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9-26 야곱의 탄생과 예정-⑧
마지막으로 야곱은 태어날 때 자기 형의 발꿈치(아케브)를 붙잡았다고 해서 "야곱(야아코브)이라고 지었다고 내레이터는 말한다. 야곱이란 이름의 기원이 되는 동사 아카브는 동음이의어로서 "배신하다, 방해하다"란 뜻도 있고, "보호하다, 돌보다"란 뜻도 있다. 주석가들에 따르면 원래 야곱이란 이름은 주전 이천년기 초(창세기의 족장 시절)의 아모리인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이름이었다. 이 이름의 원래의 정식 이름인 야아코브-엘은 이 동음이의어 동사의 "보호하다"란 의미를 바탕으로 하여 "엘이 보호하시기를" 혹은 "엘이 보상하시기를"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내레이터는 이 이름을 "발꿈치"란 뜻을 지닌 히브리어 아케브와 관련이 있는 동사에서 파생되어 "발꿈치를 잡다, 방해하다"란 의미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이름은 단순히 탄생시의 그의 특징을 나타내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일생을 나타내는 예변적(proleptic) 표현들 중의 하나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27:36에서 에서가 "그의 이름이 아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라고 한 것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의 이름이 최소한 한 번 이상은 그의 성품과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항을 지적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동안 동서고금의 많은 해석자들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하시고 에서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초해서 에스는 무조건 나쁜 쪽으로만 보려고 해 왔다는 점을 지적한 적이 있다. 그러나 분명히 사도바울은 로마서 9:11에서 이들의 선택이 결코 이들의 해위나 윤리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또한 올터(Alter)는 구약성경의 인물 분석을 다루면서 이렇게 천명한 바 있다.
"서영 저자들의 신중한 인식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선택받은 인물과 그 인물의 도덕성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하는 경우가 자주 있으며, 때로는 이 양자 사이에 절대적인 모습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과 도덕 혹은 윤리를 인과론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위험하다. 다시 말해 야곱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자이기 때문에 좋은 사람이며, 에서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자이기 때문에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은, 상당히 위험한 생각이다.
앞에서도 이미 한 번 지적한 바와 같이 성경은 비록 27:29-34; 26:46; 28:6-9 등에서 어느 정도 에서를 비판하는 듯 하기는 하지만 결코 그의 모든 것을 다 비난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는 33장; 35:27-29; 36장 등에서 보면 상당히 긍정적으로 생각되는 모습들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용서를 아는 자이며, 자기 동생에게 자비를 베푸는 자이다. 그는 자기 아버지 이삭이 죽었을 때 동생과 같이 장례를 치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이삭의 장례(35:27-29)와 연결해서 에서의 성품에 대한 한 가지 고려해 볼만한 점이 있다. 창세기 50:15-21에는 야곱이 죽은 후에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이 자기들에게 복수를 할까봐 두려워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에 대해 요셉이 간곡한 말로 위로함으로써 상황은 좋게 종료된다. 이와 비교해 볼 때 이삭의 장례와 관련하여서는 야곱과 에서 사이에는 이런 갈등의 모습이 아예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다. 이처럼 갈등이 언급되어 있지 않은 이유가 정말 에서와 야곱 사이에 갈등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후대의 요셉처럼 에서가 어떤 이유에서든 야곱을 선하게 대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인지는 내레이터가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 이런 점을 보면 에서란 사람은 가족들에게 원한을 품은 채 일생을 살아가는 자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더 나아가서 앞에서 살펴본 이스마엘의 경우처럼 에서 역시 결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가 아니라 넘치는 축복을 받은 자였음을 36:6-7은 보여준다. 그가 너무나 큰 부자가 되었기 때문에 가나안에서 그의 동생 야곱과 함께 머무를 수 없는 수준이 되었으므로 그는 타처로 떠난다. 이 때 7절의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할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는 표현은 13:6에서 아브라함과 룻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13장과 36장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13장의 경우 양자간에 다툼이 있고, 또 아브라함이 롯에게 선택권을 양보한 상태에서 롯이 인간적인 욕심을 따라 자기 눈으로 보기에 좋은 땅을 차지하려고 가나안을 따나는 것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이 36장에서는 양지간에 싸움이 없다. 또한 에서가 룻처럼 인간적인 욕심을 부리는 내요이 나오지 않는다. 다닞 에서는 동생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떠나가 줄 뿐이다. 그런 까닭에 36자의 이별은 아브라함과 룻의 이별과는 달리 기분 좋은 "발전적" 이별로 보인다. 에서와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크게 누리는 자로서 사이 좋게 각자의 땅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성경해석사를 살펴 보면 해석자들은 에서와 야곱 사이의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무조건적인 선태이 이들의 윤리성 및 도덕성까지도 운명적으로 결정지은 것으로 생각하는 오류에 자주 빠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런 오류는 현재의 독자들의 생가곡에도 많이 들어 있는 듯하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 어떤 사람의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의 선택과 구원과 하나님의 예정 문제를 단정짓고 마는가? 우리는 얼마나 만힝 욥의 세 친구처럼 어떤 사람의 상태를 보고 그 사람을 정죄하기를 즐겨하는가? 에서와 야곱에 대한 성경해석사는 이러한 점에서 우리에게 좋은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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