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구약신학

영웅의 좌절(2:11-15절): 구속사의 좌절

예림의집 2012. 10. 8. 16:38

영웅의 좌절(2:11-15절): 구속사의 좌절

 

영웅의 좌절

 

  2:10에서 모세의 이름에 대한 언급을 한 이후에 내레이터는 다시 한번 몇십년의 세월을 건너뛴다. 사도행전7:23에 따르면 모세가 2:11에 다시 등장할 때의 나이는 40세이다. 이 정보와 더불어 출애굽기 7:7과 신명기 34:7을 종합해 졸 때 그의 인생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그는 40세 때 미디안으로 도망친다. 하지만 80세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그리고 120세에 죽음을 맞이한다.

  모세는 바로의 딸에게 입양되기 전까지 자신을 길러주었던 친어머니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동족 히브리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보여준다. 출애굽기 2:11은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표현은 "자기 형제들"이라는 표현과 "보더니"라는 표현이다.

  우선 "자기 형제들"이란느 표현이 그냥 내레이터가 모세의 출신 성분 때문에 선택한 표현이 아리라 모세의 감정을 나타내주는 것일 수 있다는 근거는 "보더니"라는 단어에 의해서 지지를 받는다. 이 "보더니"의 히브리어 원어는 그냥 단순히 라아가 아니라 거기에 라는 전치사가 추가된 것이다. 이처럼 전치사가 추가되면 라아는 그냥 단순히 "보다"라는 의미를 떠나서 관찰자의 관심과 감정 등이 개입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영어의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그냥 단순히 "보다"라는 의미는 "to see"라는 단어로 표현하지만 보는 주체의 관심과 집중을 요구할 때는 "to look at" 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과 비슷한다. 다른 사람의 관심을 자기가 집중해서 보고 잇는 것으로 돌리고자 할 때 영어로 그냥 "See it!"라고 하지 않고 "Look at it!"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히브리어에서도 라아 브라는 어구를 쓰는 것은 보는 주체의 관심과 감저잉 함께 개입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처럼 모세가 자기의 출신 성분을 인식하고 자신의 핏줄을 가진 히브리인들에게 뜨거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점이다. 이와 관련해서 기억하는 것은 "이집트 왕자"라는 디즈니 영화사의 애니매이션 영화다. 이 영화에서 모세는 자신의 진짜 민족적 정체성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어떤 계기로 그것을 깨닫게 되면서 깊은 번민에 빠진다. 그는 히브리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부인하고 싶어 몸부림친다. 하지만 이것은 애니메이션 각본을 쓴 사람의 잘못된 해석에 근거한 것일뿐 본문이 말해주고 있는 모세의 모습은 결코 아니다. 그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고역을 바라본 거싱 아니다. 그는 동족 이스라엘의 고난을 가슴속으로 체휼하면서 보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모세는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성품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사람이었다. 자기가 이끌고 나갈 백성들의 아픔에 공감할 수 없는 자는 민족의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지도자가 되서도 안되다. 나는 지도력의 법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느끼지 않는 자는 이끌 수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느끼지 못하는 자가 이끈느 자리에 서게 되면 거기에는 불행만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지도자는 자의든 타의든간에 자기가 이끄는 자들의 운명에 영얗을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모세를 지도자로 맞이하게 된 이스라엘 민족은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도록 하자. 그는 이처럼 자기 형제들을 보러갔다가 한 애굽 사람이 히브리인을 때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이 폭력을 행사한 애굽 사람을 처 죽였다. 애굽 사람이 히브리인을 "치고" 있다고 말할 때와 모세가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였다고 말할때 내레이터가 모두 동일하게 "치다(나가)"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것에 기초해서 그린버그는 애굽 사람이 히브리인을 죽일 정도로 심하게 치고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는 모세가 애굽 사람을 쳐죽인 것이 결코 과도한 보복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다.

  그레스만은 2:11이하의 본문이 모세의 성품을 잘 보여준다고 지적한 바가 있다. 그는 우선 위에서 설명한 "치다"라는 단어가 모세의 정의감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센느 결코 평범한 구타 사건을 빌미로 해서 끔직한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레스만은 이 본문에서 또한 모세가 애굽인을 쳐죽이기 전에 좌우를 먼저 살폈는데, 이것은 그의 신중한 태도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세가 다시 한 번 현장에 나갔다가 이번에는 히브리인들 간의 싸움을 목격하고 그 중 "잘못한 사람"에게 어지하여 동포를 치느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이것도 그의 정의감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짧은 본문이 그린버그의 말처럼 모세의 정의감, 신중성 등의 성품을 선명하게 드러내주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확신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모세의 이후의 삶을 볼 때 그가 이런 성품들을 갖추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13절에서 모세의 책망을 들은 그 "잘못한 사람"은 오히려 모세에게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는냐"고 말하면서 그에게 대어든다. 이 말로 인해 모세는 자신이 애굽 사람을 죽인 일이 탄로난 것을 알고는 두려움에 떤다. 바로가 이 일로 인해 자기를 죽이려 들자 그는 바로의 낯을 피해 도망을 간다(2:15).

  강의할 때마다 이 대목에서 꼭 받는 질문은 어떻게 고대 세계에서 왕자 정도의 신분을 가진 사람이 겨우 사람 하나 죽였다고 해서 도망을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왕들이 상당히 많은 아내들을 통해 많은 자식들을 낳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비록 많은 자식들은 후계자의 문제를 확고하게 해줌으로써 왕국의 미래를 튼튼하게 해주는 것이지만 다른 한 편 왕위는 한 명에게만 전수되는 것이므로 많은 자식들은 서로 권력투쟁의 대상이 된다. 특히 모세 같이 이방인의 핏줄을 가진 사람은 왕위를 보장받기 보다는 제거의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이처럼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것은 제거될 수 좋은 핑계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이방인 모세가 좋은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갖춘 것이 알려져 있었다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그는 결국 자신의 불리한 혈통으로 인해 후계자 다툼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기 백성을 도와주려고 한 일로 비난을 받은 것은 장차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활동하게 되면서 겪에 될 이들의 전주곡 역할을 한다. 모세는 출애굽 당시부터 시작해서 광야 생활 내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당한 비난을 들어야만 했다.

 

  이처럼 그의 도망으로 인하여 그의 어설픈 구원자 행세는 막을 내렸다. 이 사건이 보여주는 바는 그가 자기 백성을 향하여 연민의 마음을 갖고 있었으며, 도와주고 싶은 의욕도 충만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는 40년전 갈대 상자에 담겨 나일강에 놓여진 그때처럼 무기력한 한 사람일 뿐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세의 때와 하나님의 때에 대해서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설교가들은 모세의 성급함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지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모세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볼 때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아직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때"에 근거해서 행동할 수 있겠는가? 둘째,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모세가 성급했다는 것보다는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상실할 수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기 동족을 위해서 일하고자 했다는 점이 아니겠는가?

  나는 하나님께서 그 의욕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이시지, 아직 당신을 잘 알지도 못하는 자가 당신의 때를 기다리지 않는 것에 연연하시는 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본문이 정말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모세의 성급함에 대한 지적이 아니라 그가 정의감이나 신중성, 희생정신에 있어서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모세는 좌절에 부딪쳤다. 그러나 우리는 모세의 좌절을 하나님의 좌절이나 구속사의 좌절로 볼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모세의 좌절을 초월해서 흘러간다. 인간의 낙심으로 인해 시계가 멈춘 것처럼 보이는 때에도 하나님의 구속사의 시계는 멈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