것만은 아닌 것 같다 44절에 예수님의 말씀이 있으신 이후에 비로소 45절이 가능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사역을 하면서도 여러 차례 당신이 앞으로 어떤 고난을 받아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신바 있다(9:22, 17:25, 18:31-34, 22:15, 24:6-7, 26-27). 그때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도를 “하나도 깨닫지 못했고”, “알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9:45, 18:34). 그러나 이 본문에서 저자 누가가 굳이 45절을 기록하는 것은 부활 이후의 정황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즉 공생애 동안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 부활 이후의 시점에 와서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48절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증인”이 되는 것이다. 부활 이후의 시점에서야 비로소 구원서정의 일이 가능할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강림이라는 구속사의 진행과 구원서정의 일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49절은 증인이 증인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이라고도 하고, “위로부터 오는 능력”이라고도 표현되어 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진행을 아는 우리에게 그것은 성령을 가리키시는 것이 명확하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이 문맥에서는 성령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지 않는 점이 특이하다. 단지 “약속”과 “능력”이란 단어로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나중에 사도행전이 어떻게 시작하는지와 비교해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누가복음은 구속사의 사건이 아직 남아 있음(행2)을 암시하며 글을 맺고 있다. 그리고 그 구속사적 사건이 진행이 되어야 구원서정의 사역이 진행될 수 있음을 시사하며 마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구약성경은 구속사이 역사적, 종말론적 진해오가 함께 구원서정의 진행을 함께 말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서정을 다루는데 있어서 구속사의 진행을 전제하는 불가분적인 구도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찾고자 하는 방법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