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Chapter I. 구원서정의 문제(Issues in Ordo Salutis Discussion)

예림의집 2013. 9. 1. 17:13

 

Chapter I. 구원서정의 문제(Issues in Ordo Salutis Discussion)

 

I. "구원“이란 단어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교회 등과 함께 기독교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구원이라는 단어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구원을 성취하셨으며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기독교의 가르침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충분히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구원이라는 하나의 단어가 동시에 두 개의 별개의 사건을 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구원을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받게 되는” 구원이다. 이 두 사건은 우선 시간 공간적으로 구분되는 사건임이 분명하다. 전자는 200년 전 유대 땅에서 있었던 사건이고, 후자는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둘에 대한 특별한 차이점을 의식하지 않은 채-대체로, 별로 고민하는 흔적 없이- 한 단어를 갖고 두 사건을 부르는데 익숙하다. 물론 이 둘이 별개의 사건인 것을 모르고 있다는 지적은 아니다. 두 개의 구분되는 사건이 어떤 관계에 있기에 한 단어로 언급될 수 잇는지에 대해 스스로 납득할만한 답을 할 수 있는지 반문하는 것이다.

우리가 문제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은 “구원”이란 한 단어에 엄연히 구분되어지는 두 개의 구원 사건이 지칭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설교자들이나 성도들이 이 둘의 구분이 어떤 의미(신학적)에서 우리의 삶과 연관성이 있는지 의식하지 못한 채 설교를 한다거나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신학과 목회가 서로 살아있는 유기적 관계에 있어야 하는 이유에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 중요성을 인식하기 위해 결론부터 먼저 언급한다면, 그리스도가 완성한 구원은 오늘 내가 사는 구원을 가능하게 해 주는 근거이며 동력이며 목표가 된다. 자신의 힘으로 신앙생활을 유지하려고 해 본 경험-예를 들어, 의지적 결단이나 감성적 체험 등으로 신앙생활의 동력을 삼는 경우-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신앙생활이 얼마나 힘이 들고 결국 기쁨을 상실하게 되는지 공감할 것이다. 구원론 논의에 앞서, 어떤 구원의 삶을 누리느냐의 문제는, 정확하게, 그리스도가 완성한 구원과 나의 구원이 어떤 관계 가운데 있는지 아는데서 출발한다는 강조를 하면서 논의에 임하려고 한다.

다시 정리하면, “구원”이란 한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가 2000년 전에 완성한 구원과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받는 구원 모두를 가리킨다. 그러나 한 단어를 통해 지칭되는 이 두 구원은 성질상 대조를 이룬다. 전자의 구원은 불변의 역사적 사실이라는 의미에서 객관적 차원의 구원이다. 후자의 구원은 개개인마다 각기 다른 정황 속에서 일어나는 의미에서 주관적 차원의 구원이다.

어느 누구에게고 그리스도의 사건은 가변적일 수 없는 객관의 사실이다. 나의 믿음, 이해, 동의, 수락을 필요치 않는 불변의 사건이란 의미에서 객관이다. 이 구원은 모든 개인 구원의 근거이기에 객관적 구원이다. 성경은 이 객관의 구원을 기록으로써 계시하고 있고 그 기록된 계시는 읽는 사람에 의해 다르게 읽혀서는 안 되는 객관의 계시이다. 놀라운 사실은 시간 공간적으로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이 객관의 구원이 계시의 교통을 통해서 나라는 존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구원이 나 개인에게 주어지는 성질을 가리켜 주관적 구원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주관적”이란 의미는 구원의 대상인 “나”의 존재적 특성에 그 초점을 맞춘다는 의미이다. “나”는 구체적 존재이다. 구원은 인간이라는 보편(universal)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 아무개”라는 구체적인(concrete) 그리고 둘도 없는 독특한(particular) 개체인 인격체에게 주어진 구원이란 점에서 “주관적”이다. 나의 부모가 받은 구원이 내 구원이 아니고, 내 아내나 남편이 받은 구원이 내 구원이 될 수 없는 이치이다. 나는 나만의 구체적인 정황 속에서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나를 만나 주심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 그 정황의 특수성은 나만의 특수성이지 결코 다른 사람에게 대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완성된 객관의 구원이 성경에 기록되었고, 성령을 통해 이 객관의 계시가 우리 주관의 차원에 가져다지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객관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속하고, 주관의 구원은 성령의 사역에 속한다.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시어 이루신 사역을 구원의 완성(accomplishment)이라고 하고, 성경

 

이 오순절 강림 이후 개개인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사역을 구원의 적용(application)이라고 한다. 이 때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원은 그 사건 자체가 구속사(historia salutis)이고 성경에 계시로 기록되어 있다. 서령이 완성된 구원을 개개인에게 적용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을, 개혁신학 전통에서 구원의 서정(ordo salutis)라고 부른다. 조직신학에서는 그리스도가 성육신 하시어 구원을 완성하신 내용을 전통적으로 기독론(Christology)에서 다루고 있고, 성령이 구원서정의 일을 하시는 내용은 구원론(Soteriology)에서 다룬다. 한 단어를 통해서 지칭되었던 두 개의 구원을 구분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원(Salvation)

그리스도(Christ)

완성(Accomplishment)

객관적(Objective)

구속사(historia salutis)

기독론(Christology)

성령(Holy Spirit)

적용(Application)

주관적(Subjective)

구원서정(ordo salutis)

구원론(Soteriology)

 

II. 구원서정의 개념

"구원서정(라틴어, ordo salutis, 영어, order of salvation)"은 개혁주의 구원론 논의의 전통 가운데 생겨난 용어이다. 전통적으로 “구원서정”은 구원의 각 연속적 순서, 또는 순서적 단계나 국면들을 의미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차후에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본 구원론 논의에 있어서, 구원서정의 의미를 성령이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구원을 개개인에게 적용하시는 모든 사역을 일컫는데 초점을 맞추기를 제안한다. 여기에는 “완성된 구원”과 대비되어 “적용된 구원”의 의미가 부각된다. 즉, 그리스도의 완성의 사역에 근거하여 성령이 적용의 사역을 하시는 것이 구원서정이다. 이것은 신약성경이 구원을 소개하는 그 문맥에서도 찾을 수 있다.

신약성경의 구성을 큰 특징을 따라 나눌 때, 복음서와 나머지 부분으로 대비시킬 수 있다. 복음서에서는 네 명의 저자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구원을 완성하셨는지 말해 주고 있다. 기독론적 접근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에 비해, 복음서 이후의 책들은 그 완성된 구원이 누구에 의해 우리에게 가져다지고 있고, 그러므로 영생의 구원을 소망하며 이 땅위에서 구원을 산다(live)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 구원론적 목적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사도행전을 비롯하여 신약의 나머지 부분이 하고 있는 작업이 구원의 적용의 사역, 즉 한마디로 구원에 대해 소개하고 설명하고 권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바로 이 사역이 구원서정의 일인 것이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신약성경이 성도에게 주어지는 구원을 말한 때, 쓰이는 단어들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이다. “죄 씻음, 회개, 믿음, 하나님께로 나다, 칭의, 거룩해 짐, 하나님의 자녀가 됨, 끝까지 견디어 이김, 영생, 영광에 들어감, 연합, 함께 세워짐 등” 그 외에 상징적인 의미까지 포함하여, 매우 다양하게 구원을 표현하고 있다. 이 모든 단어와 표현들은 결국 한 가지 “구원”을 설명하는 일을 한다. 조금씩 의미와 설명의 차이가 있고, 그 차이가 명확히 구분은 되지만, 다 하나의 “구원”을 칭하는 말들이다. 이 모든 것 하나하나가 “구원”이고, 동시에 다 합하여 놓은 것도 “구원”이다. 같은 말을 구조의 관점에서 다시 한다면, 복음서가 보여준 구원을 나머지 책들에서 교회들에게 그리고 성도들에게 설명을 하는 작업 체계가 구원서정이다. 이 말은 신약성경이 구원서정의 작업을 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구원서정의 작업은 실천적인 작업이다.

사도시대나 지금이나 구원을 소개하는 일이 구원서정의 일이고, 복음을 전하는 과정 자체가 구원서정의 작업이다. “선생님, 구원이 무엇입니까?”라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는 자체가 구원서정의 작업인 것이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나의 구원을 이루셨고, 나는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이제 성령의 도움으로 영생을 소망하며 거룩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것입니다.” 비록 교회 생활에서 볼 수 있는 매우 평이한 대답이지만, 이 설명이 곧 구원서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고 그 작업이 곧 구원서정의 작업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서정은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가 주님 오시는 날까지 실천해야 하는 지상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2000년의 교회 역사는 구원서정의 역사였다고 말할 수 있으며, 교회는 그 구원서정의 사명을 얼마나 충실하게 감당했는지 주님 앞에서 평가될 것이다. 그러나 사도시대 이후 교회가 그 구원서정의 사명을 실천하는 과정을 보면, 현실적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흔히 전통(tradition)이라고 부른다. 로마카톨릭, 루터란, 알미니안, 개혁주의 등, 다양한 전통을 교회사를 통해 보게 되는데, 이 전통은 -물론 교회론적 구분도 중요하지만- 구원서정의 차이에서 비롯된 전통이기도 한 것이다. 즉 이 전통들 사이에는 구원을 설명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고, 구원을 실천하는 삶에 차이가 있다. 구원서정의 차이가 전통의 차이를 낳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은 하나이고 같은 것이다. 그 구원을 어떻게 소개하고 실천하느냐 즉 구원서정은 달라질 수 있음을 역사를 통해 보게 된다. 그렇다면, 구원서정의 차이가 실제로 얼마만큼의 차이를 가져오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중세 로마카톨릭(Medieval Roman Catholic)의 구원서정은 구원이 세례를 통해 비로소 시작된다고 말한다. 세례를 통해 은혜가 주입되어야 구원이 시작된다고 본다. 그래서 로마카톨릭 교회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한다. 세례는 사제가 주고 사제는 교회에 속하므로, 교회는 구원의 어머니 역할을 하는 것이다. 교회론이 구원론을 지배하는 결과가 된다.

세례를 구원의 시작으로 보는 것은 세례를 통해 은혜가 주입(gratia ingusa)되기 때문이다. 이 은혜(havit of grace)가 최종적인 구원은 아니나 구원의 시작이다. 시작이란 의미는 이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이 은혜를 통해 구원의 삶을 살 수 있으나 여전히 죄-구원을 상실할 수 있는 죄(mortal sin)를 포함-를 범할 수도 있는 상태이다. 이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세례를 통해 주입된 은혜에 힘입어 열심히 구원의 삶을 산다. 미사, 고해성사, 봉사, 적선, 성지순례, 십자가 운동 등을 통해 열심히 은혜를 활용하면, 하나님이 구원이라는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중세시대의 표현이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facere quod in se est, Deus non denegat gratiam, 좀 더 직역하면, “자신에게 있는 것을 갖고 최선을 다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은혜를 안 주시지 않는다.”). 이것이 중세의 구원서정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이다. 물론 은혜는 인간의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일단 시작된 은혜를 인간이 열심히 활용하고 노력(meritum de congruo)할 때,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얻어낼 수 없는 영생(meritun de condigno)이라는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이난의 공로에 상응하여 하나님의 공로가 주어지는 것이다. 이 구원서정에 문제가 되는 것은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지만 은혜가 인간의 힘 즉 자연의 힘에 맡겨져 활용되고 극대화된다는 점이다. 종교개혁의 “오직 은혜(sola gratia)는 바로 이러한 구원의 도식-즉, 구원서정-에 대해 반발하였던 것이다. 구원은 전 과정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되어지는 것임을 재확인 한데에 종교개혁이 구원의 교리를 회복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결국 로마카톨릭 전통의 독특함은 그들이 제시하는 구원서정의 차이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중세의 구원서정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했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를 따르는 전통이 루터란(Lutheran)이다. 루터란은 루터의 이신칭의(iustificatio fide) 교리를 중요시 하는 특징 때문에, 믿음을 구원서정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기는 대신 구원의 다른 국면-예를 들어 성화-들은 간과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것은 루터란 구원서정이 하나님의 편(a parte Dei)에서 하시는 일보다는 인간의 편(a parte hominis)에서 되어지는 일에 더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그래서 루터란은 믿음을 -우선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라고 생각은 하지만- 인간의 능동적 행동 또는 행동을 지배하는 원리로 간주한다. 부르심, 중생, 회개 등은 단지 믿음의 동작에 앞선 준비 단계로써 그리스도가 주시는 구원의 축복과는 구분된다. 성화는 부인되지 않으나 실제적으로 구원의 삶에서 간과되는 결과를 낳는다. 결과적으로 루터란 구원서정은 칭의하는 믿음(justifying faith)을 전적으로 강조한 나머지 구원의 삶에 있어서 칭의 측면만 지나치게 부각되는 경향이 강하다.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였던 종교개혁의 특징에 반발하여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의 반응을 중요시 했던 전통이 알미니안(Arminian) 전통이다. 물론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인줄 알지만, 알미니안은 그 은혜를 받을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힘이 인간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유스런 의지의 결단이 보장될 때만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 되며, 하나님의 주권도 이 점을 침해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물론, 이같은 생각은 아담의 원죄로 인한 인간의 전적타락과 부패를 고려하지 않은 발상이다. 결과적으로 알미니안의 구원서정은 자유의지에 의한 반응을 구원의 결정적인 그리고 최종적인 요인으로 삼는다. 그리스도가 이루신 공로는 인간의 죄 용서를 확보하신 것일 뿐이다. 즉 그리스도는 인간을 위해 구원 받을 가능성을 성취하신 것이고, 구원은 인간이 자유스런 의지에 의해 믿는다고 할 때 주어지는 것이 된다. 이런 구원서정은 인간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인간이 하나님과 공역하는 것이 되므로 결국 그리스도의 공로를 삭감하는 일이 된다.

그럼 개혁신학(Reformed) 전통은 어떤 구원서정의 특징을 보이는가? 구원서정의 논의는 개혁신학 전통의 특징이라고 할 만큼 오래되었고 활발한 것이 사실이다. 대신 개혁신학 전통은, 구원서정에 관한 한, 하나로 통일되지 않는 특징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 자체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위해 세 명의 대표적인 신학자들의 입장을 소개한다.

우선 화란의 대표적인 신학자로 꼽히는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를 들 수 있다. 카이퍼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을 강조하여 특히 문화영역 속에서 주권사상을 구현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던 칼빈주의 신학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의 그러한 하나님 주권사상 강조는 그의 구원서정 개념에서도 확인된다. 카이퍼는 우리가 시간대 속에서 누리는 구원은 하나님이 영원 속에서 우리를 의롭다고 정하신(justification) 그 주권적 결정에 근거한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눈에는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칭의되며 그 때 구원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그 구원은 이미 영원 가운데 하나님이 죄인이었던 우리를 의인으로 정하신 데서 시작하여 잠재하고 있다가 시간대 속에서 복음으로 초청되는 사건을 통해 구체화 된다는 것이다. 카이퍼의 구원서정을 논리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칭의가 중생보다 먼저 있는 것이 된다. 칭의가 먼저 있기에 중생과 믿음과 회심과 서와의 삶이 있게 되는 것이다. 카이퍼가 이렇게 구원서정의 도식을 설명하는 것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절대화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의 중요한 사상이었던 죄인을 칭의하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롬 4:5)를 방어하려는 그의 의도가 크게 작용하였다고 하겠다.

그러나 카이퍼의 구원서정은 헤르만 혹시마(Herman Hoeksema)에 의해 반박된다. 혹시마가 볼 때, 카이퍼가 구원서정 개념을 영원 속으로 확장해 들어간 것을 잘못이었다. 구원서정은 우리에게 적용되는 구원을 논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대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이것을 영원 개념과 연결하는 자체가 논의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신 혹시마 역시 칼빈주의 신학에 충실한 학자였기에 인간의 전적타락(Total Depravity) 개념에 근거하여 중생(regeneration)을 구원서정의 시작으로 보았다. 즉, 영적으로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데서 구원은 시작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중생이 먼저 있고 부르심, 믿음, 칭의, 성화 등이 있게 되는 구원서정의 도식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흥미로운 것은 카이퍼나 혹시마나 모두 칼빈주의 신학에 충실한 학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설명하는 구원서정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카이퍼와 혹시마 모두 나름대로 칼빈주의 신학의 중심을 붙잡았다. 칼빈주의 신학의 양대 축 중에 카이퍼는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혹시마는 전적타락 사상을 붙잡고 각기 나름대로의 원리에 충실하였을 뿐이다. 혹시마도 나름대로 칼빈주의 신학에 입각하여 종교개혁의 사상이었던 오직 죄인이었던 자를 칭의하신 은혜(롬 4:5)를 방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들이 제시하는 구원서정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신학자가 존 머레이(John Murray)이다. 그는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신학을 대표하는 조직신학자로서 역시 칼빈주의와 청교도 전통에 충실한 학자이다. 특별히 그의 신학은 한 마디로 칼빈주의 신학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gession of Faith)에 충실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는데, 그 점은 그의 구원서정 논의에서도 잘 나타난다. 머레이는 웨스트미스터 신앙고백의 강조를 따라 인간의 구원을 말씀(복음)사역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서 이해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점은 중생을 설명하는 장에서 자ㅔ히 다룰 것이다.) 그래서 복음제시가 전제되지 않은 구원은 생각할 수 없다는 신앙고백적 확신 하에 머레이는 복음으로의 초대(invitation to th gospel)인 부르심(calling)을 중생보다 앞에 두고 있다. 즉 부르심과 중생이 있고, 그 결과로 믿음과 회개가 따르고 칭의와 성화의 삶이 있게 되는 도식이다. 구원서정에 임하는 머레이의 기본적인 생각은 특히 로마서 8:30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신약성경에는 구원서정 개념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특정한 서정 즉 순서를 신학화 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머레이도 마찬가지로 칼빈주의 신학에 충실한 사람이며, 특히 장로교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충실했던 사람이지만 그가 제시하는 구원서정은 카이퍼나 혹시마가 제시한 구원서정과 다른 점을 보이고 있다.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카이퍼, 혹시마, 머레이 모두 철저한 칼빈주이 신학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나름대로 칼빈주의 원리에 충실한 결과 그들이 제시하는 구원서정은 조금씩 달랐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개혁신학 전통이 하나로 통일된 구원서정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다시 말해, 하나의 구원서정만이 맞는 것이거나 개혁신학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과거를 돌이켜 볼 때 개혁신학 전통은 구원서정의 논의를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으나 항상 유익한 결과만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일치하지 않는 구원서정으로 인해 서로 대립하거나 교제를 상실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교회사에 있어서 개혁신학 전통이 어느 전통보다 구원서정의 논의를 많이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논의는 때때로 비효율적인 논의로 그쳤으며,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지나친 논박으로 인해 복음의 힘을 상실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개혁신학 전통의 강점과도 같은 구원서정 논의에 어떤 문제점들이 있었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겠다.

 

III. 구원서정 논의의 문제점

우리의 교회 생활 가운데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구원서정 작업 중의 하나가 설교일 것이다. 설교란 구원의 완성(기독론적)과 구원의 적용(구원론적)에 대해 선포하고 강론하는 것이라고 할 때에, 설교자체가 구원서정의 작업에 해당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교학적인면에서 볼 때, 설교에는 적용이라는 요소가 있다. 그러나 보다 원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설교 자체가 적용의 작업 즉 구원서정의 작업을 하는 것이다. 설교자라면 가장 성경에 부합하는 복음제시를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복음을 제시한다는 것은 성령께서 한 개인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일의 일환이다. 그렇다면, 분명히 설교는 구원의 적용사역에 해당되며, 자연스런 귀결로, 설교자가 구원서정에 대한 이해 없이는 설교를 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많은 설교자들이 구원서정을 신학자들이 만든 딱딱한 신학, 또는 복잡한 이론이라고 생각하여 설교에서 피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대신 본문에 충실할 것을 강조하는 설교 쪽으로 기울게 된다. 그러나 (다음 장에서 논하게 되겠지만) 성경본문에 충실한 설교는 구원의 완성만이 복음이 아니라 구원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사실 또한 복음임을 간과하지 않는 설교인 것이다.

반대로 구원서정에 대한 논의에 치중하다보니 성경을 이탈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과거 개혁신학 전통 가운데 때때로 신학자들이 범했던 과오라고 할 수 있는데, 구원에 대한 “서정(ordo)"을 정하기 위한 논리위주의 논박이 지나쳐 정작 중요한 성경의 생명력을 상실하는 경우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조직신학 논의가 성경신학 논의와 분리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개혁신학 전통에서 구원서정 논의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윌리암 퍼킨스(William Perkins)의 Goden Chaine(황금사슬)이 제시하는 구원서정 논의는 목회적 의도에서 기인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즉 성경이 말하는 구원을 평신도들에게 -때로는 글을 모르는 성도들에게도- 좀 더 가시적으로 쉽게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방법이 퍼킨스가 제안했던 구원서정의 도식이었다. 우리의 신앙을 지도하는 지침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성경의 빛을 통해 읽어야 하며, 성경을 읽을 때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빛의 도움으로 읽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서정을 교리화하려는 노력이 지나쳐 성경을 이탈하게 되는 결과는 피해야 할 것이다.

지나치게 구원서정 논의를 교리화 한다거나, 아예 구원서정 논의를 회피하는 양극간의 모순에 대해 우리는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 어느 한 쪽 만으로는 성경에 충실한 복음제시라고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개혁신학 전통에서 있었던 구원서정 논의에 어떤 문제점이 있었는지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거듭 강조하는 것은 타 전통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우리 개혁신학 전통에 대한 자성의 비판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만이 우리의 기준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라도 그리고 항상 우리의 자랑스런 전통을 성경에 비추어 비판할 수 있는 것이며 비판해야 하는 것이다.

 

A. 성경의 지나친 확대 해석

먼저 과거 개혁주의 구원서정 논의가 성경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는 경향을 보였음을 지적할 수 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서정을 말하고 있지 않다. 로마서 8:30, 고린도전서 1:30, 6:11, 디도서 3:5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성경의 의도는 하나님의 구원서정 공식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구절과 단어들을 통해 구원의 풍성함을 말하려는데 의도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바울이 로마서 8:30에서 어떤 고정된 구원서정의 순서를 말하려 한 것인가? 예정, 소명, 칭의, 영화가 바울이 생각했던 구원서정의 전부였나? 그렇다면 그는 중생, 믿음, 회개, 회심, 성화 등은 언급하지 않은 것인가? 이 수사적 질문은 그렇지 않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즉, 바울은 그의 서신 어디에서도 어떤 고정된 구원서정을 우리에게 주려고 하지 않았다. 바울은 구원서정의 여러 국면들을 표현하는 여러 단어와 구절 등은 구원의 별개의 동작이나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구원 사건에 대한 다른 의미와 체험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구원서정의 여러 명칭들은 하나하나가 별개의 사건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되는 동일한 실제(구원)에 대한 다른 이름일 뿐인 것이다. 얻너 때는 구원을 중생으로, 어떤 때에는 믿음으로, 어떤 때에는 칭의로, 어떤 때에는 성화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중생도, 믿음도, 칭의도, 성화도 구원이며, 별개의 구원이 아닌 하나의 구원인 것이다. 과거의 구원서정 논의에서 서정의 문제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성경의 의도에서 벗어나 어떤 특정한 서정의 순서를 공식화 또는 교리화 하는 노력드이 있었다. 그것은 바른 구원서정의 논의방법이 아님을 반성할 필요가 있다.

 

B. 성경의 지나친 단순화

개혁신학의 구원서정 논의가 때로는 성경을 지나치게 단순화 하였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성경이 제시하는 구원은 훨씬 풍요로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단순화시키는 한계를 말한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구원(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구원)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구원(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될 구원을 소망하는 구원)의 의미가 더해질 때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의미는 단순하게 설명될 수 없는 구원이다. 마치 3차원의 아름다운 자연을 아무리 성능이 좋은 카메라로 찍는다고 하여도 출력한 사진은 그것을 2차원으로 단순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2차원의 사진이 담지 못한 자연의 아름다움은 훨씬 더 많다. 사진에 담기지 않은 제3의 면의 모습 외에도, 그 당시 느꼈던 바람이나, 꽃내음, 분위기, 느낌이나 생각 등은 사진에 담겨지지 않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내가 그 순간에 느꼈던 것은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구원의 의미를 구원서정으로 논하는 작업은 부들불 단순화의 작업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구원서정의 논의는 항상 그 논의에 다 담지 못하는 부분과 요소가 있음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칭의는 법정적 신분에 대한 논의일 뿐 성화의 재창조적 의미를 포함하지 않는다. 또한 중생처럼 무의식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구원이 있는 반면, 믿음처럼 우리의 살아 있는 의식을 통해 일어나는 구원도 있다. 마치 다이아몬드가 아름다운 것은 깎여진 면들을 통해 반사되는 모든 빛의 아름다움이 합하여질 때 아름다운 것이다. 한 면의 빛깔만을 갖고 다이아몬드의 아름다움을 대신하려 하는 것은 모순일 것이다. 중생, 믿음, 칭의, 성화 등 한 국면에 대한 논의가 지나쳐 서로 연결점을 잃고 개별적인 지식의 주제가 된다면 그것은 구원의 풍성함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구원서정은 논의의 특정상 한 국면만을 말하는 단순화 작업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단순화 작업은 한 국면을 통해 알게 되는 구원의 의미를 좀 더 깊이 그리고 자세히 알기 위해 그래서 종합적으로 구원의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누리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지, 구원서정 논의가 구원의 풍요로운 의미를 상실케 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잘못이다.

 

C.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과론

과거의 개혁신학 구원서정 논의가 지나치게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인과론 논리에 의해 지배되었던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인과론 논리라 함은 원인과 결과(cause-and-effect)를 끊임없이 추적하는 논리체계를 말하는 것으로 과학의 기초를 이룬 지식체계이다. 종교개혁 이후 중세를 지배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과론이 다시 신학 논의에 사용되게 되었는데, 그 시대를 후대는 개혁정통주의(Reformed Orthodoxy)라고 부른다. 인과론이 구원서정의 논리를 지배한다는 말은 이런 식이다. 로마서 8:30을 들어 설명할 때, 예정이 원인이 되어 소명이라는 결과를 낳고, 소명이 원인이 되어 칭의라는 결과를 낳고, 칭의가 원인이 되어 영화라는 결과를 낳는 도식이다. 이 구원서정의 논의는 인과론이 동력이 되어 진행되면서 각 국면의 순서에 사이에 있는 논리적 관계가 논의의 주된 대상이 되는 반면, 각 국면들이 어떻게 그리스도가 완선한 구원과 연관성이 있는지는 간과하게 된다. 그런 논의방식 자체는 이신론적(deistic)논의라고 할 수 있다. 즉 구원서정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조명하는 것이 마치 별도의 지식 영역처럼 다루어진다는 것은 그 구원서정이 마치 그리스도와 분리된 채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문제를 낳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과론이 지배하는 구원서정 논의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의 관계를, 기독론과 구원론의 관계를, 구속사와 구원서정의 관계를 분리시키거나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문제를 낳았던 것이다. 복음의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서는 구원서정의 논의가 좀 더 그리스도 중심적인 논의가 될 필요가 있다. 즉 구원서정간의 관계를 조명하는 논쟁보다는 각 구원서정-칭의 또는 성화가-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구원 속에 있는 것인지, 좀 더 우리의 실존 속에 적용하여 말한다면, 우리가 그리스도 d나에서 어떻게 칭의와 성화를 누리는지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D. 지나친 주관화

구원서정 논의가 때로는 지나치게 개인의 구원체험에 초점을 두어 주관화되는 문제가 있다. 퍼킨스가 제시한 Goden Chaine(황금사슬)은 개개인의 구원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 성도가 구원의 과정 중 지금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를 지도할 수 있는 실천적이며 목회적인 동기가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구원서정의 의미를 내면적 성찰이나 주관적 체험 등을 통해서 점검하려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특히 한 사람의 구원 체험이 표준이나 정형이 되어 다른 사람도 추구하거나 모방하는 문제가 교회 안에서 종종 발생한다. 구원은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나”라는 한 인격체에 가져다주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구원서정이 다른 사람의 구원서정을 대신할 수 없다. 즉 한 사람의 구원서정이 표준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서도 기대되거나 강요될 수 없는 것이다. 하 사람의 구원서정(ordo salutis)은 오직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구원(historia salutis)의 정황 안에서만 생각되어야 하고 누려져야 한다. 개인의 삶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구원의 재창조적 사역은 이미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법적 근거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구원서정 중 어느 단계에 있을까라는 질문 보다는 나는 그리스도가 하신 일에 대해 어떤 관계에 있을까가 바람직한 접근방법이라고 하겠다. 내가 구원받았다(주관적)고 하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객관적) 안으로 받아 들여졌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IV. 요약 및 결론

본 장에서는 구원서정의 개념 및 구원서정 논의에 따른 문제점들을 지적해 보았다. 구원서정은 구원을 제시하는 과정 자체와 뗄 수 없는 성질의 것으로서 신약성경에서 사도들의 사역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었다. 2000년 교회역사 속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교회들이 구원을 제시하는 사역을 충성되게 감당해왔으나, 실제로 그 구원을 어떻게 소개하느냐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었고, 그 차이는 소위 정통의 구분으로 이어졌다. 구원을 소개하는 일이나 구원을 사는(live) 모든 과정 자체가 구원서정이기에 구원서정 논의를 어느 한 전통의 점유물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자랑스럽게 구원서정 논의는 오랜 개혁신학 전통의 특징이었으며 강점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신학의 자랑이 늘 완벽하지만은 못 했다. 많은 경우 그 논의가 구원의 순서 매기기에 치중했던 사실을 우리는 보게 된다. 구원서정 논의가 학자들 중심의 치밀한 논리 싸움이 될 때, 그러한 구원 제시는 왠지 힘을 잃었고 외면을 당했음을 경험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종교개혁 이래 지켜 온 복음이 우리의 순수한 의도와는 달리 능력을 발하지 못하는 상황을 맞았다면, 그것은 복음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방법론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맞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해야 할 것인가? 구원서정 논의를 어떤 방법으로 할 때 복음의 힘과 생명을 회복할 수 있겠는가?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때면 우리는 성경(sola scriptura)으로 돌아오는 좋은 전통을 지니고 있다. 과연 성경은 구원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혹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방법론이 있었는데 우리가 간과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겸손히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