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거룩한 습관(5) 작은 자 사랑
요한복음 9장 1-7절
우리나라에서는 리조트나 유원지에 가면 입장료를 받을 때 반드시 대인과 소인을 구별하여 받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곳에서 대인과 소인은 나이의 차이로 구별되어 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사용하는 언어 속에서의 대인과 소인은 인격적인 개념으로 등장됩니다. 대인은 주로 도량이 넓고 이웃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소인은 속이 좁고 이기적인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됩니다. 대인은 바르게 사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고 소인은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소인배라는 욕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의 스타일과 상관없이 대인 소리를 들으면 좋아하고 소인 소리를 들으면 싫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느 날 자신을 소인 즉 작은 자의 자리에 두시는 혁명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물론 여기서 큰 자 혹은 작은 자의 개념을 예수님은 인격적인 용도가 아닌 사회적 개념으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사회적으로 존중받고 인정받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면 사회적으로 버림받고 소외당하는 사람을 작은 자라고 규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작은 자와 동일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에 작은 자들이란 병든 자, 감옥에 갇혀 있는 자,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인 것입니다. 제가 임의로 여기에 하나를 덧붙인다면 신체의 불편을 감수하고 사는 장애인들을 추가하고 싶습니다. 사실, 복음서를 읽어 보시면 소위 예수님의 치유 이적 가운데 대부분은 바로 이런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그의 관심과 사랑의 결과가 아니었습니까? 작은 자에 대한 사랑은 바로 그분의 거룩한 삶의 습관이셨습니다.
1.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먼저 극복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길을 가시다가 지나치는 맹인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는 데서 시작됩니다. 2절입니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부모니이까” 우선 우리는 이전 제자들의 질문의 밑바닥에 뿌리박고 있는 그들의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편견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런 제자들의 편견은 아직도 오늘의 제자들에게 동일하게 자리 잡고 있는 편견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나치는 장애인 형제나 자매를 자연스럽고 편하게 대하지 못하고 더러는 피하고 싶고 더러는 마주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마주치기라도 한 것처럼 어색해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편견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께서는 이들이 자기나 자기 조상의 죄로 그렇게 된 것이라는 당시의 문화적 혹은 종교적 편견까지도 강하게 부인하셨습니다. 물론 우리가 겪고 있는 불편함이 궁극적으로 우리의 죄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장애인들이 특별하게 더 죄인이어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편견을 속히 극복해야 할 더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예비 장애인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는 장애인하면 선천적 장애인을 연상하지만 장애인중 선천적 장애인은 20%미만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80%는 다 후천적 장애인들인 것입니다. 산업재해, 교통사고, 약물복용, 노인성 질환 등으로 장애인이 됩니다. 어느 나라이든 인구의 10%는 장애인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비 장애인의 범주에서 예외 될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보다 특별한 사람만이 장애인이 된다는 편견에서 벗어나, 우리도 예비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앞으로 당신 자신도 장애인이 되었을 때 사랑받고 싶으신가요? 그러면 지금 무엇보다 먼저 당신 자신의 편견에서 해방되십시오.
2. 작은 자 사랑을 우리의 삶의 소중한 가치로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그들의 편견을 고쳐주시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아니하셨습니다. 우리 모두의 사명을 깨우치고자 하셨습니다. 3절에서 이미 이런 불편한 인생을 사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음을 언급하셨습니다. 이제 계속되는 4절을 읽어 보십시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여기 사명 정의가 있지 않습니까? 그 사명을 우리는 위대한 계명 혹은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합니다. 이 위대한 사명이 무엇입니까?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웃 사랑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작은 자 사랑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중고등부 학생들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사명입니다.
3. 작은 자들에게 필요한 방법으로 도움이 되고자 해야 합니다.
도움이라는 것은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을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자기 본위의 도움은 진정한 의미에서 이웃 사랑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표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예수께서 여러 유형의 병자들을 만나 치유하시는데 그는 결코 동일한 방법을 일률적으로 사용하지 않으심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만으로 고치시고 어떤 사람은 안수하셔서 고치십니다. 어떤 사람은 즉각적으로 고치시고 어떤 사람은 시간을 두고 치유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육체적인 면만 다루시고 어떤 사람은 그의 영적 필요를 다루십니다.
오늘의 본문에 등장하는 맹인에 대해서는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치유하십니다. 침을 뱉어 진흙에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십니다. 그리고 실로암 못에 가서 물로 눈을 씻으라고 처방하십니다. 아마도 이 맹인은 자신의 눈에 차가운 물기 섞은 진흙이 발라지고 그리고 그의 눈에 다시 연못의 물로 그 진흙이 씻겨 질 때 구체적으로 자기 눈에 주님의 터치를 느낄 수 있었을 것이고 이제 내 눈에 무슨 중요한 일이 일어 날 것을 믿음으로 기대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사람에게 필요한 방법으로 접근하시고 그의 믿음을 북돋아 주실 수 있는 가장 친근한 방법으로 도우신 것입니다. 그분은 말씀만 하시면 고칠 수 있는 분이시지만 그에게 유익이 되는 방법으로 접근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내가 상대방을 어떻게 도울지 모르면 솔직하게 질문하십시오. “어떻게 도와 드리면 좋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인 도움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한 맹인을 보게 하신 다음 주님은 마침내 그의 영적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그를 믿음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사실 우리의 이웃 사랑도 결국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그들이 친히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것, 이것이 궁극적인 필요요 도움인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런 작은 자들을 돕는 것을 내가 누군가 이웃을 도왔다는 도덕적 자부심이 아닌 자연스러운 자신의 삶의 행복과 가치로 여기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한 사람을 소개하며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헬렌 켈러의 스승 앤 설리번이 이야기입니다.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던 어린 소녀 헬렌 켈러가 마침내 좌절을 이기고 일어나 교육의 놀라운 진보를 보이자 헬렌의 부모가 눈물을 흘리며 학교 교장 앞에서 설리번 선생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때 설리번 선생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사실 행복한 것은 저 자신입니다. 제가 헬렌에게 도움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은 저의 보람이고 저의 행복이며 저를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설리번은 헬렌을 돕는 것을 자기 자랑이 아닌 자신의 인생의 가치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헬렌은 스승에게서 이런 자연스러운 이웃 사랑의 실천을 배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1888년 4월 16일은 헬렌 켈러가 8살 되던 해 처음으로 교회 나가던 날이었습니다. 설리번 선생의 특별한 부탁으로 교회 주일학교 학생들은 처음 교회 나오는 헬렌을 축하하는 파티를 열어 주었고, 반의 아이들 모두는 일일이 헬렌를 안아주고 사랑의 입맞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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