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역사신학

오리겐과 진리에의 갈구

예림의집 2012. 10. 11. 21:14

오리겐과 진리에의 갈구

 

3세기 초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발생하였다. 클레멘트는 이를 피해 도시를 떠나야 했다. 그러나 그가 플라톤에게 배웠듯이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이다." 그는 학당 지도의 책임을 예외적으로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였던 18세의 소년에게 맡겼다. 오리겐은 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클레멘트의 뒤를 잇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임을 증명하였다. 그는 스승과 같이 철학을 깊이 사랑하는 인물이었다. 그 역시 인간들의 본능적인 지식에의 갈구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확신하였다. "만약 우리가 뛰어난 인간들의 예술 작품을 접하더라도, 우리들은 곧 그 작품의 본질과 제작 방법과 제작 목적들을 탐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작품들을 대할 때에는 그와 비교할 수 없이 더 강렬한 욕구로서, 창조의 원칙들과 방법과 목적을 알고자 추구하게 된다. 이러한 욕구, 정열은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심정 속에 심어 놓으신 것이다. 마치 눈이 빛을 찾듯이, 육체가 양식을 요구하듯이, 우리들의 지성은... 하나님의 진리와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들의 연유를 알고 싶어하는 본능적이요, 자연적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오직 기독교만이 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으며, 오리겐은 그리스도께서 부여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모든 진리들을 귀속시키기로 결심하였다. 오리겐은 원래 기독교 가정 출신이었다. 그의 부친 네오니데스는 클레멘트가 피해서 알렉산드리아를 떠났던 바로 그 박해 때 순교한 바 있었다. 자기 가족들을 돌보기 위하여 오리겐은 세속 장서들을 팔아 버리고 교사요 학자로서의 위대한 생애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학자는 그의 감독 데미트리우스와의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는 데미트리우스가 교만하고 권력을 사랑하는 교회 행정가라고 보았으며, 반면 데미트리우스는 오리겐이 이집트의 교회를 조직하려는 그의 노력에 비협조적이라고 생각하였다.

229년 경 오리겐은 아테네로 초청을 받았는데, 그리스를 향해 가는 도중에 존경하는 이들이 많았던 팔레스타인을 통과하게 되었다. 그는 가아사랴에서 성직을 위한 안수를 받았다. 데미트리우스는 이를 자기의 권위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라고 생각하여 오리겐을 공개적으로 정죄하였다. 그후 오리겐은 이 때문에 가이사랴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위대한 학자의 생애는 알렉산드리아의 시기(202-230)와 가이사랴의 시기(230-254)이 둘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그 장소를 불문하고 오리겐은 사람들을 끄는 힘이 있는 교사였다. 그는 사람들의 초청을 받아 각처를 여행하였다. 마치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 왔듯이 학생들이 수 백 마일 밖으로부터 몰려들었다. 가장 초기의 학생들 가운데 하나로 소 아시아 출신의 그레고리가 있었는데, 그는 후에 특출한 사역으로 인하여, "기적을 이루는 이(Wonder worker)"라는 별명을 얻은 인물이다.

오리겐에서 5년을 수학한 후, 그레고리는 그의 스승을 찬양하는 책을 저술하였다. 그레고리에 의하면, 오리겐은 처음부터, 진정한 철학의 목표로서 흠이 없이 착한 생활을 제시하였다. 오직 성결한 생활을 추구하는 이들만이 합리적인 피조물로서의 합당한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선 스스로를 알고자 노력하게 되며, 무엇이 선한 것이며, 무엇을 이루고자 노력해야 하는가, 무엇이 악한 것이며, 무엇을 피해야 할 것인가의 지식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오리겐은 무지야말로 경건에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가르쳤다. 철학의 선물을 경멸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경건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진정한 철학은 언제나, "그의 표현할 수조차도 없는 아름다움을 인하여, 모든 이들을 저항할 수 없도록 스스로에게 이그시는" 말씀에 그 초점을 맞추게 된다.

따라서 오리겐의 철학은 단지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을 형성해 나가는 통로였다. 여기서 스승 자신의 모습이 그의 교훈보다도 더 강력한 가르침이 되었다. 그레고리에 의하면 "그는 그가 가르친 이론에 의해서보다도 그의 생활과 행동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더 큰 자극을 주었다." 오리겐은 그의 생도들에게, 그들의 행동의 근원은 점검하고, 그들을 혼란으로부터 건져내어 도덕적 질서에로 인도하는 충동들을 살피며, 악의 근원들을 대항하고, 선을 향상시키도록 노력하라고 가르쳤는데, 오리겐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선의 배양이 곧 이성을 의미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생도들에게 덕에 대한 사랑을 심어 주었으며, 제자들은 곧 그들의 스승 자신이야말로 진정 지혜로운 인간의 본보기임을 깨닫게 되었다.

오리겐은 부유한 친구의 덕에 일곱 명의 속기사들을 고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이 번갈아 가며 그의 기르침을 기록하였다. 그의 교실로부터는 책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으며, 그의 명성은 곧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후에 제롬은 이렇게 말했다. "과연 누가 오리겐의 모든 저서들을 독파할 수 있겠는가?"

이 위대한 알렉산드리아인은 기독교 신자들을 위해 그리고 이교도들에 대항하여 광범위한 제목들에 관해 저술하였으나, 자기의 가장 중대한 사명은 역시 성경의 해석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구약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헥사플라(Hexapla)라고 이름한 6개 번역판 구약 대조 성경을 편찬하였다. 여기다가 구약의 각권들에 붙인 수십 권의 주석들과 수 백개의 설교들을 추가하였다.

그는 성경이야말로 신적 계시의 보고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생도들은 이를 전체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특정한 구절의 의미가 도덕적 확신이나 하나님의 속성에 어긋날 것 같으면, 이 가운데는 반드시 구절의 표면적 의미 아래 더 깊은 곳에 무언가 더욱 오묘한 진리와 의미가 잠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확신은 오리겐을 우리가 흔히 "풍유적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이라 부르는 영역으로 끌고 갔다. 그는 성경 속에는 서로 다른 세 차원의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문자적 의미, 영혼에의 도덕적 적용, 그리고 풍유적 혹은 영적 의미인데 바로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신비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오리겐의 관심은 어떤 특정한 구절의 표면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전체 성경 자체가 스스로의 의미를 말하게 하려는데 있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할 때, 이는 곧 이를 영감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이단적 교훈들에 대항하는 오리겐의 모습이 나타난다. 고대나 현대를 막론하고 이단들의 공통적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모습은 몇 개의 인상적인 성경 구절들을 뽑아내어 이들로부터 잘못된 해석들을 축출해내는 것이다. 오리겐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자 하였다. 그는 성경 전체가 말하도록 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바로 가톨릭 기독교의 중심적 교훈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관한 오리겐의 방대한 작품들은 참으로 중요하기 이를 데 없다. 이들은 지성적인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성경을 믿고 기독교인들로 남아있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인간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기독교 사상의 발전을 제어하도록 이성적으로 해석된 성경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오리겐은 교회를 위해 성경을 구해냄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 토대를 보호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