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빛
교회는 항상 인간 세상과는 이중적 관계를 맺어 왔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 이러한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하셨다. "너희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나, 세상 속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이다(요 17:16, 18). 이는 곧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교회는 분리와 참여의 두 측면을 간직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복음과 영우너한 생명은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으니, 분리의 관계가 생긴다. 그러나 하나님게서 교회를 세상 속으로 보내셨고, 이 가운데 빛으로서 비추게 하셨으며, 인간들을 진리로 인도하게끔 하셨으니 참여의 측면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하여 교회는 이율배반적인 리듬을 따라 역사 속을 행진하고 있다.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동시에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는 곧 문제의 존재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서도 참여의 시기나 방법을 두고 이견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복음의 증거가 또 다른 이들에게는 타협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능히 예견할 수 있듯이 일부 신자들은 정통 신학자들이 헬라 철학과 기독교 신앙을 조화시켜 보려는 노력을 반대하였다. 이들은 후퇴하고 회피하는 것이 사도들의 뜻이었다고 생각하였다.
요한은 그의 "어린 자녀들"에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그는 기록하였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 그리고 헬라 철학에 관해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던 사도 바울도 십자가의 메시지가 헬라인들에겐는 단지 어리석음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과연 빛과 어두움 사이에 무슨 교제가 있을 수 있겟는가?
3세기에 기독교와 헬라 철학을 조화해 보고자 했던 시도를 가장 맹렬하게 반대했던 이는 다름 아닌 터툴린안이었다. 그는 이단들은 다름 아닌 철학들에 의해 조장되었다고 외쳤다. 발렌티누스는 플라톤 학파였으며, 미르키온은 스토아 학파였다. "아테네와 예루살렘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단 말이냐? 스토아 철학, 플라톤주의, 기타 변증법에 의해 오염된 기독교를 생산하려는 일체의 헛된 시도들을 모두 물리쳐라. 우리들에겐 그리스도 예수를 넘어가는 호기심들은 필요치 않다. 우리들이 믿을 때 그 신앙의 대상 외에은 더 필요한 것이 없다. 믿기 위하여 탐구하고, 그리고는 멈추어라."
영지주의와의 생사가 걸린 혈투의 모습을 생각해 볼 때, 신자들은 이러한 터툴리안의 모습을 단수히 종교적 광신이 낳은 편협한 태도라고만 치부할 수도 없었다. 실제로 영지주의자 발렌티누스는 그의 철학적 이론을 복음에 적용했으며, 그 결과 많은 신자들을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영지주의의 모습을 보면 기독교인의 문화에의 탐익이 그 정도를 지나칠 수 잇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영지주의의 진정한 정체를 밝힌 후에, 즉 이들이 본진에 잠입한 적군임을 파악한 후에도, 기독교인들은 헬라 철학을 계속하여 스파이로서만 취급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이들을 동맹군으로서 포옹하여 사용할 길은 없겠는가?
3세기의 신자들은 황제들의 박해 아래서 신앙을 지키고자 투쟁을 계속하는 동안에, 또한 복음을 헬라 사상의 용어와 방법을 사용하여 제사하는 길이 있을을 발견해내고 있었다. 결국 황제가 복음을 받아들였고, 제국은 기독교화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화해에의 길은, 만약 신앙과 철학 양자가 모두 그리스도에게 경배한다면, 이 둘이 평화스럽게 공존할 수 있음을 증명하였던 기독교 교사들에 의해 닦여진 것이었다.
이러한 연합을 처음 이끌었던 것은 알렉산들이아의 클레맨트와 오리엑이 주도했던 소위 "교리 문답 학파(Catechetical School)"였다. 이드링야말로 헬라의 지혜에 정통할 뿐 아니라, 그 철학을 사랑하면서도 그리스도이 교훈에 충성을 잃지 않았던 일련의 기독교 학자들 가운데 효시인 존재들이다. 이들은 헬라 문화의 최선의 정수들, 특히 플라톤주의와 스토아 학파의 사상들을 기독교 속으로 합류시켜 보고자 하였다. 클레멘트는 이렇게 말한다. "진리의 길은 오직 하나다. 그러나 마치 거대한 강을 향해서처럼 그 속으로 여러 물길들이 각처에서 흘러 들어간다."
학자들은 아직까지도 과연 이 학파가 원래 교회에서 시작되었는지, 아니면 교회와는 별도로 시작되었는지에 관해 논란을 벌이고 있다. 그러네 현재까지의 증거들을 보면, 필자의 새각으로는, 별도로 시작되었던 듯하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철학 교사들은-스토아 학파, 견유학파, 영지주의를 막론하고-대도시에 개인적으로 학당을 개설하고 찾아오는 학생들을 가르쳤다. 기독교 학자들도 이러한 관습을 좇았다. 유스티누스가 로마의 법정에 섰을 때. 이교도 재판관이 그의 활동에 관해 물었다. 공식적인 기록에 의하면 유스타누스는 다음과 같이 응답하였다. :나는 디모데우스의 목욕탕 근처에 있는 마틴이라는 자의 집 2층에 살고 있다. 내가 로마에 두 번재 찾아 온 후 계속 그곳에 거주하였다. 나는 이외엔 다른 집회 장소를 아는 바가 없다. 그곳으로 나를 찾는 모든 이들에게 나는 진리를 가르쳤다. 그렇다. 나는 기독교 신자이다."
약 180년 경에 판타이누스라는 시칠리아 출시느이 신자가 알렉산드리아에 이와 비슷한 도습의 "기독교 영지주의(Christan Gnosticism)" 학당을 설립하고, 거기서 기독교를 진정한 철학으로서 교수하였다. 그는 가톨릭 신앙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하여, 기교도들의 사상 세계로 파고 들어가고자 하였다. 그의 가르침은 의미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다루었다는 점에서는 영지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전통적인 해답들을 제시하였으므로 "기독교적"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판타이누스는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지식을 목말라하던 모든 이교도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게 되엇다. 그는 치밀하고 영감있는 강의를 통하여, 많은 이교도들을 기독교로 인도하였으며, 많은 신자들을 그와 함께 신학적 황홀경으로 이끌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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