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칼빈의 기독교 강요 2부 6장

예림의집 2013. 9. 5. 20:17

■ 제2부 제6장

-타락한 인간은 마땅히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구해야 한다.

 

■ 내용

-중보자를 통해서 본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아버지시다, 1-2

 

1. 중보자만이 타락한 인간을 도우신다.

인류 전체는 아담 안에서 멸망했다. 따라서 시초에 있었던 훌륭한 고귀성(高貴性)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도 되지 못하고 도리어 큰 수치를 주고 있다. 그러나 죄로 오염되고 부패한 인간을 자기의 작품으로 인정하시지 않는 하나님은 드디어 자기의 독생자를 통해 구속자로 나타나셨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더라도 믿음이 따르지 않으면, 그 모든 지식은 무용지물일 것이다. 사람이 반역한 후, 우리는 어느 쪽으로 향하든 간에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뿐이다. 우리의 허물 때문에 무고한 다른 피조물까지도 이 저주 하에 잡혀 있고 덮여 있으며 우리의 영혼은 이 저주에 압도되어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아버지 같은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려고 하시더라도, 우리는 우주를 보고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리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전연 인정하시지 않고 인연을 끊으시는 것은 우리에게 죄가 있으므로 당연하다는 양심의 소리를 듣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발언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바울이 "하나님의 지혜"라고 부르는, 무수한 기적이 가득히 들어찬 하늘과 땅을 보면 우리는 지혜를 얻어 하나님을 알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 혜택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이 믿음을 어리석다고 보아서 멸시한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전파하는 것이 우리의 인간적인 성향과 맞지 않더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가길 원한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전도를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처음 사람의 타락 이후로 중보자를 떠나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구원을 얻게 하는 힘이 없었다(참조, 롬 1:16; 고전 1:24). "영생은 아버지를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 알며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의역)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 시대뿐 아니라 모든 시대를 포함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 4:22).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방 종교를 그릇된 것이라고 단죄하는 동시에, 율법 하에서 구속자가 선민에게만 약속되었다는 그 이유를 알리신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우러러보지 않는 경배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다는 결론이 된다. 이 근거에 따라 바울은 모든 이방인들이 하나님이 없고 생명에 대한 희망을 빼앗겼다고 단언한다(엡 2:12). 요한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에게 생명이 있었고(요 1:4), 모든 세계가 그 생명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하므로(참조, 요 1:10), 그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가 화해자이시기 때문에 자기를 생명이라고 선언하신다(요 11:25, 14:6).

 

2. 옛 언약까지도 중보자가 없으면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없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중보자를 떠나서 하나님이 고대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신 일도 없고 은혜를 받으리라는 희망을 주신 일도 없다.

 

-언약과 진정한 믿음을 위해서 그리스도는 필수적이다, 3-4)

3. 구약의 믿음과 소망은 약속에 근거한다.

고난 중에 위로가 약속되며 특히 교회의 구원이 묘사될 때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와 희망의 기치(旗幟)가 예시(豫示)되었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그의 메시아와 함께 나가셨다"(합 3:13, 의역)고 하박국은 말한다. 예언자들은 교회의 재건을 말할 때마다, 다윗의 나라가 영원하리라는 약속을 백성에게 상기시킨다(참조, 왕하 8:19). 이것은 이상하지 않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언약에 안정성이 없겠기 때문이다. 이사야의 대답은 특히 적절하다. 불신자인 아하스 왕이 예루살렘에 대한 포위 공격이 해제되어 도성이 곧 안전하게 되리라는 이사야의 증언을 물리쳤을 때, 그는 갑자기 메시아에 대해 언급한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사 7:14).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이 자비하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모든 예언자가 항상 애써 선포한 것은 구속과 영원한 구원을 가져올 다윗의 나라였다. 그래서 이사야는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사 55:3-4)라고 한다. 낙망한 자들을 고무하시기 위하여 예레미야서에서 말씀하신다.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23:5-6). 에스겔서에는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34:23-25)라고 하며,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도 이 믿어지지 않는 갱신을 논하신 후에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37:24, 26)라고 하신다.

 

4.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곧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대 백성들이 이런 예언들을 듣고 깨달아, 직접 그리스도를 향해서 해방을 구하게 되기를 원하셨다. 그들은 부끄러운 타락 상태에 빠졌지만 대(大)원칙에 대한 기억을 말소할 수는 없었다. 다윗에게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손을 통해서 교회를 구원하시며, 선민을 자기의 백성으로 택하신 그 언약 - 거저 주신 그 언약 - 은 확고부동하리라는 것이 그 대원칙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조금 전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에 어린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마 21:9)하는 노래를 부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하나님을 분명하고 완전하게 믿기 위해서는 자기를 믿으라고 친히 명령하셨다. "너희는...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믿음의 대상(對象)이라고 하는 상식적인 말에 나는 찬성하지만, 거기에는 조건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를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이라고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 칭호는 우리에게 경고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만나시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받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없다고 한다. 유대인 사회에서는 예언자들이 구속자에 대해서 가르친 것을 율법학자들이 잘못된 해석으로 모호하게 만들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중보자의 출현 외에는 절망 상태를 빠져나갈 다른 방법이 없으며, 교회를 해방하는 방법도 달리 없다는 것이 여론과 같이 인정되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라"(롬 10:4)는 바울의 말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었다. 바울의 가르침은 바르고 확실하다. 믿음에 대해 아직 논하지 않지만, 독자들의 의견이 이 점에서 일치하길 바란다. 경건 생활의 제 일보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 - 우리를 지켜주시며, 주관하시며, 양육하시며, 드디어 우리를 모아 하나님 나라를 영원한 상속으로 주신다는 것 - 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최근에 말한 것 -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더라도 구원을 얻게 하는 지식이 될 수 없다고 한 것 - 이 분명하게 된다. 그래서 세상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모든 사람들 앞에 그리스도를 세우시고 그들이 그를 보며 그를 믿게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