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II. 누가복음 24장 25절-27절

예림의집 2013. 9. 5. 16:35

 

II. 누가복음 24장 25절-27절

 

비슷한 상황이 앞서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에게서도 발생했다. 실의에 빠져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셔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물으셨을 때, 그들은 나사렛 예수를 선지라라고(19절) 답했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지가 사흘이 지났으며(21절), 예수가 살아났다고 하는 여인들이 있다(23절)고 대답 했다. 한껏 기대를 걸었으나 이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것처럼 실의에 차 있는 제자들을 책망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본문이다.

 

“(25절)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절)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고(27절)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누가복음 24:25-27)”

 

25절에서 “더디” 믿는다고 책망하신 것은 지적 능력이 되지 못해 빨리 이해를 하지 못하거나, 이해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서 책망하신 것이 아니다. 이때 “더디(slow)”는 부정의 의미가 강하다. 즉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미련”한 것과 믿지 “못 하는”것과 연관성이 있다. 그래서 25절은 “이 어리석은 자들아, 선지자들이 말했던 모든 것을 마음으로 믿지 못하는 자들아”라고도 번역이 가능하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책망은 그들이 알아야 하는데, 그래서 믿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책망이며, 그 알아야 하는 내용은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이라고 압축되고 있다.

그러나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이란 표현은 좀 막연한 표현 같다. 어쩌면 그 말을 들은 제자들도 좀 당혹스러웠을지 모르겠다. 선지자들이 말한 게 많은데 그 중 어떤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일까? 정말로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내용을 다 알아야 하는 책임이 제자들에게 있다는 건가?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에 대한 해석이 부담스러울 수 있는 대목에서 예수께서 친히 그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26절에 말씀해 주셨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이라고 표현 되어있다.

조직신학 개념으로, “고난”은 성육신과 죽으심의 “낮아지심” 또는 “비하(humiliation)”에 해당되고, “영광”은 부활과 승천을 포함한 “높아지심”또는 “승귀(exaltation)”에 해당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것을 구속사의 관점으로 다시 본다면, “고난”은 그리스도의 사역 가운데 성육신하신 이후 죽기까지 육신을 입으시고 율법 하에 놓이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충족시키시기 위해 하신 모든 사역을 함축하는 것이고, “영광”은 부활이후 승천하셔서 지금도 하나님 우편보좌에서 통치하시며 이제 재림하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의 사역을 함축하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은 지금 예루살렘에서 되어지는 일들은 “고난”과 “영광”으로 함축되는 구속사를 성취하는 일이며, 그 구속사의 성취에 대한 비밀이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이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그렇게 읽어도 되는지는 27절에 나타나는 저자 누가의 주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즉 25-26절에 대해 27절은 누가의 설명인데, 예수님이 표현한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누가는 그것이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이라고 주석하고 있다. 25-27절을 종합하면, 예수님이 표현한 “선지자”는 예수님 식의 “수사(rhetoric)”로써 결국 성경(구체적으로,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인 것이다.

그렇다면 44절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로, 25절에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성경관을 확인하게 된다. 예수님은 성경 전체가 -이 문맥에서는 구약성경이- 당신을 가리키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성경의 모든 기록이, 이 문맥에서는 “고난”과 “영광”으로 대변되는, 의도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고 계셨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예수님이 의식하셨던 “자기에 관한 것”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고 있다. 25-27절의 문맥에서는 단지 “고난”과 “영광”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그것이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사역, 즉 기독론적 사역으로 이해하게 한다. 그러나 구속사적(기독론적) 사역과 함께 구원서정의 사역이 같이 의도되느냐의 논의는 열려있다는 생각이다. “영광”을 좁은 의미로 본다면 그리스도의 기독론적 사역으로 국한된다. 그러나 “고난”이던 “영광”이던 성경의 단어들을 너무 성급하게 조직신학에 대입시키지 않는 것이 좋다는 판단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단어들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조직신학이 개혁신학 전통 속에서 모든 설명을 마쳤다고 단정할 수 없고, 또 단정해서는 안 되기에, 우리는 늘 오히려 성경에 비추어 조직신학적 개념을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표현하신 “영광”은 기도론적 의미와 함께 -또는 기독론적 의미에 근거하여- 앞으로 성령을 통해 진행될 구원서정(구원론)의 일도 내포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 다시 말해, 굳이 “영광” 속에 성령이 사도들과 교회를 통해 이루시는 구원의 일(구원서정)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단정해야할 논리가 오히려 부족하다는 얘기다. 분명한 것은 25-27절의 문맥에서는 아직 예수님이 의도하고 계신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44절 이하의 본문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이 “자세히 설명하신” 내용은 구원서정의 내용도 당신에 관한 기록 속에 포함하는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단지 누가는 거듭해서 예수께서 “모든 성경에 기록된 것”이 “자기에 관한 것”임을 분명히 의식하고 계셨다고 우리에게 보도하는 사명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이 모든 성경이 가리키고 있는 것이 당신에 관한 것임을 “자세히 설명하신” 결과가 32절에 나타난다.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예수님이 성경을 “설명”해 주신 것이 제자들에게는 성경을 “풀어”준 것이 되었다. “풀어주다(open)”의 의미는 “설명(interpret)”의 의미보다는 좀 증폭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성경의 비밀이 드러나 이제 성경이 보이기 시작하는 의미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무엇을 설명해 주셨기에 성경이 풀리고 보이기 시작한 것일까?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것이 25-27절에서 의도되었던 비밀, 즉 모든 성경이 당신에 관해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고난”을 받으시고 “영광”에 들어가셔야 하는 의미이며, 44-49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비밀을 깨닫는 것이라고 하겠다. 제자들은 바로 그 비밀을 깨달아 알게 된 것을 가리켜 “성경이 풀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성경이 풀렸다는 말은 우선 이해가 되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성경이 이해가 되자 -즉 그 말은 성경의 의도하는 그리스도의 일(구속사)의 진행이 이해가 되자- 그 결과로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뜨겁다”는 “밝히다(light, 마 5:15, 눅 12:35, 요 5:35)”의 의미와 “태우다(burn, 히 12:18, 계 8:8,10, 21:7)”의 의미를 같이 갖고 있는데, 굳이 그 중 하나를 택일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이해의 부분과 이해를 통해 오는 감동의 부분을 굳이 별개의 것으로 떼어 놓을 필요가 없다. 특별히 지금 상황이 부활 이후의 상황임을 다시 감안한다면, 성경이 풀린 결과 “뜨겁게”된 것은 앞으로 성령이 하실 일을 시사하는 의미가 된다. 성령의 사역으로 그리스도의 일(구속사)이 이해가 되고 감동이 되어 뜨거움이 있는 일(구원서정)이 앞으로 본격적으로 있을 것을 조망하고 있다고 하겠다.

44-49절만큼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25-27절과 32절을 통해 볼 때에도 구속사와 구원서정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확인했다. 구속계시(성경)의 전행(구속사) 자체가 구원서정의 사역을 예측 또는 기대하고 있는 특징이 우리가 포착해야 할 방법론으로 드러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