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십자가 신학
서 문
총신 양지 캠퍼스에서의 2012년 가을학기는 나의 일생의 뚜렷한 의미를 남기는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그 동안에 가졌던 루터에 대한 오해와 고난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들을 일거에 날려 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동안 자 접하지 못했던 신학자 루터의 삶과 신학을 통하여 나의 신앙을 돌아보게 되었고, 전도자로서, 설교가로서, 신학자로서이 나의 정체성을 새롭게 세워나가게 되었다. 특히 교수님이 직업 지으신 『루터 혼돈의 숲에서 길을 찾다』를 읽으며 깊은 감명과 도전을 받게 되었다. 본 리포트를 통하여 본 책과 교수님의 수업을 정리하면서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다시 한 번 정립하고 과연 “나의 십자가 신학”을 어떻게 세워갈 것인지 고민해 보도록 하겠다. 이러한 작업은 앞으로의 나의 목회에 나침반이 되어 나로 하여금 세속적 가치에 흔들리지 않고 나의 십자가를 지고 힘차게 나아가 아버지의 기쁘고 선한 뜻을 이루어나가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1부에서는 『루터 혼돈의 숲에서 길을 찾다』와 수업 필기를 기초로 하여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나름대로 정리하고 각 주제마다 약간의 소견을 달아 보았다. 2부에서는 십자가의 의미와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만난 사람들의 글을 살펴본다. 3부에서는 나의 십자가 신학을 정립해 보았다.
이번 기회를 통하여 나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며 그것을 마음 판에 새기고 주님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에게 부여한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제 1부 루터의 십자가 신학(강의 요약과 교제를 중심으로)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다. 그러나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칭의론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게 하실 때에, 또 의롭게 된 신자를 인도해 나가실 때, 반드시 십자가를 통해서만 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신학이다. 지금의 신학계에서는 정치신학, 민중 신학, 해방신학 등의 급진 신학에서 주로 십자가 신학을 강조하여 말한다. 전통신학에서 십자가 신학을 거론하면 마치 신비주의 또는 위의 급진 신학자로 오해 받기가 일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신학을 말하는 것은 원래 성경이 말하는 것이 십자가 신학이고, 사도 바울 중심의 신학이 십자가 신학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당연히 전통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종교개혁의 전통 아래에서 나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할 때에 루터를 연구하게 될 것이고 그의 신학이 바로 십자가의 신학임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루터를 단순히 칭의론자로 인식하는 것은 옳지 않다. 루터가 말한 십자가의 신악이 무엇인지 진중한 마음으로 연구해
I. 십자가 신학은
하나님은 죄인을 십자가로 의롭게 하신다.
십자가 신학은 먼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 주시고자 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되 하나님의 의로, 즉 그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선물로 주어진 의로 죄인을 구원하셨다. 그는 죄인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유전되어 있는 원죄 때문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를 죄인들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고, 그의 피로 죄인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대속의 십자가임을 믿는 자를 의롭다고 선언해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도 다시 살리어 그가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었음을 알게 하셨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 자신도 의로우심을 분명히 하셨다.
루터가 그 시대의 스콜라 신학신자들과 달랐던 점은, 그가 복음을 하나님 중심적으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그는 이 복음 자체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부르고 있으며, 하나님은 복음 즉, 십자가로 죄인을 구원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루터에게 있어서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은 처음 칭의에서 그의 구원 사역을 끝내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신이 구원하신 예수 믿는 자들을 계속 의롭게 만들어 가시기를 원하신다. 그들 안에서는 여전히 죄성이 존재함으로 그 죄성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원치 않는 십자가를 보내신다.
하나님은 의롭게 된 신자를 십자가로 계속 의롭게 하신다.
루터는 이런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그의 첫 번째 시편 강의 시편 4편의 주해에서 분명히 전달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신자를 다루는 방식을 요약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먼저 의롭게 하시고 살게 하시고, 그 때 곧바로 싸움으로 적응하게 하시기 때문에 … 그는 자신의 성도 가운데서 놀랍다. 왜냐하면 그는 그를 환난들에 넘겨주고 그리고 그렇게 면류관을 씌우시기 때문이다 … 무릇 경건하게 살고 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을 것이다 …”
하나님의 의는 롬 1:17을 통해 나타나는데 주님은 계속 의롭게 만들어 가시는 일 즉, 성화를 이루어가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사용하신다. 이것이 곧 복음이다. 즉, 어거스틴과 루터는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지 않았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루터는 여기에서 뿐만 아니라, 시편의 다른 구절들에 대한 해석들에서도, 신자를 다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하여 그리고 신자에게 환난이 일어나는 이유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첫째, 환난이 오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먼저 의롭게 하시고 곧 바로 한난을 주시기 때문이다. 둘째, 그가 그들에게 환난으로 내어주시는 것은 그들을 영광으로 이끄시기 위해서이다. 셋째, 고난의 목적은 한편으로는 신자들을 의와 거룩으로 교육시키기 위해서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육체와 악마를 제압하기 위해서이다. 넷째, 우리 안에 머무르고 있는 죄가 이런 고난을 필요하게 만든다. 루터는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아 밖으로부터 오는 환난과 핍박을 그리고 또한 신자 안에 쉼 없이 일어나는 시험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부르고, 이런 십자가가 구원 받은 신자에게 반드시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2. 루터의 칭의론 그 때와 지금…(특강 요약과 연구)
루터의 칭의론은 개신교 교리의 핵심이다. 칭의론 때문에 그는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쫓겨났다. 개신교가 잉태 된 결정적인 원인이 칭의론이다. 루터교와 카돌릭 교회는 오랫동안 에큐메니칼 운동을 해 왔지만, 칭의론에 대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결국은 갈라서게 된 것이다. 칭의론을 적용해서 일치를 보게 되면, 교회 일치의 길이 열릴 것이지만, 칭의론, 마리아 숭배, 교황 무오설 등이 좁힐 수 없는 일치의 걸림돌이다.
루터의 칭의론을 “오직 은혜로”로 바꾸어 부르기로 한다. 카돌릭은 오직 믿음 만으로가 안 되고 사람의 공로가 더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들이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박성명을 내고, 카톨릭에서도 반발이 일어나 일치와 화해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루터의 칭의론의 특징.
첫째, 루터는 칭의론을 하나님의 영광을 사수하는 도구로 사용하였다. 그는 칭의를 창조보다 더 위대한 구속의 원리로 보았다. 이 칭의의 진리를 가르치지 않으면 하나님께 합당하게 돌려질 영광을 가로채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둘째, 루터는 칭의론을 창조론의 틀 속에서 이야기하였다. 그는 칭의, 구속, 창조를 분리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의 구속은 새 창조의 경륜 속에 있고, 새 창조는 죄인의 의롭게 됨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여, 의롭게 된 사람은 창조의 사람이 된다고 하였다.
셋째, 루터는 칭의 조항은 모든 조항의 핵심적으로 본다. 모든 교리의 주요 조항들은 그 한 조항인 칭의론이 의지한다고 보았다. 칭의 교리는 기독교 교리의 총체이다.
넷째, 루터는 칭의론을 목회자가 필수적으로 알고, 연구하고, 읽고, 명상하고, 연습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로마서, 갈라디아서 등을 자주 읽어야 한다. 칭의가 가난한 자, 죄 의식 속에서 헤매는 자, 고통 가운데 있는 자 등.에게 가장 큰 위로를 줄 수 있다. 그는 칭의론을 목양적으로 사용하여야 한며, 위로 설교와 칭의 설교를 연결시켰다. 우리는 성도를 위로해서, 격려해서 세우는 사람이다. 칭의 교리를 잘 배우고 이를 응용하는 연습을 행 할 것이다. 선생이 되려는 사람은 매일 칭의를 연습해야 한다.
다섯째, 루터는 자신의 신학의 제 1원칙을 칭의로 여겼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칭의 연구는 끝이 없다. 어떻게 해서 내가 의롭게 되었는지를 다각도로 연구해야 한다.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정돈하라. 우리는 어떠한 공로로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를 받는 것이다.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그 예수의 공로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것이다.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계명을 지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이 자신의 몸을 드려 사랑을 실천하셨다. 그 예수의 공로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것이다.
여섯째, 루터의 이 교리는 시험당하는 신자를 위로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시험과, 공포와 좌절 속에서 칭의의 교리를 붙잡아야 한다. 환란과 시험 속에서 칭의의 신앙이 그를 붙잡을 것이다. 내가 너무나 부족해 보이고 처량해 질 때, 하나님의 칭의의 신학을 묵상하라. 하나님의 자녀요, 상도 받을 사람인데, 그 은혜에 합당치 못하게 살아가지 말고 합당하게 살아가자. 이것으로 인해서 구원과 상급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루터는 칭의론을 성경 이해의 열쇠로 본다. 스콜라 신학자들은 성경을 칭의론 중심으로 보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가죽옷, 아브라함의 믿음, 모세를 통한 구출, 제사제도 등이 모두 칭의의 복음이다.
루터의 칭의론의 내용
첫째, 전가 교리이다. 톰 라이트는 루터가 이야기했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하심의 칭의를 거부하였다. 법정적 칭의, 전가적 칭의를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드릴 수 없다고 하였다. 전가의 교리란, “우리가 받는 구원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가서 의로다 함이 판결 받은다”는 주장이다. 이 의는 노력을 해서 획득한 우리 안에 있는 의가 아니라 밖에서부터 내려오는 전가시킴으로 획득한다. 이 의는 우리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전가(轉嫁) 되어 성취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서 구원 받은 것이다. 우리는 전적 타락한 자로 자기의 의로 구원받을 수 없다. 카돌릭은 전가 교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여 트랜트 종교회의에서 루터의 전가 교리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전가 교리를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루터는 두 가지 의에 대해서 말한다. 먼저, 낮선 의로 밖에서 값없이 주어진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말하며, 또 하나는 시민 의로 보편적인 의로움으로써 이런 의를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을 수 가 없다.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고 내가 이 땅 위에서 의롭게 살려고 살아갈 때 일어나는 의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다(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다).
둘째, Simul iustus et Peccator이다. 이를 번역하면,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인 그리스도인”이다. 이를 모르면 죄를 지을 때 칭의의 교리를 놓치게 된다. 카돌릭 교회서는 50%는 의인 50%는 죄인이라고 하느냐고 외곡 하여 정죄를 하였다. 루터는 전인을 이야기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강단에서 더욱 더 교리적으로 설교해야 한다. 칭의와 십자가를 설교해야 한다.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인 것을 설교해야 한다. 전가의 은혜를 설교해야 한다. 영적 싸움에 대해서 가르쳐야 한다.
셋째, 루터는 두 종류의 의인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은 의인과 그렇지 않은 의인”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은혜를 아는 죄인과 그렇지 않은 죄인”이다.
더불어, 성령세례와 칭의와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 성령세례만 받으면 죄를 안 짖고 승리하며 살 수 있다고 설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더욱더 기도하고, 말씀보고,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운명론적 결정론적으로 가르치지 말라. 우리에게 마귀를,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 주시고, 말씀을 주시고, 신앙의 동역자를 보내 주셨다. 그분이 바로 성령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붙잡고, 성령을 의지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붙잡는 삶이 신앙이다.
3. 십자가: 신자가 당하는 환난, 연단
루터는 신자가 당하는 환난, 연단을 성경에서는 십자가라고 부른다. 루터는 그의 십자가 이해를 시편강의 다음에 이어진 로마서 강의에서 좀 더 심화시키고 있다. 특히 롬 5:3-5에 대한 주석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의인을 다루시는 행동방식을 또 한 번 꺼내면서 의인의 삶에 왜 십자가가 필요한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신자에게 십자가가 필요한 것은 신자의 신분에 기인한다. 신자는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 으로 살아간다. 루터에 의하면, 신자는 하나님이 의를 전가시켜 주심을 통하여서 그리고 그가 이 의를 믿음으로 의로워졌다. 그럼에도 그는 “의롭다”기 보다는 “의롭게 되어졌다”고 칭해져야 한다. 그리고 “의”라기 보다는 “칭의”라고 칭해져야 한다. 신자는 “항상”의로워져야 하는 칭의의 과정 속에 있다. 오직 그리스도 자신만이 이미 의로우시고 완성된 의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신자의 신분 상태로 인하여 의인의 현재의 삶은 필연적으로 모순적인 삶이다. 신자들은 양심 안에서와 영 안에서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가지고 있지만, 육체와 세상과 악마와는 불화를 가지고 있다.
루터는, 롬 5:3-6에 대한 주석에서, 문장론의 저자인 롬바르트의 소망을 이루는 방식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비판하면서, 그의 십자가 이해를 계속 드러낸다. 그는 여기에서 신자가 칭의 후에 당하는 환난을 믿음, 소망, 사랑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하고 이 환난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바울이 말하는 이런 환난은 하나님의 자비의 증거로 본다. 그는 자비로 말미암은 환난과 심판으로 말미암은 환난을 구분한다. 이런 하나님이 주시는 환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자체와 같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십자가의 유물을 흠모하면서도 환난과 역경을 피하는 자는 위선자라고 비난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환난들이 성경에서는 본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칭해진다.”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 환난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들이다. 그는 계속하여 환난의 목적은 신자로 하여금 인내를 배우도록 하기 위함임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은 연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을 받지 않으신다고 말한다. 이런 연단이 필요한 것은 이간 안에 남아 있는 원죄 때문으로 본다. 하나님은 자신이 받으시는 아들 마다 이런 연단을 허락하신다고 마한다. 이런 환난만이 참된 소망으로 이끈다고 본다. 소망은 롬바르드가 말하는 것처럼 공적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망은 환난과 연단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런 환난이 참된 사랑으로 이끈다. 그는 이런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Caritas Dei)”이라고 부르고 “인간의 사랑(Amor Homini)”과 구별시킨다.
하나님의 사랑은 부어지나 인간의 사랑은 반복되는 행동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덕이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인간의 연민을 하나님에 대한 순전한 연님으로 바꾸고 하나님에 대한 순전한 감정을 갖게 한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올바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창조하고 그들로부터 불의를 제하고 자신의 의에 대한 향유를 없애준다. 그는 이러한 사랑은 하나님 외에 아무도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과 같다고 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교만하지도 부서지지도 않는다. 루터는 이런 사랑을 로마서 8장 28절에 대한 해석에서 “십자가”라 부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첫째, 루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다루면서 “Deus iustificans”즉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에서 그 출발점을 찾는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다. 루터 신학은 바울 신학이다. 바울을 통해서 성경 전체를 보려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성토하며 살아야 하겠다고 마음을 다짐했으면 좋겠다.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임하여야 한다. 십자가는 목회의 최고의 무기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생각할 때 하나님의 감동적인 사랑에 대한 끌어 오름이 있어야 한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칭의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루터는 우리가 의롭게 되는 방법(iustifacatio칭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십자가 없이는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둘째, ex fide(믿음으로). 개신교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믿음이다. 믿음이 아니고서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고, 우리의 자력적으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믿음을 갖게 해달라고 늘 기도해야 한다. 약속의 핵심은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주겠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하나님과 화목 되는 것이 복이다. 당시에는 믿음보다 사랑이 강조되던 시대였다. 그러나 사랑은 믿음의 열매인 것이지 사랑 때문에 믿음이 오는 것은 아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신득의는 우리의 공로가 있을 수 없다.
셋째, Sanctifatio(거룩)하게 만드심(성화)의 단계이다. 의롭게 된 자들을 가만히 두면 저절로 성화가 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기까지 이끄신다. 구원은 하나님의 열심이다.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이루어가시고, 완성시키는 것이다. 신앙인의 상태가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기 때문에, 이를 항상 머릿속에 염두에 두고 목회를 해야 한다. 인간된 우리는 자기 영광을 구하려 하고, 안주에 빠지고, 게을러지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율법(처서 굴복시키는)이 필요하다.
신자의 십자가
이제부터 우리에게도 역할이 주어졌다. 루터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첫째, tribolatio(환난, 고난)이다. 이 고난은 처음에는 감당할 수 있다고 느끼지만, 계속되는 고난으로 시험이 들어 버린다. 하나님이 얼마나 전능한 분이신가? 믿음이 없는, 경험이 없는 성도들에게 믿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둘째, tentatio(시험)이다.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리 금식기도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 시험에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시험은 유익을 주는 시험이다. 나의 힘으론 어찌할 수 없지만 성령님께서 인도해 주신다.
기도, oratio(기도)이다. 우리는 감당할 수 없기에 울부짖는 기도, 간절한 기도. 가슴을 찢는 기도, 통회하는 마음, 쏟아놓는 기도를 해야 한다. 환란과 시험을 거친 신앙이기 때문에 이러한 기도를 드릴 수 있다. 이것이 없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의롭게 만든 다음에 가만히 두지 않으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에까지 이끄시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신자의 십자가를 모두 설파해야 한다. 해방신학, 민중 신학 정치신학에서는 대속의 십자가를 전하지 않는다. 인간의 원제와 대속이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아이러니이고 하나님이 싫어하신다.
루터정통주의, 칼빈정통주의는 화란 개혁주의로 이어졌다. 정통주의가 제일 강조하는 것은 어떤 것이 정통 교리인가이다. 많은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에 대해서는 흠 없이 전하지만, 신자에게 임하는 십자가를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여러분에게도 십자가가 왔다는 것을 말해 주어야 한다. 또한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를 도우시고, 위로하신다.
대속의 십자가를 전하는 사람은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대속의 십자가이다. 그는 온갖 방법으로 십자가를 방해한다. 십자가 신앙은 행위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비판을 받는다. 우리는 반드시 안팎으로 핍박을 각오해야 한다. 또한 올바른 목회를 하면 사탄과의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 세상이 하는 말을 교회에서 똑같이 하게 된다면 교회는 텅텅 비게 될 것이다. 현대의 복음은 칼 마르크스 이후에 사회 경제의 문제로 세상을 보는 잘못한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이다. 세상에서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다. 아무런 핍박이 없다는 것은 복음을 잘 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령님의 도우심
우리가 십자가의 삶을 산다는 것, 나아가 대속의 십자가를 전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짐이다. 그 자체가 고난의 십자가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은혜가 주어졌으니 도우시는 성령이다. 신자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을 성령이 도우시고 영화에 이르게 하신다. 성화되어가며 마지막 날에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이 고난의 자리가 영광의 자리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뽑고, 뽑은 자리가 나의 자리이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나의 삶을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시다. 그 누구도 이 십자가의 삶을 함부로 건들 수 없게 하라.
glorificatio(영화)의 단계
믿음의 서정의 마지막 단계인 영화는 마지막 날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나를 쓰시는 그 자리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부족하지만 나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전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아무도 날 건들지 못하게 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의롭게 되는데 까지는 단회적 사건이고, 성화(환난, 시험, 기도), 성령의 도우심은 반복적 사건이며 영화는 최종적 사건이지만 지금도 맛볼 수 있는 단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예베소서 1:3, 고전 1장, 벧전 1장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칭의론의 꽃은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올려 드리는 것이다.
4. 하나님의 역설적인 응답
하나님은 십자가라는 정반대 형태를 통해 신자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십자가 신학은 기도를 강조한다. 왜냐하면 환난 당하는 성도는 기도하기 때문이다. 롬 8:26절에 대한 해석에서, 루터는 기도응답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이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기도응답에 있어서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의 기대에 거슬려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며 그 이유를 하나님의 행동방식에 돌린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을 파괴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런 하나님의 선물들을 받기 위해 인간은 수동적으로 견뎌야 하는데, 이렇게 견디고 나아갈 때 하나님은 그의 선물들을 고난이라는 “정 반대 형태 아래(Sub contraria specie)"로 선물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 방법을,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 때 사용하셨고, 신자들 역시 이런 정반대 형태의 방법으로 인도하신다.
루터는 이런 맥락에서 신비주의자 타울러를 인용하는데 이는 그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고난이 가지는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꾸로 그가 스콜라 신학자들을 비판했던 것은 이런 하나님의 지혜를 성경적으로가 아니라 형이상학적(methaphysice)으로, 존재유비의 방법(anologia entis)으로 이해하려했기 때문이었다.
Sub contraria specie(정 반대 형태로)
이는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지 못하는 방법으로 응답해 가신다는 것이다. 주님의 응답은 우리 이성하고 반듯이 맞아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스콜라 철학은 하나님은 합리적 하나님이다. 이성과 일치하는 하나님으로 이는 계몽주의, 자유주의로 연결된다. 우리들이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는 신자들이 실패를 하게 되면 마귀가 했다거나 믿음이 연약해서 그랬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성공하게도 할 수 있고, 실패하게도 할 수 있다. 요셉의 경우처럼 결국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 그러므로 내 맘과 내 뜻대로 내가 기도한대로 이루지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비참하게 여길 정도로 우리를 이해 못하는 곳으로 인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합리적으로 만들어 가르치면 안 된다. 우리는 신자를 향해서 목회를 해야지 대중을 향해서 목회하지 말아야 한다. 율법주의(종교)와 합리주의(철학)를 주의해야 한다.
5. 하나님은 낮선 일(opus alienum)과 본래의 일(opus proprium)
루터는 “하나님은 낮선 일(opus alienum)을 통하여 본래의 일(opus proprium)을 이루신다.”고 말한다. 루터는 이런 하나님의 구원 방법을 히브리서 강의에서도 강조하고 있다. 히 2장 8절에 대한 해석에서 그는 하나님의 인도방식을 다시 꺼낸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를 살리시기 위하여 죽으신다. 또한 그를 높이시기 위하여 낮추신다.” 그는 그리스도 역시 높임을 받기 전에 먼저 낮아짐을 당했다고 말한다. 그는 바울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전 2:2)”고 말했을 때,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인도방식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다고 본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과 십자가를 지고 따름은 떨어질 수 없는 하나를 이룬다는 것이다. 히 2잘 24절에 대한 해석에서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악마와 죽음에 대한 승리의 비밀임을 분명히 한다. 이는 하나님의 일의 독특성에 기인한다. 하나님은 성도를 낮선 일(opus alienum)을 통하여 본래 하고 싶은 고유한 일(opus proprium)을 행하신다. 하나님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 마귀를 사용하신다. 마귀를 통하여 생명의 원수 죽음을 없애신다. 그리고 본래 주시고자 하시는 생명을 주신다. 그리스도인도 사는 날 동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시험당하는 자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기억하고 그에게 스스로 성례와 본이 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짐을 통하여 시험을 극복할 수 있다.
이러한 원리를 설명해 본다. 하나님은 그를 살리시기 위하여 죽이시고, 높이시기 위하여 낮추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이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라! 십자가가 없는 곳에 영광도 없다(No Cross, No Crown). 고전 2:2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라고 말한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대속의 십자가뿐만 아니라 신자의 십자가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십자가 신학”을 정립하라. 사고를 자극하고 어렵다고 생각하는 책들을 읽으라. 공부하면서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쉽게 공부하려고 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 이다. -조금 더 씹어 먹을 수 있고, 어렵다고 생각하는 책을 읽으라.
십자가 신학은 고달프게 사는 인생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기를 안주하지 말고, 방학 때를 나를 위하여 사용하라. 영어 성경도 읽어야 한다. 라틴어, 히브리어, 헬라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등. 스스로 속이지 말고, 십자가를 지라.
Deus absconditus
루터는 숨어계신, 숨겨진 하나님(hidden God)을 소개한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십자가 안에 자신을 숨겨서 계시하신다. 십자가를 가면으로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은 이성적으로 추론해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우주 만물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을 추론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서 오류를 범하였다. 루터는 인간이 아무리 이성적으로 추론해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 수 없다고 한다.
하나님을 알려면 십자가로 가야 한다.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뺀 것은 자신의 경험일 뿐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이야기함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
Sub contraria speciae
루터는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과 코드를 맞추어 일치하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거슬려 응답할 수 있다고 한다. 때로는 원하는 소원대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 때로는 이성과 맞지 않게 역사하신다(사 55:).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루터는 낮선 의와 본래의 의를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Opus aliemum(낮선 의)을 통해서 Opus proprium(본래 의)을 드러내신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주님은 오히려 사탄을 허용하심을 통해서 신자들의 하나님을 은혜를 깨닫고 생명을 주신다.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죽음을 없애기 위해서 사탄을 사용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십자가의 지혜”이다.
오늘날 교인들이 성경을 자기 식으로 배우기 때문에 하나님을 합리적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합리적인 분이 아니시고,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을 이성과 합치시키려고 하면 끝없이 고통에 빠지게 된다.
6. 루터의 십자가 신학
루터는 이렇게 십자가를 통하여 신자를 구원하는 방식을 그는 십자가 신학이라고 부른다. 루터는 이 사실을 우선 히 12장 1절에서 6절의 해석에서 설명한다. 그는 신자의 삶에 있어서 징계의 필요성에 대하여 주장한다. 그리고 징계가 당시에는 쓰라리게 보이나 이를 통하여 연단될 때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고 본다. 이런 하나님의 지혜를 그는 히 12장 11절의 난외 주해에서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이란 말로 대체한다. 앞에 언급했던 시편, 로마서, 히브리서 그리고 구약과 신약의 고난에 관계된 구절들을 모자이크하여 십자가 신학의 틀을 형성하였다.
“성경에는 서로 반대되는 두 개념들이 병행되어 있다. 예를 들어 심판과 의, 진노와 은총, 사망과 생명, 악과 선 등이 그러하다. 이것은 ‘대저 여호와께서 … 일어나시며 … 자기 일을 행하시리니 그 일이 비상할 것이며 ….(사 28:21)’의 구절에서 언급된 것이다. 왜냐하면 시편 4편 1절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에서 표현된 것처럼, 하나님은 놀라운 방식으로 양심을 기쁘시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 구절은 ‘당신은 나를 중시하셨으며 향상시키셨습니다.’의 뜻이다. 이런 것은 은총이 주어졌을 때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며 로마서 5장 4절에는 ‘연단은 소망을 이루고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이라고 쓰여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십자가 신학을 발견한다. 또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장 18절과 23절에서 ‘십자가의 도가 …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다.’라고 말한 것처럼, 십자가의 도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의롭게 하신 후 환난을 보내시어 그를 훈련시키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신자를 다루시는 지혜이다. 루터는 이런 지혜를 십자가의 지혜 혹은 십자가의 신학이라 부른다. 모든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십자가라는 정반대, 낮선 일을 통해서 구원하신다.
영광의 신학(thologia gloyriae) 비평
반대로, 천주교에서는 영광을 강조하였다. 이를 영광의 신학이라 부른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들어내시는 것을 강조한다. 그들은 사람들을 전도할 때 부정적인 것보다 좋은 것을 설명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루터는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을 찾아오셨다고 말한다. 영광의 신학자들은 결과적으로 저주받은 자들이다. 영광의 신학은 결국 수많은 사람들을 좌절시킨다.
우리는 십자가 신학을 말한다. 하나님을 잘 믿어도 우리의 삶 속에 병이 안 고칠 수도 있고 부자가 안 될 수도 있다. 십자가 신학은 전천후 신학이고, 영광의 신학은 편 가르기 신학이다. 우리의 영광은 예수 믿고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을 말한다. 십자가 신학만이 진정으로 성도들을 위로하고 축복할 수 있다. 곤란을 주셔서 곤란 중에 축복을 주시는 기가 막힌 하나님의 지혜를 보라!
십자가의 도가 다른 사람에게는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능력이 된다. 십자가의 도는 성경 전체에서 설명하고 있다. 예수를 믿는데 아무런 고난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다. 우리는 역경과 고난과 멸시를 당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해주어야 한다. 진리는 사람을 기쁘게 한다.
제 2부 루터의 십자가에서 현대의 교회 속으로…
1. 잊혀져가는 십자가 신학
루터는 1518년 4월에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자신의 ‘십자가 신학(Theology of the Cross)’를 발표했다. 그의 주장은 당시 천주교의 ‘영광의 신학’(Theology of Glory)과 대조되었다. 영광의 신학이란 스콜라 신학자들이 내세우는 것으로서 하나님을 그분의 권능과 영광의 측면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영광의 신학은, 하나님은 만물과 사건들을 통해 드러나신 하나님으로서,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지만, 근본적으로 선을 행할 수 있고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신비적 체험과 명상, 도덕적 성취 등을 통해 영적 사다리를 계속 올라가면 그 끝에서 직접적이고 막힘이 없이 “적나라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반면에, 루터는 ‘십자가 신학’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은 고통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으로서 죄에 빠진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거나 알 수 없고, 사다리의 끝에서 우리가 만나는 “적나라한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 아니라, “소멸하시는 불”, 즉 심판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고난과 고통, 십자가를 통해서만 알 수 있으며,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만 영광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개신교 영성의 근간이 되었다. 모든 개신교의 부흥에는 언제나 십자가의 은혜와 회개와 자기부인의 영성이 강조되었고, 참된 기독교 신앙이란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해 구원받고 그분의 뒤를 좇아 우리 또한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이해되었다.
하나님이 진정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면 우리는 영광이 아니라, 고난의 렌즈를 통해 그분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 ‘십자가 신학’이다. 하지만 ‘십자가 신학’의 영성은 현대에 들어와서 퇴색되었고 개신교, 특히 복음주의 기독교 안에 다양한 형태의 ‘영광의 신학’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성공과 번영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찾고자 하는 기복주의나 수에 집착하여 외형에 치우치는 물량주의, 또 인간의 죄성을 깊이 인식하지 못한 채 중심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제자훈련이나 값싼 은혜 구원론, 도덕적 수양을 성화와 혼동하는 율법주의 등등은 다 영광의 신학의 후예들이다.
참된 신앙생활은 십자가를 지나서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떠난 그 어떤 신비체험이나 영적 성취도 하나님을 아는 바른 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십자가에 머물면서 주님의 고난과 아픔, 버림받음에 동참해야 한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2. 고난과 영성과의 관계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는 고난 없는 편안한 삶의 행로가 포함되어 있다고 외치는 이들을 철저히 부인하면서 십자가는 우뚝 서 있다. 예수의 부활을 둘러싸고 한참 행복감에 도취되어 있던 바로 그때에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실존이 저 천국을 향해 올라가려고만 할 뿐, 이 세상에서 만나는 삶의 현실과 어떤 접촉도 갖지 않으려 했던 위험한 모습이 실제로 존재하였다. 신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경험한 것을 내세우면서, 바로 지금 여기에 서 있는 그들을 향하여 신앙이 요구하고 있는 것들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된다. 예수를 따르라는 외침은 그와 더불어 고난을 함께 하라는 부르짖음이기도 하다(막 8:31-38). 신자들이 자신의 실존에 삼게 된 모범은 바로 고난, 배척당함 그리고 죽음의 길을 지나 영생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는 최종 목적지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다른 길로 돌아 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도는 없다. 고난, 배척 그리고 죽음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드러내는 순수한 증거들이다.
이런 통찰들은 십자가 신학이 각각의 신자가 경험한 것과 관련을 맺으면서, 그 신학에 무게를 더해준다 고난, 겸비함 그리고 배척당함이야말로 신앙의 순전함을 보증하는 증명서(hallmark)다. 그것들은 신자들이 참 제자임을 보여주며, 그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을 보증한다. 그런 점에서 십자가는 인간의 고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나타내는 증표인 십자가로 세례 받는 것처럼,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로 말미암아 빚어지고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리스도가 고난당하신 일이 실제로 그리고 진정으로 한 일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르게 한 것이다.' 세례는 단순히 그리스도인의 삶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끊임없이 죽고 사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고난의 길에 '넘겨지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로 그 손길에 '넘겨진' 이들이다. 신자 자신의 삶속에서 십자가가 담고 있는 원형(pattern)을 깨달게 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 안에 서 있고 부활의 신비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나아가 자신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의 풍성한 유업을 이어 받은 상속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십자가라는 본보기를 강조하면서 심각한 오해가 나타나게 된다. 다음 글을 곰곰이 살펴보라.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crucianus)이 아니라면, 그 누구라도 그리스도인(Christianus)이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인이 아니니, 그 까닭은 그가 자신의 주인인 예수그리스도를 전혀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자칫 어떤 모방의 영성, 곧 예수라는 본보기를 인간이 닮아가는 영성을 가리킨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사실 이런 영성은 토마스 아 켐피스의 글에서 그 견고한 기초를 찾아볼 수 있는, 너무나 중세의 냄새가 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루터가 말하려 했던 것은 그것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었다. 그의 말의 핵심은 곧, 진정한 그리스토인이란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진(이 말이 능동이 아니라 수동의 의미임을 유념하라)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신앙이란 겉으로 드러나는 방식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발버둥치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신앙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만드시는 수단일 뿐이다. 루터가 생각하였던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진다.'는 말의 뜻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주체로서 일하심을 강조한 것이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떠받치며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일 뿐이지, 우리 자신의 작품은 아닌 것이다." 루터가 강조하였듯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고난을 당하려고 몸부림치는 것도 아니요. 자신이 주체가 되어 그리스도의 고난을 흉내 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도리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은 모양으로 빚어 가시도록 해드리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루터는, 어쩌면 자신과 같은 시대를 살던 사람들에겐 놀라울 수도 있지만, 고난이 영성에서 갖고 있는 긍정할 만한측면들을 강조하고 있다. 다른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옹호하거나 이 세상을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데 고난이 필요함을 논증하는 곳에서, 루터는 영적인 방황과 고통 받는 자들의 고뇌를 직접적으로 토로한다. 다음 글은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직접 건네는 말이다.
십자가의 신학자(곧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 안에 모습을 감추신 하나님을 말하는 사람)라면, 고난, 십자가 그리고 죽음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귀중한 보배이며, 가장 거룩한 유물들이라고 가르친다. 이는 이 신학의 주(主) 되시는 분이 거룩한 당신의 살로 만지실 뿐 아니라, 거룩하고 신성한 자신의 의지로 품으심으로써 스스로 성별(聖別)하시고 복 주셨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는 이 유물들을 바로 여기에 두심으로써, 우리가 거기에 입 맞추고 추구하며 품을 수 있도록 하셨다. 이런 그리스도의 보배들을 받을 만한 자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은 얼마나 큰 행운아이며 복 받은 사람들인가!
3. 고난과 신앙과의 관계
고난과 신앙은 한 몸이며 그 강도와 질(質)을 놓고 볼 때 서로 직접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이 루터가 자기 학대의 영성을 추구했던 인물이었음은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자들이, 문자 그대로 또는 비유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채찍질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고난 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겨주신 것이 되게 하고, 결코 우리가 자신에게 지우는 고난이 되게 하지 말자. 어떤 고난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며 기여할지를 하나님이 가장 잘 아시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인이란 모름지기 하나님을 섬겨야 하며 고난이 자신에게 찾아올지, 그것이 어떤 모습을 띠게 될지 분별해야만 한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으나 이 인용문에서 'passio' 가 갖고 있는 두 가지 의미, 곧 '고난과 '다른 이의 영향을 받다'는 뜻 사이에 긴밀한 연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주목하라.) 고난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또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지워야 할 어떤 짐 같은 게 아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삶 속에서 십자가를 지는 고통이 반드시 필요함을 깨닫는 사람이며 하나님께 그 고난이 일어날 곳과 시간 그리고 그 본질을 맡기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루터가 보기에 신자와 그리스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긴밀한 연합으로 결합되었으며, 신자는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고 그리스도는 신자의 삶을 함께 소유하신다. 신앙은 마치 혼인 계약과 같은 것이어서 신자와 그리스도 사이에 함께 소유할 물건들을 정하게 된다. 우리가 가진 것들(죄와 사망)이 그의 것이 되고, 그가 가진 것(구원과 생명)이 우리의 것들이 된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신자의 생명 속으로 뚫고 들어와, 이처럼 '찬탄할 만한 거래' (commercium admirabile)를 만들어낸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풍성함의 특권은 그와 함께 고난당하는 것이며, 이는 그와 더불어 우리가 다시 일으켜지도록 한다. 즉 그리스도가 전에 밟고 지나갔던 길, 먼저는 심자가를 향하여 그 다음에는 영광을 향하여 걸어갔던 것과 같은 길을 우리가 걸어가게 하는 특권인 것이다.
바로 여기서 신앙이 시험대에 오른다. 진정 영광이 십자가 너머 저편에 자리 잡고 있는가? 십자가는 삶의 종착점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출발점을 가리키는가? 십자가야말로 영광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출구이고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다. 나아가 신자로 살아가는 우리 여정에 찾아온 고난과 고통 그리고 반대들은 소멸되어 새롭게 바뀔 것이라는 견고하고 줄기찬 확신을 갖고 사는 삶이 바로 믿음의 삶이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그 첫 번째 금요일이 부활의 날로 나아가는 길을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지금 당장은 다소 어둡고 불투명한 안경을 쓴 것처럼 뚜렷하지 못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 날이 이르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명명백백하게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부활이 없었다면 십자가의 길은 금욕주의자의 자기 부인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며, 기껏해야 인간 실존의 무익함에 자신의 몸을 내맡기는 한 방편이거나, 심지어 절망과 망상 정도로 그칠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그 부활이 우리의 실존에 암시하는 바를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십자가는 현실 감각과 목적의식을 갖게 된다. 이 길은 고난, 고통, 배척의 길이다. 그러나 이미 우리보다 앞서 그의 길을 걸어가신 뒤 저편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을 만나기 위해 걷는 길이기도하다.
4. 십자가 신학을 만난 사람들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Crux sola est nostra theologia).
마르틴 루터가 했던 이 말을 처음 접했을 그때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옥스퍼드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자마자 나는 곧바로 1978년에 캠브리지에 도착하여 종교개혁 시대의 신학 문헌들을 철저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더 젊은 시절, 칼 바르트(Karl Barth)의 신학에 익숙하였던 나는, 근대 종교사상의 토대가 되었던 두 원천, 곧 루터(Martin Luther)와 칼빈(Jean Calvin)을 더 깊이 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루터의 말을 우연히 알게 된 것은 1979년 봄이었다. 책에서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 나는 쓰던 것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힘, 가능성 그리고 도전으로 가득 차 있던 루터의 선언은 전류가 흐르는 말처럼 보였다.
그 말은 또 한편 터무니없는 말처럼 보였다. 어떻게 단지 과거에 불과한 한 사건이 현재와 그런 연관성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또 하필 왜 이 사건,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어야만 하는가? 무슨 논리로 그 십자가에 이처럼 집중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이해시킬 수 있을까? 루터의 신학과 영성 안에서 그 초점이 어떻게 떠오르는지 잘 보여주는 것이 하나의 과제였다. 하지만 계몽주의의 통찰들이 압도하던 시대에 과연 십자가가 기독교 신학의 핵심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당시 내가 비록 영국 자유주의 신학 전통의 틀 속에 있긴 했지만, 나는 결국 루터의 접근법을 시대에 뒤떨어진 진부한 것으로, 오로지 교리사가(敎理史家)들과 종교개혁 초기의 신학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이나 관심을 보일만한 것으로 여겨, 깨끗이 잊어버렸다. 루터가 선언한 그 말은 현대의 기독교 사상에서는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 필기를 계속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은 내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 말은, 당시 나의 정체성을 구성했던 관대한 자유주의 신학에만 존재한다고 스스로 막연히 직감하면서도, 정작 딱 부러지게 집어낼 수 없었던 잘못된 무언가를 확실하게 포착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뒤로 내 생각이 발전해온 궤적(軌跡)을 뒤돌아보면 루터가 던진 짧은 한 마디는 바로 나의 자유주의가 무너져 내렸던 반석임이 증명되었다. '십자가 신학, 바로 그것을 통하여 루터는 자신이 살던 시대에 도전장을 내밀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앙 무대를 차지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그 신학은 현대에도 도전장을 내밀 수 있는 것임이 증명되었다.
이 주목할 만한 신학을 역사적인 정황과 함께 이야기해 보자. 1517년과 1519년은 종교개혁에서 대단히 중요한 시기로 간주된다. 1517년, 루터는 면죄부의 잘못을 지적한 95개조의 반박문으로 신학의 세계에 맹렬한 폭풍을 일으켰다. 1519년에 이르자 그는,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벌어진 토론에서 자신의 강력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일약 유명한 인물이 되고 만다. 요한 엑크(Johann Eck)에 맞서 맹렬한 싸움을 벌이면서 루터는 중세 가톨릭교회가 고수하던 많은 전통 사상들에 이의를 제기하였으며, 특별히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그가 불을 붙였던 그 토론은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매개 역할을 했음이 증명되었다.
이와 반대로 1518년은 조용한 시기였다. 그러기에 자칫하면 그 해를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그 해 4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전통이던 공개 토론이 하이델베르크(Heidelberg)에서 열리게 되면서, 루터는 그 토론회의 사회자로 초청받게 되었다. 거기는 자신이 속한 수도회였고 그도 수도회의 수사들 중 하나였다. 바로 이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루터는 '십자가 신학' 을 내놓게 된다. 루터가 말한 가장 중요한 대목을 인용해 본다.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일들을 피조물 속에서 보이는 것으로 여기는 이들은 그 누구든지 신학자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고난과 십자가에서처럼,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뒷모습을 본 사람은 그 누구든지 신학자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17루터에게,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우리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모든 생각이 담금질되는 도가니이다. 루터는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그리고 '십자가는 만물의 시금석이다'와 같은 말에서처럼, 간결하면서도 단호한 말로 잇달아 십자가가 곧 핵심임을 설파하였다. 그는 이제는 유명해진 한가지의 구분을 보여준다. 곧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떼어 놓으려는 '영광의 신학자'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와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을 아는 '십자가의 신학자' 사이의 구분이다.
십자가의 영성 갖기
첫째, 인간 중심의 영성을 버리고 십자가의 영성을 갖는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가져올 중요한 결과들 중 하나는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신자의 모습이 일치되어 가는 것이며 나아가 영광은 오직 고난을 통하여 올 뿐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강력하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는 영성이다. 그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커다란 매력이심을 알게 하고, 그와 지속적으로 연합시키는 의를 상속받게 한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또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당신에게 어떤 은혜도 주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하셨던 일들을 향해 적절하고 올바르게 응답하게 한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른 채 자기만족만을 갈구하며 발버둥치고 있는 이곳에서 십자가의 영성으로 우뚝 서는 것이다.
둘째, 세속의 유혹과 도적에 당당하게 맞서는 영성이다. 성공의 영성을 거부하는 것이다.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며, 성공하지 못했다면 곧 믿음이 없다는 것이라는 주장을 반대한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분은 건강과 부로 되갚아 주신다는 허황된 누각을 허무는 것이다. 재산과 지위는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신앙을 보여주는 특징이라는 주장을 뿌리쳐야 한다. 바로 이런 형태의 영성이 기독교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해야만 한다.
부와 건강이 곧 하나님의 은총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말은, 고난이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을 보여주는 가장 순수한 증거라고 주장했던 루터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순전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그림자 밑을 지나가지, 그 그림자를 피하지 않는다. 이러한 세속 기준들이 기독교 안으로 들어와 교활하게 영향을 미치고 많은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오염시키고 있다. 나는 이러한 오염된 신학에서 교인들을 보호해야 한다.
셋째, 지나친 자신의 경험 지향적 태도를 조심해야 한다. 특별히 신앙이 유년기를 거치는 동안 아직 그 신앙이 자라지 못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경험한 것을 너무나 의지한다. 또한 이를 부추기는 세력들은 조직적으로 십자가에서 떠라 자신의 체험에 몰두하게 한다.
십자가 신학은 이와 같이 지나치게 경험을 믿고 따르는 태도를 향하여 강력한 도전장을 내민다. 물론 신앙의 체험은 유익하며,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결코 그것들이 성경과 십자가보다 앞서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체험들이 유효할 것은 그것을 통해 상황 속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분별할 때 경험이라는 차원이 갖고 있는 심각한 한계들이 인식한 때이다.
신앙의 표준으로서의 십자가
십자가는 모든 것을 시험하는 시금석이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기독교회의 사명이 시작된다. 아울러 기독교회는 바로 이 십자가로 되돌아가 사명을 재발견하고 되찾으며 그 사명을 다시 그의 소유로 삼아야만 한다. 이로써 연약함 속에서 완전하게 된 능력을 나타내는 기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교회는 계속하여 정복하고 정복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몸 된 교회에 남겨 준 유산은, 죽은 자 가운데에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수치, 버림받음 그리고 절망을 놀라움과 기쁨으로 바뀌게 하는 십자가였다. 십자가는 그 위에서 달려 죽은 사람이 신실하다는 것을 변호하는 어떤 도덕의 승리가 아니었다.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가 이 세상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곤, 흥미롭지만 지독히도 무미건조한 몇몇 생각들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이런 생각들이 1세기의 유대인 종파들을 다룬 몇몇 학술서의 각주에 기록되지 않은 이유는 단순하면서도 당황스러운 사실, 곧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주요 구원자이신 그분이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살아나셨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곧 그의 생각들이 옳은 것이라고 증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죽음으로부터 일으킴을 받아 영광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말하며, 나아가 바로 그 그리스도가 계속하여 자신의 몸 된 교회를 무장시켜,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도록 추진력을 제공하였음을 보여준다(마 28:20). 그리스도인이 갖고 있는 위대한 테마인 소망과 기쁨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그분의 십자가로 수렴된다. 기독교회가 역사의 중요한 부분으로 계속 남아 있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리심으로 세상이 내린 유죄 평결을 뒤집으신 바로 그 하나님을 믿음을 통해, 앞을 향해 역사 속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한 언덕 위에 서 있는 하나의 봉화대처럼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드러내는 표지로 우뚝 서있으면서 죄 가운데 신음하는 인생들을 불러 모으신다. 기독교회는 그런 십자가 아래에 모여 들어, 십자가의 수욕과 고난 속에 감춰졌지만 사실은 그 속에서 계시되었고 나아가 자신의 무력(無力)함과 연약함 속에서 도리어 강력하고 의미심장하게 호소하시는 하나님을 놀라워하면서 그분을 찬미한다.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한 참 지식이 우리의 것으로 주어진다. 나아가 그 지식은 신자와 교회의 실제 모습이 어떠한지 드러낸다는 점에서 신자와 교회 양쪽에 깊은 상처를 안겨준다. 그러나 바로 이로써 우리는 도리어 나음을 얻으며, 나아가 다른 이를 치유하게 된다. 우리의 벌거벗음, 연약함, 무기력함, 죄로 가득 찬 모습 그리고 어리석음을 깨달음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자신으로부터 나음과 완전함을 얻게 하시고(계 3:17-19), 이 나음을 다른 사람에게도 베풀게 할 목적으로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십자가 신학은 소망의 신학이다. 죽음이 가져다주는 두려움, 겉보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는 고난, 그리스도인이 경험한 것과 모순되는 것들, 멸망의 위협, 겉보기에 연약해 보이고 어리석어보이는 기독교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억눌려 있는 자들에게 소망이 되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과 부활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하고, 바로 그 안에 실존에 대한 기독교의 이해, 나아가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회의 정체성을 회복시키는 열쇠가 놓여 있다. 십자가 신학은 기독교회들의 현재 상태에 절망하면서, 그 교회들이 발전은 고사하고 과연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회의를 품고 있는 이들에게 소망이 되는 신학이다.
그렇지만 교회가 계속하여 존재하는 것은 결코 인간의 힘과 지혜에 의존하지 않는다. 전 세계에 있는 묘지들은 교회의 존재와 생명이 자신에게 의존한다고 믿었던 사람들로 가득하지만, 정작 그 무덤은 교회의 존재와 생명이 결국 의존하고 있는 단 한사람을 담아둘 수 없었다. 십자가에 대한 선포는 그 고유의 힘을 갖고 있는데, 이는 그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들의 연약함과 죄를 초월한다. 십자가의 고난 속에 감추어졌던 바로 그 하나님이 자신의 몸 된 교회의 연합함 속에 감추신 채, 그 연약함을 정복하고 그 모습을 바꾸신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의심과 근심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할 말이 많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종교개혁이 그런 상황 속에 있는 이들로 하여금 어떤 자원들을 유익하게 선용할 수 있도록 하는지 살펴보게 한다.
십자가 신학과 목회자의 자세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공부하면서, 나의 목회 철학 및 자세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십자가 신학은 자만하고 승리감에 차 있으며 또한 안심하고 점잔을 빼고 있던 나에 대하여 심판을 내리며, 내가 회복해야할 십자가의 뿌리를 환기시켰다. 한 학기 내내 십자가 신학은 나에게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으로 다가왔다. 나의 시선은 당연히 이 시대의 교회로 향하였다. 명백한 약함과 어리석음의 장면인 갈보리에서 전적으로 버려지신 유기의 장면은 하나님의 세상과 하나님의 교회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현존과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는 신학자의 패러다임이다. 교회가 절망감과 무력함을 인식하는 곳에서, 교회는 세상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로서 계속되는 교회의 실존을 이해하는 열쇠를 발견한다. 교회의 매우 약함 안에 교회의 가장 강력한 능력이 놓여 있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숨어계신 하나님'은 그의 능력을 분명한 약함 뒤에 놓아두고 계신 하나님이시다. 나는 늘 교회가 왜 이렇게 약한지, 공격당해야만 하는지, 문제가 많은지에 대해 하나님께 투덜거렸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지혜를 명백한 어리석음 뒤에 놓아두고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십자가 신학은 나처럼 기독교회의 약함과 어리석음에 절망한 사람들을 위한 희망의 신학이다.
제 3부 나의 십자가 신학
한 학기 동안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중심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그의 십자가 신학은 중세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반박이자 그의 개혁운동의 이론적인 무기였다. 루터는 어떠한 경우에도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에게로 다가갈 수 있다거나 또 그러한 행위에 의해서 구원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맹렬하게 비판하였다. 그의 십자가 신학은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단순히 고전적인 의미로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할 말을 가지고 있다.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라고 외치면서 십자가 신학을 주장했던 루터의 신학은 당시 긴박한 상황에서 로마 가톨릭 신학에 대항해서 세운 전략이었지만 그의 십자가 신학은 이후 수많은 개신교 신학자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주었으며 오늘날 시대에 뒤지거나 그 중요성을 상실한 것은 아니다. 그가 씨름하고 고민했던 신학적 관심사는 여전히 오늘날 현대 교회와 신학에도 적용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십자가 신학은 언제나 현대적이다. 그의 십자가 신학은 복음의 재발견이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토대로 나의 십자가 신학을 정립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예수의 십자가 위에서 감추어지고 드러난 하나님 계시의 의미는 나 자신의 삶 안에 있는 모든 의로움을 파괴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모든 죄들을 대신해서 형벌을 받으신 사건이다. 죄인은 자기 의화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하고 고통 받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에 의해서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 이런 점에서 루터의 칭의론과 그의 십자가 신학은 일맥상통한다.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은 죄인을 무죄 방면하시고 의롭게 여기신다.
둘째로 말씀 없는 십자가 신학과 십자가 없는 말씀 신학과의 관계성이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에서 십자가 신학과 말씀 신학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경향을 볼 수 있다. 극단적인 금욕과 고행, 수련을 통해서 십자가의 고통에 참여하려는 수도원적인 영성 운동은 말씀이 빠져버린 십자가 신학의 왜곡된 모습이다. 그러나 말씀과 십자가의 불가분리성을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십자가 사건은 말씀 선포 안에 현재한다. 말씀 없는 십자가 신학은 중세 신비주의 모방 경건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선행이나 경건, 금욕, 고행 등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모방하려는 모든 시도는 인간의 고행으로 인한 구원으로 인도한다. 하지만 우리는 십자가 없는 말씀 신학의 위험성도 동시에 간파해야 한다. 십자가 없는 말씀의 신학은 현대 세속화된 교회에서 매일의 십자가를 일종의 업적의 의로 변형시키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어떠한 시도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하며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십자가와 고통의 수용에 의해서 확증되고 증거 되는 것이라는 점을 선포해야 한다.
셋째로 십자가 신학은 희망의 신학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가시적인 것들. 즉, 약함, 고통, 가난, 비참, 불행, 어리석음 등이 드러난다. 실로 하나님은 그의 약함 속에서 그의 가장 강한 힘이 놓여있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감추어 계신 하나님의 강함은 분명한 약함 속에 숨어있으며 그분의 지혜는 분명한 어리석음 속에 놓여있다. 십자가 신학은 지금 여기에서 절망과 약함, 고통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희망의 신학이다. 절망과 파괴의 한 가운데 하나님은 실로 계신다. 갈보리 십자가에서의 하나님의 감추어진 현존과 십자가에서 버림받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루터의 선언은 ‘하나님에 의해서 자신들이 버림받았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의 현존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넷째로 기독교의 보편성은 십자가 신학을 통해서 확보된다. 서구 근대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형성된 포스트 모던이즘은 어떠한 전통적인 진리 체계나 가치들도 더 이상 절대적이며 당연한 것들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믿는 기독교 하나님은 보편자이시며 절대적인 진리이다. 라고 계속해서 주장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하나님은 자연이 파괴되고 압제와 고난에 시달리는 민중의 삶의 한 복판에 실제로 서 계시는가? 라는 질문과 연결 지어서 대답이 추구되어야 한다. 기독교의 보편성은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고난의 현장에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의 삶 한 가운데 함께 하시고 그 고난 속에 감추어 계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주제로 삼아야 할 핵심적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십자가 신학과 그리스도인들의 삶과의 관계성이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고난을 감내하면서 고난과 박해 하에서도 겸손하게 인내하며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고난을 덜어주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이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인들 각자로 하여금 자신의 십자가를 보게 한다. 그의 십자가 신학은 금욕적이거나 윤리적인 원리가 아니다. 그것은 고난과 소외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의 생명연대로 부르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공동의 선을 지향하는 창조적인 과정이다. 이점이 바로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윤리이며 우리는 이러한 십자가 윤리를 오늘 우리의 상황에 비추어 재구성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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