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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9-26 야곱의 탄생과 예정-⑤

예림의집 2012. 10. 1. 22:32

25:19-26 야곱의 탄생과 예정-⑤

 

  하지만 본문이 이에 대해서 선명하게 말해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정말 리브가가 남편을 통해서 뒤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된 것인지, 아니면 그냥 스스로 기도하거나 혹은 다른 어떤 경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이 문제가 중요한 것은 이어지는 본문들(25:27-34; 27장)에서 과연 이삭이 신탁의 내용을 알고 있었느냐 하는 것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나중에 본문들을 보면 이삭은 에서에게 일방적인 사랑을 베풀고, 부당하게 에서에게만 모래 축복을 하려고 드는데 그가 정말 신탁의 내용을 알고도 그렇게 하는가 라는 문제는 야곱 이야기의 흐름에 있어서 정말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이 선명한 결론을 내려주지 않기 때문에 이 문제는 이어지는 본문들을 읽어나가는 독자들의 마음에 여러 가지 의문을 남긴다. 그렇다면 이삭은 야곱과 에서의 운명에 대한 신탁의 내용을 알고도 25:27-4와 27장에서 의도적으로 에서의 손을 들어 주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는 이 점에 있어서 신탁에 정면으로 도전하거나 식탁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혹은 이삭은 그러 리브가로부터 이 신탁의 내용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그리고 관습대로 장자인 에서를 사랑하는 것일까? 또 과연 리브가는 이삭에게 이 신탁의 내용을 알려줬을까? 만약 알려주지 않았다면 왜 그랬을까? 그녀에게 아삭은 그저 미덥지 못한 사람이었을까?

  어떤 경로를 통해서 알았든지 간에 리브가가 받은 신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국민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겟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후반부의 번역에서 보듯이 전통적으로 이 신탁은 쌍둥이 중에서 동생이 형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이해되어 왔따. 하지만 최근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는 히브리어 구물론과 시의 특성상 마지막 행은 "어린 자는 큰 자를 섬기리라"로 읽을 가능성도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곤 한다. 더 나아가서 흔히 고대 그리이스의 텔피 신전의 신탁이 그 모호성 때문에 어떤 식으로도 해석이 가능한 성격을 띠고 있듯이 리브가의 신탁도 누가 누구를 섬기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모호성을 띠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런 대아적인 주장이 흥미롭기는 해도 시의 전체 구조와 주변 문맥의 흐름을 볼 때 결코 정당화되지는 못한다. 오히려 전통적인 해석이 훨씬 더 타당성이 이다고 생각된다. 또 에서가 야곱에게 축복을 뺏긴 후에 이삭이 에서에게 한 말 중 "네 아우(형제)를 섬길 것이며"란 말은 신탁의 성취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전통적인 해석을 받아들일 때 이 신탁은 다시 한 번 창세기의 전반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주제인 형제 사이의 서열의 역전 현상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 세부적인 측면에서 약간씩 다른 형태를 띄기도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야곱과 자식들, 유다가 다말을 통해서 낳은 베레스와 세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셉의 두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적용된다. 나중에도 사도 바울은 로마서 9:10-13에서 특히 야곱과 에서의 예를 들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논리를 펴는데 사용한다. 이처럼 전통적인 해석을 받아들일 때 야곱과 에서의 역전 현상은 창세기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비슷한 현상들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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