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역사신학

철학자들을 위한 목자

예림의집 2012. 10. 11. 19:51

철학자들을 위한 목자

 

  클레멘트는 판타이누스의 명성에 끌려 알렉산드리아를 찾았던 인물이다. 그는 이곳에서 20년 동안 판타이누스의 제자로 배웠으며, 그후에는 그의 후계자로서 학당을 이끌었다. 우리들은 주로 그가 남긴 저술들을 통하여 클레멘트에 관해 알고 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들은 그의 3부작, <이교도들에 권면(Exhortation to the Heathen)>, <교사(Instructor)>, <잡록(Miscellanies)>들로 대변될 수 있다. 이중 <잡록>은 그의 생전에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동시대인들은 그를 저술가라기 보다는 "철학자의 제복을 거친 기독교의 사자"로서 이해하고 있었다. 그의 활동의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당시 헬라적인 과학 세계의 중심지였던 대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상상해 보면, 이곳의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로 이끌고자 하는 선교적 열망에 불타고 있었던 기독교 철학 교사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최초의 기독교 학자" 클레멘트는 성경뿐만 아니라 헬라 철학과 고전문학들을 포함한 그가 살던 시대의 학문들에 정통하고 있었다. 그는 로마, 아테네, 안디옥 등 교육의 중심지들로부터 그를 찾아온 젊은이들의 의문들과 문제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자기가 그러했듯이 전통적인 가르침들로부터 만족을 얻지 못하고, 기독교 계시 속에서 마지막으로 최고의 지혜를 추구하고 발견해야 할 것이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틀림없이 이전에 이미 어떤 이단적인 영지주의적 형태의 기독교와 접촉해 본 경험이 이쓸 것임에 틀림없었다. 클레멘트는 그들의 세계로 파고 들어가 이들의 오해를 풀고, 참을성있게 이들을 진정한 기독교에 대한 이해로 인도해 가야 할 것이었다. 그는 철학자처럼 생활하고 가르쳤으며, 그 시대의 영지주의자들의 형식과 언어들을 사용하였다.

  클레멘트의 목표는 분명하였다. 그는 당시 이교 철학자들의 외부적인 의복이나 표현 형식들뿐만 아니라, 그들이 씨름했던 난제들까지도 채용하였다. 예를 들어, 그가 당시 영지주의 학파에서 그렇게 관심을 갖고 다루었던 우주와 그 의미(우주론, cosmology)를 취급한다면 그는 이들의 오류를 지적하고 비판하기 위해서만 이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세계의 창조에 관한 근본적인 종교적 문제들과,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근원에 관한 의문,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속에서의 구원 등이 기독교적 계시 가우데서 어떻게 가장 궁극적이고 심오한 대답을 발견하는가를 증명하고 지적해내고자 하였다. 그는 헬라 지성의 세계를 위한 시도가 되고자 하였다. 그의 목표는 단순히, 혹은 우선적으로도 신학적인 것이 아니었고, 목회적이었다. 그는 토론에서 이기기를 원한 것이 아니고, 인간들을 그리스도에게, 그리고 그를 통하여 구원으로 이끌고자 하였다.

  이러한 그의 의도는, 특히 아직도 발렌티누스적 영지주의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었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상당한 위험을 부담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을 의미하였다. 교회로서는 헬라 철학과 이교도들의 문학을 두려워 해야만 할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이교는 고전 문학에 깊이 스며들어 있어서, 각종 저술들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교의 가치관과 종교적 신하들을 쉽게 문학 교육들로부터 분리해 낼 수 없었다. 기독교의 초신자들은 멋있고 세련되게 변호되고 있는 이단들과 지루하고 편협하게 보이는 정통 신학 사이의 선택에서 주저하기 마련이다. 현대의 세속 학교에 다니고 있는 자식있는 신자들이라면 이러한 문제를 실감할 수 있으리라, 클레멘트는 이들에게 제3의 길을 제시해 보고자 하였다.

 

  이단적인 영지주의자들처럼, 알렉산드리아 학자들도 기독교를 당시의 사상의 흐름과 접류시켜 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선 철학을 보다 긍정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클레멘트는 철학이 기독교를 위한 예비의 단계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잡록>의 처음 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가 도래하기 전, 철학은 헬라인들에게 의를 가르치는데 유용하였다. 이제 신앙을 갖게 된 이들에게 경건을 위해 유용하다. 마치 율법이 유대인들을 위해 그러하였듯이, 철학은 헬라인들을 위해 초급 교사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에 이른 이들을 위한 길을 예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클레멘트와 오리겐의 방법은 이단적 영지주의자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기독교를 위한 철학적 방법의 도입을 위해 영지주의는 사도들의 교훈을 완전히 파괴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기독교를 철학의 형식을 통해 제시하면서도 베드로와 바울의 메시지에 완전히 충실한 모습을 고수하였다.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또 다른 중요한 측면, 그리스도인의 삶과 태도에서 영지주의자들과는 달랐다. 영지주의 이단들은 신자들의 성품을 계발하는 데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클레멘트는 영적 통찰력은 심령이 순수한 자들, 마치 어린 아이가 그의 아버지의 손을 잡고 동행하듯이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들, 윤리적 행동의 동기가 상벌의 기대를 초월하여 선을 선 그 자체 때문에 사랑하는 이들에게만 임한다고 가르쳤다. 이는 지식을 통한 신앙으로부터 일단 더 나아가, 구속받은 이들이 하나님과 연합하는 축복받은 상태에의 도달을 의미하고 있었다. 이러한 신비스런 연합의 가능성의 근거는 창조를 통해 심어진 하나님의 형상에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영지주의 이단과 클레멘트 사이의 근본적 차이점에 도달하게 된다. 발렌티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창조를 어떤 하한 신들에 의한 장난으로 치부하여 그 가치를 부인해 버렸다. 그러나 클레멘트는 창조를 그의 교훈의 중심에 두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합리적 피조물들 속에 진리의 선한 씨앗들을 심어 두셨다고 생각하였다. 기독교 신자들이 헬라인들에게서도 배울 수 있는 이유는 모든 진리와 선은 어디에서 발견되든지 결국은 창조주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클레멘트의 사역은 기독교 교리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한다. 클레멘트 이후부터 헬라적 사고는 기독교 사상과 연합하게 되었다. 그 이후 위대한 성자들과 신학자들을 통해 이러한 연대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한 모습 없이는 처음의 교회회의들이 이룩하였던 엄청난 신학적 성취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리겐의 천재성은 바로 이러한 연합의 기초 위에 이룩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